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 원치 않은 선택 (1/4)

[목차]

1. 원치 않은 선택

2. 뒤바뀐 운명

1. 원치 않은 선택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무도회장으로 가며 제이드 모건은 속으로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두건으로 검은 머리카락을 숨기고 온종일 남의 집에서 허드렛일을 하던 제이드 맬링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몇 번이고 되새겼다. 제이드는 석 달 전, 라프녹스 왕국의 북쪽 영토 그레트나를 다스리는 모건 공작가의 영애로 입적했다.

“들어가시죠.”

제이드의 시중을 드는 하녀 앨런이 무도회장의 커다란 문을 열었다. 빈민가의 끝자락, 오두막보다 못한 집에서 다섯 식구가 살았던 제이드는 여전히 귀족의 생활이 낯설었다. 커다란 성에는 없는 게 없었다. 반짝 거리는 크리스털 샹들리에와 황금과 거울로 장식한 무도회장은 너무 넓어서 몇 명이나 들어갈지 감도 오지 않았다.

"오셨습니까?

"네."

어정쩡하게 문 앞에 서 있는 제이드에게 모건가의 집사 어원이 긴 다리로 성큼성큼 다가오며 부드럽게 웃었다.

“오늘도 아주 예쁘십니다."

"고맙습니다."

제이드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칭찬은 들어도 들어도 익숙하지 않았다. 인사치레일 뿐이라고 생각 하면서도 어윈의 칭찬에는 늘 기뻤다. 제이드가 저도 모르게 어원을 향해 공손하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 순간 다가온 어원의 큰 손이 그녀의 턱을 가볍게 잡아 올렸다.

“고개 숙이지 마세요. 아가씨는 가볍게 턱 인사만 해도 충분한 분이십니다."

모든 것이 모자란 제이드에게 어윈은 한 번도 화를 낸 적이 없었다. 제이드의 턱을 쥔 손이 가볍게 떨어졌다. 그 손의 온기를 아쉬워하며 제이드는 자세를 바로 세우고 어원과 시선을 맞춰다.

어원은 모건가의 집사일 뿐인데도 기품이 넘쳤다. 어원 덕분에 제이드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이제 제이드는 누가 봐도 귀족의 영애로 보였지만, 그녀의 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아직도 제이드는 제가 빈민가에 더 어울리는 사람 같아서 어원에게 주눅이 들었다.

“이제 함께 춤을 춰 볼까요?"

어원이 손을 내밀었다. 제이드는 떨리는 손을 꾹 쥐었다. 몇 번이나 반복하며 춤을 추었지만, 어원의 앞에서는 늘 떨렸다. 제이드는 어원이 내민 손을 오른손으로 잡고 왼손은 그의 너른 어깨에 살포시 올렸다. 자연 스럽게 제이드의 팔 아래 어원의 팔이 들어와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감쌌다. 어원에게는 한 톨의 사심도 없어 보이지만, 제이드는 그의 손이 닿은 등이 뜨겁게 타는 것 같았다.

"시작하겠습니다. 스텝 잘 기억하세요."

어원이 고갯짓을 하자 대기하고 있던 피아노 반주자가 연주를 시작했다. 춤에 집중해야 하는 것을 알지만, 제이드는 눈앞에 보이는 어윈의 야한 목덜미에 더 시선이 갔다. 미쳤다고 생각하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어원과 함께하는 시간이 들어 갈수록, 제이드가 그를 훔쳐보는 시간도 점점 늘어났다.

"아앗."

완벽하게 외웠다고 생각한 스텝이었는데, 제이드는 어원을 의식하다가 그만 발이 꼬여 무게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어원은 제이드의 무너지는 허리를 긴 팔로 안아 지탱했다.

"괜찮으십니까?"

"네......"

제이드가 고개를 들자, 속을 알 수 없는 깊고 검은 어원의 눈과 마주쳤다.

“오늘은 그만해도 될까요?"

제이드는 어원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도저히 춤을 출 수 있는 기분이 아니었다. 이렇게 기분대로 행동하는 것이 예의에 어긋난다는 것은 알지만, 어원은 늘 이 성에서는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했으니 괜찮을지도 몰랐다.

"미안해요."

제이드는 어원을 뒤로하고 무도회장을 빠져나갔다. 무도회장에서 방으로 가는 길은 한참이 걸렸다. 어원이 저를 쫓아왔으면 하는 마음과 당분간 어원을 보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계속 교차했다. 어원은 쫓아오지 않았다. 그게 또 서운했다. 제이드는 빈 복도를 힐끔 돌아보고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내가 미쳤지."

늘 우아하고 다정한 어원의 속마음이 무엇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어원에게 제이드는 그저 맡겨진 임무일 뿐일 텐데 제이드의 마음은 자꾸 선을 넘었다. 그의 눈빛도 손짓도 말투도 너무 달아서, 어원의 마음도 저를 향하고 있다는 착각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제이드는 어원에게 점점 미쳐 가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아가씨, 벌써 오셨어요?"

