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해 줄 수 없는 일
“춤 잘 추시죠?”
제이드와 어윈이 함께 하는 점심 식사 자리였다. 음식을 잘게 잘라 제이드의 접시에 올려 주고 있던 어윈은 뜬금없는 제이드의 질문에 고개를 갸웃했다.
“어디 가서 빠지지 않을 만큼은 춥니다.”
“남은 기간은 어윈에게 춤을 배우고 싶어요.”
어윈이 사라졌던 동안 제이드는 샤보노 부인이 꼭 알아 둬야 한다는 무도곡을 모두 외웠다. 샤보노 부인을 부른 것은 여자 스텝을 배우기 위해서였으니, 이제 어윈과도 충분히 춤을 출 수 있었다. 어윈은 호쾌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또 하고 싶은 게 있습니까?”
“네. 있어요.”
처음 공작저에 왔을 때는 번화가에 놀러 가고 싶다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해서 이리저리 빙빙 돌리던 제이드가 단호하게 대답하자, 어윈이 씨익 웃었다.
“뭘 그렇게 하고 싶은데요 ?”
"나중에 말할게요. 거절하면 안 돼요.”
“제가 언제 아가씨 얘기를 거절한 적 있었나요?"
어윈은 한 번도 제이드에게 '안 된다'는 말을 한 적 없었다. 오히려 제대로 된 경험이 없어서 뭘 하고 싶은지 모르는 제이드에게 다양한 제안을 먼저 해 주는 건 어윈이었다. 그러나 이번 제안은 절대 어윈이 먼저 하지 않을 것이었다.
"어윈은 제게 늘 하고 싶은 걸 하라고 했죠.”
“그럼요. 아가씨가 이 저택에 온 이유죠.”
제이드는 어윈의 말을 듣고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하고 싶은 걸 하라는 어윈의 말이 그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다는 것을 그는 모를 터였다.
“이제 함께 춤을 춰 볼까요?"
어윈에게 먼저 춤을 청했던 제이드는 결국 어윈을 훔쳐보다가 제 발에 걸려 넘어지는 추태를 보이고, 방으로 도망치듯이 돌아왔다. 그리고 저를 걱정하며, 제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저를 올려다보고 있는 어윈에게 짧게 키스했다. 이 저택을 떠나면 어윈과 이별이었다. 제이드는 꿈에서조차 어윈을 제대로 가져 본 적이 없었다. 어윈의 짙은 시선은 제이드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제이드는 도톰하게 솟은 어윈의 아랫입술을 엄지로 부드럽게 쓸었다.
“혹시 흑룡의 신부가 처녀일 필요가 있나요?"
제이드의 목소리는 담담하게 들렸지만, 그녀의 심장은 녹아내리고 있는 것 같았다. 만약 어윈이 거절한다면 이 심장은 영영 고장 날지도 몰랐다.
"..... 그깟 짐승이 뭘 알겠습니까?”
습한 목소리로 대답한 어윈은 몸을 일으켜 제이드의 두 뺨을 잡고 키스했다. 두어 번 가볍게 입을 맞추던 어윈은 굳어 있는 제이드의 턱을 잡아 입을 벌리고 부드럽게 파고들었다. 단단한 몸과 달리 어윈의 입 안은 너무 부드러웠다. 어윈의 더운 숨이 입 속으로 생생하게 느껴졌다. 어윈의 매끄러은 입술과 촉촉하고 말캉한 혀가 제이드의 여린 입 안을 휘저었다.
"하읏......”
어윈의 키스에 달아오른 제이드가 어쩔 줄 모르고 있던 두 손으로 어윈의 허리춤을 잡자, 어윈은 제이드를 모두 집어삼킬 듯이 붉게 달아오른 입술을 거칠게 빨아들였다. 꿈에서 느끼던 감각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꿈속에서의 진한 감정은 눈을 뜨고 나면 아련하게 남을 뿐이었지만, 현실의 어윈은 제이드의 가슴에 하나하나 각인되고 있었다.
"제이드.......”
잔뜩 탁해진 어윈의 목소리가 제이드의 귓가에 울렸다. 어윈의 목소리가 너무 야해서 제이드는 숨도 제대로 내쉬지 못했다. 양 뺨과 는 끝이 붉게 물든 제이드의 얼굴을 어윈이 기다란 손가락으로 어루만졌다.
“싫으면 싫다고 해요.”
싫을 리가 없었다. 어윈이 주는 것이라면 뭐든지 좋았다. 제이드가 고개를 흔들자, 어윈은 제이드의 등과 다리를 한 번에 번쩍 들었다. 이번에는 제이드도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제이드의 얼굴 지척에 어윈의 얼굴이 있었다. 어윈은 제이드의 입술에 키스하며, 침대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제이드를 침대로 조심히 내려놓은 어윈은 결박하듯이 그녀의 허리를 긴 팔로 감아 침대 안쪽으로 깊이 밀고, 제 몸을 올렸다.
숨이 막히게 끌어안는 완력과는 다르게 제이드를 향한 어윈의 키스는 절절하고 달콤했다. 제 입술에 맞닿은 어윈의 제어되지 않는 뜨거은 숨결이 저를 원한다고 말해 주는 것 같았다.
"으응......"
어윈의 키스는 점점 맹수와 같이 흉포해졌다. 늘 다정했던 어윈의 빛은 음심을 감추지 못하고 짙게 번들거렸다. 제이드의 입 안을 뭉근하게 헤집은 어윈은 입술이 짧게 떨어질 때마다 굶주린 짐승처럼 사납게 다시 맞붙어 왔다. 질척하고 끈질기게 비비고, 휘젓는 어윈의 키스에 제이드는 온몸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제이드에게는 키스조차 너무 강렬한 감각이었다. 세상이 뒤집힐 만큼 갑작스럽게 밀려오는 전을에 어쩔 줄 모르고 몸을 비틀어 어윈을 밀어내고 밭은 숨을 내쉬는 제이드에게서 떨어진 어윈은 그녀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고 나직이 중얼거렸다.
“하아...... 이러면 안 되는데.......”
제이드는 어윈의 말에 심장이 쿵 떨어졌다. 싫어서 밀어낸 것이 아니었다. 당장이라도 어윈이 제게서 몸을 떼고, 구겨진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미안하다고 말할 것 같았다. 제이드는 어윈이 떠날까 봐 그의 허리를 확 끌어안았다.
“안 돼요.”
“미안해요. 욕심부리지 말고 부드럽게 해 줘야 하는데......”
제이드는 고개를 흔들었다. 부드러울 때는 감미로워서 좋았고, 거칠 때는 저를 향한 어윈의 흥분이 느껴져 더 달아올랐다. 코끝을 간질이는 그의 체향와 묵직하게 짓누르는 강건한 육체는 저 깊은 곳의 무언가를 계속 흔들어 놨다. 싫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한 적 없었다.
"......다 좋았어요.”
“더 기분 좋게 만들어 줄게요.”
조용히 웃은 어윈은 상의를 먼저 벗어 던졌다. 그리고 제이드에게 키스하며, 그녀의 드레스의 단추를 하나하나 열었다. 앙상하게 말라서 볼품없었던 제이드의 몸은 이제 제법 살집이 올라 부드럽고 폭신하게 변했다.
어윈이 옷을 벗기자 늘 꽁꽁 싸매고 있어서 붙조차 제대로 뛸 적이 없는 제이드의 하얀 살결이 수줍게 드러났다. 눈 속에 차오르는 분을 갈무리하지 못한 어윈은 제이드의 옷을 잡아 내릴 때마다 입술로 쓸고, 탐욕스럽게 잘근잘근 씹었다. 그 느릿하고 집요한 음직임은 감질나게 몸을 달궜다.
"아흣......”
악물린 잇새에서 새어 나온 교성에 어윈은 그녀의 속옷을 찢듯이 벗겨 냈다. 봉긋하게 솟아올라 흔들리는 탱탱한 가슴과 엉덩이까지 이어지는 잘록한 허리선이 그린 것처럼 아름다웠다. 어윈은 제이드의 숨겨 둔 아름다움에 순수하게 감탄했다. 드레스를 입었을 때보다. 벗은 모습이 훨씬 아름다웠다.
“너무 예뻐요. 늘 아름답다고 생각했어요.”
한 손에 착 감기는 제이드의 가슴은 푸딩처럼 부드러웠다. 어윈은 수줍게 돋은 분홍빛 돌기를 한입에 삼켰다. 이내 단단해진 제이드의 유두를 어윈은 강하게 빨아들이고, 혀로 부드럽게 쓸다가 깨물었다. 남은 손은 다른 쪽 가슴의 유두를 비틀고 비비면서 희롱했다. 어윈의 입술이 움직일 때마다 반짝이는 타액이 그녀의 몸에 길게 남았다.
“으읏...... 하앗......"
