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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뒤바뀐 운명 (2/4)

깡총

2. 뒤바뀐 운명

제이드는 아침부터 어원과 앨런에게 시달렸다. 누군가는 시중을 받는 것이 편하겠지만, 지금껏 저 혼자 모든 것을 해결했던 제이드는 마음이 너무 불편했다. 그러나 어윈은 고용인의 도움을 받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것조차 공작 영애의 소양이라고 했다.

앨런의 도움을 받아 씻고, 머리를 만지고, 화장에 쏟는 시간이 만만치 않았다. 마지막으로 어원이 추천한 옷을 입은 제이드는 거울 앞에 서고 두 눈을 의심했다.

"어머."

늘 가렸던 검은 머리는 진주로 만든 장신구로 풍성하게 틀어 올렸고, 하얀 레이스를 겹겹이 덧댄 자주색 드레스는 제이드의 마른 몸을 볼륨 있어 보이게 만들어 주었다. 곁에 타서 칙칙했던 제이드의 얼굴은 화장으로 밝게 빛나고, 반짝이는 초록색 눈동자를 돋보이게 한 화장 덕분에 이목구비는 더 뚜렷하게 보였다.

"기대 이상이에요.”

제이드를 바라보면서 앨런이 옆에서 손뼉을 쳤다. 그녀 뒤를 지키고 있던 어윈도 흡족한지 고개를 끄덕였다.

"노력한 보람이 있군요. 마음에 드십니까?"

"누군지 모르겠다는 것 빼면, 마음에 들어요.”

거울 속의 자신이 아직도 믿기지 않는 제이드의 대답에 앨런과 어원이 작게 웃었다. 제이드는 거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작고 깡마른 몸에 거친 손은 그대로지만, 손에 레이스 장갑까지 끼니 정말 제이드 모건이 된 것 같았다.

“가시죠.”

어원은 응접실로 제이드를 안내했다. 모건 공작의 가족들과 인사를 나누는 자리였다. 어원은 그들과 친해질 필요는 없지만, 얼굴은 익혀 두는 게 좋다고 했다.

“네가 제이드구나.”

“처음 뵙겠습니다.”

제이드는 아침에 어원이 가르쳐 준 대로 예를 갖춰 모건 공작 가족에게 인사를 올렸다. 중년에 접어든 듯 보이는 모건 공작은 제이드에게 반갑게 인사했다. 그러나 공작 부인과 제이드 또래로 보이는 장남 데릭과 딸 레아는 불쾌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빈민가의 딸을 양녀로 들인다는 것도, 지금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도 뼛속까지 귀족인 그들에게는 못마땅하기 짝이 없었다.

“우리 가문에서 흑룡의 신부가 나올 수 있도록 잘 부탁하다.”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모건 공작은 제이드에게 말을 하면서도 계속 어원을 힐끔힐끔 바라봤다. 제이드에게는 모건 공작이 저를 탐탁지 않게 여겨, 어원에게 불만을 토로하고 싶어 하는 것으로 보였다.

어원은 제이드에게 공작가 사람들에게 잘 보일 필요는 없다고 했지만, 어원이 욕먹게 할 수는 없었다. 제이드는 어원이 가르쳐 준 대로 고개를 똑바로 들고, 입가에 미소를 유지했다. 감히 쳐다볼 수도 없었던 공작가 사람들 앞에서 떨리는 마음을 내색하지 않고, 태연하게 서 있는 것만으로도 힘들었다.

“휴우”

제이드는 인사를 끝내고 밖으로 나오면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예상대로 모건 공작은 어윈을 따로 불렀다. 아마도 제 평가를 할 터였다. 어원을 기다려야 하는 제이드는 복도 벽에 기대서 창밖의 하늘을 올려다봤다. 제 마음과 달리 하늘은 맑고 깨끗했다.

“아, 짜증나.”

문 안에서 앙칼진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연이어 달칵하고 응접실의 문이 열리자, 자연스럽게 제이드의 고개가 돌아갔다. 공작 부인과 데릭, 레아가 문밖으로 나왔다. 제이드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공작 부인과 데릭은 눈앞에 제이드가 보이지도 않는 듯이 무시하고 제 앞을 지나갔고, 레아는 제이드를 위아래로 훑으며 앞에 멈춰 섰다. 짙은 금발을 치렁치렁 드리운 레아는 벌꿀같이 달콤한 표정과 어울리지 않는 싸늘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모건가의 딸은 나 하나뿐이야. 착각하지 마.”

“알고 있습니다.”

“아빠가 단단히 착각한 거야. 흑룡이 너 같은 천한 평민을 신부 삼을 리 없잖아. 빈민가로 다시 기어들어갈 때까지 조용히 살아. 재수 없게 굴지 말고.”

“네.”

제이드는 레아를 향해 방긋 웃어 주지 못했지만, 레아의 폭언에 타격이 전혀 없었다. 제이드도 레아의 생각에 동의했다. 다만 제이드가 공작가에 달라붙어 빌어덕고 싶어 할 거라는 레아의 생각과 달리, 제이드는 이곳의 경험을 통해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고 싶었다. 자존감이 바닥인 제이드는 공작가에서 자기를 받아 줄 거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레아는 저의 막말에도 여전히 덤덤한 제이드 때문에 더 화가 났다.

“두 분이 무슨 대화를 하고 계셨습니까?”

어느새 밖으로 나온 어원이 제이드의 곁으로 다가왔다. 어윈의 등장에 제이드를 쏘아보던 레아의 눈이 둥글게 휘어졌다.

“어원."

레아는 밝은 미소와 함께 혀 짧은 소리로 어원을 불렀다. 그러고는 어윈에게 다가가 척하니 팔짱을 끼고, 새끼 고양이 같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누가 봐도 집사를 보는 눈은 아니었다. 제이드는 설마 공작가의 영애가 집사에게 마음을 품었을까 생각했지만, 레아의 옆에 있는 어윈의 자태를 보고 쉽게 납득했다. 귀족 중에서도 저런 미모는 흔치 않을 거였다. 여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 눈길이 갈 남자였다.

“우리 나들이 가요. 돌아오는 길에 쇼핑도 하고요.”

“죄송합니다. 제가 오늘은 할 일이 많습니다.”

어원은 무표정한 얼굴로 제 팔을 잡은 레아의 손을 정중히 거둬 냈다. 레아는 자존심이 상했다. 한낱 집사가 주인의 지시를 거절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새로 들어온 집사 어원은 제 이야기를 하나도 들어주지 않았다. 몇 번이고 아버지에게 가서 일러 봤지만, 그냥 놔두라는 이야기만 반복해서 들을 뿐이 었다. 세상 남자는 모두 제 발밑에 끓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레아는 그래서 어윈에게 몸이 달았다. 아버지의 힘으로도 어쩔 수 없는 어윈을 포기할 수 없었던 레아는 그를 살살 꾀는 것으로 노선을 바꿨다.

“다른 사람 시키고, 같이 가요. 네?”

“안 될니다. 제이드 아가씨에게 집 구경을 시켜 주기로 했습니다.”

"하, 겨우 그런 일로?”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어윈을 노려보는 레아의 입에서 어이없는 한숨이 연달아 나왔다. 어윈에게 어떻게든 잘 보이려고 참고 있지만,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다. 어윈은 레아의 반응에 신경 쓰지 않고, 제이드에게 동의를 구했다.

“어제 약속을 해서요. 그렇죠, 아가씨?"

제이드는 자신에게 날아온 화살에 당황했다. 어원이 집 구경을 시켜 준다고 한 건 맞지만, 그렇다고 이런 불화를 감내할 만큼 중요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자기 의견을 제대로 내세워 본 적이 없는 제이드는 두 사람 중에서 화가 더 많이 난 레아를 달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집 구경은 내일 해도 될 것.......”

“내일은 내일 할 일이 따로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제이드 아가씨가 도망가는 바람에 일정이 많이 밀렸습니다.”

제이드는 제 잘못으로 미뤄진 일정을 탓하는 어윈에게 더는 할 말이 없었다. 레아는 대놓고 자신을 무시하는 어윈 때문에 화가 나서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넌 모건가의 집사잖아. 누가 너의 진짜 주인인지 몰라?”

“제이드 아가씨도 모건가 사람입니다. 저는 아가씨를 담당하고 있고요.”

“집사 따위가. 두고 보자.”

레아와 어윈 사이에 흐르는 살벌한 분위기에 눈치만 보고 있던 제이드는 심장이 손톱만큼 쪼그라드는 것 같았다. 약이 바짝 오른 레아는 결국 씩씩대면서 어윈을 밀치고 가 버렸다. 제이드는 혹시라도 레아가 어원에게 해코지할까 걱정했다. 그러나 어윈은 태연했다.

“모건가 사람들 얘기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요. 그들이 진짜 가족이 되려고 하는 것도 아니니까.”

제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석 달도 지속되지 않을 인연이니, 굳이 얽힐 필요는 없었다. 어디 가서 모건 공작이 아버지라고 떠들 일도 없을 것이고.

“그럼 저는 여기서 뭘 해야 하나요?"

“단순해요. 아가씨가 하고 싶은 걸 하면 됩니다.”

제이드는 공작가에 올 때, 흑룡의 신부를 만들기 위해서 준비한 대단한 수업이라도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어원은 마리온과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도대체 이 공작가에서 하고 싶은 걸 하라는 말이 뭔가 싶어, 제이드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어원을 올려다봤다. 제이드를 향해 작게 미소 지은 어윈은 제 커다란 손을 그녀 앞에 내밀었다.