아직 무도회장에 있어야 할 제이드가 헐떡이며 방으로 들어오자 그녀의 방을 청소하고 있던 앨런이 깜짝 놀란 눈을 떴다.

"앨런, 혼자 있고 싶어요."

"네."

어원에게 춤을 배운다고 들떠서 나갔던 제이드가 갑자기 풀이 죽어 방으로 돌아와도 앨런은 무슨 일인지 묻지 않았다. 그녀가 무엇을 원하는지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편히 쉬세요."

앨런이 밖으로 나가자 제이드는 숨을 고르며 푹신한 침대 위로 누웠다. 애써 단장한 머리가 뭉개지든 말든 아무 상관도 없었다. 한쪽 팔로 두 눈을 가리고, 흐르는 눈물을 꾹꾹 눌렀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했지만, 그 자리는 모두 가짜일 뿐이었다.

모건가에 어떻게 입양이 되었는지는 제이드가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이제 곧 제이드는 이 성을 떠나야 했다. 무도곡까지 완벽하게 익히면, 어원과도 이별이었다.

하고 싶은 모든 일을 할 수 있다는 이 성에서 정작 제이드가 하고 싶은 단 한 가지 일은 할 수 없었다. 그게 얼마나 큰 욕심인지 알면서도 제이드는 쉽게 포기할 수가 없었다. 똑똑, 가볍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제이드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어원의 나직한 목소리에 제이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런 얼굴을 하고 어원을 어떻게 봐야 할지 몰랐다. 그러면서도 손은 저절로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하고 몸은 소파에 우아하게 앉았다.

"대답을 안 주시면 문 열겠습니다."

어원을 거절하는 법을 모르는 제이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후 제이드의 방문이 스르륵 열렸다. 늘 곧은 자세로 서 있는 어원의 모습이 보였다.

“괜찮으십니까?"

어원이 제이드의 앞으로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제이드를 올려다봤다. 걱정하는 눈빛이었다. 제이드에게 어원의 다정함은 독이었다. 제대로 사랑을 받아 보지 못한 제이드는 처음 맛보는 어원의 상냥함에 푹 빠져 버렸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제 마음속에서 일어난 일을 제이드는 어원에게 말할 수 없었다. 이렇게 어원을 바라보는 순간에도 어윈과 이별할 날에 대한 걱정이 사라지지 않았다. 어윈의 다정함은 정말 직업적인 버릇일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제이드는 어윈이 좋았다. 살면서 무엇 하나 욕심낸 적 없는 그녀였지만, 어원은 달랐다. 딱 한 번 이라도 어원을 갖고 싶었다. 제이드의 마음도 모르고 어원은 그녀를 걱정스러운 눈길로 바라봤다.

"저에게 이유를 말해 주세요."

이제 시간이 없다. 이 성에서 나가면 어윈과는 두 번 다시 볼 수 없는 사이가 된다. 제이드는 어원의 날렵한 두 뺨을 제 손으로 잡았다. 갑작스러운 제이드의 행동에 당황한 어원은 금세 평정을 되찾고 부드럽게 웃었다. 제이드는 고개를 숙여 어윈의 탐스러운 입술에 짧게 키스했다. 웃고 있던 어원의 표정이 잔뜩 굳었다. 제이드는 살짝 벌어진 어원의 입술을 엄지로 부드럽게 쓸었다.

“혹시 흑룡의 신부가 처녀일 필요가 있나요?"

***^***

그레트나의 번화가 중심에는 커다란 알림판이 있었다. 나라에서 백성들에게 알리는 대자보가 가끔 크게 붙고는 했다. 사람들은 대자보가 붙으면 너도나도 달려가 그 앞에서 의견을 나누었다. 대자보에 붙을 만한 일은 큰일이 많아서 한번 대자보가 붙으면 한동안 그 앞은 인파로 가득했다.

오늘 새로 붙은 대자보는 특히 그랬다. 흑룡의 신부 모집은 보통 100년에 한 번 있는 일이었는데, 이번엔 20년이나 빨랐다. 사람들은 전설처럼 내려오던 이야기를 직접 눈으로 목격하고 떠드느라 정신이 없었다.

"흑룡의 신부가 진짜 있구나."

왕국의 북쪽 윈슬로우 산을 지키는 흑룡의 신부를 찾는다는 소식이었다. 흑룡의 신부 모집은 석 달 후였다. 올해 스무 살이 되고, 검은 머리칼을 가진 귀족의 영애는 모두 윈슬로우 산에 있는 흑룡의 성에 모여야 했다.

"말이 흑룡의 신부지 인신 공양의 제물 아냐?"