제이드를 아이 다루듯 안아 남은 옷을 모두 벗긴 어윈은 제이드의 허리를 팔로 감아 제 몸 위로 가볍게 올렸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얼굴을 간지럽혔다. 어윈은 희게 드러난 제이드의 목덜미를 길게 핥고, 가녀린 어깨와 목에 키스하며, 잘록한 허리와 납작한 배를 손으로 등글게 쓸어 내려갔다. 제이드는 어윈의 손길이 지나는 곳마다 열꽃이 피는 것같이 뜨거웠다.
휘몰아치는 쾌락에 제이드의 입에서 교성이 새어 나왔다. 아랫배에서 올라오는 황홀하고 저릿한 기분에 허리를 뒤틀었다. 꿈보다 선명하게 느껴지는 절절 끓는 생생한 쾌감에 제이드는 자신이 낯설었다. 입 안에서 자꾸 새는 야릇한 신음, 잘게 떨며 흔들리는 허리, 저도 모르게 움찔대는 하복부의 열기가 어떤 의미인지도 명확히 모르면서, 자꾸 어윈을 원했다.
“하읏...... 어윈......”
“조금만 더 참아 봐요. 아직은 일러요.”
어느새 몸을 일으켜 제이드를 자신의 다리 사이에 앉힌 어윈은 그녀의 귀를 깨물고, 핥아 올렸다. 무의식적으로 몸을 붙이려는 제이드의 한쪽 허벅지를 어윈이 들어 올렸다. 훤하게 드러난 그녀의 둔덕에 닿은 어윈의 손바닥은 이미 습기를 머금고 있는 도톰한 살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꿈에서 본 덕에 이곳이 주는 쾌락을 어렴풋이 알고 있는 제이드는 제 손가락을 잇새로 물었다.
자꾸 뒤로 꺾이는 목을 어윈이 팔로 감싸 안았다. 제이드는 끊어오르는 열락의 끝을 찾아 본능적으로 어윈의 입술을 물고 빨았다.
“흐응...... 흐...... 으읏.”
자연스럽게 벌어진 긴 틈새로 스며든 어윈의 손가락은 이미 잔뜩 부는 작은 열매를 등글게 문질렀다. 진즉 촉촉하게 젖은 그곳에서 활칵하고 물기가 새어 나왔다. 어윈의 손가락 하나가 조심스럽게 그녀의 안쪽으로 향했다.
남자를 받아들인 적 없는 좁은 틈은 손가락 하나 받아 내기도 버거웠다. 어윈은 그녀의 쾌락점을 빠르게 비비며 손가락 하나를 더 넣어 보려고 했지만, 좁은 틈새는 쉽게 길을 내주지 않았다. 제이드가 애원할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첫 삽입에 통증을 느끼면, 그 뒤는 느끼기가 어려울 거였다.
“너무 좁아요. 뜨겁고......”
어윈은 제이드를 눕히고, 몸을 낮췄다. 제이드가 뒤로 몸을 물렸다. 너무 환한 낯이었다. 이렇게 음부를 내민 자세로 어윈에게 비밀스러운 곳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허벅지로 어윈의 고개를 밀어 보려고 했지만, 어윈의 힘을 당할 수 없었다.
“가만히 있어요. 가만히.”
어윈은 제이드의 다리와 발에 부드럽게 키스하면서, 제이드의 긴장을 풀었다. 다시 몸을 낮춘 어윈은 제이드의 한쪽 다리를 제 어깨에 올려 그녀의 숲 앞에 고개를 숙였다. 살짝 벌어진 긴 틈 사이 애액으로 촉촉이 젖은 속살이 반들반들 빛났다. 어윈은 거침없이 그 틈 사이에 혀를 넣어 길게 핥았다. 그 기묘한 감각에 제이드의 상체가 불쑥 솟아올랐다.
“으....... 음...... 앗!”
꿈에서 겪는 것과 실제 겪는 것은 너무 달랐다. 한 번도 남자의 손길을 받은 적 없는 붉은 속살은 어윈의 혀에 너무 쉽게 녹아내렸다. 어윈은 동그란 살점을 쪽쪽 빨고, 혀로 빠르게 핥았다. 극치의 쾌락에 제이드는 몸을 덜덜 떨었다. 빠르게 치솟는 호흡에 눈앞이 흐려서 제대로 사고를 할 수 없었다. 강한 쾌감은 고통과도 닮아 있었다.
“아흣...... 앗....... 앗....... 아앙!”
짧게 터지는 제이드의 교성이 계속 이어졌다. 어윈은 혀로 그녀의 쾌락점을 핥으면서, 넘치는 애액과 집요한 애무로 늘려 놓은 내벽 안으로 손가락을 다시 넣었다. 아까와 달리 미끈한 샘물이 넘쳐나는 그곳은 무리 없이 손가락을 받아들였다. 앞뒤로 느리게 움직이다가 속도를 높이자 질퍽하게 젖은 안쪽의 여린 살이 손가락을 물고 놔주지 않았다.
“아아아...... 제발... 하앗......”
울먹이는 제이드가 본능적으로 원하는 것은 어윈의 것이었다. 그녀가 놀랄까 봐 하의도 벗지 못했던 어윈이 재빨리 남은 옷을 모두 벗어 던졌다. 어윈의 단단한 허벅지 사이는 제이드가 꿈에서 본 것과 비슷했다. 무기라고 불러도 어색하지 않을 흉포한 물건이 꺼덕대고 있었다.
"제이드 ...... 하아......"
어윈은 제이드의 다리 사이로 들어가 그녀의 위에 몸을 겹쳤다. 다정한 키스로 제이드를 진정시키면서, 어윈은 터질 것같이 부풀어 오른 제 성기를 잡고 뭉뚝한 선단으로 뭉근하게 비볐다. 제 것이 들어가기엔 여전히 좁았지만, 그래도 서로의 틈에서 나온 미끌미끌한 액들이 도움이 되었다.
“으읏”
끄트머리가 겨우 들어갔을 뿐인데, 제이드가 놀라 어윈의 어깨를 꽉 잡았다. 그래도 가장 두꺼운 살이 안으로 들어갔으니, 그 뒤는 조금 쉬울 거였다. 어윈은 앞뒤로 조금씩 조심스럽게 움직이며, 그녀의 허리를 팔로 꽉 끌어안고 쉽게 결합할 수 있는 자세를 만들었다. 그리고 제이드가 제 키스에 정신을 뺏겨 긴장이 풀어진 틈을 타서, 단번에 제 것을 찔러 넣었다.
“아앗!”
"많이 아파요?"
어윈의 뜨거운 기둥이 제 몸을 반으로 쪼개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 얼얼한 통증은 참을 만한 아픔이었다. 더군다나 아프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어윈과 하나가 됐다는 만족감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고통과 맞먹는 쾌락에 비하면, 차라리 참을 만했다. 다만 제 몸에 저렇게 커다란 양물이 들어올 공간이 있다는 게 신기했다. 제이드는 고개를 크게 흔들었다.
“괜찮아요."
밖에서는 제이드의 매끄러운 몸이 온 힘을 다해 어윈을 끌어안았고, 그녀의 안에서는 좁고, 뜨겁고, 움찔거리는 내벽이 어윈의 단단한 살덩이를 꽉꽉 물어 댔다. 어윈은 동그랗게 부풀어 오른 그녀의 음핵을 엄지로 살살 만지며 천천히 허리를 움직였다.
“아...... 이 안은 너무 좋아요.”
어윈은 제이드의 입술을 검지와 중지로 쓸다가 안으로 넣었다. 제이드는 어윈의 장난에 달콤하게 웃었다. 그리고 두 눈을 감고 어윈의 손가락을 장난치듯이 혀를 돌려 날름날름 핥았다. 그게 얼마나 야한 짓인지 제이드는 아직 몰랐다. 어윈이 목울대가 크게 울렸다. 제이드의 위도 아래도 축축하고, 따뜻하고, 기분 좋았다.
"부드럽고..... 녹아내릴 것 같고...... 너무 좋아요.”
저를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는 어윈을 보며 제이드는 섹스가 안락하고 행복한 즐거움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윈과 하나가 되었다는 충만함에 제이드는 이제 섹스가 거의 다 끝난 줄 알았다. 키스를 퍼붓고, 달콤한 밀어를 귀에 속삭인 어윈은 제이드가 여유가 보이자, 천천히 제 것을 밖으로 빼냈다.
“집중해요. 이제 시작이니까.”
한동안 어윈의 성기를 머금었던 그녀의 붉은 틈이 아쉬운 듯이 움찔거렸다. 어윈은 더는 참지 못하고, 제 것을 단숨에 밀어 넣었다. 이제 제이드의 내벽은 완벽하게 어윈의 것을 받아들였다.
"하앗...... 아으...... 어윈!”
제이드는 어윈의 이제 시작이라는 말이 뭔가 싶었지만, 금세 어윈의 말을 이해하게 됐다. 전희까지 마지막 이성을 놓지 않았던 어윈의 허리가 처음과는 다르게 과격하게 움직였다. 제이드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그녀의 팔 안쪽에 제 팔을 넣어 어깨를 잡고, 허리를 양껏 흔들었다. 들고 날 때마다 제 것을 물어 대는 감도 높은 속살이 그를 미치게 했다. 제이드를 앞에 두고 참았던 시간이 길었던 만큼, 제 맘껏 그녀를 취하고 싶었다.