“하기 싫은 건 안 해도 된다는 말이죠. 이 손을 잡는 것도 포함해서요.”

이 남자가 왜 이러는지 제이드는 알 수 없었다. 선뜻 손이 나가지 않는 제이드를 향해, 어원은 어서 손을 잡으라는 듯이 작게 손짓했다. 저를 바라보는 미소가 너무 싱그러워, 그에게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머뭇거리던 제이드가 어윈의 커다란 손에 레이스 장갑을 낀 작은 손을 조심스럽게 올렸다. 어떻게 어윈에게 싫다는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요즘 살이 올라 더 예뻐졌어요.”

어원이 제이드에게 청이 큰 보닛을 씌워 주면서 흐뭇하게 말했다. 제이드는 어윈의 칭찬이 부끄러워 그의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했다. 어윈은 제이드를 거울 앞에 데려가 세웠다.

“봐요, 이젠 정말 다른 사람 같죠?"

제이드는 꾸미는 것에 따라 사람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알려 주는 교본에 나와도 될 것 같았다. 이제 뼈가 앙상하게 드러나지 않을 만큼 뽀얗게 살이 오른 제이드는 처음 저택에 왔을 때랑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어윈이 짜준 일정에 따라 매일 마사지를 받고 따뜻한 물에 푹 담근 몸은 한결 부드러워졌고, 잔뜩 패었던 두 뺨은 동그랗게 살이 올라 발그레하게 혈색이 돌았다.

"자세가 곧아져서 키도 더 커 보이고요.”

늘 어깨를 움츠리고 있던 제이드는 어윈의 조언에 따라 허리를 세우고 가슴을 펴고 다니기 시작했다. 다시 구부정한 자세로 돌아갈 때마다 어윈의 곧은 자세를 따라 했더니 효과가 좋았다. 당당한 자세만으로도 제가 괜찮은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다 어원 덕분이에요.”

“무슨 말씀을요. 아가씨가 잘 따라온 덕분이죠. 이 정도만 돼도 검은 머리 아가씨 중에 제일 예쁠 겁니다.”

제이드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벌써 저택에 온 지 두 달이 훌쩍 지났지만, 어원의 말을 따른 것 외엔 아무것도 한 게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앨런이 단장을 해 주었고, 마중 나온 어윈을 따라 하루를 시작했다. 어윈은 제이드를 정성껏 사육했다. 충분히 덕이고, 승마나 산책으로 운동을 시키고, 달게 재웠다. 달게 재웠다.

“갈까요?”

산책 준비를 다 마친 제이드는 자연스럽게 어윈이 내민 팔에 팔짱을 꼈다. 그와 함께 천천히 걸으며 대화하는 시간은 제이드의 큰 즐거움이었다. 오늘 산책은 저택 뒤편에 있는 유리온실에서 끝이 났다. 한눈에 다 훑을 수 없을 만큼 대단한 규모의 온실은 희귀한 식물과 아름다운 꽃을 1년 내내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제이드와 어원은 온실에 들어가 꽃을 구경하고,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피곤하지 않아요?”

“조금요. 잠깐 쉬면 될 것 같아요.”

오늘은 저택 근처의 호수에 가서 조각배를 타고, 커다란 호수를 따라 한 바퀴를 걸었더니 제법 피곤했다. 막상 걸을 땐 어원과 얘기하느라 피곤한지 몰랐는데, 저택에 다 도착하고 보니 힘이 빠졌다. 어느새 다가온 하녀가 그들의 앞에 시원한 레모네이드를 놓고 갔다.

“와, 이건 또 언제 시켰어요?”

“아까 후문 문지기에게 부탁했습니다. 쉬어 가야 할 것 같아서.”

새콤달콤한 레모네이드를 마시고 난 후에 제이드는 슬쩍 어윈의 어깨에 기댔다. 혹시 어원이 피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어윈은 오히려 편히 기대라고 어깨를 더 내주었다. 모든 것이 최상급으로 준비된 이 저택에서 가장 좋은 것은 역시 어윈이었다.

어깨에 고개만 닿아도 이렇게 좋은데, 어윈의 애인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하지만 자신은 곧 이 저택에서 떠나야만 했다. 흑룡의 신부가 되어도, 신부가 되지 않아도 다시 이 저택에는 돌아을 수 없었다. 그래도 어윈을 만나고, 이렇게 함께 있을 수 있어서 좋았다. 좋은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던 제 인생에서 어원은 단 하나의 행복이었다.

“여기 너무 좋아요.”

제이드는 어원과 함께 있어서 좋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온실 내부는 따뜻하고, 볕이 좋아 사람을 노곤하게 만들었다. 어윈의 어깨에 기대 깜백 잠이 들었던 제이드는 고개가 뚝 떨어져 눈을 떴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옆을 보니 어원도 잠들어 있었다. 파란 하늘을 보고 온실에 들어왔는데, 벌써 밖의 하늘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생각보다 꽤 오랜 시간 동안 잠이 든 모양이었다.

“어원.”

어윈도 잠들어 있었다. 불게 타오르는 저녁 노을이 비추는 어윈의 모습은 신비하리만큼 아름다웠다. 단정하게 정리한 검은 머리카락부터, 창백하리만큼 투명한 흰 피부, 짙은 눈썹 밑의 감은 눈에는 숱 많은 속는썹이 보기 좋게 호를 그리고 있었다.

"자요?”

작게 속삭인 제이드는 잠든 어원의 앞에 손을 흔들어 봤다. 깊게 잠이 들었는지, 어원은 반응이 없었다. 제이드는 마음 놓고 어원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입술에 시선이 멈췄다. 살짝 벌어진 붉은 입술은 입술 선이 선명하고 도톰해서 톡 건드리면 터질 것만 같았다. 제이드는 홀린 듯 어윈의 입술에 손을 대려고 하다가 정신을 차렸다. 그 순간 어원의 손이 제이드의 손을 잡았다.

깜짝 놀라 손을 빼려는 제이드를 어윈은 더욱 꽉 잡고 흐드러지게 웃었다.

“다 봤어요?”

“네?”

잠든 줄 알았던 어윈은 제가 무슨 짓을 했는지 다 아는 것 같았다. 제이드는 제가 얼마나 집요하게 어원을 훑었는지 들킨 게 부끄러워서 온 얼굴이 새빨같게 달아올랐다.

“안 봤어요.”

제이드는 고개를 돌리고 시치미를 뗐다. 어원의 나직한 웃음소리가 제이드의 귀에 들렸다.

“그래요? 난 아가씨가 자는 걸 한참 봤는데.......”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어원의 말에 제이드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제이드를 흑룡의 신부로 만들어 주겠다고 이곳에 데려온 어윈은 점점 제이드를 헷갈리게 했다. 바람둥이인지, 아니면 진짜 저를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언제든 보고 싶으면 보고, 만지고 싶으면 만져도 돼요.”

“아, 왜 그래요.”

어원이 계속 놀리자 난처해진 제이드가 그의 손에 잡힌 제 손을 빼려고 했다. 어원은 제이드의 손을 놔주지 않고, 오히려 제이드의 손가락을 제 입술에 가져가 가볍게 입 맞췄다. 손끝에 닿은 어윈의 입술에 화들짝 놀란 제이드는 어윈을 밀치고 벌떡 일어나 온실 밖으로 달렸다.

주제도 모르고 어원을 좋아하는 게 너무 부끄러웠다. 눈치 빠른 어원이 제 마음을 모를 리 없었다. 제이드는 앞으로 어원을 어떻게 봐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하여튼 천것이 품위 없게.......”

온실에서 뛰쳐나와 정신없이 달리는 제이드를 본 레아는 혀를 찼다. 시답잖은 천것이 자꾸 눈에 거슬렸다.

“저건 또 뭐야?”

레아는 제 입술을 엄지로 쓸면서 온실에서 나오는 어원을 보고 기가 막혔다. 두 사람이 보통 사이가 아니라고 동네방네 자랑이라도 하는 듯한 꼴이 아주 가관이었다. 제이드가 떠나면 어원을 제 담당으로 해 달라고 말해 놨는데, 어원이 제이드에게 사적인 마음이 있으면 곤란했다.

"어원!”

조금 멀리 떨어져 있던 레아가 어원을 향해 소리쳤다. 뛰어가는 제이드의 뒷모습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어원이 목소리가 들리는 쪽을 향해 몸을 돌렸다. 저 멀리서 팔짱을 끼고 노려보는 레아가 보였다. 승마복을 입은 것을 보아, 말을 타고 나갔다가 돌아오는 모양이었다.

“재미 좋네.”

어원을 잔뜩 비꼬려고 작정한 듯 삐딱한 레아의 말에, 어원은 고개를 끄덕이고 답했다. 언제 봐도 질리지 않는 잘생긴 얼굴로.

"네. 좋습니다.”

***^***

제이드는 커다란 성의 복도에 혼자 서 있었다. 낯선 곳이지만, 미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제이드는 긴 복도를 천천히 걷다가, 커다란 문을 손으로 밀었다. 문이 열리자 제이드의 입에서는 가벼운 탄성이 절로 흘러나왔다.

보라색과 은색으로 꾸며 놓은 고급스러운 침실은 공작저의 제 방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보라색은 황족만 쓸 수 있는 색이어서, 제이드는 보랏빛 꽃을 본 적은 있어도 실제로 보라색은 처음 보는 거였다. 제이드는 저도 모르게 창가로 다가가 은사로 섬세하게 수놓은 커튼을 손으로 만져 보았 다. 손에 감기는 부드러운 촉감은 이 세상 것이 아닌 것 같았다.