“딸 팔아서 집안 살리겠다는 거지. 딸이 흑룡의 신부가 되면 그 집안은 대박 난다며."

“에이, 귀족들이 뭐가 모자라서 짐승한테 자기 딸을 팔겠어."

“말만 귀족인 집이 얼마나 많은데 그래. 딸 하나 팔아서 팔자 고치는 거지."

사실 평민 중에는 흑룡의 신부에 대해 정확히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들에게는 그저 재미로 떠들기 좋은 소재일 뿐이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어디서 들은 이야기를 아무렇게나 지껄였다. 올해 스무 살이 된 제이드도 검은 머리라 흑룡의 신부 얘기는 흥미롭게 들었다. 하지만 빈민가의 딸인 자신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었다.

“흑룡도 평민은 싫은가 봐. 귀족만 찾는 걸 보면."

“검은 머리 평민은 어디 쓸데도 없구먼. 손가락질이나 받지."

검은 머리로 태어나는 여자들은 거의 귀족이었다. 가끔 평민의 아이가 흑발로 태어나면 집안의 망신이었다. 검은 머리의 아이는 귀족의 사생아일 확률이 크기 때문이었다. 사람들 이야기를 들으며 제이드는 괜히 신경이 쓰여 두건이 벗겨지지 않았는지 손으로 재빠르게 확인했다. 남은 두건은 천이 나달거려서 헐렁했다.

“흑룡이 나라를 지켜 주는 건 맞아?"

"쯧쯧, 역사책 안 봤어? 언젠가 검은 머리 공주 숨겼다가 나라 망할 뻔했다잖아. 공주를 내놓을 때까지 비 한 방을 안 내리고, 물고기 한 마리도 안 잡혔다고."

사람들의 얘기는 끝도 없이 이어졌다. 제이드도 궁금한 게 많았지만, 더 듣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잠시만요."

제이드는 대자보 앞에 모여서 소란스럽게 떠드는 사람들을 요리조리 피해 빠져나왔다. 새벽부터 나와서 남의 집 일을 하고, 집에 가면 할 일이 또 쌓여 있었다. 가족 누구도 제이드를 도와주지 않았지만 불평을 할 수 없었다.

제이드는 가족 누구와도 닮지 않았다. 그래서 제이드의 아버지는 어머니의 부정을 의심하고, 또 의심했다. 어머니는 외도한 적이 없다고 억울해했지만, 믿어 줄 사람은 없었다.

제이드가 태어난 후, 아버지는 술과 노름에 빠져 집에 돈 한 푼 갖다 준 적이 없었고, 그렇게 싸움을 해대면서도 동생들은 셋이나 더 생겼다.

어머니는 가정불화의 원인인 제이드를 미워했다. 그녀는 집 나간 남편 대신 제이드를 실컷 부려 먹었다. 제이드는 여섯 살에 이미 빨랫감을 걷으러 동네를 돌아다녔고, 열두 살부터는 남의 집 일을 도와주러 다녔다. 어머니의 부정을 감추려 두건으로 머리를 꽁꽁 감춘 채로.

“그래도 오늘은 운이 좋은 날이야."

제이드는 결혼식 준비를 하는 집 일을 도와주고 감자와 고기를 제법 받았다. 모처럼 기분 좋게 번화가 너머 빈민가로 발걸음을 향했다. 늦으면 욕을 한바탕 먹을 거였다. 지금부터 부지런히 걸어도 빈민가의 끝에 있는 집에 가려면 한 시간은 걸렸다.

“아앗"

고개를 푹 숙이고 정신없이 걷던 제이드는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건장한 남자의 등에 머리를 부딪치고, 휘청였다. 그 순간에도 제이드는 혹시라도 오늘 먹을 식량이 땅으로 떨어질까 봐 자루를 품에 꼭 안았다. 곧 중심을 잡은 제이드는 무조건 사과부터 했다.

“죄송합니다."

제이드를 향해 돌아서는 남자의 구두는 광이 반질반질 나도록 잘 관리된 구두였다. 구두만 봐도 귀족임이 틀림없었다. 제이드는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남자는 제이드가 한참 고개를 들어 올려 쳐다봐야 할 만큼 키가 컸다. 반듯하게 정리된 검은 머리칼, 티 하 나 없이 하얀 피부, 호를 그리는 새까만 눈썹과 차가운 어둠 같은 눈, 반듯하게 솟은 콧대, 붉고 도톰한 입술까지 어디 하나 허투루 생긴 곳이 없을 만큼 잘생겼다. 이 작은 마을에서 이런 미남을 본 적이 없었다. 그가 입은 핏 좋은 검은색 슈트는 건장한 육체를 더욱 매혹적으로 보이게 했다. 처음 보는 압도적인 미모에 제이드는 얼이 빠졌다.