“아...... 너무 좋아........”
어윈은 거친 숨을 내쉬며 빨갛게 부어오른 제이드의 입술을 먹어 치웠다. 어윈의 난폭한 추삽질에 살과 살이 부딪치는 음탕한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제이드는 제 안을 파고드는 그의 성기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너무 선명하게 느껴져 발끝이 저릿저릿했다. 그 뜨거운 이물감이 주는 고통에 인상을 찡그렸던 제이드는 점점 그의 움직임이 주는 희미한 쾌락을 느끼기 시작했다. 사정 봐주지 않고 퍽퍽 쳐 대며 제 안을 파고드는 뜨겁고 단단한 살덩이가 좁은 틈 사이에서도 이곳저곳을 찔러 댈 때마다. 허리가 절로 튀어 올랐다.
“아아앗..... 아아......”
어윈이 아래에서 위로 쳐올릴 때마다, 머릿속에 폭죽이 터지는 것 같았다. 잇새에서 새어 나오던 고통의 신음이 환희의 교성으로 바뀌는 순간을 어윈은 놓치지 않았다. 제이드가 느끼는 곳을 집요하게 찔러 대는 어윈의 허리 짓에 제이드는 그의 등에 매달려 헐떡됐다. 저 아래에서 척추를 타고 올라오는 쾌락은 제이드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차라리 고통이 나았다. 온 뇌를 튀겨 버릴 것 같은 짜릿한 열락은 끝내 그녀의 눈에서 눈물을 뽑아냈다.
“아아아아아...... 아앙...... 너무 빨라......”
"후으....... 천천히....."
어윈은 깊은숨을 토하며 속도를 줄였지만, 뿌리 끝까지 깊숙하게 찔러 들어왔다. 그 느릿하고 충만한 음직임에 이제 좀 숨을 쉴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것도 잠시, 어윈은 얕고 빠르게 허리를 치대며 제가 느끼는 곳을 꾹국 눌러 댔다. 이미 한껏 예민해진 속살은 극치의 쾌감으로 그녀의 사지를 벌벌 떨게 했다. 이제 제 안은 다 녹아서 물러 터질 것만 같았다.
"그만....”
“아....... 제이드......”
애원하고 싶은 건 어윈도 마찬가지였다. 제이드의 안으로 들어갈 때마다 쥐어짜듯 저를 빨아들이고, 나올 때마다 아쉬운 듯 놓아주지 않고 딸려 오는 그녀의 내벽이 주는 황홀경은 그 어떤 기쁨과도 견줄 수 없었다. 이 안에서 오래오래 머물고 싶은 마음과 방사의 쾌락을 느끼고 싶다는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어윈은 제 밑에서 한껏 흐트러진 얼굴을 하고, 울고 있는 제이드를 보고 마음을 굳혔다.
“아아...... 어윈...... 아...... 앗...... 아!"
더 커질 수 없을 것 같았던 어윈의 성기가 단단하게 부풀면서, 이미 과민하게 눌리고 비벼진 제이드의 스팟을 사정없이 몰아쳤다. 제이드는 무자비하게 몰아치는 쾌감에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이미 제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허벅지가 덜덜 떨렸다. 온몸이 붕 떠 있는 것 같았다. 어윈이 제 몸을 온전히 꽉 끌어안고 놔주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또다시 몰아치는 아찔한 전율은 그 생각마저 그녀에게서 앗아 갔다. 온 무게를 다 싣고 짓누르는 것 같은 어윈의 마지막 스퍼트는 강렬했다. 잔뜩 미간을 좁히고, 저를 바라보는 어윈의 얼굴을 보고 마음에 열꽃이 확 피는 것 같았다.
"으응...... 앗...... 앗!”
"큿........아....... 제이드.”
제이드가 주는 촉촉하고 진한 감각에 어윈의 눈앞이 점멸하듯 흐려졌다. 거친 신음과 함께 그녀의 안에 모든 것을 뜨겁게 쏟아 냈다. 굳이 천국에 갈 이유가 없을 것 같은 극치의 쾌감이었다. 그녀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고, 제이드는 거친 숨을 골랐다.
“제이드..... 아..... 제이드.”
어윈은 제이드의 귓가에 그녀의 이름을 속삭였다. 그러자 어윈의 부름에 화답이라도 하듯 제이드가 작고 마른 손으로 어윈의 목덜미를 쓸어 주면서 귀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폭풍 같은 시간이 끝났다. 잔뜩 달아오른 몸은 쉬이 식지 않았고, 제이드는 여전히 몽롱한 느낌에 취해 있었다. 제 몸을 가득 채운 충만하고 행복한 기분이 사라지지 않았으면 했다.
"많이 아팠어요?”
제 목과 어깨를 부드럽게 핥는 어윈의 걱정 어린 질문에 제이드는 고개를 세게 흔들었다. 아예 아프지 않았다는 것은 거짓말이지만, 좋은 게 더 컸다. 어윈은 고개를 들어 도톰하게 부푼 제이드의 입술에 짧게 입 맞추며 물었다.
“그럼, 한 번 더 할 수 있겠어요?"
***^***
제이드는 햇볕이 내리쬐는 숲속에 혼자 서 있었다. 저 덜리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제이드는 소리 나는 쪽으로 자연스럽게 돌아섰다. 멜리사였다. 긴 금발을 휘날리며 그녀는 물속을 유영하는 것처럼 천천히 제이드에게 걸어왔다. 그 모습에서 는 을 떼지 못한 제이드는 못이 박혀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처럼 꼼짝 못 하고 서 있었다.
영겁같이 느껴지는 긴 시간이 흘렀다. 결국,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했다. 멜리사의 시선이 좀 더 높았다. 제이드는 꿈에서 멜리사를 자주 봤지만, 한 번도 얼굴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드디어 멜리사의 얼굴이 제이드에 초점에 들어왔다.
"헉....."
제이드는 번쩍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켰다. 생각도 못 한 일이었다. 늘 희미하게 보였던 멜리사의 얼굴은 바로 제 얼굴이었다. 비록 꿈이지만, 어윈의 사랑을 받는 멜리사가 부러워서 그녀를 제 얼굴로 본 것 같았다. 제이드는 제 추악한 질투가 부끄러웠다.
“미안해요, 멜리사."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든 제이드는 작게 중얼거리며 풀썩 다시 누웠다. 몸살이라도 난 것처럼 온몸이 아팠다. 특히 다리 사이가 뻐근했다. 그 안쪽도 여전히 화끈거렸다. 그 느낌에 어젯밤 일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늘 평정심을 유지하던 어윈의 표정이 저로 인해 무너질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어윈을 만나기 전까지는 섹스란 아이를 낳는 방법이라고만 생각했다. 섹스란 뜨겁고, 격하고, 난잡했다. 제가 가진 모든 것을 숨김없이 다 내놓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제 첫 상대가 어윈이어서 다행이었다.
“옷을 입혀 줬구나.”
몸도 닦아 줬는지 뽀송뽀송했다. 벌써 아침이 훌쩍 넘은 시간이었다. 제이드는 앨런을 불렀다. 앨런은 금세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일어나셨어요?”
“네. 어윈은 안 왔나요?"
“아침에 아가씨가 일어나시면 기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저택에서 어윈과 밤을 보낼 수는 있어도, 아침에 함께 눈을 뜨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 기분은 무척 쓸쓸했다.
"오늘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 앨런은 푹 쉬세요."
만약 앨런이 이 방을 치운다면 지난밤의 흔적을 모를 리 없었다. 시트는 욕실에서 빨면 되는데, 어디에 널어 말려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앨런이 웃으며 말했다.
"얼른 씻고 점심 드세요. 제가 다 치울게요.”
앨런은 엄지와 검지를 들어 제 입술을 위아래로 잡았다. 침묵을 지키겠다는 이야기였다. 제이드는 멍한 눈으로 앨런을 바라봤다. 어윈이 앨런은 믿어도 된다고 했지만, 그런 문제가 아아니었다. 지난밤의 흔적이 창피했다. 얼굴이 새빨개진 제이드의 생각을 읽었는지 앨런이 다시 웃었다.
“혼자 씻을 순 있어요?”
“네.”
제이드는 후다닥 침대에서 일어나 욕실로 들어갔다. 뜨거운 물에 발긋발긋한 제 몸을 담근 그녀는 앞으로의 일을 생각했다. 어윈이 너무 좋았다. 미칠 것 같은 이 감정을 잃고 싶지 않았다. 제이드는 절대 흑룡의 신부가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
연회장에는 이제 연주자도 없었다. 제이드와 어윈은 얼마 남지 않은 두 사람의 시간을 만끽하고 있었다. 제이드와 어윈은 춤을 출 것처럼 손을 맞잡고 스텝을 밟았지만, 춤은 아니었다. 그저 끌어안고, 뜨거운 숨결을 나누고, 서로의 발걸음에 맞춰서 음악도 없이 빙글빙글 돌았다. 흑룡의 신부가 되기 위해 윈슬로우 산으로 떠나야 하는 것이 바로 내일이었다. 두 사람은 오랜 시간 말없이 서로의 온기만 느끼고 있었다.
