44 - 로맨스판타지(9)
“루이나! 좋은 아침!”
“시우야! 너도 좋은 아침!”
“루시우스라니까…”
“내가 시우라면 시우인 거야 히히.”
최근 루이나가 달라졌다.
언제나 차갑고 조금만 건드려도 부서질 것만 같았던 루이나는 사라졌고 따뜻하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가진 루이나가 나타났다.
마치 어렸을 적으로 돌아간 것처럼 루시우스가 반했던 그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다.
일 년에 몇 번 보기도 어려웠던 그녀의 미소였는데…
지금은 하루종일 그녀에게서 웃음이 사라지질 않는다.
비록 자신이 루이나를 바꾸지 못했다는 점에서 아쉽긴 했지만 루시우스는 달라진 루이나가 훨씬 더 좋았다.
식어가던 루이나에 대한 감정에 다시 불이 붙었다.
====
====
“우선 단추를 풀고 옷을 걷어올려줄래? 심장 부분이 보일 정도로만 올리면 돼.”
“네…”
루이나는 자신의 살갗을 드러내는 게 부끄러웠지만 티를 내진 않았다.
검사를 받는 건 전생에서도 많이 있었던 일이었다.
비록 현생에서 남자에게 보여지는 건 처음이었지만… 민망한 부위도 아니고 검사를 위해서니까 그의 말을 따랐다.
“이건… 벌써 여기까지 잠식이… 루이나양 대체 너는…”
그런데 검사를 하는 남자의 반응이 심상치 않다.
분명 아무 것도 없는 새하얀 속살을 보고는 심각한 표정을 짓더니 이윽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엄청… 아프고 괴로웠을 텐데… 누구도 이해해주지 못하는 고통에 힘들었을 텐데… 용케 지금까지 버텼구나.”
“아…”
그것은 공감이었다.
같은 병에 걸려 사랑하는 사람을 곁에서 떠나보낸 사람만이 해줄 수 있는 공감이었고
그녀가 전생과 현생에서 처음으로 받은 공감이었다.
자연스럽게 그녀의 눈망울이 촉촉해졌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버티려고 했지만 자기 대신 울어주는 남자를 본 그녀는 끝내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신의 질투'라는 저주는 심장에 파고들어가 사람을 괴롭혀. 그리고 고통을 양분삼아 점점 몸 곳곳으로 퍼져나가다 결국 사람을 죽게만들어.
그런데 너는 벌써 저주가 많이 퍼진 상태야. 이 정도면 매일같이 죽고싶을 만큼의 고통이 느껴졌을 텐데… 정말 대단하구나 이걸 버티다니.”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특히 아카데미에 입학한 이후 아픔을 안느껴본 날이 없었다. 밥을 먹는 만큼 약을 먹어야 했다.
그럼에도 그녀가 버틸 수 있었던 건 이 정도의 아픔은 이미 그녀가 전생에서 지긋지긋하게 겪었던 고통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드디어 그녀에게 그 괴로움에서 벗어날 기회가 찾아왔다.
진단을 끝낸 남자가 치료를 시작했다.
***
“우선 주변부부터 치료를 시작할게. 이 정도면 무리하게 심장을 치료하려다가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 있거든.”
“네… 부탁드릴게요.”
남자는 자신의 손을 루이나의 아랫배에 갖다댔다.
그러고는 힐을 사용해 치료를 시작했다.
언뜻보기엔 아무것도 아닌, 오히려 성추행에 가까운 행위였지만 그의 손에서 튀어나오는 초록빛 입자들이 이 행위가 치료라는 걸 믿게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효과가 있었다.
따뜻한 그의 손길이 배에 닿자 순간적으로 고통이 사라졌다. 토할 것 같은 울렁거림 대신 천국 같은 편안함이 느껴졌다.
천천히 그가 시계방향으로 손을 움직이자 그 편안함이 온 몸으로 퍼져나갔다.
‘굉장해… 엄청 기분 좋아. 따뜻하고 포근해… 전혀… 전혀, 아프지 않아…’
그녀는 눈을 감고 그의 손길을 온전히 느꼈다.
그녀는 몸과 마음을 그에게 맡긴 채 그가 주는 따뜻함에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자신이 조그맣게 신음소리를 내고 있는 것도 모른 채 한참을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아…”
그러다 그가 손을 거뒀을 때 자기도 모르게 아쉬움에 탄식을 내뱉었다.
“어땠어? 좋았어?”
“네… 엄청…”
***
그렇게 루이나의 첫 번째 치료는 끝이났다.
예상과 달리 너무나 만족스러웠던 치료에 루이나의 기분이 상쾌해졌다.
그녀에게 희망찬 미래만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 즐거웠다.
‘불치병도 치료하고, 모솔도 탈출하고, 이제 행복하게 살다가 가면 되는 거야!’
그런데 그 즐거움은 그렇게 오래가지는 않았다.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에 왕자가 아리아에게 집적거리는 걸 목격해버린 것이다.
‘아… 내가 왜 숨었지? 이제 왕자는 신경쓰지 않기로 했잖아… 그래 그냥 가면 되는 거야.’