"괜찮습니까?"

남자의 시선이 저에게 닿은 것 같아 제이드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봄바람이 살랑 불면 마음이 설렐 나이지만, 제이드는 남자랑 손 한 번 잡아 본 적이 없었다. 할머니나 쓰는 두건에, 빨아도 얼룩이 지워지지 않는 지저분한 옷, 볕에 타서 새까만 피부, 볼이 팰 정도로 마른 몸은 또래 남자들의 시선을 끌지 못했다. 이렇게 잘생긴 귀족 남자가 자신에게 관심 있을 리 없었다. 나비같이 예쁜 귀족 영애들이 곁에서 그를 유도할 터였다. 그걸 알면서도 제이드는 낯선 남자의 시선에 마음이 떨렸다.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죄책감을 느끼면서.

"검은 머리군요.”

제이드는 그제야 남자가 자신의 얼굴이 아닌 머리를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남자의 등에 고개를 부딪치면서 밀려난 두건 밑으로 검은 머리가 살짝 드러나 있었다. 제이드는 두건을 바로 쓰면서 주변을 둘러보 았다. 다행히 남자 말고는 본 사람이 없었다. 어차피 남자는 이 근방 사람은 아닌 것 같으니 제이드가 누구인지도 모를 터였다. 빨리 자리를 피해야 했다.

“안녕히 가세요”

제이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을 향해 숨을 헐떡이며 뛰었다. 제이드가 검은 머리인 것이 알려지면 그녀의 부모는 제이드를 가만두지 않을 거였다. 명예라고는 한 줌도 없는 빈민가에서도 제이드는 집안의 수치였다.

***^***

하루가 지나도 잘생긴 남자의 얼굴은 잊히지 않았다. 제이드는 남자에 대해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빈민가의 남자들은 늘 땀냄새를 풍겼고, 멀끔한 귀족 남자들은 향수 냄새가 진동했다. 제법 잘생겼다는 평가를 받는 남자를 봐도 크게 마음이 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달랐다. 아마 현실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완벽한 외모라 그냥 자신이 꿈을 꾼 것만 같았다. 잘생긴 귀족 남자에 설레는 자신이 속물같이 느껴졌다.

“하아..."

제이드의 입에서 한숨이 절로 흘렀다. 지금 남자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식구들 빨래는 물론 동네에서 빨랫거리를 한 짐 받아서 온종일 두들겼더니, 몸은 금세 녹초가 됐다. 아파서 드러누울 때 말고는 쉬는 날 없는 고된 인생이었다.

제이드가 어제 일하고 받아 온 고기는 다 동생들 몫이었다. 오늘 내내 힘을 써야 하는 그녀에게는 감자 두 알이 다였다. 점심으로 먹은 사과 한 알은 멍들었어도 달아서 맛있었다. 제이드는 허기진 빈속을 냇물로 채웠다.

빨래를 마치고 겨우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유독 멀게 느껴졌다. 기운이 없어서 더 그런 것 같았다. 머릿속에는 얼른 집에 가서 저녁을 만들고, 쉬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다. 제이드의 발은 바빠졌다.

"어?"

오두막이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은 좁고 낡은 집 앞에 선 검은 마차를 제이드는 신기한 눈으로 바라봤다. 번화가를 오가는 마차를 자주 보긴 했지만, 흔히 보는 그런 마차와는 전혀 달랐다. 마차를 모는 검은 말 두 마리는 윤기가 좌르르 흘렸고, 적어도 4인용 이상은 될 만큼 크고 비싸 보였다. 마자 앞에 탄 마부는 제이드의 인기척을 느끼고 모자를 벗은 뒤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낯선 이의 방문에 잔뜩 긴장한 제이드는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눈치를 살폈다.

“저희 집에 어떻게 오셨어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들어가 보시죠."

마부는 제이드에게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마차를 몰고 왔을 뿐 자세한 내용은 모르는 것 같았다.

제이드의 머릿속에는 별생각이 다 들었다. 제 집에 어울리지 않는 으리으리한 마차를 보고 혹시 아버지가 도박으로 큰돈을 벌었나 싶었다. 그렇다고 저를 본척만척하는 아버지가 굳이 자신을 챙길 리는 없었다. 차라리 아버지가 저를 어딘가에 팔아넘기는 게 더 잘 어울렸다.

“제이드!"

큰 숨을 내쉬고 초라한 집의 문을 열자 제이드의 어머니 실비아는 밝은 얼굴로 제이드를 반겼다. 제이드는 그렇게 밝은 얼굴로 저를 부르는 어머니를 처음 봤다. 고생으로 주름진 실비아의 거무죽죽한 얼굴에는 홍조까지 올라와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한 구석에 놓인 낡은 식탁 앞에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실비아는 문 앞에 멍하게 서 있는 제이드를 끌고 재빨리 식탁 앞으로 데려갔다. 투박한 찻잔을 앞에 둔 남자가 제이드를 향해 돌아섰다.

