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 로맨스판타지(6)
아카데미에 들어온 지 벌써 2주가 지났다.
힘들 거라는 예상과 달리 아카데미에서의 생활은 정말 즐거웠다.
‘덕배 아실’이라는 사람이 얼마나 좋은 사람이었는 지를 느끼는 2주였다.
누구 하나 친절하게 대해주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뭘 그렇게 나를 찾는 사람이 많은 지 매일 찾아오는 손님에 세실리아를 만나러 갈 틈도 없었다.
게다가 로판이라는 장르답게, 또 귀족 아카데미라는 특성답게 학생들의 수준이 꽤나 높았는데 덕분에 여러모로 호강하고 있다.
세실리아나 루이나 급은 아니지만 충분히 아름다운 귀족 아가씨들이 많았는데 내 손길에 헐떡이는 모습을 보면 정말 짜릿했다.
테라피를 핑계삼아 찾아오는 아가씨들을 조금씩 건드려주고 있는 데 이번 달 내로 한 명씩 따먹을 생각이다.
그런데 이 ‘덕배 아실’이라는 놈은 결혼하기 전에 여성 편력이 좀 있었는지 혼자가 되었다고 대쉬하는 여자들이 생겼다.
너가 내 첫사랑이었어, 당신이 내 처녀 가져갔잖아, 오빠 우리 그때처럼 행복해지자, 아실 나 외로워 등등 한 두 명이 아니었다.
그 중에서도 한 명은 거의 매일같이 내게 작업을 걸어왔는데 동료 교사라 틈만 나면 나를 찾아왔다.
그녀는 레인 아르만, 상급 귀족이며 아카데미에서 검술 교사를 맡고 있는 귀족 아가씨다.
아름다운 외모와 시원한 성격으로 남녀 가리지 않고 학생들의 사랑을 받는 교사 중 한명인데 확실히 다른 교사랑은 급이 다르게 예쁘긴 하다.
원래 숏컷인데도 이뻐야 진짜 미인이라는 말이 있거든. 딱 그 꼴이다.
하나 아쉬운 건 가슴인데 기사라 압박 붕대라도 하는지 세실리아보다 작아보였다.
과연 그래서 이어지지 않은 거였나? 관계를 가졌었다는 여자들을 보니 다 가슴이 크더라고. ‘덕배 아실’은 가슴충이었다. 나는 여자 가슴이면 크기는 상관없지만.
“아실… 너를 여기서 다시 만날 줄이야… 생각도 못했었어.”
“정말 반가워. 앞으로 잘 부탁해. 이번엔 내가 많이 도와줄 테니까 나를 믿어줘.”
처음엔 그냥 오래된 친구를 다시 만나게 되어서 반가운 줄만 알았는데
“옆자리… 앉아도 되지?”
“그 때 생각난다. 자주 이렇게 같이 먹었었잖아. 이 식당에서.”
“린츠가 입학하기 전, 정말 즐거웠었는데…”
조금씩 미묘한 느낌이 들더니
“오늘 한 잔 어때?”
“저기… 상담 좀 해줄 수 있어?”
“아실… 아니야, 그냥 불러봤어.”
최근엔 확실히 티가 났다.
‘덕배 아실’ 너는 대체… 어떤 삶을 살았던 거냐?
이런 여자들의 사랑을 받다니…
하지만 나는 그 사랑들을 받아줄 수는 없다.
괜히 지금 위치에서 애인을 만들어봤자 좋을 게 하나도 없거든.
네토리를 위해서도, 세실리아를 위해서도 나는 솔로로 지낼 생각이다.
그래서 계속, 돌려서 거절하는 중인데 레인 아르만은 기사답게 우직하게 포기를 모른 채 나를 공략하고 있다.
그냥 몸만 원한다면 엊그제 찾아온 한나 양처럼 하룻밤 즐기고 헤어지면 될텐데 레인 아르만의 사랑은 너무 무거워 보인다.
엘리제 때문에 억눌렸던 감정을 터뜨리려는 것처럼 보인달까? 괜히 한 번 건드렸다가 결혼까지 갈 분위기다.