“어윈......”
제이드는 어윈의 팔에 매달려 그를 올려다봤다. 공작저에서 윈슬로우 산까지는 마차로 꼬박 이틀이 걸린다고 들었다. 사흘 뒤에는 어윈을 볼 수 없다. 어윈을 보는 제이드의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어윈은 제 이름을 부르고 말을 잇지 못하는 제이드와 시선을 맞췄다. 제이드의 눈은 당장 눈물이라도 흐를 것같이 촉촉이 젖어 있었다.
“괜찮으니까 얘기해요.”
어윈은 말하기를 주저하는 제이드에게 다정하게 말했다. 제이드는 저를 바라보는 어윈의 따뜻한 눈에 용기를 얻었다.
“.......우리 같이 도망가요."
제이드도 공작가의 집사인 어윈에게는 힘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젊었고, 이 커다란 저택을 돌보면서 편안히 살 수 있는 능력도 있었다. 그런데도 제이드는 어윈이 저를 선택해 줄 거라고 믿었다. 그녀는 두 사람의 마음을 확인한 이후, 어윈이 함께 도망가자는 말을 해 주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어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녀의 마음은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
“아가씨는 흑룡의 신부가 되어야 합니다.”
어윈의 임무가 제이드를 흑룡의 신부로 만드는 것임을 제이드도 알고 있지만, 그것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기 전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아도, 어윈이 저를 사랑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어윈에게 자신은 한순간 스치는 여인일 뿐이었다. 저는 사랑과 욕정도 구분하지 못하는 멍청이였다.
“날 사랑하는 줄 알았어요.”
“사랑해요. 믿어 줘요. 아직 시간이 필요할 뿐이에요.”
“사랑하면서 어떻게 날 흑룡에게 보내요? 난 흑룡의 신부가 되지 못할 텐데, 그땐 어떻게 할 거예요? 내가 찾아오면 다시 만나 줄 건가요?”
제이드에 입에서 궁금했던 말이 쏟아져 나왔다. 어윈은 억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제이드의 얼굴을 엄지로 쓸며 나직이 말했다.
“그런 일 없을 거예요. 당신은 완벽한 흑룡의 신부니까.”
"하..... 하하......"
앞뒤가 맞지 않았다. 자신을 사랑한다면서 완벽한 흑룡의 신부라니. 기가 막힌 제이드의 입에서 헛웃음만 흘러나왔다. 어윈은 제 품을 빠져나가려는 제이드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러나 제이드는 오히려 두 팔로 어윈의 가슴팍을 밀치고 빠져나왔다.
"손대지 말아요."
제이드의 날카로운 음성에 어윈은 고개를 돌렸다. 제이드는 흘러넘치는 눈물을 감추려 연회장 밖으로 나갔다. 몇 걸음만 빠르게 걸으면 자신을 충분히 잡을 수 있는 거리였지만, 어윈은 그녀를 잡지 않았다. 아니, 이 저택을 제이드가 떠날 때까지, 어윈은 그녀를 찾지 않았다. 윈슬로우 성으로 가야 하는 시간은 금세 다가왔다.
"앨런도 같이 가요?"
“그럼요. 윈슬로우 성 앞까지는 제가 모셔야죠.”
“너무 다행이에요.”
떠나기 전에 예의상 공작 부부에게 인사를 드리고 나온 제이드는 현관 앞에 서 있는 마차 두 대를 봤다. 하나는 늘 타고 다니던 4인용 마차였고, 나머지 하나는 뒤가 뚫려 짐을 잔뜩 실을 수 있는 짐마차였다. 그 마차에는 여행에 필요한 짐이 잔뜩 실려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어윈과 앨런이 나란히 서 있었다.
“가시죠.”
제이드는 아직 어윈의 얼굴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녀는 어윈이 가르쳐 준 대로 우아하게 턱 인사를 하고, 어윈이 문을 열어 주는 마차에 올라탔다. 곧이어 앨런도 마차에 올라탔다. 이제 끔찍할 만큼 어색한 어윈과의 여행이 시작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마차에 올라타지 않고, 마차 문을 닫았다. 미련과 후회만 가득 남기고, 이렇게 어윈과 헤어진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마차가 떠나면 두 번 다시 어윈을 못 볼 수도 있었다. 이렇게 어윈과 헤어질 수 없었다. 깜짝 놀란 제이드는 마차의 창문을 열어 밖을 내다봤다. 어윈은 다행히 짐마차에 올라타고 있었다.
“하아.”
창밖으로 몸을 빼고 밖을 본 제이드가 작게 숨을 토하자, 옆에 앉은 앨런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막상 떠나려니까 아쉽죠?”
제이드의 한숨을 오해한 앨런이 그녀를 토닥였다. 제이드는 이 저택에 하나도 관심 없었다. 이곳에 어윈이 있었기 때문에 의미가 있을 뿐이었다.
“아무래도 아쉽네요.”
그나마 이틀은 어윈을 더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제이드는 안심했다. 그러나 윈슬로우 성으로 가는 내내 제이드는 앨런과 함께였다. 식당에서도 제이드는 앨런과 상차림을 따로 받았고, 잘 때는 혼자였다.
“어머, 어서 오세요.”
흔히 볼 수 없는 고급 마차에서 내리는 제이드는 이제 누가 봐도 공작가의 영애였다. 사람들은 모두 저에게 친절했고, 신기한 눈으로 쳐다봤다. 만약 흑룡의 신부가 되면, 이제 황제도 자신을 무시할 수 없을 터였다. 그러나 제이드는 공허했다. 금은보화를 산처럼 준다고 해도 어윈과 함께 있을 때의 설렘과 비교할 바가 못 됐다.
"내일이면 모든 게 결정 나는구나.”
윈슬로우 산 앞에 있는 여관의 가장 큰 방의 창가에서 달을 보고 있던 제이드는 우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시간은 속절없이 가고 있었다. 어윈과 함께 있을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이었다. 어윈과 이별하더라도 마무리는 잘 하고 싶었다.
"어윈.”
똑똑, 손가락으로 작게 문을 두들기며, 제이드는 어윈의 방 앞에서 그를 불렀다. 문 안에서 그의 익숙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달칵, 문이 열리자 모습을 드러낸 어윈은 순식간에 문 앞에 선 제이드의 어깨를 안아 안으로 들였다.
문이 닫히고, 제이드의 등은 문에 맞닿았다. 어윈은 제이드를 양팔 사이에 가두고, 깜짝 놀라 동그란 눈을 깜박이는 제이드의 입술을 한입에 삼켰다. 화해하고 싶다는 변명으로 어윈을 찾은 제이드는 제가 이곳에 왜 왔는지도 까먹고, 제이드에게 매달려 그의 키스를 받았다. 그의 마음이 저한테 없다는 것을 알아도 어윈의 키스는 달았다.
“제이드.......”
제 이름을 부르는 어윈의 목소리에 제이드의 화난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그는 그녀의 귀와 목에 짧게 키스하며, 애타게 제이드의 이름을 불렀다. 제이드는 그럴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윈이 정말 저를 사랑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을 이렇게 애절하게 부를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이 밤이 끝나면 완전한 이별이라 마음이 급했다. 제이드는 어윈의 어깨를 붙잡고 물었다.
“어윈, 날 사랑해요?"
"사랑합니다."
"그럼, 지금 나랑 떠나요. 제발."
마지막으로 애원하는 제이드에게 어윈은 무겁게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제이드는 어윈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랑한다면서 어떻게 이렇게 매정할 수 있을까. 흑룡이 저에게 관심을 둘 리 없었다. 내일 흑룡의 신부가 정해지면, 제이드는 자유였다.
“내가 흑룡의 신부가 되지 않는다면 나랑 도망갈 거예요?”
"당신은 흑룡의 신부가 될 거예요.”
제이드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두 눈이 절로 감겼다. 모건 공작이 굳이 저를 양녀로 들여 흑룡의 신부로 만들고 싶어 할 만큼 이 일에 진심이라는 건 알았다. 어윈의 일이 저를 흑룡의 신부로 만드는 것이라는 것도, 그러나 저를 사랑한다면 그게 어윈에게 그렇게 중요한 일인가 싶었다. 저를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모건 공작이 주는 돈은 잃기 싫은 모양이었다.
"....... 모건 공작가의 집사직이 그렇게 중요한가요?"
"......."
“내 애원을 거절할 만큼?”
다시 눈을 뜬 제이드의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눈물을 닦아 주려는 어윈의 손을 제이드가 쳐 냈다.