"또 뵙네요."

제이드는 단숨에 남자의 얼굴을 기억해냈다. 계속 머릿속을 맴돌던 얼굴이었다. 제이드가 검은 머리인 걸 들켰던 그 남자. 그의 아름다운 얼굴을 다시 보게 된 건 좋았지만, 아무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검은 머리를 본 남자가 굳이 제 집을 찾아온 것은 불길했다. 실비아는 하얗게 질린 제이드의 허리를 쿡 찔렀다.

“뭐 하니? 인사해야지."

"아, 안녕하세요. 우리 집에 무슨 일로 오셨나요?"

떨리는 제이드의 물음에 대답한 건 남자가 아니라 신이 난 실비아였다.

“흑룡의 신부 모집에 너를 데려가고 싶다고 하시네."

"저를요? 저는 귀족도 아닌데....."

앞뒤 없는 실비아의 얘기에 당황한 제이드를 이해시키기 위해 남자가 나섰다.

“저는 모건 공작가의 집사 어윈 트래비스입니다. 아가씨는 모건 공작가의 영애로 입양되어 흑룡의 신부가 될 준비를 하시면 됩니다."

제이드는 어원의 말을 들으면서도 무슨 말인지 바로 정리가 되지 않았다. 모건 공작은 그레트나 최고의 귀족이었다. 그런 집에서 자신을 입양한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너무 허무맹랑한 이야기라 실감이 안 나서 놀랍지도 않았다.

“아무래도 흑룡의 신부가 되기 위한 기본적인 소양을 쌓으려면 시간이 걸릴 겁니다. 석 달밖에 여유가 없으니, 저와 바로 가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제이드는 어머니를 쳐다봤다. 실비아는 밝은 얼굴로 당연히 그러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제이드는 흑룡의 신부가 되기 싫었다. 말이 좋아 신부지 사람들은 입을 모아 인신 공양의 제물이라고 했다. 아직 아무것도 못 해 봤는데, 스무 살에 흑룡에게 잡아먹혀서 인생이 끝난다니 끔찍했다. 지금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저를 사랑해 주는 남자를 만나 소박하고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고 싶었다.

“전 싫어요."

제이드는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나 실비아의 억센 손이 바로 제이드를 잡았다. 실비아의 난폭한 손길에 제이드의 몸이 움츠러들었다. 제이드를 보는 실비아의 시선에는 늘 혐오가 담겨 있었다. 제가 낳은 저주. 가족의 불명예. 차마 제 자식이라 죽일 순 없었던.

“뭐가 싫어. 공작님의 영애가 되기가 쉬운 줄 알아? 흑룡의 신부는 아무나 되냐고."

“나쁜 거니까 나한테 시키려는 거잖아요."

울컥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어릴 때부터 동네에서 일손이 필요한 집은 안 가 본 적이 없었다. 제 또래들은 다 학교에 다니는데, 저는 일을 하러 이 집 저 집을 전전하는 게 창피했다. 하지만 검은 머리인 딸을 버리지 않고 키워 준 부모님에게 감사하자고 늘 마음을 다잡았다. 그렇게 제이드는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부모가 시키는 일은 아무리 힘든 일이어도 묵묵히 해 왔다. 그건 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렇게 빤히 보이는 사지로 내몰리긴 싫었다.

“진정하세요. 나쁜 일은 없을 겁니다. 약속해요."

흥분한 제이드를 안정시키려는 어윈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다정했다. 하지만 제이드는 믿지 않았다. 좋은 일이 저에게 있을 리 없었다. 행운의 여신은 저를 위해 웃어 주기는커녕 저를 쳐다본 적도 없는 것 같았다.

“싫... 싫어요."

제이드는 저를 잡은 실비아의 손을 뿌리치고 집 밖으로 뛰어갔다. 평상시에는 늘 고분고분했던 제이드가 반항하자, 실비아는 당황했다. 하여튼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제이드! 너 이리 안 와!"

뒤에서 악을 쓰며 따라오는 실비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제이드는 집 밖을 나와 야트막한 야산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렸다. 죽어도 짐승의 신부 따위는 되기 싫었다.

***^***

마리온은 자기 전에 현관 밖에 켜 놓은 작은 등불을 끄려고 밖으로 나왔다. 칠순을 훌쩍 넘긴 그녀의 발걸음은 느릿느릿했다.

"에구머니나!"

마리온은 현관문 옆에 작게 몸을 웅크리고 자는 검은 인영을 보고 깜짝 놀랐다. 등불 밑은 어두웠지만, 마리온은 두건을 보고 금세 제이드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마리온이 제이드의 어깨를 부드럽게 흔들자 제이드가 눈을 번쩍 떴다.