“여기 있었군요.”

뒤에서 들리는 어윈의 목소리에 제이드가 뒤를 돌았다. 어원이 성큼 다가와 제이드를 한 품에 꼭 안았다. 두 번 다시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저를 간절히 끌어안는 어원이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느껴졌다. 제이드의 허리를 꼭 감싸 안은 어원은 그녀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고 속삭였다.

"한참 찾았어요.”

어원은 제이드의 볼에 살짝 입 맞추고, 제이드의 얼굴을 엄지로 쓸면서 확인했다. 제이드는 저를 바라보는 어원에 눈빛에 감탄했다. 사랑에 빠진 어원의 얼굴은 이렇구나. 이렇게 다정하고 애틋하게. 제이드는 익숙하면서 낯선 어원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어원."

“왜 그렇게 봐요. 설레게.”

어윈은 제이드를 아이처럼 소중하게 안아서 들고, 푹신한 침대에 내려놓았다. 어원은 제이드 옆에 모로 누워 그녀를 내려다봤다. 어윈의 눈빛이 얼마나 저를 원하고 있는지 느껴져서 시선만 부딪쳐도 마음이 설렜다. 제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머리칼을 쓸어 넘기는 어윈의 부드러운 손길이 그녀의 마음을 살살 녹였다.

"츄, 츄웃. 츄."

제이드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온 어윈의 더운 입술이 제이드의 이마와 눈썹, 입술에 짧게 닿았다 떨어졌다. 어윈은 제이드와 시선을 맞추고 웃더니 코끝끼리 가볍게 비볐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제이드의 턱을 잡고 조심스럽게 입술을 맞췄다. 봄바람처럼 살랑이는 가벼은 입맞춤이었지만, 키스가 처음인 제이드의 두 볼이 금세 붉게 상기됐다. 부끄러웠지만, 그만두고 싶지도 않았다.

"하아.......”

저 혼자 벅차오르는 숨을 작게 토하는 제이드의 입술이 자연스럽게 벌어지자, 어윈은 기다렸다는 듯이 제이드의 입술 사이로 혀를 밀어 넣었다. 말캉하고 부드러운 어윈의 혀가 제이드의 입 안을 샅샅이 훑고, 그녀의 혀를 농락하듯 휘감았다. 타액으로 젖은 더운 입술을 빨아 당기고 부드럽게 핥을 때면 숨이 가빠왔다.

어윈의 키스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끈적하고 집요했다. 키스가 원래 이런 거였나? 뜨겁고, 말캉하고, 부드러운 것이 입 안을 온통 휘저었다. 키스에 제이드가 숨이 막혀 입술을 떼면, 숨이라도 핥아 먹을 기세로 달려드는 어윈의 키스를 감당하지 못한 제이드가 어원을 밀어냈다. 그는 아쉬운 듯 달콤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요?”

“하아........ 잠깐만요. 숨이 막혀서.......”

“키스할 때 코로 숨 쉬는 건 가르쳐 줬는데......”

어윈이 짓궃게 웃었다. 제이드는 달뜬 숨을 내쉬다가 저를 보고 있는 어윈의 붉은 입술에 시선을 고정했다. 키스 좀 했다고 그새 어윈의 입술밖에 보이지 않았다.

“무슨 생각 하느라고 그렇게 멍한 표정이에요?"

어원이 작게 웃고는 부어오른 제이드의 입술을 엄지로 가만히 쓸어 주며 물었다. 이런 상황이 처음인 제이드는 당연히 멍할 수밖에 없었다. 농염한 어원의 모습에 당황한 제이드가 고개를 작게 흔들며 큰 눈을 연달아 깜빡였다. 어원은 제이드의 뺨에 인장처럼 입술을 꾹 눌렀다.

“오늘 왜 이렇게 귀엽게 굴어요? 어떻게 감당하려고.."

제이드는 뭘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아직 모르지만, 어윈의 말은 협박보다는 유혹에 가깝게 들렸다. 어원이 주는 것이라면 제이드는 무엇이든 달게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두 눈을 감고 어윈의 목에 두 팔을 감았다. 뜨겁게 맞닿은 어윈의 단단한 육체는 제이드에게 긴장을 불러오기 충분했다.

어원은 몸을 살짝 일으켜 입고 있던 상의를 벗어 던졌다. 옷을 입었을 때는 늘씬하게 보였던 어윈의 몸은 오히려 벗은 몸일 때 더 크게 보였다. 너른 어깨 아래 단단하게 자리 잡은 질긴 근육들은 뭉치고 쪼개져 남성의 육체가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 보여 주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어 제이드의 눈이 바지와 속옷을 한 번에 벗어 버린 그의 중심에 닿았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커다랗고 굵직한 것이 음모 사이에서 꺼덕대고 있었다. 어윈의 금욕적이고 기품 있는 얼굴과 달리 그의 성기는 잔뜩 성이 나 있었다.

“감상 다 했으면, 팔 들어요.”

귓가를 나른히 핥으며 속삭이는 어윈의 목소리에 제이드는 두 팔을 올렸다. 무엇을 입고 있었는지 자각도 못한 채 드레스와 속옷이 단숨에 어원의 손에 의해 바닥으로 떨어졌다. 다리 사이로 바짝 들어온 어윈의 야릇한 시선에 낯이 달아오른 제이드가 제 몸을 팔로 가리려고 하자, 어원은 그녀의 두 팔을 한 손으로 잡고 위로 올렸다.

“가리지 말아요. 다 보고 싶어요.”

어원은 그녀의 턱을 잘근잘근 씹으며, 목덜미를 부드럽게 핥았다. 그의 커다란 손은 봉긋 솟은 젖가슴을 탐욕스럽게 주물렀다. 그의 손길에 금세 뾰족해진 젖꼭지는 어원의 입술 안에서 농락당했다. 어원이 혀로 핥고, 이로 긁고, 입 속으로 빨아들일 때마다 제이드의 숨이 가팔라지고, 몸이 들썩거렸다. 짜릿한 무언가가 전신을 통과하는 기분이었다. 옷을 벗기 전까지의 애틋한 애무와는 뭔가 달랐다.

손가락으로 한참을 비비고, 손바닥으로 주물럭거리던 가슴 위로 입술을 옮긴 어윈의 애무가 집요하게 이어져 제이드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새하얀 푸딩같이 부드러운 그녀의 젖가슴 여기저기에 빨간 꽃이 피어올랐다. 온몸을 휘감는 야릇한 쾌감에 다리 사이는 점점 뜨거워지고, 발가락은 자꾸 곱았다.

"으읏......읏.”

아랫입술을 이로 깨물면서 제이드는 신음을 막아 보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이제 어원의 커다란 손바닥은 제이드의 매끄러운 살결을 뱀처럼 휘어 감으며 움직였다. 열기로 단단해진 납작한 배를 안마하듯 지그시 만지고, 뽀얗게 살집이 오른 엉덩이를 힘 있게 그러잡은 그의 손은 이제 꽉 다물린 허벅지 안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다리 벌려 봐요.”

어윈이 귀를 길게 핥으며 습하게 속삭였다. 어윈의 목소리에 제이드는 쉽게 허벅지에 힘을 빼기 힘들었다. 그러나 단단한 그의 팔은 너무도 손쉽게 그녀의 한쪽 다리를 열었다. 다시 다리를 오므릴 수도 있었지만, 제이드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어원은 제이드의 하얀 목덜미를 질근질근 씹으면서 손바닥을 그녀의 중심에 대고 위아래로 천천히 움직였다. 그 느릿한 움직임에 잔뜩 힘이 들어간 제이드의 몸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하응......흣."

이내 어원의 긴 손가락은 그녀의 틈새를 가르고, 촉촉이 젖은 그녀의 예민한 살점을 지그시 누르며 문질렀다. 제이드도 제대로 만져 본 적 없는 곳이었다. 어윈의 손가락이 주는 생각지 못한 자극에 제이드의 허리가 뒤틀렸다. 더 강한 무언가를 원하는 마음과 더 이상해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교차했다. 어윈의 손길에 마구잡이로 떨리는 몸이 제 몸이 아닌 것 같았다.

끊어 오르는 숨을 뱉느라 제이드의 입술이 잔뜩 벌어졌다. 어원은 혀로 그녀의 입 안을 휘저으며 정신을 흩어 놓았다. 어윈은 손가락으로 끈적한 애액을 흘리는 샘의 입구에서 물을 폈다. 그러곤 만질 때마다 움찔대는 쾌락점과 피가 쏠려 부푼 날개까지 완전하게 적셨다. 어윈의 황홀한 손놀림에 제이드는 뭔지 모를 기대감으로 허리가 휘었다. 어윈의 손길이 닿는 부분마다 타는 듯이 뜨거웠다.

“많이 젖었어요. 그래도 아직은 힘들겠죠?”

제이드는 어윈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다. 하지만 어원이 답변을 기다리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제이드를 감싸고 있던 어윈이 몸이 순식간에 제이드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두 눈을 질끈 감고 숨을 헐떡이던 제이드는 갑작스러은 상황 변화에 눈을 번쩍 떴다.

"어....”

제이드의 다리 사이로 고개를 숙인 어윈은 양손으로 그녀의 허벅지를 벌리고, 허벅지 안쪽을 길게 핥았다. 제이드가 무의식적으로 허벅지를 조여 봤지만, 그녀의 음부 중심에 어윈의 머리를 가져다 놓은 꼴밖에 되지 않았다.