"레아랑 잘해 보세요. 혹시 알아요? 그 좋아하는 공작가의 가족이 될지."
어윈의 마음을 제 마음처럼 갈가리 찢어 놓고 싶었다. 그러나 저와 어윈은 마음의 크기가 너무 달라 상처 줄 수도 없었다. 어윈과 함께 있을 수 있다면 제 모든 것을 던져도 괜찮은 제이드는 저보다 일이 더 중요한 어윈이 야속했다.
제이드는 인사도 없이 어윈의 방에서 나왔다. 제 방으로 가는 내내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이에서 좋은 이별은 있을 수 없었다. 동이 틀 때까지, 제이드는 제 사랑을 씹어 삼켰다. 다시 사랑할 일은 없었다.
***^^***
“아가씨, 눈이 왜 그래요?”
마지막 단장을 위해 제이드의 방을 찾은 앨런이 깜짝 놀라 물었다. 밤새 그치지 않는 눈물을 닦고, 또 닦은 제이드의 눈은 퉁퉁 부어 있었다. 앨런은 제이드를 제 품에 꼭 안았다.
“흑룡의 신부는 모두가 원하는 자리니까, 좋은 일만 있을 거예요.”
"앨런도 내가 흑룡의 신부가 될 거라고 생각해요?”
“그럼요. 이렇게 예쁘고, 다정한걸요.”
앨런은 진심을 듬뿍 담아 이야기했지만, 제이드는 그저 딸 같은 제가 짐승의 신부가 되는 게 안타까워 저를 위로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고마워요. 앨런 덕분에 행복했어요.”
짧은 시간이었지만, 제이드는 자신을 살뜰하게 챙겨 준 앨런에게 엄마에게보다 더 큰 사랑을 받은 것 같았다. 그녀와 헤어지는 것도 아쉬웠다. 다시 툭툭 눈물이 떨어졌다.
“울지 말아요. 화장하기 힘드니까!”
앨런은 우울한 분위기를 바꿔 보려고, 밝게 웃으며 얘기했다. 제이드는 나오려는 눈물을 꾹꾹 누르며 앨런이 꺼내 준 옷을 입고, 화장했다. 흑룡의 신부를 뽑는데, 가발은 당치 않았다. 그 대신 앨런은 짧은 머리인 게 티가 나지 않을 만큼 꼼꼼하게 머리 장식으로 치장했다.
“정말 예뻐요.”
앨런은 거울 앞에 제이드를 세웠다. 푸른 계열이 잘 어울리는 저를 위해 앨런이 준비한 옷은 짙은 남색 드레스였다. 단정에 보이면서도, 제이드의 몸매의 장점을 다 보여주는 옷이었다. 심지어 목을 감싸는 부분과 팔은 레이스 망사여서 묘하게 섹시한 느낌이 있었다. 지금까지 입던 옷과는 차원이 다르게 신경을 썼다는 게 역력하게 드러났다. 이 옷을 준비하려고 앨런도 꽤 고생했을 것 같았다.
"앨런은 어디서 이렇게 예쁜 옷을 구했어요?"
겉으로만 보면 제이드가 더러운 두건을 쓰고 남의 집 허드렛일을 하던 사람이라고,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것 같았다. 까맣게 그을렸던 얼굴도 하얗게 바뀌었고, 평생 거칠 줄 알았던 제 손도 이제는 어디에 내놔도 부끄럽지 않을 만큼 부드럽고, 고왔다.
“집사님이 구해 오신 거랍니다. 저는 아가씨에게 맞게 수정만 조금 했어요.”
"아.....”
제이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쩌면 어윈은 마지막 선물로 이 옷을 준비했는지도 모른다.
“고맙다고 전해 줘요.”
“네.”
직접 전하라고 할 만도 한데, 앨런은 되묻지도 않고 상냥하게 답했다. 앨런은 늘 모든 것을 아는 것 같으면서도, 아무 내색도 하지 않았다.
"이제 가요.”
여관에서 마차를 타고 윈슬로우 성으로 가는 길은 멀지 않았다. 창밖을 멍하니 보던 제이드는 기시감이 드는 장소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꿈에서 본 그곳이었다. 숲이야 크게 다를 게 없다지만, 해가 뜨면 빛처럼 햇볕이 쏟아지는 장소는 제이드에게 너무 익숙했다.
“어?”
“어머, 너무 아름답네요.”
제이드의 놀란 목소리에 창밖으로 눈을 돌린 앨런이 탄성을 내뱉었다. 누가 봐도 놀랄 만큼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것과는 별개로 제이드는 이 낯선 장소를 꿈에서 이미 봤다는 게 신기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윈슬로우 성 앞에 마차가 섰다. 모건 공작의 저택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높고 커다란 성이었다. 흑룡이 사는 성답게 반짝이는 검은 돌로 만든 성은 기이하면서도 아름다웠다.
“도착했습니다.”
흑룡의 예비 신부들이 모이는 날답게, 커다란 성문은 이미 열려 있었다. 성문 앞에는 문지기가 있었고, 안쪽에는 수많은 고용인이 예비 신부들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제이드의 짐이 고용인들에게 전달됐다. 모든 준비가 끝나고 제이드는 마차에서 내렸다. 어윈과 앨런 그리고 마부가 제 앞에 서 있었다.
"이 인사가 마지막이겠네요. 감사했습니다.”
자꾸 눈물이 차올라서, 제이드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흑룡의 신부가 되실 겁니다. 행운을 빌게요.”
“몸 건강히 잘 지내세요. 또 봬요.”
어윈과 앨런의 인사를 받고, 제이드는 몸을 돌렸다. 더 인사를 나눴다가는 다시 어윈에게 매달릴 것 같았다. 덤덤한 얼굴을 한 어윈을 보면서 제이드는 제가 이상한 사람같이 느껴졌다. 어윈과는 스치는 사이일 뿐인데도 미련하게 집착하고, 혼자 상처받으면서도 포기가 되지 않았다.
일행을 뒤로하고 돌아선 제이드가 성으로 들어가자, 문 안쪽에 서 있던 고용인들이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키가 크고, 콧수염이 난 노년의 남성이 그녀 앞으로 다가왔다.
“제이드 모건 양, 반갑습니다. 저는 윈슬로우 성의 집사 데클렌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데클렌은 제이드가 묵을 방으로 안내했다. 성의 내부는 두말할 나위 없이 크고 아름다웠다. 특히 성의 입구에 있는 로비는 이렇게 크고, 높게 만든 이유가 무엇인지 물어보고 싶을 만큼 웅장했다.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이 로비의 중앙에 떨어져 더 몽환적으로 보이게 했다.
제이드는 데클렌의 뒤를 따라가면서, 고개를 가만히 두지 못했다. 한 폭의 미술 작품처럼 아름다운 성을 구경하느라 정신없었다.
"연회 시간에 다시 모시러 오겠습니다."
제이드를 서쪽 탑에 있는 방으로 안내한 데클렌이 사라졌다. 돌로 만든 성 특유의 좁고 긴 창에는 끝없이 펼쳐진 숲이 보였다. 숲길에는 지나가는 사람 하나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분명히 이 성에는 저 말고도 수많은 고용인과 흑룡의 신부가 되기 위해 모인 여인들도 있을 텐데 적막하기만 했다. 숲을 스치는 바람 소리와 지저귀 는 새소리가 가끔 들릴 뿐이었다. 이 탑에 갇힌 것도 아닌데, 제이드는 이 세상에 혼자 남겨진 것 같아 외로웠다. 사실, 어윈이 제 곁에 없어서 슬펐다.
***^*^***
연회는 윈슬로우 성의 입구와 맞닿아 있는 로비에서 열렸다. 성의 고용인들이 흑룡의 예비 신부들이 이곳으로 하나둘 데려오고 있었다. 라프녹스에 사는 스무 살의 흑발 여자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50여 명 정도 모인 것 같았다.
제이드는 자신 말고, 흑발을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이곳에 모인 여자들은 모두 새까만 머리를 하고 있어서, 제이드는 기분이 미모했다. 그녀들은 모두 검은 머리가 돋보이도록 화려한 치장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급조된 자신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모두 아름답고 기품이 넘쳐서 제이드는 기가 죽었다. 한편으로는 흑룡이 저를 선택하지 않을 것 같아서 마음이 놓였다.
“어서 오십시오.”
로비 한쪽에는 간단한 간식거리와 음료가 준비되어 있었지만, 아무도 그것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제이드는 여자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다가가긴 했지만, 그들 사이에는 끼지 못하고 좀 떨어져서 끝에 섰다. 제이드는 여전히 귀족이 무서웠다. 만약 모건가에서 교육을 받지 않고 왔다면, 아무리 예쁘게 치장하고 왔더라도 문 앞에서 한 발짝도 못 움직였을 거였다.
“전 맨골드에서 온 리코티 백작의 딸 셰릴이에요. 어디서 왔어요?"