"안녕하세요!"

"아가, 왜 이러고 있어. 날 부르지 않고."

"잘 지내시나 궁금해서......"

제이드는 우물쭈물하고 말을 흐렸다. 누군가에게 아쉬운 소리 한 번 못 하고 산 제이드는 마리온에게도 도와 달라는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내가 보고 싶었구나. 고맙게도."

마리온은 제이드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제이드에 대해 꽤 많이 알고 있었다. 한때 빈민가의 아이 중에는 마리온의 손을 안 거친 이가 없었다. 산파였던 그녀는 제이드가 태어날 때도 함께 있었다. 실비아의 다리 사이에서 보이는 핏덩이의 머리가 까맣다는 것을 알았을 때 마리온은 속으로 깊은 한숨을 쉬었다. 아이의 운명이 너무 가혹했다.

검은 머리의 아이를 보고 아내의 부정을 탓하는 제이드의 아버지에게 먼 조상 중에 귀족의 피가 섞였다면, 검은 머리가 나올 수 있다고 얘기해 줬다. 평민의 자식이었던 마리온의 고조할머니도 검은 머리였다는 말에 제이드는 바로 버림받지 않았다. 제이드는 부모에게 사랑을 받지 못했지만, 마리온 덕분에 살 수 있었다.

"들어가자. 따뜻한 차 한 잔 줄게."

마리온은 어쩔 줄 모르고 꼼지락거리는 제이드의 두 손을 잡았다. 스무 살 아가씨의 손치고는 너무 딱딱하고 거칠었다. 제이드는 기력이 떨어져 혼자 집안일을 다 돌보기 힘든 마리온의 집을 종종 찾아와 일을 도와주는 고마운 아이였다. 마리온은 제이드를 집으로 들이고 주방에 있는 테이블에 앉혔다.

"무슨 차 줄까?"

"아무거나 좋......"

제이드가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꼬르륵 소리가 적막한 주방에 크게 울렸다. 제이드의 얼굴은 새빨개졌고, 마리온은 호쾌하게 웃었다.

“배부른 걸 줘야겠구나."

염치없다는 걸 알지만 제이드는 너무 배가 고파 거절하지도 못했다. 마리온이 분주하게 주방에서 움직이자 제이드가 벌떡 일어났다.

“제가 할게요."

"오늘은 일하러 온 거 아니잖니. 그냥 맛있게 먹어 줘."

극성스러운 아들 셋을 잘 키워 장가보낸 마리온은 금세 제이드 앞에 따끈따끈한 요리를 내왔다. 제이드는 침을 꿀꺽 삼켰다. 마리온은 어서 먹으라고 손짓했다.

"잘 먹겠습니다."

제이드는 하얗게 김이 올라오는 고기 스튜와 채소가 잔득 들어간 오믈렛을 허겁지겁 먹었다. 마리온은 제이드가 밥을 다 먹을 때까지 옆에서 지켜봤다. 또래보다 제법 키가 큰 동생들과 달리 제이드는 너무 작고 왜소했다.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아서 마리온은 제이드가 더 안쓰러웠다.

"무슨 일 있니?"

“모건 공작가로 입적해서 흑룡의 신부가 되라고 하셔서......"

마리온은 고개를 갸웃했다. 딸을 흑룡의 신부로 만들고 싶은 귀족들이 많다는 것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모건 공작이 굳이 제이드를 입양한다는 것에는 조금 놀랐다.

“널 왜?"

“흑룡의 신부는 사실 잡아먹히는 제물이니까 자기 딸을 보내고 싶지 않은 거 아닐까요?"

“내가 들은 얘기로는 흑룡의 신부를 배출한 가문은 황제도 부러워할 만큼 호의호식한다던데."

"아무도 본 적 없잖아요."

"음...... 만약 흑룡의 신부가 제물이라면, 굳이 귀족들이 딸을 보내진 않았겠지."

마리온은 근방에서 가장 똑똑한 여인이었다. 제이드는 마리온의 말을 믿고 싶지만 자꾸 의심이 들었다. 사람들이 그랬다. 딸을 팔아 호강하고 싶은 가난한 귀족도 많다고.

“그럼 모건 공작은 왜 저를 입양할까요? 이미 충분히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는데."

얼굴에 살이 워낙 없어서 커다렇다 못해 퀭해보이는 제이드의 선명한 초록색 눈이 호기심으로 가득 찼다. 그녀의 표정을 보고 마리온은 작게 웃었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단다. 모든 걸 다 가진 황제도 전쟁으로 옆나라를 뺏으려고 하잖니. 원래 있는 사람 욕심이 더 무섭지."

하루 세끼만 배불리 먹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사는 제이드에게는 잘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다.

“만약 네가 흑룡의 신부가 되지 않으면?"