"조르니까 좋네요.”

제이드의 반응을 오해한 어원이 이미 촉촉하게 젖어 있는 그녀의 속살 한가운데를 길게 핥았다. 기다랗고 곧은 손가락과 두툼하고 미끌미끌한 혀의 느낌이 너무 달랐다. 이미 손을 탄 곳은 녹아들 것처럼 뜨거워져 있었다.

어윈은 타액과 애액으로 반질거리는 붉은 속살에 짧게 입을 맞추고 진득하게 여린 살을 빨아 냈다. 질척하고 음란한 소리가 제이드의 귓가에 울렸다. 제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자극적이었다. 울음에 가까은 신음을 흘리는 제이드의 가슴과 허리가 들썩였다.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이렇게 강렬하고, 어쩔 줄 모르겠는 잔인한 감각이 또 있을까 싶었다.

"그만...... 제발..."

그만하라는 제이드의 울먹이는 목소리는 오히려 애원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녀의 말과 달리 어윈의 입술이 맞닿은 좁은 틈새에서는 달콤한 액이 흘러넘쳤다.

“여기 좋아하잖아요.”

도리어 어원의 음심을 자극하는 그녀의 애원하는 소리에 어윈은 혀로 그녀의 쾌락점을 빠르게 괴롭혔다. 척추를 타고 올라온 열락이 뇌를 절절 끓게 만들어 하얗게 불태우는 것 같았다. 제이드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뒤로 고개를 꺾었다.

"아흣..... 아아....... 앗.......”

참을 수 없는 교성이 잇새로 질질 흘렀다. 어윈은 진주알 같은 단단하게 올라온 둥근 살점을 진득하게 빨아 올리며, 다음을 기다리는 빠끔거리는 좁은 통로에 손가락 하나를 밀어 넣었다. 이미 제이드의 내벽은 미끈하게 젖어서 그의 손가락 하나를 꿀꺽 삼키고 조였다.

"안 돼........ 아앙......"

하지 말라는 것인지, 하라는 것인지 모를 그녀의 애끓는 신음에 어원은 손가락 하나를 더 조심스럽게 밀어 넣었다. 처음이라서 힘들진 않을까 했는데, 이미 녹진하게 녹아 버린 그녀의 내벽은 기다렸다는 듯이 손가락을 빨아들이고 놓지 않았다. 세 개도 가능할 것 같았다. 어원은 제이드가 잘 느껴서 더 예쁘고 좋았다.

“다행이에요. 이제 움직여 볼까요?”

제이드는 대답 대신 어윈의 어깨에 제 고개를 묻고 끄덕였다. 어윈의 굵고 긴 손가락이 뭉쳐서 거칠게 앞뒤로 움직일 때마다 제이드의 머릿속이 하얗게 물들어 갔다. 제 안을 들쑤시는 극렬한 감각에 그녀는 수치도 잊고 허리를 흔들었다. 어떻게 이렇게 예민한 쾌감이 제 안에 숨어 있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아흣...... 아앗......."

쉬지 않고 이어지는 어윈의 집요한 애무에 제이드의 허벅지가 덜덜 떨렸다. 상상할 수 없이 크나큰 열락에 빠져 끙끙거리는 제이드는 이제 한계인 것 같았다. 제이드는 저도 모르게 어윈에게만 더 매달리고 있었다.

“아아...... 어원.......”

어윈은 제이드의 손길 한 번 받지 못했으면서, 핏줄까지 도드라질 정도로 흥분한 제 성기의 뭉툭한 끝을 그녀의 입구에 뭉근하게 비볐다. 뜨거운 액체가 넘쳐흐르는 그곳은 이제 어윈의 것을 완벽하게 원한다는 듯이 뻐끔거리며 그를 반겼다.

“하아...... 멜리사...... 이제 들어갈게.”

그 순간, 끝없이 밀려오는 쾌락에 헐떡이던 제이드는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멜리사라니. 이건 무슨 일이지. 제이드는 고개를 돌려 침대 옆에 있는 거울에 자신을 비췄다. 긴 금발의 여자가 낯설게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악."

잠들어 있던 제이드는 비명을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너무 선명한 꿈이라 아직도 아랫도리가 욱신거리는 것 같았다. 어윈을 두고 이런 꿈을 꾸다니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 앞으로 어윈을 어떻게 볼지 눈앞이 캄캄했다. 꿈속의 그는 너무 섹시했다.

***^***

아침에 찾아온 어원을 볼 낯이 없었던 제이드는 그에게 혼자 쉬고 싶다는 말을 전하고, 자신이 공작저에 와서 무엇을 했는지 정리를 했다. 제 마음을 뒤흔드는 어원 때문에 마음이 복잡하기도 했고, 도대체 흑룡의 신부가 되려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 파악도 해 볼 참이었다.

"시작해 볼까.”

제이드는 깃털 펜에 잉크를 찍어 자신이 이곳에 와서 한 일 중에 의미가 있는 일들을 정리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공작가에 들어온 제이드도 점점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는 중이었다. 특히 어윈에게 물어서 추천받은 라프녹스의 신화와 흑룡 윈슬로우에 관한 책은 빠짐없이 읽었다.

제이드도 이리저리 건너 들은 말로 이 나라의 동서남북을 지키는 사방신이 있다는 것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무척 추상적인 일이었다. 100년에 한 번 신부를 뽑는 흑룡의 이야기는 꽤 많이 알려진 것 같아도 구멍 난 부분들이 많았다.

흑룡의 신부가 인신 공양의 제물이라는 이야기는 낭설이 맞았다. 흑룡의 신부 가문에 내리는 축복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생각보다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흑룡의 신부가 원하면 언제든지 가족을 만날 수 있었다고 했다.

“흑룡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별로 없네.”

특이한 부분은 윈슬로우 성에 다녀온 여성들의 이야기였다. 그녀들은 모두 윈슬로우 성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기억하고 있지만, 간택 방법은 전혀 몰랐다. 흑룡이 숨어서 지켜보고 신부를 선정한다는데, 그 기준도 알 수 없었다. 흑룡의 신부와 관련된 기록도 있지만, 그녀들은 흑룡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제대로 흑룡을 보고 기록에 남긴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아 모르겠다.”

책을 읽어도 흑룡에 대한 궁금증은 시원하게 풀리지 않았다. 제이드는 흑룡의 이야기를 뒤로하고 다시 제가 한 일을 적기 시작했다.

“음...... 여기 와서 책을 읽었고..... 그리고.....”

제이드는 귀족이라고 하면 화려한 옷과 풍성한 머리 장식을 가장 먼저 떠올렸다. 공작가에 오면 당연히 드레스를 고르는 법이나 머리를 만지는 법 같은 것을 배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고용인들이 할 일이지 제이드가 할 일이 아니라는 말에 충격받았다.

준비해 둔 옷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입고 싶은 옷이 있을 때는 언제든지 이야기를 하면 된다고 해서 제이드는 조금 아쉬웠다. 한 번쯤 번화가의 의상실에서 옷을 맞춰 입고 싶었는데, 앨런이 치수만 재고 끝이었다.

“쇼핑은 내 취향이 아닌 것 같고......."

너무 아쉬워하는 제이드를 위해 어원이 번화가에 그녀를 데리고 나갔지만, 공작저에서 본 것보다 좋은 것도, 신기한 것도 별로 없어서 조금 실망했다. 수많은 물건 중에서 무엇을 골라야 할지 모르는 제이드에게 쇼핑은 어려운 숙제 같아서 그리 즐거운 취미가 아니었다. 하지만 어윈과 함께 돌아다니며 사람 많은 식당 에서 밥을 먹고, 카페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이런저런 대화를 한 것은 좋은 추억이었다.

결국, 이 저택에 와서 배웠다고 할 만한 것은 식사 예절을 포함한 귀족의 예법과 승마, 책에서 얻은 지식밖에 없었다.

“월 그렇게 열심히 쓰세요?"

앨런이 제이드가 앉아 있는 책상에 준비해 놓은 다과를 놓으며 물었다. 제이드는 제가 쓰고 있는 걸 앨런에게 보이는 게 부끄러워서 슬쩍 뒤집어 놓았다. 그리고 앨런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 고소한 아몬드 향이 나는 따끈한 쿠키를 하나 들었다. 그러곤 앨런의 입에 쿠키를 쏙 넣어 주고 자신도 한 입 베어 물었다.

앨런은 점심때 먹고 싶은 음식이 있는지 묻고, 밖으로 나가려고 했으나 제이드는 앨런을 붙잡았다. 귀족에 관한 일이라면 저보다는 앨런이 더 많이 알고 있을 터였다.

“보통 귀족 아가씨들은 뭘 배워요?”

"음, 신부 수업 외에 승마, 춤, 그림, 악기 정도 배우지 않을까요?"

“그럼, 신부가 될 여자가 꼭 배워야 할 건 뭘까요?"

"당연히 춤이죠! 신랑을 찾는 무도회에서 돋보여야 하잖아요.”

앨런의 답은 틀리지 않았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제이드에게 춤을 가르치지 않았던 어원이 어느 날, 춤 선생 샤보노 부인을 데려왔던 것이다. 황족들의 춤 선생으로 유명한 그녀는 날카로은 얼굴을 한 키가 크고 늘씬한 중년의 여성이었다.

"고개 들고, 허리 세우고...... 하나, 둘.......”