그래서 확실히 단호하게 거절해야 하는데 쉽지가 않다.
후… 오늘도 한 잔 하자는 걸 거절하는데 진이 다 빠졌단 말이지.
-똑똑!
“루이나 오베르입니다. 들어가겠습니다.”
그렇게 내가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다짜고짜 주인공이 나를 찾아왔다.
***
다시 봐도 정말 예쁘다. 난 핑크머리가 저렇게 잘 어울리는 사람이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했었어.
너무 소녀소녀 해서 조금만 건드려도 부서질 것 같아서 위태롭긴 하지만 그만큼 아껴주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생길 정도로 사랑스럽다.
그럼에도 저 눈. 언제 어디서나 당당한 듯 부릅 뜨고 있는 저 눈이 참 매력적이란 말이지. 이상하게 저 눈을 보고 있으면 눈을 뗄 수가 없어.
내가 루이나 오베르를 멍하니 지켜보고 있자 그녀가 내게 약을 요구했다.
“약? 난 들은 게 없는데?”
“그런… 분명 인수인계 다 하셨다고 들었는데…”
“미안 근데 정말 들은 게 없어. 어쩌지?”
정말이다.
애초에 내가 아카데미에 왔을 땐 이미 전임교사는 그만 둔 뒤였고 그래서 제대로된 인수인계도 받지 못했었다.
그러니 당연히 이런 상황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루이나 오베르가 몸이 안좋았었나? 따로 찾아와서 약을 받을 정도면 심각한 건데.
“무슨 약이 필요한지 말해줄래? 내가 만들어 주면 되니까.”
“그게… 메티 선생님께서 직접 조합하신 약이라 저도 자세히는 모르겠어요.”
아니 메티 선생! 이렇게 중요한 거면 따로 인수인계를 부탁했어야죠.
주인공이 죽으면 ‘히로인 네토리’가 끝난다고요!
“그러면 증세라도 말해줄래? 나도 조합할 줄 모르는 게 아니니까.”
“그러니까 그게…”
어라? 루이나가 말을 꺼내는데 어딘가 익숙한 증세들이다. 뭐더라?
머리 속에서 끔직한 고통이 느껴지고 계속해서 자신을 괴롭히는 환청이 들리고 뱃속에서부터 깊은 혐오감이 목구멍으로 올라오고…
이건…?
혹시나 해서 ‘관측’을 써봤더니 역시나였다.
그런데 이 병의 이름이 ‘신의 질투’였구나.
거 참 정말 적절한 이름이다.
“매번 아침에 일어나면 팔 다리가 끊어진 것처럼 아프고 자기 전엔 숨이 쉬어지지 않을 정도로 괴롭고 그렇니?”
“…네? 어, 어떻게?”
“밥을 먹고 나면 항상 토할 것 같고 물 외의 다른 음료를 마시면 피를 마시는 것 같고 거울을 보면 죽어있는 네 모습이 보이니?”
“마… 맞아요! 그건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은 건데…?!”
“루이나… 마음의 준비를 하고 들어. 네가 걸린 병은…”
엘리제 린츠가 걸렸던 그 불치병이다.
***
불치병이란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의외로 루이나 오베르는 담담한 표정이었다.
마치 미리 알고 있던 것처럼…
아, 그랬지.
그러고보니 이번 ‘히로인 네토리’의 주인공은 빙의 캐릭터였지? 그렇다면 미리 아는 게 당연했다.
그런데 엘리제 린츠가 걸렸던 병이라는 건 모르는 듯했다. 그것까진 원작에서 밝혀지지 않은 건가?
내가 그 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말하자 그녀는 크게 놀라며 내 말을 의심했다.
그러나 엘리제가 죽고 나서 각성을 했다며 치료능력을 보여주자 그녀는 이내 납득한 듯 아아 그렇게 된 거였구나… 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애절한 표정으로 내게 치료를 부탁했다.
뭐가 그렇게 된 건 진 모르겠지만 아무튼 좋은 게 좋은 거다.
덕분에 별 저항없이 내가 치료해주기로 약속하며 네토리 각이 생겼거든.
불치병에 걸린 히로인과 그녀를 치료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 나.