“바로 공작가에서 쫓겨날걸요."

"그래도 네 인생을 바꿀 계기가 되지 않을까? 집을 떠나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

"우리 가족은요? 엄마 혼자 동생들을 어떻게 키워요?"

제이드가 집을 떠나고 아빠가 다시 돌아온다고 해도 밥벌이를 한다는 보장이 없었다. 지금도 제이드의 아빠는 돈이 다 떨어지면 집에 찾아와 돈을 내놓으라고 난리를 쳤다. 만약 엄마 혼자 동생들을 키운다면, 동생들은 다니고 있는 학교도 졸업 못 하고 허드렛일을 시작할 거였다.

"넌 어떻게 하고 싶은데?"

마리온의 물음에 제이드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하루하루 사는 게 너무 버거워 구체적으로 미래를 생각 해 본 적이 없었다. 마리온은 혼란스러워하는 제이드의 손을 다정하게 잡아 주었다.

"이제는 네가 하고 싶은 대로 살아 보면 어때? 동생들은 네 자식이 아니잖아."

"......"

“지나고 보니까, 남편과 아이가 없을 때 하고 싶은 거 다 해야겠더라고, 넌 성실하고 착한 아이니까. 어디를 가든 잘 살 거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하고 싶은 걸 해 봐."

“감사합니다.”

아무리 해 준 게 없는 가족이라지만, 제이드에게 가족은 저를 지탱해 주는 마지막 끈이었다. 그녀에게는 저를 구박하는 가족이라도 절실했다.

“푹 쉬어.”

마리온은 제이드에게 묻지도 않고 잠자리를 먼저 내줬다. 그리고 마음껏 쉬다 가라고 했다. 제이드는 마리온의 집에서 집안일을 도우며 사흘을 보냈다. 마리온의 말대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뭔지 생각해 봤는데, 남이 시킨 일만 했던 제이드는 제가 하고 싶은 일을 찾기가 더 어려웠다. 하지만 마리온과 마음 편히 살아 보니 흑룡의 신부가 되기 싫다는 생각은 더 강해졌다. 흑룡이 짐승이 아니더라도, 부귀영화를 가져다준다고 해도, 처음 보는 남자의 신부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저 집에 가서 짐 좀 챙겨 올게요. 엄마랑 얘기도 좀 해야 하고요.”

마리온은 제이드가 원한다면 흑룡의 신부가 정해질 동안 함께 이곳에 계속 살아도 좋다고 허락했다. 마리온의 집에서 머무는 동안 제이드는 마리온의 집으로 누군가 찾아오면 어떻게 하나 조마조마했지만, 찾아오는 사람은 없었다. 어쩌면 흑룡의 신부가 되기 싫다고 도망간 제이드의 입양을 포기한 건지도 몰랐다.

“이 밤에?”

흔들의자에 앉아 뜨개질하고 있던 마리온은 불안한 눈으로 제이드를 바라봤다. 야트막한 산이라고 해도 밤은 위험했다.

“달이 밝잖아요. 눈 감고도 갈 수 있어요.”

"음......"

“낮에는 사람들이 찾아올지도 모르잖아요. 얼른 다녀올게요."

제이드는 마리온을 안심시키려 밝게 웃었지만, 마리온은 불안했다. 나이가 들면 걱정이 많아지는 법이었다.

"조심해서 다녀오너라.”

더 만류하지 못하고 마리온은 제이드를 배웅했다. 며칠 잘 먹고, 잘 잤다고 살이 조금 올라서 보기 좋았다. 이제 좀 제이드 얼굴이 피나 싶었는데, 집에 갔다가 다시 못 돌아올 것 같은 생각이 자꾸 들었다. 마리온은 현관에 있는 작은 등을 제이드의 손에 쥐여 줬다.

“이 등이라도 들고 가. 넘어질라.”

“감사합니다.”

꾸벅 인사를 하고 떠나려는 제이드를 마리온이 다시 불렀다. 무슨 일인가 싶어 마리온 앞에 돌아온 제이드를 마리온은 꼭 안아 주었다.

“하고 싶은 일을 해. 알았지?"

“네.”

마리온은 뒤를 돌아보고 손을 흔드는 제이드의 등불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녀의 뒤를 지켰다. 왜 눈물이 나는지 모를 일이었다.

"까악!”

발목을 스치는 젖은 나뭇가지에 놀란 제이드가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하도 많이 다녀서 눈을 감고 와도 되는 길이라고 생각했지만, 어두운 산은 무서웠다. 마리온이 준 등이 아니었으면, 다시 마리온으로 집으로 돌아갔을 것 같았다. 빨리 집으로 가고 싶어 숨이 차도 속도를 올렸다.