제이드에게 춤을 배우는 것은 고역이었다. 자신도 이렇게 몸치일 거라고 생각 못 했다. 제법 몸 쓰는 일은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일할 때 쓰는 몸과 춤을 출 때 쓰는 몸 사이에는 엄청난 간극이 있었다.

너무 엄격한 교육에 긴장한 근육은 제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제이드는 샤보노 부인이 반복해서 가르쳐 준 스텝을 그대로 따라 한다고 생각했는데, 돌아오는 것은 핀잔뿐이었다.

“정신 안 차려요?"

“죄송합니다.”

제이드는 슬쩍 옆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어원이 바른 자세로 서서 제이드를 보고 있었다. 제이드가 자꾸 스텝이 엉키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 앞에서 멋진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벌써 며칠째 어원은 제이드를 샤보노 부인 앞에 데려다 놓고, 옆에서 항상 지켜보고 있었다. 어원을 보지 않으려고 몸을 돌려도 봤지만, 샤보노 부인의 팔을 잡고 빙글빙글 돌 때는 저에게 시선을 떼지 않는 어원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아앗."

제이드는 결국 어원을 신경 쓰다가 스텝이 꼬여 발목을 접질리고 말았다. 날카로은 통증이 발목을 스치면서 제이드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발목을 잡고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발목에서 올라오는 아릿한 통증에 제이드의 미간이 잔뜩 좁아졌다.

"괜찮아요?”

샤보노 부인이 제이드의 구두를 벗기고 발목을 보려고 했지만, 흰색 스타킹 때문에 볼 수가 없었다. 스타킹을 내리려면 허벅지에 있는 가터벨트를 풀어야 했다. 난감해하는 사이 어느새 어원이 곁에 다가와 제이드의 다친 발목을 살며시 잡고 돌렸다.

“아...... 아파요.”

“발목이 부러진 것 같진 않군요.”

부러지지 않았다고 해도 부어오르기 시작한 발목이 찌르는 듯이 아팠다. 인상을 쓰고 있는 제이드를 보고 어윈은 샤보노 부인을 향해 말했다.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그래요. 제이드 양, 얼른 쾌차하세요."

어원에게 2주 안에 모든 무도곡을 다 가르치라고 지시받은 샤보노 부인도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제이드는 아픈 발목을 붙잡고 겨우 일어나 샤보노 부인에게 인사를 했다. 어원은 그런 제이드에게 다가와 뭐라 말할 틈도 없이 그녀를 가뿐하게 안아 들었다.

"내려 주세요. 조금만 쉬면 걸을 수 있어요.”

“무서우면 내 목에 팔 감아요.”

어원은 내려 달라는 제이드의 말을 가볍게 무시해 버렸다. 어원은 무서우면 그의 목에 팔을 감으라고 했지만, 제이드는 차마 어원의 목에 팔을 감지 못했다. 어원의 손이 어깨와 무를 아래를 감싼 상황이라. 여기서 몸을 돌려 어원의 목에 팔을 감으면 그를 확 안아 버리게 될까봐 무서웠다.

“그냥 내려 줘요.”

제이드는 이제 발목이 아픈 것보다 맞닿은 어원의 몸이 더 신경쓰였다. 향수와 어윈의 체향이 섞인 모한 향기가 머리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점점 커지는 어원을 향한 마음이 그와의 관계를 더 어렵게 했다.

"붕대 하기 전엔 안 돼요. 다리 때문에 흑룡이랑 춤을 못 추면 어떻게 하려고요.”

“흑룡이 춤도 춰요 ?"

“모르는 일이죠. 흑룡이 춤추는 것을 좋아하는 로맨티시스트일지도.”

어윈과의 접촉에 두근거려서 정신없는 제이드와 달리 어윈은 뜬금없는 이야기를 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성큼성큼 걸어갔다. 제법 거리가 되는 제이드의 방까지 그녀를 안고 가면서도 어윈은 지친 기색이 없었다.

제이드를 침대에 내려놓은 어윈이 무슨 일인가 싶어 기웃대는 엘런에게 붕대를 찾아오라고 부탁했다.

“스타킹 벗어요.”

어린이 담담하게 말하고 뒤로 돌아섰다. 제이드는 몸을 돌려 치마 속 가터벨트를 풀고 허벅지까지 오는 스타킹을 벗었다. 다친 발목의 복숭아뼈에 부기가 살짝 올라와 있었다. 맨발을 어윈에게 보여 주기 민망했던 제이드는 발목 상태를 확인하고 다시 치마 속으로 발을 감췄다.

“다 벗었어요. 조금 부은 게 다예요.”

“보여 줘요.”

침대 스툴에 앉은 어윈은 제이드의 발목을 살렸다. 그녀의 말대로 큰 상처는 아닌 것 같았다. 명이라도 들었으면 병원에 데려가려고 했는데, 이 정도면 찬물로 찜질하고 붕대로 압박만 해 두면 괜찮을 것 같았다.

"욕실로 갈까요? 찬물에 담그면 좋아요.”

어윈이 다시 제이드를 안으려고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제이드가 먼저 두 손으로 어원을 밀어냈다.

“혼자 할 수 있어요. 욕실이 멀지도 않고..”

제이드가 침대에서 일어나 다친 다리에 힘을 빼서 절룩절룩 걷자, 제이드의 뒤에 바싹 붙어 있던 어윈이 뒤에서 제이드를 번쩍 안았다.

“아앗!”

“흑룡이랑 춤 못 춰서 결혼 못 하면 어떡할 건데요?"

제이드는 어원에 입에서 나오는 흑룡 이야기는 반갑지 않았다. 혹시 어원이 자신에게 관심이 있나 싶다가도, 흑룡 이야기가 나오면 어원이 저를 그저 일로만 보는 것 같아서 괴로웠다.

입이 비쭉 나온 제이드를 안고 욕실로 들어간 어윈은 욕조 위에 제이드를 앉히고 차가운 물을 틀어 부어 있는 발에 흐르게 놔뒀다. 어윈의 다정함이 제이드에게는 너무 가혹했다. 제이드는 찬물이 흐르는 방향으로 제 발목을 잡고 있는 어원을 보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

“어원은 세상에서 제일 좋은 남편이 될 거예요.”

"......”

“그 여자가 부러워요.”

지난 두 달 동안 제이드는 부모에게도 받지 못한 사랑을 어윈에게 다 받은 것 같았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도 웃으면서 들어 주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옆에서 차분히 도와주었으며, 아침에 눈을 떠서 밤에 잠들기 전까지 제이드의 옆에서 보살펴 줬다. 제이드는 어원에게서 '당연하다' 라는 반응을 기다렸지만, 어원이 너무 조용했다.

“왜 아무 말도 안......”

제이드는 어원의 새하얀 귓바퀴가 붉게 달아오른 것을 보고 말을 멈췄다. 뭐지? 뭐 때문에 저렇게 부끄러워하는 거지? 제이드가 의아해하는 사이 어원은 제이드의 발을 내려놓고, 욕실 밖으로 나갔다.

"앨런에게 붕대 받아 올게요.”

잠시 후, 앨런에게 퉁대를 받아 온다는 어윈은 오지 않고, 붕대를 들고 앨런이 욕실로 들어왔다.

"아가씨, 발목 괜찮아요?"

“네. 어원은요?”

"급한 일이 생겼다고 하시던데요? 저한테 붕대를 감으라고 하셨어요.”

앨런이 물기를 닦은 제이드의 발목에 붕대를 감는 동안 제이드는 좋은 남편이 될 거라는 말에 붉게 달아올랐던 어윈의 귀를 생각했다. 한 번쯤 그의 마음을 떠봐도 될 것 같았다.

***^***

녹음이 짙은 나무 사이로 따뜻하게 내리쬐는 햇빛 때문에 숲은 몽환적인 느낌이었다. 그리고 빛 한가운데는 허리까지 오는 길고 반짝이는 금발의 여인과 잘 차려입은 어원이 서로를 마주하고 있었다. 제이드는 그녀가 멜리사라는 것을 금세 알았다. 왜 자꾸 어윈의 옆에 다른 여자가 있는 꿈을 꾸는지 모를 일이었다.

멜리사는 어원을 숭배하는 눈으로 바라봤다. 누가 봐도 사랑에 빠진 여자의 눈이었다. 어윈의 눈길도 그녀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두 사람은 사랑에 푹 빠져 있었다.

“부럽다.”

제이드는 멜리사가 밉지 않았다. 미움도 질투도 어지간히 따라갈 수 있어야 생기는 법이었다. 어윈의 곁에 선 멜리사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어원과 무척 잘 어울렸다. 어원을 두고 야한 꿈이나 꾸는 저와는 달랐다.

제이드는 두 사람을 피해 숲을 빠져나와 걸었다. 어느샌가, 제이드는 전에 왔던 그 성으로 돌아와 있었다. 말도 안 되는 공간 점프였지만, 이상하다고 생각이 들지 않았다. 꿈은 원래 말도 안 되는 조각들이 모여서 보여 주는 환상 같은 거니까.

제이드는 뚜벅뚜벅 긴 복도를 걸었다. 이 복도는 보라색 침실로 가는 길이기도 했다.

보라색 침실 밖으로 들리는 슬픈 울음소리에 제이드는 문을 살며시 열었다. 침대 끄트머리에 앉아 머리를 감싸고 우는 어윈의 모습이 보였다. 그 울음이 너무 슬퍼서 제이드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멜리사....... 흐흑......”

어원을 울린 주인공이 누군지 너무 선명했다. 제이드는 어윈의 앞으로 다가갔다. 어원이 자신을 알아봐 줄지 몰랐다. 제이드가 고개 숙인 어윈 앞에 서자, 어린이 고개를 들어 올려 제이드의 얼굴을 확인했다.

