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 왕도용사물(16)
문을 열고 들어가니 술냄새가 진동했다. 이게 술집이야 길드야?
길드 안에는 술집처럼 테이블이 가득했고 딱 봐도 모험가처럼 생긴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길드 벽면에는 의뢰서가 가득 붙어있고 그 옆에는 현상수배범들의 얼굴그림들이 잔뜩 붙어있다.
길드 안쪽에는 직원용 공간이 있는데 거기서 길드원으로 보이는 여자가 머리를 긁으며 웬 서류들을 읽고 있다. 저 여자한테 가면 되겠지.
긴장했는지 뻣뻣하게 굳은 시우와 내 등에 달라붙은 소피아를 데리고 여자에게 다가가니 근처에 있던 험상궂은 모험가 하나가 입을 열었다.
“어이! 뭔 꼬마들이 여기 와있어? 가서 아빠 좆이나 더 빨고 와라!”
그러자 안그래도 화가 나있는 듯한 여자가 그 모험자에게 다가가더니 뺨싸다구를 날리며 소리쳤다.
“엄마 젖이겠지 이 무식한놈아! 영업방해말고 썩 꺼져!”
오우, 터프하네…
뺨을 맞은 모험가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가 비틀거리며 일어나더니 아무렇지 않은 척 술판에 합류했다.
“어우 썅년! 이빨이 다 흔들거리네. 어이! 이빨 하나 팔 테니까 술 사줄 사람 어디 없나?”
생긴 거랑은 달리 흔히 있는 주정뱅이였나보다.
솔직히 좀 쫄았었는데…
“그래서 무슨 일인가요? 혹시 의뢰인가요?”
여자의 말대로 모험가가 꺼지자 여자가 밝은 미소를 지으며 용건을 물었다.
어째선지 웃고 있는데도 무서운 느낌이 들었다. 나만 그런 게 아닌지 뒤에서 소피아가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모험가 등록을 하려고 왔습니다.”
“에이 뭐야 텃네. 보증인 있어요? 없겠지 뭐. 인당 1골드씩 내시고 기다리고 계세요. 실력테스트 봐야하니까. 에휴 뭔 이런 애들까지 모험가가 된다고 난리람.”
갑자기 여자가 미소를 지우더니 귀찮아하는 표정으로 싸가지없게 말했다.
거 참 의뢰인 아니라고 태도가 너무 달라지는데?
그리고 1골드라고? 내가 반년동안 요리하면서 번 돈이 37실버인데 보증금이 너무 비싸다.
“그리고 신분증은 있어요? 없죠? 그럼 1골드 추가. 참 1골드 더 내시면 실력테스트 없이 바로 7등급으로 만들어 줄 수 있어요. 어때요?”
7등급이면 최하위 등급의 모험가다.
사실 모험가라 부르기도 어렵다. 인턴이지 인턴.
7등급은 몬스터 사냥에 나서지도 못하고 약초를 캐거나 짐을 들어주거나 하는 잡일밖에 하지 못한다.
그걸로 해준다고 1골드를 더 달라고 하는 걸 보니 제대로 호구잡힌 거 같다.
“추천서가 있습니다. 여기요.”
하지만 그럴까봐 미리 준비해놨지.
사실 원래 계획은 도제 마을 촌장의 인맥으로 지에 상회 지부장에게 받는 거였지만 그 보다 위의 사람한테 받았으니 오히려 좋다.
“오 그래요? 어디 보자… 루이즈라 루이즈… 뭐?! 클라인 루이즈?!”
여자는 깜짝 놀라더니 당황한 표정으로 우리를 쳐다보았다.
“조작 아니죠? 이 걸 조작하면 큰일 나는 거 아시죠?”
“확인하셔도 좋습니다.”
“그야 당연히 확인해야죠! 이럴 게 아니지… 우선 따라오세요.”
확실히 이래서 빽이 있어야 해. 여자의 거들먹거리는 말투가 싹 사라졌다.
2층으로 따라 올라가니 1층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고급진 접객실이 있었다.
푹시푹신한 쇼파에 앉은 후 따뜻한 차를 대접받았는데 차알못인 내가 느끼기에도 꽤나 고급진 차 같았다.
잠시동안 기다리고 있자 아까의 그 여자가 아닌 모험가 길드 지부장이 접객실로 찾아왔다.
“이야! 그 클라인 루이즈가 보증해주는 모험가가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했는데!”
나 역시 생각도 못했었다. 못먹는 감 찔러나 본다고 루이즈에게 부탁해봤는데 루이즈는 냉큼 알겠다고 하더니 곧바로 추천서를 써주었다.
아무래도 시우의 주인공 버프 덕분이 아닐까 싶다.
“그 고블린 놈들 때문에 우리도 속이 좀 많이 쓰렸었거든. 지에 상회에서 의뢰를 넣긴 했는데 도저히 하겠다고 하는 모험가들이 없어서 말야.
그만큼 위험한 놈들인데 그 놈들을 너희들끼리 해결하다니! 역시 사람은 겉으로 판단하면 안된단 말이지! 끌끌.”
“네? 저희가…”
“저희가 해결한 게 맞습니다. 사실 운이 좋았죠. 고블린 주제에 방심을 하지 뭡니까.”
루이즈가 구라를 약간 섞어준 모양이다. 눈치 없는 시우가 사실대로 얘기하려 했으나 굳이 진실을 밝힐 필요는 없지.