제이드는 옆으로 쓱 다가온 여자가 갑자기 말을 걸어 깜짝 놀랐다. 환한 미소를 지은 셰릴이 친근하게 물었다. 제이드는 그녀의 고향인 맨골드가 그레트나와 멀지 않아서 조금 부담스러웠다. 귀족들은 서로 관심이 많았다. 툭하면 연회를 열어 근처에 사는 귀족들을 모아 놓고 친목을 다지는 게 다반사였다. 셰릴이 모건 공작가와 인연이 있다면 분명히 제 존재에 의문을 품을 터였다.
“그레트나의 모건 공작가에서 온 제이드입니다.”
“어머, 모건 공작님 영애졌구나. 그 가문에는 검은 머리 딸이 없다고 들었는데........”
".......”
“너무 예쁘시다.”
레아의 이름이 안 나오는 것을 보면 모건 공작가와 아주 친한 집은 아닌 것 같았다. 제이드는 할 말이 없어서 그저 웃고 말았다. 제이드 앞에서 실언을 했다고 생각한 셰릴은 제 말실수를 만회하려고 괜히 예쁘다는 칭찬을 하면서, 재빨리 웃으며 사과하고 떠났다.
제이드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그녀는 삼삼오오 모여서 수다를 떠는 여자들을 둘러봤다. 대개는 흑룡의 신부가 되기를 바라고 있었고, 몇몇 여인들은 여기에 끌려와서 화가 난 것 같기도 했다. 이래도 저래도, 저들은 모두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좋겠다.”
얼굴도 몇 번 못 본 모건 공작은 만약 흑룡의 신부가 되지 않더라도 저택으로 돌아오라고 했다. 그리고 짐을 쌀 때도 제법 비싼 것을 잔뜩 넣어 주었다. 다시 돌아오라는 공작의 말은 빈말이었겠지만, 지금 입고 있는 옷과 보석, 장신구만 해도 몇 달은 먹고살 만큼 귀한 물건이라 고마웠다.
나가서 제 짐을 싹 다 팔면, 빈민가에 집을 한 채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제대로 배운 기술이 없으니 또다시 허드렛일은 나가겠지만, 엄마와 함께 살지 않으니 두건은 하지 않아도 됐다. 머리가 언제 다 자랄지는 모를 일이지만.
“여기에 주목하세요.”
아까 제이드를 안내한 데클렌이 오늘 진행을 맡을 모양이었다. 한 줄로 쭉 서라는 데클렌의 안내를 받고 여자들이 느릿느릿 우아하게 움직였다. 제이드가 얼떨결에 제일 던저 도착해 맨 왼쪽에 섰다. 로비가 얼마나 큰지 50여 명이 되는 인원이 띄엄띄엄 서도 좁지 않았다.
“잠시 후 윈슬로우 님이 나오실 겁니다. 여기 계신 분들을 한 분 한 분 살피고, 신부 한 분을 결정하실 겁니다.”
윈슬로우 숲과 성의 이름은 모두 흑룡의 이름에서 나온 것이었다. 제이드도 라프녹스의 수호신인 윈슬로우가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다.
"신부를 결정하는 기준이 뭔가요?"
"그것은 윈슬로우 님만이 아십니다."
누군가의 질문에 데클렌이 상냥하게 답하자, 갑자기 여기저기서 질문이 마구 쏟아졌다. 말이 섞여서 잘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질문 시간이 아닙니다. 윈슬로우 님이 곧 나오시니까, 자제 부탁드립니다.”
긴장한 여자들의 입은 쉽게 다물리지 않았다. 집사의 이야기를 귀로 흘리고 여자들은 자기들끼리 정보를 교환했다. 제이드가 책에서 읽은 수준의 이야기였다.
"윈슬로우 님, 입장하십니다.”
말 많던 여자들의 입이 모두 조개처럼 꼭 다물어졌다. 커다란 후문이 양쪽으로 열리고, 윈슬로우의 모습이 보였다. 두 눈을 후문에 고정하고 있던 여자들은 동시에 소리를 질렀다.
흑룡이라고 해도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날 줄 알았던 그들의 예상이 한순간에 깨졌다. 제이드는 그를 보고 이 성의 로비가 왜 이렇게 큰지,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적어도 3미터는 훌쩍 넘는 것 같았다. 지금은 날개를 접고 있지만, 날개까지 편다면 더 클 것 같았다.
머리에 뾰족하게 솟은 뿔, 길게 찢어진 검은 눈, 윤기 흐르는 검은 날개, 강철 같은 비늘과 못 뚫는 게 없을 것 같은 날카로운 발톱까지 완벽한 흑룡, 그 자체였다.
“꺄아악!”
윈슬로우를 본 여자들은 혼비백산하여 소리를 지르며 주저앉고, 밖으로 나가려고 문을 향해 뛰었다. 말로만 듣던 윈슬로우가 흑룡의 본체로 나타나서 제이드도 깜짝 놀랐다. 하지만 피한다고 달라질 것도 없었다. 도망치고 싶다고, 쉽게 이 성을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어차피 모든 일은 윈슬로우가 결정할 터였다.
우왕좌왕하는 아가씨들 틈에서 제이드 혼자 꼿꼿이 서서 흑릉을 찬찬히 훑어봤다. 왠지 모르게 길게 찢어진 깊고 새까만 검은 눈이 익숙했다. 그 눈은 침착했다. 사냥을 나은 짐승의 눈이 아니었다. 흑룡이 앞발로 바닥을 치자, 여자들이 모두 숨을 죽였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모두 집까지 안전하게 가실 수 있습니다. 제 신부를 찾을 때까지만 가만히 서 계세요.”
윈슬로우의 목소리는 귀로 들리는 것이 아니라 머릿속에서 바로 울렸다. 신묘하다는 소문이 괜히 나은 것이 아니었다. 영물은 영물이었다.
충격에 빠진 여자들은 윈슬로우가 그냥 짐승이 아니라는 것과 정중하고 예의 바른 어투에 안심했다. 하지만 방금 전까지 흑룡의 신부가 되고 싶다고 떠들던 여자들도 이런 커다란 짐승의 신부가 될까 봐 겁에 질렸다. 데클렌은 익숙하게 여자들을 정리해서 일렬로 쭉 세웠다.
"자, 얼른 자리를 잡아야 일찍 돌아가실 수 있습니다.”
여자들이 자리를 잡자 윈슬로우가 조금 더 가까이 왔다. 가까이라고 해 봤자, 팔을 쭉 뻗어도 한참이 떨어진 거리였다. 윈슬로우는 그 깊고 까만 눈으로 오른쪽에 선 여자부터 한 명, 한 명 훑었다. 무엇이 기준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리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금세 윈슬로우는 마지막에 서 있는 제이드의 앞으로 다가왔다. 제이드와 윈슬로우의 눈이 마주쳤다.
“나를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윈슬로우의 목소리가 머리에서 울렸다. 제이드는 그가 결혼이 아니라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에 조금 놀랐다. 그러나 그에 대한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럴 리가요. 저는 당신의 신부가 될 생각이 없습니다."
“내가 그대를 신부로 선택해도?"
"이 성의 하녀로 고용해 주시면, 그건 달게 받겠습니다.”
제이드가 딱 잘라 말했다. 윈슬로우의 호쾌한 웃음소리가 머리에 울렸다. 제이드는 이렇게 근엄하게 생긴 흑룡도 웃을 수 있구나, 라고 생각할 뿐 별다른 감출은 없었다. 지금까지 흑룡의 신부들은 저 흑룡과 어떻게 살았을지가 궁금할 뿐이었다. 흑룡의 모습이긴 하나, 대화도 되고 점잖았다. 비록 평범한 부부 생활은 하지 못한다고 해도 흑룡의 부인이 되면 세상 좋은 것들을 다 누릴 수 있으니 가능할지도 몰랐다.
“흑룡의 신부는 당신입니다."
“네?”
"나중에 봅시다.”
윈슬로우는 커다란 몸집과 어울리지 않게 바람과 같이 후문으로 빠져나갔다. 아무리 성이 크다고 해도 그에게는 답답한 걸지도 몰랐다. 윈슬로우가 사라지고, 흑룡의 신부가 된 제이드는 절망에 빠졌다. 흑룡의 신부가 되고 싶다고 간절히 바라는 여인들을 놔두고 싫다는 사람을 굳이 고르는 흑룡의 심보가 괘씸했다.
"여기 주목해 주세요."
데클렌의 박수 소리에 여자들이 그를 쳐다봤다.
“신부 선정이 끝났습니다.”
“네? 언제요?”
여자들은 다들 묘하게 몽롱한 얼굴이었다. 조금 전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여자들은 누가 신부가 됐는지, 신부 선정이 어떻게 끝났는지 서로 묻고 있었다. 흑발의 여인 중에서 윈슬로우의 기억이 남아 있는 건 제이드 밖에 없었다. 흑룡에 관한 책 중에 윈슬로우의 모습과 신부 선발이 어떻게 . 이루어지는지가 쏙 빠진 이유를 제이드는 이제야 알았다. 흑룡은 저를 본 여인들의 기억을 모두 지워 버렸다.