"멜리사!”

어윈이 제이드를 가슴 가득 안았다. 그리고 목덜미에 고개를 묻고 서럽게 울었다. 제이드는 어윈의 등을 토닥이며, 침대 옆에 있는 거울에 제 모습을 비췄다. 흑단같이 새까만 머리, 멜리사보다 키도 작고, 마른 몸이 보였다.

"어원. 전 델리사가 아니에요.”

“돌아올 줄 알았어. 멜리사.”

어원은 제이드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눈물범벅이 된 어윈의 얼굴은 처연하고, 애처로웠다. 제이드는 어윈의 긴 눈초리 끝에 매달린 눈물을 엄지로 닦아 냈다. 제이드는 어원이 저를 위해 울어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뱉지는 못했다.

"멜리사는 곧 돌아올 거에요.”

"당신이군요.”

어윈은 그제야 제이드를 알아보고 서글프게 웃었다. 눈물로 젖은 어윈의 슬픈 얼굴을 보면서 제이드는 자신이 멜리사가 아니라 미안한 마음이 들 정도였다.

“저를 알아보겠어요?"

제이드의 물음에 어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원은 제이드의 얼굴을 하나하나 눈에 담으려는 것처럼 꼼꼼하게 바라봤다. 제이드도 어윈의 눈에 시선을 맞췄다. 꿈이 아니라면 저 새까맣고 빛나는 눈을 이렇게 마음대로 쳐다보지 못할 터였다. 제이드는 서로를 마주하고 있는 어원과 제가 조금 전 숲속에서 본멜리사와 어윈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잊지 말아요.”

제이드를 서글프게 바라보던 어윈은 그 한마디를 남기고 바람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자신이 서 있는 곳도 이미 보라색 방이 아니었다. 달 한 조각 뜨지 않은 어둡고 컴컴한 속에 제이드는 혼자 남아 있었다.

***^***

흑룡과 춤을 못 추면 어떻게 할 거냐며 어윈이 난리를 친 발목은 이틀도 지나지 않아 거짓말처럼 나아 버렸다. 그러나 발목이 다 나아도 어윈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가씨, 다 드셔야 해요. 집사님이 돌아왔을 때 아가씨 살이 빠져 있으면 가만히 두지 않겠다고 했단 말이에요.”

“그건 어원이 혼날 일이지, 앨런이 혼날 일이 아니에요.”

어윈 없이 입맛이 돌 리가 없었다. 제이드가 워낙 못 먹고 살았던 터라, 공작가에 처음 왔을 때는 어원이 먹이는 대로 살이 쪘었다. 그러나 마냥 살이 찌는 것도 한계가 있는지, 어느 정도 살이 찐 이후에는 도리어 살이 다시 빠져서 어원이 잔소리를 많이 했다.

"어원은 언제 온대요? 연락 없어요?"

어윈이 사라진 지 벌써 일주일이었다. 이 저택을 떠날 날은 더욱 바짝 다가왔는데, 집을 떠나 연락도 없는 어윈이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었다.

"따로 받은 연락은 없었어요.”

제이드의 기분이 처져 있자 괜히 앨런이 눈치를 봤다.

"오늘도 춤 연습만 하면 되죠?"

“네. 점심 드시고, 연회장으로 모실게요.”

어원이 없어서 잘된 유일한 일은 그나마 제이드의 춤이 많이 늘었다는 것이다. 어원이 그렇게 바라던 특릉과의 춤도 가능할 정도로, 오후 내내 춤을 연습하고 방으로 돌아온 제이드는 침대 위에 놓인 쪽지를 하나 발견했다.

[오늘 밤 10시, 앨런 몰래 온실로 나와요. 줄 선물이 있어요. - 어원 트래비스]

명필 이어서 놀랐던 어윈의 글씨는 아니었다. 그러나 누군가 어윈의 명을 받아 적어 보낸 쪽지일 수도 있었다. 제이드는 어윈의 쪽지를 들고 방 밖으로 나와 앨런을 찾았다. 앨런은 간단한 간식거리를 준비해 제이드의 방으로 오는 길이었다. 제이드는 앨런을 보자마자 물었다.

"어윈 왔어요?”

“아, 저도 조금 전에 얘기 들었는데요. 내일 오신대요.”

“내일부터 일하려면, 오늘 밤늦게 오실 수도 있고요. 정확히는 모르겠어요.”

어원이 돌아왔을 때 잘 빠졌다고 실망할까 봐, 제이드는 앨런이 두고 간 간식을 하나도 남김없이 먹었다. 그 뒤 제이드는 창가 테이블에 앉아 저택의 입구를 바라보며 어윈의 쪽지에 관해 생각했다. 어원이 아직 저택에 돌아오지 않은 걸 보면, 직접 쪽지를 두고 간 것 같지는 않았다. 쪽지를 놓고 간 사람은 누구인지 궁금 했으나, 어원의 부탁을 들어줄 사람은 너무 많았다.

10시면 잠자리에 들 시간이었다. 어원이 밤늦게 자신을 보고 싶어 미리 보낸 쪽지라는 생각에 제이드는 마음이 설렜다. 무슨 선물을 준비했을지도 궁금했다.

"하, 아직도 9시네.”

누군가를 기다리는 시간은 참 더디 흘렀다. 앨런과의 수다도 즐겁지 않고, 책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제이드는 온실에 던저 가서 어원을 기다리기로 했다. 엘런에게는 일찍 자겠다고 말을 해 두었으니, 제이드가 누군가를 부르지 않는 이상 이 방에 올 사람은 없었다.

제이드는 침대로 가서 이불 속에 베개 두 개를 넣어 자신이 자는 것처럼 꾸미고 방 불을 껐다. 방 안에서는 살금살금 걸을 필요가 없는데도, 긴장한 제이드는 발꿈치를 들고 문 앞으로 다가가 살짝 문을 열었다.

최소한의 불을 켜 둔 복도는 어둑어둑했다. 제이드는 혹시라도 누가 볼까 봐, 주변을 두리번두리번하며 저택 밖으로 나왔다. 그런 뒤엔 일부러 어두은 곳을 골라 몰래몰래 온실로 다가갔다. 딸깍, 온실의 문이 쉽게 열렸다.

“아우........."

잔뜩 긴장했다가 온실로 들어오자 큰 숨이 절로 나왔다. 제이드는 어원과 자주 앉아서 이야기 나누던 벤치로 가서 앉았다. 달빛을 받은 꽃들은 또 다른 매력을 뽐내고 있었다. 제이드는 온실 문을 바라보며 곧 찾아올 어원을 기다렸다. 행복한 시간이었다.

***^***

더러운 창고 한편에서 커다란 포대 자루가 들썩였다. 재갈이 물리고, 손발이 함께 묶인 제이드는 어떻게든 자루 속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리려고 움직여 봤지만, 밖은 조용했다. 도대체 언제 이 포대에 갇혔는지, 이 안에서 몇 시간이 흘렀는지도 알 수 없었다.

소리를 지르려고 해 봐도 혀까지 통제한 재갈은 제이드의 목소리를 막았다. 이렇게 허무하게 죽다 싶어서 막막하기만 했다. 누구라도 저를 구해 달라고 기도도 해 봤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어서 제이드는 점점 지쳐 갔다. 딸깍. 문이 열리는 소리에 제이드는 또다시 몸부림을 쳤다.

“기운도 좋아.”

익숙한 여자 목소리였다. 한껏 비아냥거리는 말투에 제이드는 납치한 사람이 레아라는 것을 알았다. 저벅저벅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에 제이드는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한 명이 아니었다.

곧 자루가 들리고, 매듭이 풀리더니, 힘센 누군가가 제이드를 바닥으로 물건처럼 쏟아 냈다. 제이드는 묶인 짐승처럼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채로 고개를 들었다. 팔짱을 끼고 제이드를 내려다보는 레아의 뒤를 건장한 장정 둘이 지키고 서 있었다. 레아가 왜? 제이드는 혼란스러웠다.

“어윈이랑 밤에 자주 만났나봐? 그런 허접한 쪽지에 넘어갈 줄 몰랐네.”

재갈에 걸려 말이 나오지 않았다. 레아가 붙잡고 싶어도 제이드는 공작저를 떠날 사람이었다. 처음 모건가의 가족에게 인사를 하고 나서는 레아와 몇 번 마주친 적도 없었다. 제이드는 아무리 생각해도 레아가 저한테 이러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도 제이드는 레아를 바라보며 계속 소리를 냈다.

“할 말이 많은가 보네.”

레아는 제이드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제이드는 그녀의 손을 보고 깜짝 놀랐다. 날카롭게 벼려진 칼이 레아의 손에 들려 있었다. 레아는 그 칼을 제이드의 얼굴에 들이댔다. 공포에 질린 제이드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레아의 칼은 재갈을 물린 천을 숭덩 잘랐다.

"입이랑 같이 자를 걸 그랬나?”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말을 뱉은 레아는 천사 같은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기이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제이드는 어떻게든 레아에게서 멀리 떨어지고 싶어서 몸을 꿈틀댔다.

“제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러시는 건가요?"

죽을 땐 죽더라도 이유는 알고 죽고 싶었다. 제이드의 다급한 질문에 레아의 미간이 좁아졌다.

“정말 모르는 거야? 모르는 척하는 거야?"

“뭐가 됐든 저는 곧 떠날 사람이잖아요. 아니, 살려만 주시면 당장 떠날게요.”