재빨리 나무 뒤로 숨은 그녀는 자신의 행동에 어이가 없었지만 차마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왕자가 루이나를 버리고 아리아에게 구애한다는 소문이 사실인지 그녀도 궁금했던 거다.
“아리아, 이번주 금요일에 시간 있어?”
“네, 네네네네? 어… 있기는 한데요?”
“그럼 나랑같이 어디 좀 가자.”
“어… 네에에? 이건, 그… 어…”
‘하! 그럼 그렇지! 바람둥이라니까! 금세 다른 여자한테 저러는 거 좀 봐!’
자신에게 데이트신청을 할 때와 똑같은 말로 아리아에게 작업을 거는 왕자를 보고 루이나의 기분이 상해버렸다.
조용히 뒤로 물러난 그녀는 그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자리에서 도망쳤다.
====
====
아리아와의 데이트 약속을 잡은 왕자가 그녀와 헤어진 후 신호를 보내니 풀숲에서 그의 부하가 튀어나왔다.
“왕자님… 작전 성공인데요?”
“내가 말했지? 통한다니까. 원래 여자는 질투의 동물이거든.”
“근데 이대로 루시우스나 진에게 가버리면 어쩌죠?”
“쯧쯧. 그 때를 대비해서 선물을 사러 가는 거잖아. 그냥 선물을 주는 것보다 한 번 실망시켰다가 반전으로 선물을 주는 게 더 효과적이다 이말이야.”
“어? 그럼 진짜 아리아양이랑 데이트 약속을 잡은 거에요?”
“안 할 이유가 있나?”
“왕자님 당신은 대체…”
====
====
“같이 가자고요?”
“우으… 혼자 가기엔 두 분이 너무 부담스럽고 또 처음 가보는 곳이라… 부탁드려요 세실리아양!”
이걸 어떻게 해야 할까요? 또 그 날파리가 멜츠양에게 달라붙었네요.
그런데 함께 오베르양에게 줄 선물을 사러 가자고라…
흠… 왕자는 오베르양에게도 집적거리는 건가요?
역겨운 쓰레기. 자기가 아버지도 아니면서 제 주제를 너무 모르는 군요?
함께 다니는 호위기사 역시 마찬가지겠죠. 두 분에게 ‘교육’을 한 번 해드려야 할까요?
“어쩔 수 없네요. 그 둘은 한 번쯤 만나서 확인을 해 볼 생각이었으니 같이 가드릴게요. …하지만 역시 괘씸하네요. 왜 자꾸 스스로의 가치를 떨어뜨리나요?”
“어… 네에?”
“아버지만 생각하라고 했잖아요 멜츠양. 또 벌을 받고 싶으세요?”
“어, 어어… 어라? 아, 아뇨…”
“멜츠양에게 다른 남자들은 다 역겨운 존재일 뿐이잖아요. 멜츠양은 오직 아버지의 자지에만 관심이 있잖아요. 그렇죠?”
“그게… 역겨운? 그런? 어… 맞아! 그렇구나! 맞아요 세실리아양! 저는 선생님의 자지만 있으면 돼요!”
“후훗, 그래요. 멜츠양은 그러면 되는 거에요. 그게 멜츠양의 존재 이유니까요.”
***
"이야 설마 그렇게 유명했던 세실리아 아실이 이렇게나 미인이었다니!"
정말 혐오감이 드는 사람이군요.
제가 외모를 가꾼 건 당신에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닌데 말이죠.
“그 소문 때문에 걱정이 많았었는데 알고 보니 질투에 눈이 멀어 생긴 소문이었군!”
…지금 이 사람은 무슨 얘기를 꺼내는 거죠?
당신이 함부로 얘기할 그 날의 사건들이 아닌데…
“아무튼 만나서 반가워 세실리아양. 내가 누군진 알지? 아리아양은 글쎄 일주일 넘게 날 못알아본 거 있지? 하하하.”
“왕자님 목소리를 낮추시죠.”
“진! 네가 내 옆에 있는데 뭐가 걱정이야!”
하… 확인하러 오길 잘했네요.
존재가치가 없는 구제불능의 쓰레기.
모두를 위해서 세상에서 사라지는 게 더 나은 인간말종.
옆에서 구경만하는 당신도 마찬가지고요.
정말… 스트레스네요.
“윽? 우욱… 읍…”
“무슨…? 갑자기 으윽… 누가? 이봐 연락을… 욱…”
-털썩!
“꺄아악! 무, 무무무 무슨 일이죠? 갑자기 두 분이 쓰러졌어요!”
“저희랑은 상관없는 일이에요. 그렇죠?”
“어… 맞아요. 그렇네요.”
“그러니 오늘은 아무 일도 없었던 거에요. 이대로 기숙사로 돌아가세요 멜츠양.”
“네, 알겠어요!”
그럼… 이 두 쓰레기는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요?
이대로 세상에서 지우는 건 간단하지만 뒷처리가 귀찮단 말이죠.
그렇다고 놔두자니 자꾸만 멜츠양과 오베르양을 건드리고…
역시 그때 생각했던 것처럼 만들어야 할까요?
후훗, 제가 생각해도 너무 심한 일이라 차마 이렇게까진 하지 않으려고 했었는데… 안되겠네요.
그럼 왕자님과 호위기사님… 두 분이서 서로 좋은 사랑 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