“신부가 결정됐습니다. 제이드 모건 양을 제외한 여러분은 돌아가셔도 됩니다.”
“어떻게 결정된 거죠? 우리는 윈슬로우 님을 만난 적이 없는데요?
여자들의 볼멘소리가 이어졌다. 특히 흑룡의 신부가 되고 싶었던 여인들은 크게 실망했다.
"윈슬로우 님은 처음부터 여러분을 지켜보고 계시다 떠났습니다.”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데클렌은 여자들이 밖으로 나갈 수 있게 안내했다. 검은 머리의 여자들이 문밖으로 나가며 웅성웅성 떠들었다. 제이드도 그 속에 껴서 은근슬쩍 밖으로 나가려고 했는데, 데클렌이 그 앞을 막아섰다. 제이드는 하필 이런 중책을 맡는 집사가 제 담당이었다는 게 짜증 났다.
“제가 신혼 방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거부권은 없나요?”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데클렌은 부드럽게 웃었다. 윈슬로우 성의 집사인 그가 제이드의 편일 리 없었다.
“어떻게 저런 짐승의 부인이 되라는 거죠?"
감정이 격해진 제이드의 발언에 온화한 표정을 하고 있던 데클렌이 제이드를 나무라듯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짐승이라는 표현은 좀......”
"...... 죄송합니다.”
“윈슬로우 님을 만나 보시면 생각이 달라지실 겁니다. 확신할 수 있어요.”
흑룡이 아무리 대화가 되는 영물이라고 해도, 결국 사람과는 다른 종일 뿐이다. 같이 숲을 산책하거나, 머리의 뿔을 잡고 하늘을 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번화가에 가서 식사를 하거나, 축제에 가서 사람들 사이에서 함께 즐기고, 아이를 낳아 단란하게 키우는 평범한 생활과는 아예 거리가 멀 것이다.
"따라오시죠.”
데클렌은 제이드를 새로운 장소로 안내했다. 제이드는 그 뒤를 따라 걸으면서도 쉽게 표정이 펴지지 않았다. 아름다운 성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머리가 복잡한 제이드는 데클렌의 발뒤꿈치에 눈을 고정하고 무작정 그를 따라갔다.
“이제 이 방의 주인이십니다.”
데클렌의 발이 멈추자, 제이드가 고개를 들었다. 낯익은 복도, 익숙한 위치, 기억과 비슷한 커다란 문. 제이드는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제이드가 꿈에서 본 기억과 일치한다면, 이곳은 멜리사의 보라색 방이었다. 방문을 여는 데클렌의 뒤에 선 제이드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쑥 내밀었다.
“어?"
방을 확인한 제이드는 고개를 갸웃했다. 제가 꿈에서 본 보라색 방이 아니었다. 방의 크기는 비슷한 것 같지만, 흰색 배경에 황금색이 포인트로 들어간 휘황찬란한 침실이었다. 가구의 위치도 실내 장식도 모두 달랐다. 제이드는 저도 모르게 실망했다. 그 실망의 원인이 뭔지는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제이드는 이 방이 보랏빛 침실이기를, 어윈이 이곳에 있기를 무의식으로 바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마음에 안 드십니까?"
"아니에요.”
데클렌의 물음에 제이드는 고개를 흔들었다. 사실 이곳이 마음에 들고 말고의 문제는 아니었다. 이미 그녀는 흑룡의 선택을 받았고, 이곳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는 게 급선무였다. 흑룡이 그녀를 다시 찾기 전에 제이드는 이곳을 떠나야 했다.
"짐을 가져왔습니다.”
고용인들이 제이드의 짐을 가져와 정리하는 동안 그녀는 창밖을 바라봤다. 녹음이 너무 짙어 검게 보이는 윈슬로우 숲의 전경이 익숙했다. 그 꿈은 흑룡의 신부가 되는 것을 암시한 예지몽 같은 건지도 몰랐다. 그러나 모든 꿈이 현실과 딱 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 모든 꿈에서 제이드는 한 번도 흑룡을 보지 못했다.
“저녁은 윈슬로우 님과 함께 드시게 될 겁니다.”
"용이랑 밥도 같이 먹나요?"
데클렌의 설명에 제이드는 반문했다. 제이드는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이건 결론이 아니었다. 차라리 흑룡이 자신의 반려동물이 되거나, 제가 흑룡의 반려동물이 되었다고 하면 더 이해가 빠를 것 같았다.
“저녁까지 몇 시간 남았죠?"
“세 시간 후에 모시러 오겠습니다.”
데클렌은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하녀 낸시를 소개하고 사라졌다. 저보다 몇 살은 더 많아 보이는 낸시는 빨간 곱슬머리를 단정하게 올린 귀여은 인상이었다.
"목욕을 먼저 준비할까요? 배고프진 않으세요?"
낸시는 제이드가 무엇을 원하는지 상냥하게 물었다. 제이드는 피곤해서 저녁 전까지 잠을 자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낸시는 커다란 창에 커튼을 쳐 햇빛을 막았다.
"일어나면 부를게요. 고마워요.”
“푹 주무세요. 그리고 윈슬로우 님의 신부가 되신 것 축하드려요.”
데클렌도 그렇고 낸시도 그렇고, 진심으로 제이드가 흑룡의 신부가 된 것을 축하하는 느낌이었다. 윈슬로우는 고용인들의 신뢰를 꽤 받는 것 같았다. 아니면, 그 커다란 흑룡에게 신부가 있어야 자신들이 좀 덜 괴로울지도 몰랐다.
낸시가 밖으로 나가자 제이드는 커튼을 다시 열고 창밖을 살렸다. 창문이 크지 않았지만, 몸집이 작은 제이드는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었다. 2층 해 볼 만했다. 제이드는 제 손에 잡은 커튼을 온 힘을 다해 당겼다.
***^***
“시작해 볼까.”
낸시가 방을 나간 후에, 제이드는 창가의 커튼을 힘껏 당겨 떨궜다. 암막 역할을 하는 커튼은 꽤 튼튼해서 밧줄 대용으로 충분했다. 커튼으로 만든 밧줄을 밀어도 꿈쩍하지 않는 가구의 다리에 묶었다.
워낙 허드렛일을 많이 해서 절대 풀리지 않도록 매듭짓는 법 서너 개는 너끈히 알고 있었다. 무슨 일이든 경험한 것은 살면서 다 도움이 된다는 것을 제이드는 다시 한번 느꼈다. 커튼으로 만든 밧줄을 슬쩍 창문에서 떨어트리자 바닥까지는 닿지 않아도 충분히 내려갈 수 있는 길이였다.
“옷은....... 뭘 입지.”
지금 입고 있는 옷은 너무 눈에 띄었다. 제이드는 제 짐을 정리한 곳에서 적당히 화려하면서 눈에 띄지 않는 옷으로 갈아입고, 무게를 받아도 조여들지 않는 매듭으로 허리와 가슴을 연결해 묶었다. 이 정도면 떨어져도 충격이 분산될 거였다.
제이드는 제가 벗어 놓은 드레스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어윈의 마지막 선물이었다. 제이드는 살며시 드레스를 만져 보았다. 아직 온기가 남은 옷은 제 마음 같았다. 그러나 언제까지 감상에 젖어 있을 수는 없었다. 이곳을 탈출해야 어윈도 만날 수 있었다.
찌익, 제이드는 어윈이 선물한 드레스를 찢었다. 길게 찢은 천으로 찰과상이 남지 않도록 손바닥을 감쌌다. 어윈이 준 선물이니 제게 행운을 가져다줄지도 몰랐다. 어윈이 이 옷을 골랐을 때는 이런 식으로 쓰일 거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을 거였다.
"가자!"
제이드는 가구와 제 몸에 묶인 밧줄을 감아 들고 조심스럽게 창가에 올라갔다. 창가에 뒤돌아서 서자, 손바닥에 식은땀이 촉촉이 흘렀다. 뒤가 보이지 않아서 더 무서웠다. 그렇다고 이 방에서 흑룡의 신부가 되기를 기다릴 수는 없었다.
“으아아아아......"
제이드는 절로 나오는 소리를 입 밖으로 내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벽에 발을 대고 천천히 천을 풀어 바닥까지 내려가겠다는 계획과 달리, 제 몸무게를 이기지 못한 두 팔은 금세 줄을 놓쳤다. 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제이드는 단번에 바닥까지 떨어졌다.
“아흐......”
줄이 길지 않아 다행이었다. 땅바닥 바로 위에서 대롱대롱 매달린 제이드는 발을 내려 겨우 땅으로 내려왔다. 밧줄을 묶은 가슴과 허리에 충격을 좀 받긴 했지만, 몸을 못 움직일 정도는 아니었다. 제이드는 재빨리 매듭을 풀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제 문지기를 속이는 일만 남았다. 제이드는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눈에 띄지 않게 천천히 걸었다. 성의 입구에 다다르자 그 앞을 지키고 있던 문지기와 눈이 마주쳤다. 제이드는 로비에서 자신에게 말을 걸었던 여자의 이름을 떠올렸다.