“어머, 누가 널 떠나게 해 준대?”

레아는 제이드의 머리카락을 한 손에 움켜쥐고 당겼다. 머리카락이 뽑힐 만큼의 강한 악력이었지만, 그런 아픔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제이드는 겁을 먹었다. '악' 소리도 못 하고 부들부들 떠는 제이드의 얼굴을 레아는 기분 좋게 바라봤다.

“무서워? 그럼, 잘 하지 그랬어.”

뭘 잘 하라고 하는 건지 몰라서 제이드는 답답했다. 억울해하는 제이드의 눈을 보면서 레아는 손에 꽉 쥔 제이드의 머리카락을 칼로 그었다. 머리카락을 잡는 힘이 우악스러워서 두피가 벗겨질 것 같았다. 아픈 것은 참을 수 있었다. 그러나 얼굴 위로 잘린 머리카락이 우수수 떨어지는 게 너무 무서웠다. 제이드가 몸부림을 쳐도 레아는 꿈쩍하지 않고, 제이드의 머리카락을 다시 한 움큼 쥐었다.

“너 같은 건 여기서 죽어도 아무도 안 찾을 거야. 어윈? 어차피 널 가지고 놀다가 흑룡에게 데려다주면 끝인 사람이잖아.”

“...... 그런데 왜요?”

제이드는 레아의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지금 이 상황이 어윈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면, 그는 정말 자신을 흑룡에게 데려다주면 다시 볼 일 없는 사람이었다. 굳이 레아가 자신에게 이럴 필요가 없었다.

“그걸 내가 왜 가르쳐 줘야 하지?"

레아는 제이드의 물음에 답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이건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제가 손을 뻗었을 때 거절한 이는 어원이 유일했다. 어원은 몇 달 전, 갑자기 공작가에 나타나 집사가 되었다. 레아의 눈에 어원은 집사보다 꿈속의 왕자님에 가까웠다.

처음 어원이 인사를 할 때만 해도 매끈하고 잘생긴 외모가 탐났을 뿐이었다. 한낱 집사에게 진심일 필요도 없었다. 밤늦은 시간에 제 방에 들르라는 한마디면 충분했다. 하지만 어윈은 한 번도 그녀의 부름에 답한 적 없었다. 제이드가 오기 전까지 제법 상냥했던 어윈은 제이드가 공작저로 오고 나서는 대놓고 무시하기 일쑤였다. 어윈의 뒷배가 얼마나 대단한지는 모르겠지만 아버지도 고용인일 뿐인 그를 어찌할 수 없다는 게 더 화가 났다.

“이 검은 머리가 그렇게 대단해?”

레아는 어원이 제이드에게 관심을 보이는 이유가 희귀한 검은 머리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귀족의 딸 중에서도 검은 머리는 드물었다. 더군다나 흑룡이 신부를 찾을 때 성년이 되는 검은 머리 귀족의 영애는 어릴 때부터 애지중지 귀하게 길렀다. 그녀들은 일확천금을 벌 수 있는 희박한 확률을 갖고 태어난 귀한 아이들이었다.

“흑룡의 신부? 그게 뭐라고!”

금발로 태어난 레아는 흑룡의 신부 얘기에는 관심이 없었다. 어차피 흑발도 아니고, 흑룡이 신부를 찾을 때는 이미 중년이 된 이후가 될 거였다. 그러나 20년이나 일찍 흑룡의 신부를 찾는 얘기가 나오고, 천것 중에 검은 머리 처녀를 찾아 모건가의 양녀로 올린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는 난생처음 절망을 느겼다.

이 세상에서 자신이 못 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흑발이 아니라는 이유로 집안에서 그렇게 바라는 흑룡의 신부가 될 수 없다는 사실에 분했다. 레아가 활비의 자리에 오른다고 해도, 흑룡의 신부보다 지위가 더 높을 수 없었다. 황제조차 흑룡의 말에 벌벌 떤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었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주인공 자리를 뺏겨 본 적 없는 레아는 쓰레기 같은 천것에 밀려 자신이 2순위가 되는 것을 참지 못했다.

“아악”

레아의 억센 힘에 제이드에 입에서 단말마의 비명이 터졌다. 레아는 제이드의 머리를 다 잡아 뽑을 기세로, 제이드의 머리에 거침없이 마구 칼질했다. 칼에 베인 두피에서 피가 흘러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포획한 짐승처럼 묶여 있는 제이드는 레아의 칼날을 피할 수도, 그녀를 대항해 싸울 수도 없었다.

“네년이 감히 내 자리를 노려? 너 어원이 나 좋아하는 거 알고도 일부러 꼬신 거지?”

제이드는 어이 없었다. 공작저에 와서 어원만 생각하는 것도 벅차서, 레아 따위를 신경 써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레아는 이 세상이 자기 위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광기로 번뜩이는 레아의 눈을 보니 어떤 말도 통하지 않을 듯했다.

“맞아요. 어윈은 아무것도 몰라요. 제가 혼자 꾄 거예요.”

레아도 제정신이 아니지만, 제이드는 자신도 미쳤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대답이 레아에게 불을 지르는 꼴이라는 것을 알지만, 어원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았다. 만약 자신이 인정하지 않으면, 레아의 화살은 어원에게 돌아갈지도 몰랐다.

“미친...... 이 천것이 죽여 달라고 떼를 쓰는구나!"

레아는 제 성질을 못 이기고 소리를 버럭 질렀다. 레아의 손과 칼에 뽑히고, 잘린 머리카락이 제이드의 얼굴 위로 마구 떨어졌다. 레아에게 질투이자 혐오의 상징인 검은 머리카락이 다 잘리고 나면, 그녀의 칼이 어디로 들어올지 몰랐다.

앨런 몰래 방에서 나와 아무도 마주치지 않고 온실에 갔다고 좋아할 때가 아니었다. 온실에서 어윈을 만나면, 그에게 제 마음을 전하고 싶었는데, 이제 다 끝난 것 같았다. 머리카락을 엉망진창으로 만든 레아의 손이 제이드의 양 뺨을 짓이기듯 눌러 잡았다.

"이번엔 이 눈을 파내 줄까?”

분노로 인한 광기는 레아의 깊은 곳에 있는 잔인한 무언가를 건드렸다. 어원을 향해 반짝이던 제이드의 초록색 눈을 푹 파내야 자신의 속이 좀 풀릴 것 같았다. 레아는 제이드를 죽일 생각이 없었다. 제이드에게 죽음은 너무 자비로웠다. 레아는 제이드를 맹인으로 만들어 사창가에서 평생 굴릴 생각이었다. 제이드에게는 그게 딱 어울렸다.

"아악!”

날카로운 칼날이 눈에 가까이 오기도 전에 제이드가 소리를 지르며 몸부림을 쳤다. 너무 무서워서 눈을 뜰 수도 없었다. 그 순간.

“이게 뭐야! 꺄아악!”

레아가 순식간에 제이드에게서 떨어졌다. 뒤를 지키고 있던 덩치 좋은 남자들도 어울리지 않게 비명을 질렀다. 제이드의 눈이 번쩍 떠졌다. 제이드의 눈에 보인 건 그들의 몸에 올라타는 쥐 떼였다. 어딘가에서 셀 수 없이 많은 쥐가 창고 안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크고 작은 쥐들이 발버둥 치는 레아의 몸을 타고 올라 찍찍거리고 울었다.

“빨리 어떻게 좀 해 봐!”

레아가 장정들에게 소리를 질렀지만, 장정들도 제 몸에 붙은 쥐들 때문에 정신이 나간 상태였다. 세상에 태어나 이런 공포를 처음 느낀 레아의 울음이 크게 터졌다. 떼어도 데어도 쥐들은 악독한 저주처럼 레아에게 끝도 없이 달라붙었다.

“꺄아아아아악!”

레아가 칼을 휘둘러 봤지만, 타점 없이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칼은 아무런 일도 해결해 주지 못했다. 제이드는 저에게 쥐가 다가올까 봐 몸을 잔뜩 웅크렸다. 그러나 단 한 마리의 쥐도 제이드의 곁에 오지 않았다. 잠시 후, ‘황' 하는 소리와 함께 철과 나무로 만든 창고 문이 툭 떨어졌다. 저벅저벅 창고를 가득 채울 것처럼 모여든 쥐가 남자의 걸음에 홍해처럼 갈라졌다.

"어원! 도와줘!"

레아의 외침에도 어윈은 그녀를 바라보지 않고, 창고 안을 훑기 바빴다. 레아가 어윈에게 달려가려고 했지만, 쥐들은 거의 탑을 쌓을 듯이 레아에게 달려들었다. 이내 머리끝까지 쥐로 뒤덮인 레아의 끔찍한 비명이 창고를 울렸다.

"제이드!”

창고에 들어와 제이드를 발견한 어윈은 그녀에게 재빨리 달려왔다. 그는 제이드를 묶고 있는 매듭을 칼로 끊어 냈다.

“미안해요.”

제이드는 눈앞에 나타난 어원이 믿기지 않아서 멍하니 눈만 깜빡였다. 어원은 엉망진창이 된 채로 울고 있는 제이드를 품에 꼭 안았다. 어원의 넓은 품 안을 확인하고 마음을 놓은 제이드는 그에게 저를 완전히 맡기고 눈을 감았다.

어떤 말도 할 수 없고, 눈물 한 방울도 나오지 않을 만큼 지쳤다. 어원은 코트를 벗어 제이드를 감싸 안고 일어섰다. 그 많은 쥐는 어느새 창고 밖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쥐와의 전쟁으로 기진맥진한 레아와 장정들은 바닥에 너부러져 있었다.