당연히 치료 중에 무슨 짓을 하더라도 치료에 필요한 일이라고 둘러댈 수 있으며 그게 싫다하더라도 루이나 오베르는 거절하지 못하겠지.
살고싶을 테니까.
죽음이라는 절망 속에서 허덕이다가 치료될 수 있다는 얘기를 듣자 피어난 삶에 대한 갈망이라는 꽃은 정말 아름다웠다.
비록 내 정액으로 더럽혀지겠지만 그건 그것 나름대로 즐거운 일이겠지.
앞으로의 일이 기대가 된다.
-똑. 또똑! 똑. 똑. 똑!
그렇게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며 발기하고 있자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이 신호는… 세실리아구나.
황급히 자지를 가라앉히고 문을 열어주니 언제나처럼 귀여운 세실리아가 달려와 내게 안겼다.
“아버지! 보고 싶었어요…”
“리아… 어제도 찾아 왔잖니.”
그렇다. 내가 찾아갈 시간은 없었지만 세실리아가 찾아올 시간은 많았다.
하루 종일 양호실에 박혀 있으니 세실리아가 원할 때면 언제든 만날 수 있었다.
“히잉… 아버지는 제가 보기 싫었어요?”
“설마! 이렇게 귀여운 내 딸은 언제나 보고 싶지. 하지만 매일 찾아오면 걱정이 되잖니. 친구들에게 리아가 병약하다거나 파파걸이라는 오해를 사면 어떡해.”
의외로 세실리아는 큰 문제없이 아카데미의 학생들과 어울렸다.
분명 왕도에서의 일로 자칫하면 따돌림을 당할 수도 있겠다고 걱정했었는데 전혀 그런 일 없이 금방 친구들을 사귀고는 즐거운 학교생활을 보냈다.
역시 내 딸은 귀엽고 착하다니까. 호감을 안 가질 수가 없지. 그럼그럼.
“후훗, 상관없어요. 이렇게 아버지랑 있는 시간이 더 중요하니까요. 그런데… 아버지 혹시 오베르양이 찾아왔었나요?”
“응? 어떻게 알았니? 조금 전에 진료해줬어. 아픈 곳이 있다고 하더라고.”
루이나 오베르가 불치병에 걸린걸 말해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 된다.
하지만 굳이 말해줄 필요는 없겠지. 세실리아의 트라우마가 자극될 수도 있고, 치료는 가능하다고 하나 역시 불치병에 걸린 얘기니까.
“그렇구나… 어쩐지 아까 건물 입구에서 만났거든요. 그런데… 요새 아르만 선생님이랑 친하게 지낸다는 소문이 있던데… 사실인가요?”
“아, 그게 옛 친구거든. 오랜만에 만나게 되어서 서로 반가워서 몇 번 따로 만나고 그랬어. 근데 그냥 그게 끝이야 하하…”
난 뭔 여친에게 변명하듯 말하고 있냐? 하지만 변명이 아니다. 진짜라고?
한 번쯤 따먹고 싶다고 생각은 했었지만 사귈 생각은 없었으니까. 괜히 한 번 박았다가 결혼해달라고 강요받으면 답이 없다.
그러니 앞으로 어떻게든 철벽을 칠 생각이다.
“흐음… 그렇군요. 아르만 선생님은 인기가 정말 많거든요. 그런데 아버지의 친구분이셨군요.”
“맞아. 그냥 친구지 친구.”
말을 돌릴 겸 세실리아를 쓰다듬어 주며 세실리아의 일상을 물었다.
세실리아는 싱글싱글 웃으며 즐겁게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가끔 튀어나오는 아리아의 얘기에 흠칫흠칫 놀랐다.
혹시나 자기도 모르게 말을 꺼냈으면 어떡하나 했는데 다행히 아리아는 내가 당부한 대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듯했다.
하긴 설마 친구 아빠한테 보지가 쑤셔진 얘기를 꺼내겠어?
안심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도 되겠다.
그런데 왜 이렇게 졸립지…?
이상하게 세실리아가 찾아오면 잠이 오더라…
긴장이 풀려서 그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