이런 게 다 평판이 되어서 도움이 될 텐데 거저주는 걸 뱉을 필요는 없다.
“끌끌. 그래, 아무리 강해봤자 몬스터는 몬스터지.
흠… 5급 몬스터 토벌에 클라인 루이즈의 보증도 있으니 바로 6등급으로 시작해도 되겠어.
아아 나도 5등급으로 해주곤 싶은데 이게 규정이란 말이지. 그래도 의뢰 몇 번이면 바로 승급시켜 줄 테니 걱정은 말고.”
확실히 이름값 있는 보증인이 있으니 일이 거침없이 잘 풀린다. 그 후 몇 가지 이야기를 나눈 뒤 우리는 모험가 카드를 받을 수 있었다.
이걸로 우리 셋 모두 모험가가 된 것이다.
====
우리는 지부장의 호의로 길드 앞 여관을 숙소로 삼았다.
이 여관은 길드가 직접 운영하는 여관이라 다른 여관들과 달리 비교적 안전한 편인데 그래서 아무나 묵을 수 있는 곳은 아니라고 한다.
어느정도 신용이 있는 모험가들만 묵을 수 있다고 하니 마음속으로 다시 한 번 루이즈에게 감사의 인사를 보냈다.
방을 두 개 빌린 후 간단하게 짐을 풀고 1층으로 내려와 식사를 끝냈다.
그리고 잘 시간이 되자 나는 미리 계획했던 작전을 실행했다.
“…그래서 말인데 소피를 혼자 자게 할 수는 없어.”
“네?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 그게 맞아. 방에 여자 혼자 두는 건 아무리 여기가 믿을 만한 여관이라 해도 위험해. 괜히 혼자 자는 걸 들키면 이것저것 귀찮게 집적거리는 놈들이 분명 나올 거야.”
“그러면 누구랑…?”
시우가 슬쩍 소피아의 표정을 살폈다.
아닌 척하면서도 은근히 기대하는 눈치다.
“너희 둘이 써. 그래도 내가 연장자잖아? 방 좀 편하게 쓰자.”
나는 시우에게 신호를 보내면서 말했다.
물론 그럴 생각은 전혀 없다. 소피아와 함께 준비한 작전이다.
시우에게 나는 소피아한테 관심없다는 어필을 하면서 소피아와 한 방을 쓰려는 작전!
역시나 시우는 막상 기회가 찾아오자 망설이고 있었다.
“그러면 저랑… 그… 소피아랑… 소피아 그… 괜찮을까? 난 상관은 없는데…”
귀까지 새빨개져서는 식은땀을 흘리면서 불안한듯 눈동자가 이리저리 움직인다.
어우 저 호구새끼. 저래가지고 서브 히로인이랑은 맺어질 수 있을까? 기회가 되면 창녀촌에 데려가서 아다를 떼줘야 겠다.
“…미안. 부끄러워서… 오빠 그냥 오빠랑 같은 방 쓰면 안될까?”
소피아가 계획대로 말하자 시우는 엄청 아쉬워했다. 그러나 끝까지 그러지 말고 자기랑 같은 방을 쓰자는 말을 덧붙이지 못했다.
“에휴…”
대놓고 한숨을 쉬며 시우를 바라보자 시우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어쩔 수 없지. 나랑 소피랑 같은 방을 쓸게. 그럼 늦었으니까 오늘은 각자 방에서 쉬고 내일 아침에 1층에서 모이도록 하자.”
“응! 헤헤.”
“…네”
소피아가 내 팔에 엉겼고 시우는 터벅터벅 자기 방으로 향했다.
-탁!
시우가 방에서 나가고 문이 닫히자마자 소피아가 달려가 문을 잠그더니 내 품에 안겼다.
나는 자연스럽게 소피아를 침대에 눕히고는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소피아와 꽁냥거리고 있자 이제서야 하루가 지났다는 실감이 났다. 정말 많은 일이 있었던 하루였다.
처음으로 몬스터와 싸우고
칼에 찔리고
독에 중독되고
죽을 뻔하고
경비대를 만나고
모험가가 되고
…애들 앞이라 애써 유쾌한 척했으나 나 역시 무서웠다.
아무리 ‘히로인 네토리’ 속이라 해도 그 아픔과 고통은 진짜였다.
그리고 죽음의 공포, 다시는 소피아와 만날 수 없다는 그 생각이 정말로 두려웠다.
이렇게 하루를 곱씹고 있으니 갑자기 소피아가 울음을 터뜨렸다.
“흑… 오빠… 오빠…!”
소피아 역시 오늘을 회상했는지 눈물을 흘리며 불안에 떨었다.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내 품속으로 파고드는 소피아를 나는 말없이 가득 안아주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소피아의 불안이 사라지지 않았다.
“흐앙… 흑…흑흑… 오빠 죽으면 안돼…”
“절대로… 절대로! 흡… 죽지마… 날 두고 떠나면 안돼… 응?”
“흑… 오빠가 죽을뻔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너무 아파… 아무리 힐을 써도 나아지지가 않아…”
소피아는 두 눈이 빨개지도록 엉엉 울면서 나를 끌어안았다.
가슴팍이 소피아의 눈물로 젖어가는 게 느껴졌다.
나를 이렇게 사랑해주는 소피아가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동시에 이런 소피아를 가슴 아프게 만든 자신이 미웠다.
“소피…”
나는 고개를 숙여 소피아에게 키스를 해주었다.
그녀와의 첫키스처럼 짠맛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