“집에 가요.”

어원은 제이드를 안고 창고 문을 향해 걸었다. 바닥에 퍼져 숨을 헐떡이는 레아는 어원이 제이드만 챙기는 것을 보고 이를 갈다가 칼을 들고 어윈에게 달려들었다.

“내가 가만두지 않겠다고 했지!”

어원은 무섭게 달려드는 레아의 공격을 슬쩍 발을 옮겨 가볍게 피했다. 레아는 온 힘을 다한 공격을 실패한 후, 제 힘에 못 이겨 바닥으로 풀썩 쓰러졌다.

"미친....... 죽여! 죽이라고!"

레아는 정신을 놓고 있는 장정들을 향해 소리쳤다. 장정들이 그제야 칼을 들고 어윈에게 달려들었다. 어원은 제이드를 안고도 손쉽게 그들의 칼을 피하며, 창고 밖을 향해 소리쳤다.

“들어와!”

그 한마디에 거구의 남자 다섯이 창고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그들은 검은 복면을 쓰고 있었는데, 눈 코 입이 하나도 뚫려 있지 않았다. 사람인 것 같으면서도, 사람 같지 않았다. 장정들은 그 기세에 놀라 뒤로 물러섰다. 레아도 위협을 느끼고 장정들 뒤에 섰다. 어원은 제 뒤를 보호하고 있는 남자들에게 지시했다.

“남자들은 손만 봐줘. 여자는 알지?"

“네, 분부 받들겠습니다.”

복면을 쓴 남자들이 다가오자 칼을 손에 쥔 장정들도 겁에 질려 뒷걸음질을 쳤다. 레아의 하얀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해졌다. 어원이 말하는 알지? 의 의미를 레아는 몰랐다. 수상한 집사였던 어윈의 진짜 모습도 레아는 알지 못했다. 어윈의 목소리는 소름 끼치게 차가웠다. 공포는 상상부터 시작됐다. 남자들이 가까이 올 때마다 레아의 공포도 더욱 커졌다.

“꺄아아아아악!”

어윈이 마차에 제이드를 태워 떠날 때까지, 창고 밖으로 레아의 비명이 끊임없이 울렸다. 제이드는 어렴풋이 흐려지는 기억 속에서 그 소리를 들었다.

***^^***

눈부신 아침 햇살에 눈을 뜬 제이드는 온몸을 두들겨 맞은 것 같은 아픔에 눈살을 찡그렸다. 잠을 잤는데도 피곤이 가시지 않았다.

"으...... 으........”

제이드의 온몸이 삐거덕거렸다. 손목과 발목의 통증과 쓸린 상처가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주는 것 같았다. 직접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눈을 뜬 곳이 익숙한 제 방이라 다행이었다. 어윈의 품에 안겨 마차를 탄 후의 기억은 까맣게 지워져 있었다.

“괜찮아요?”

않는 신음을 흘리며 기지개를 켜던 제이드는 어윈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어원이 침대 밑 쪽 스툴에 앉아 저를 지켜보고 있었다. 말려 올라간 소매 밑 팔목에는 어제 묶였던 매듭 자국이 선명했다. 그러나 제이드는 괜한 걱정을 끼치기 싫어서 소매로 상처를 가리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밤새 여기 있었어요?"

어윈의 얼굴이 수척해 보였다. 옷도 갈아입지 못한 것 같았다. 어제 제이드를 감쌌던 긴 코트가 침대 옆에 덩그러니 떨어져 있었다.

“네. 많이 놀라면, 아플 수도 있거든요. 내가 제대로 보살펴야 했는데, 미안해요.”

"어원이 구해 줬잖아요. 고마워요."

제이드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어원을 향해 아무렇지도 않은 듯 밝게 웃었다. 그러다 문득 어젯밤 마차에서 들은 레아의 비명이 떠올랐다.

“레아는요?"

“모건 공작님이 화가 잔뜩 나셨어요. 레아 아가씨가 밤에 함부로 돌아다닌다고. 당분간 바깥출입은 못 할 겁니다."

어원은 별일 아닌 듯이 이야기했지만, 제이드는 쉽게 믿기지 않았다. 어원은 도와 달라는 레아의 말을 듣는 척도 하지 않고, 구해 주지도 않았다.

“어제 어원을 공작님이 보내신 건가요?"

“네. 공작님이 레아 아가씨에게 사람을 붙이셨어요.”

제이드는 어제 일이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공작이 레아에게 사람을 붙일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가 오기 전에 쥐 떼가 나타나 레아와 장정들을 공격한 건 기이한 일이었다. 그 많은 쥐가 갑자기 나타나 사람을 골라서 공격하는 게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쥐들은 마치 결계를 넘지 못하는 것처럼 제이드 곁에는 다가오지 않았다. 어원이 데려은 복면을 쓴 남자들도 평범한 무사들과는 거리가 덜었다. 결정적으로 어윈은 레아를 구하지 않았다.

“더러운 창고라 쥐가 너무 많더군요. 제이드 아가씨가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어원은 제이드를 구해서 정말 다행이었다는 듯이 해사하게 미소 지었다. 숱한 의심이 들었지만, 제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레아의 뒤를 쫓다 저를 우연히 발견했다니, 하늘이 도운 일이었다. 어차피 어윈도 쥐 떼가 어떻게 창고에 들어왔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고.

“너무 무서웠어요.”

어젯밤 생각에 진저리 친 제이드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넘기다가 멈칫했다. 손가락에 걸리는 머리가 너무 짧았다. 두건을 쓰고 다닐 때도 이렇게 짧은 머리는 해 본 적이 없었다.

“아....."

두 손으로 머리카락을 더듬던 제이드는 침대에서 번쩍 일어나 거울 앞에 가서 섰다. 레아가 잡아 뜯고 잘라 놓은 머리는 뭐라 말할 수 없을 만큼 처참했다. 짧은 머리 사이에 긴 머리가 군데군데 남아 있어 더 보기 흉했다. 제이드는 거울을 보고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왜 다들 자신을 가만히 두지 않는 건지 몰랐다. 어쩌면 저는 평생 두건이나 쓰고 다닐 팔자인 것 같았다.

“울지 말아요. 내가 정리해 줄게요.”

귓가에 다정한 어윈의 목소리가 들렸다. 제이드는 눈물을 대롱대롱 매달고, 어느새 제 뒤로 다가온 어윈을 거울로 쳐다봤다. 어원은 제이드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만졌다. 어윈은 제 머리가 잘린 듯 안타까운 표정으로 제이드의 머리칼을 살폈다.

“머리도 자를 줄 알아요?”

“그럼요.”

어윈은 의자를 가져와 거울 앞에 제이드를 앉히고, 커다란 수건을 목에 둘러 주었다. 그리고 날이 선 가위를 들고 와 제이드의 뒤에 섰다. 제이드는 어원이 제 머리를 자르는 게 무서웠지만, 도저히 이 머리는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다.

“자를게요. 눈 감아요.”

어린이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잡고 사각사각 머리를 잘랐다. 제이드의 얼굴에 머리카락이 투툭 떨어지자, 어제의 기억이 떠오른 그녀가 흠칫 놀라 몸을 떨며 눈을 번쩍 떴다. 제이드의 얼굴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면포로 털어 내던 어윈은 그녀의 겁먹은 눈을 보고 다정하게 어깨를 토닥였다.

“괜찮아요. 다 지난 일이에요.”

다독이는 어원의 목소리에 제이드는 다시 스르르 눈을 감았다. 머리를 한 올 한 올 자르는지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눈 떠요.”

어윈의 솜씨는 울릉했다. 산 미치광이의 가시처럼 보였던 머리는 단정한 짧은 단발로 깔끔하게 마무리됐다. 하지만 제이드는 제 머리를 보고 울상이 되었다. 귀 밑에 간당간당한 짧은 머리는 자신을 어린 남자아이처럼 보이게 했다. 어원을 다시 만나면 고백하고 싶었는데, 이런 모습으로는 있던 정도 떨어질 것 같았다. 시무룩한 얼굴로 거울을 보고 있는 제이드를 보면서 어윈이 말했다.

“머리가 짧으니까 귀엽네요. 길 때는 예쁘더니.”

어윈의 칭찬이 위로라는 것을 제이드는 잘 알았다. 하지만 내심 그 말이 진심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중요한 행사에는 모두 가발을 쓰니까 괜찮아요. 평상시에는 뒷머리를 핀으로 고정하고, 머리 장식을 하면 아무도 모를 거예요. 앨런은 솜씨가 좋거든요."

“어원은 어떤 머리를 좋아해요?"

“음...... 지금은 짧은 머리가 제일 좋아요.”

제이드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만약 이렇게 이야기하고 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한다면, 너무도 확실하게 어원의 잘못이었다.

"놀리지 말아요.”

부풀어 오르는 마음에서 바람을 빼며 칭얼거리는 제이드를 보고 어윈은 웃음기 없는 얼굴로 나직하게 답했다.

"맹세코 아가씨를 늘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제이드는 저에게 했던 어윈의 말들이 머리를 스쳤다. 지금까지 저에게 어원이 해 준 칭찬들이 모두 진심이라면, 제이드는 용기를 내도 될 것 같았다.

"앨런 들일 테니까 준비하고 아침 같이 먹어요.”

모아 놓고 방문으로 향했다. 제이드는 어원의 뒷모습이 문밖으로 사라질 때까지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제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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