“맨골드에서 온 리코티 백작의 딸 셰릴입니다. 제가 무리에서 이탈한 것 같아요."
문지기는 의아한 눈으로 제이드를 바라봤다. 분명히 아까 흑룡의 예비 신부들은 모두 밖으로 나갔었다. 제이드는 부끄러운 듯이 고개를 돌리고 작게 말했다.
“제가 화장실에 너무 오래......”
"아...... 그런데 혼자 나오셨습니까? 안내하는 사람도 없이?"
"나왔더니, 아무도 없던데요. 절 안내했던 사람을 다시 찾아와야 하나요?"
“아닙니다. 마차를 불러 드릴까요?”
"산 밑에 숙소가 있어요. 걸어가도 금세 가요."
문지기는 아무런 의심도 없이 금세 성문을 열어 주었다. 그는 흑룡의 신부가 탈출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잔뜩 긴장했던 제이드는 드디어 성을 나가게 되어서 마음이 놓였다. 그녀는 문지기들에게 손까지 흔들며 유유히 성을 빠져나왔다.
"성공이다.”
제이드는 마을과 이어진 숲길을 걸으며 속으로 환호성을 외쳤다. 만약 제가 사라진 것을 알게 되면 공작에게 바로 연락이 갈 거였다. 그 소식을 들은 어윈은 깜짝 놀랄 테지만, 제가 어디로 사라졌을지 알 방법은 없을 거였다. 당분간은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가족이나 마리온에게도 기별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제이드는 흑룡의 신부가 되지 못한 자신의 모습을 여러 번 상상했었다. 그 옆에 어윈이 있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결국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제이드는 완벽하게 낯선 장소에서 새 인생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짐 속에 있던 패물들도 이미 치마 속에 잘 챙겨 놨다.
“이렇게 쉬울 줄이야.”
제이드는 탈출에 성공하고 의기양양했다. 하지만 그녀는 숲에서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벌써 하늘이 붉어지고 있었다. 이제 낸시가 저를 찾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아....... 아........”
탄식이 절로 새어 나왔다. 제이드는 한 번도 길을 잃어 본 적이 없었다. 길도 잘 익히고, 방향 감각도 좋은 편이라 해가 어디에 떴는지 확인만 할 수 있으면 아무리 숲길이어도 제가 원하는 곳에 가는 건 문제없었다. 그런데 이 숲은 마법에 걸린 것만 같았다.
'헉, 헉'
제이드는 풀썩 주저앉았다. 벌써 이 숲을 몇 바퀴나 돌았는지 몰랐다. 분명히 마차에서 본 길을 따라 내려갔다. 숙소에서 윈슬로우 성으로 오는 길은 구불구불하기는 했지만, 덜지는 않았다. 그런데 제이드는 똑같은 장소를 뱅뱅 돌고 있었다. 혹시 다른 곳과 착각하는 것은 아닌가 싶어 옷을 찢어 나무에 묶었는데, 한참을 돌아왔 는데도 제 옷이 나무에 걸려 있었다. 귀신에 홀린 것만 같았다. 제이드는 결국 꿈에서 본 그 술을 벗어나지 못했다. 차라리 성을 탈출하는 게 더 쉬웠다.
“아가씨."
그때, 소리도 없이 다가온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에 제이드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
“이 숲은 윈슬로우 님의 허락 없이 출입할 수 없습니다.”
제이드를 데리러 온 것은 데클렌이었다. 그는 그녀가 거기에서 뱅뱅 돌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말로 하면 못 믿을 것 같아서, 스스로 숲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걸 경험하게 놔두었다는 그의 말에 제이드는 경악했다. 어쩐지 문지기가 성문을 너무 쉽게 열어 줬다. 문지기도 허락받은 사람이 아니면 이 숲을 나갈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우선 좀 씻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데클렌이 제이드를 방에 데려다주었다. 그녀가 죄 뜯어 놓았던 커튼은 벌써 새로운 커튼으로 바꿔 달았고, 제이드가 벌여 놓은 짐도 다시 싹 정리가 되어 있었다. 이미 낸시는 목욕 준비를 다 마치고, 제이드를 불렀다.
"목욕 준비 끝났습니다.”
제이드는 옆에서 목욕 시중을 들겠다는 낸시를 욕실 밖으로 내보냈다. 방과 비슷하게 흰색 대리석과 활금으로 치장한 욕실은 입이 쩍 벌어질 정도 으리으리했다. 흑룡의 부인이 쓰는 욕실이라면 정말 황금을 쓸지도 몰랐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근 제이드는 욕조에 붙은 활금 장식이 진짜 황금인가 싶어서 살짝 만져 봤지만, 제대로 금을 본 적 없어서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 없었다.
"아.......”
나른하게 신음을 흘린 제이드는 좀 더 깊이 몸을 뉘었다. 피곤했다. 아침부터 계속 신경도 많이 쓴 데다가, 탈출할 때 떨어진 충격도 있고, 잔뜩 긴장하고 숲을 뱅뱅 도느라 다리도 아팠다. 마음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 속상했다.
제 몸에는 아직도 어윈이 남긴 붉은 열꽃이 채 다 사라지지도 않았다. 이런 몸으로 사람도 아닌 흑룡의 신부가 되다니 어이 없었다. 그 신통한 흑룡도 제 신부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는 모양이었다.
제이드는 너무 졸려서 대충 몸을 닦고, 그냥 침대에 누워 버렸다. 침대 속에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여기서 빠져나갈 방법을 알려 줘요!"
숲을 뱅뱅 돈 탓인지, 제이드는 꿈속에서도 그 숲이었다. 미리 숲에 와 있는 금발의 여인을 붙잡고 제이드는 애원했다.
"아직 그를 못 만났군요. 곧 만나게 될 거예요. 걱정 말아요.”
"누구를요?”
여인은 저를 보고 웃었다. 그녀는 불안에 떠는 제이드를 포근히 끌어안았다.
"아.....”
여자의 몸이 제이드의 안으로 들어왔다. 아니, 스며들었다. 그녀의 몸 속에 들어온 금발 여인의 마음이 그대로 제이드에게 전이됐다. 기묘하고도 슬펐다. 그립고 따뜻했다. 순식간에 밀려드는 온갖 감정들이 제이드의 가슴을 벅차게 했다.
"헉."
제이드는 꿈에서 깼지만, 혼란스러웠다. 여인의 몸이 흡수됐을 때의 기억은 듬성듬성했지만, 선명했다.
“일어났어요?”
침대 캐노피 너머로 들리는 남자의 목소리에 제이드는 깜짝 놀라 눈알을 가리고 있는 하얀 레이스 천을 거뒀다. 익숙한 목소리, 그리운 얼굴. 어윈이었다.
“어윈?”
“나 안 보고 싶었어요?”
소파에서 일어난 어윈이 환하게 웃으며 제이드에게 다가왔다. 제이드는 아직도 제가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 숲과 성에서 만난 유일한 남자는 어윈이었으니까. 눈을 깜빡이면 어윈이 사라질 것 같아서 제이드는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어윈을 바라봤다. 지금 어윈은 저에게 보고 싶었냐는 한가한 소리를 할 때가 아니었다.
“여기 어떻게 들어왔어요? 흑룡이 알면 어쩌려고..”
“그게 중요해요? 나는 제이드가 날 보고 싶어 했는지가 더 궁금한데.”
윈슬로우 숲은 흑룡의 허락 없이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고 했는데, 어윈은 도대체 어떻게 이 성에 들어와 이 침실에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만약 꿈이라도 어윈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그렇게 상처받고도 그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는 제가 바보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보고 싶었어요.”
“그런데 왜 도망갔어요? 같이 저녁 먹고 싶었는데.”
"저녁이요? 혹시 흑룡이랑 아는 사이예요?”
아무리 귀족의 사정을 모른다고 해도 어윈이 보통 집사들과 조금 다르다는 것은 제이드도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어쩌면 어윈은 흑룡에게 귀속된 사람일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이 성에서 어윈과 함께 있을지도 몰랐다.
제멋대로 폭주하는 생각에 들뜬 제이드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다가 다시 주저앉아 두 손으로 머리를 쥐어 잡았다. 머릿속에 이상한 기억들이 뒤죽박죽 섞이고 있었다. 늘 꿈에 나오는 금발 여인, 멜리사의 기억이었다.
"으으......읏.......”
"제이드!"
어윈이 금세 침대에 뛰어 올라와 괴로워하는 제이드를 품에 안았다. 제이드의 이마에 순식간에 맺히는 식은땀을 어윈은 소매로 눌러 찍었다.
"제이드! 괜찮아요? 제이드!"
어윈의 애타는 부름에도 제이드는 대답할 수 없었다. 머릿속에 섬광이 튀는 것 같았다. 뇌가 폭발할 것 같은 강렬한 두통에 제이드는 그 자리에서 폭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