야산을 넘어 내리막길에 다다르자 저 멀리 제이드의 집이 보였다. 저에게 뭐 하나 해 준 것 없는 집인데도 창가의 불빛이 저를 반기는 것 같았다. 제이드는 노래처럼 마리온이 해 준 말을 중얼거렸다.

“하고 싶은 일을 해.”

제이드는 마리온이 해 준 말을 되뇌었다. 배움의 기회가 많지 않았던 제이드는 주변 사람들이 해주는 좋은 말이 있으면 잊지 않으려고 반복해서 생각하고 외웠다.

“후....”

제이드는 집 앞에 도착해서 등불을 껐다. 계속 움직이다 멈췄더니 땀이 더 송골송골 올라오는 것 같았다. 깊은숨을 내쉰 제이드가 현관문을 조심히 열었다. 엄마는 아직도 일하고 있을 것 같았고, 일찍 자는 동생들은 잠들어 있을지도 몰랐다. 혹시 가족들 잠을 깨울까 봐 살금살금 집으로 들어간 제이드는 깜짝 놀랐다. 집 안은 온갖 짐이 흐트러져 엉망진창이고, 한눈에 보여야 할 가족들도 없었다.

"설마......."

제이드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집 안을 살폈다. 아직 쓸 만한 짐들이 그냥 버려져 있었다. 딱히 갈 데도 없는 식구들은 저녁이면 이 좁은 집에 모여 늘 함께 있었다. 깔끔한 성격의 엄마는 집이 난장판이 되는 것을 두고 볼 사람이 아니었다.

“엄마, 빌, 캘빈, 롯지.......”

제가 공작가의 양녀가 되지 않겠다고 해서 가족을 다 내쫓은 건지도 몰랐다. 아니, 다 죽였는지도 몰랐다. 제이드의 커다란 눈에 금세 눈물이 방울방울 맺혔다. 그때, 주저앉아 우는 제이드의 뒤로 열어 둔 현관문이 쿵 하고 닫혔다. 제이드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잘 돌아왔어요. 아가씨.”

지금, 제이드가 가장 피하고 싶은 남자의 목소리였다.

***^***

사람 서넛은 너끈히 누울 수 있는 크기에, 몸이 빠져들 것같이 푹신한 침대가 불편해서 제이드는 잠이 오지 않았다. 커다란 벽 한쪽을 차지하는 창 밖에 보이는 먼 하늘의 달마저 낯설었다.

“이게 뭐지.”

제이드는 제 몸을 포근히 감싸고 있는 부드럽고 가벼운 이불을 꽉 쥐었다. 지금, 이 순간이 현실같이 느껴지지 않았다.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식구들은 죽은 것이 아니었다. 공작가에서 준 돈을 받고 사라졌다. 제이드를 찾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믿을 수 없다고 하는 제이드에게 어윈이 내민 것은 한 통의 편지였다.

[제이드, 흑룡의 신부가 되어라. 그것이 우리 가족을 살리는 마지막 길이야. 부탁한다. - 실비아]

제이드는 엄마의 글씨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글을 많이 써 보지 않아 어수선한 아이 같은 글씨였다. 제이드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져 종이를 적셨다. 검은 머리 딸을 계속 낙인처럼 여겼던 엄마는 결국 제이드를 버렸다.

“저랑 함께 가시면, 가족들은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훌쩍이는 제이드는 어원을 원망스러운 눈으로 쳐다봤다. 어윈은 서럽게 우는 제이드가 이해되지 않았다. 주변의 이야기를 조금만 들어도 그녀의 가족들이 제이드를 얼마나 홀대했는지 쉽게 알 수 있었다. 제이드에게 가족은 무거운 짐에 불과하다고 여겼던 어윈은 제이드가 이렇게 슬퍼할지 몰랐다. 그는 당황했지만, 어쨌든 제이드를 공작가에 데리고 가는 게 먼저였다. 어원은 우는 그녀를 달래는 것보다, 이 상황을 빨리 이해시키는 것을 택했다.

“제가 오늘 안 왔으면요?"

어원은 제이드가 떠난 후, 이 집에서 계속 제이드를 기다렸다. 그녀가 돌아올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갑작스러은 제안을 받은 제이드가 마리은의 집에서 머리를 식히고 오는 시간도 필요할 터였다.

“아가씨가 어디 있는지 몰라서 그냥 둔 게 아니에요. 마음 정리할 시간을 드린 거죠."

자신이 꼭꼭 숨어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어원은 이미 다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제이드는 혼란스러운 마음을 다스릴 시간이 좀 더 필요했다.

“저는 아직.......”

“공작님이 가족의 이사 비용을 그냥 지급하셨다고 생각지는 않으시지요?"

"......"

"아, 혹시 가족들이 불행했으면 하나요? 그것도 가능합니다.”

어원은 두 눈을 접고 웃으며 상냥하게 말했지만, 제이드에게는 이보다 더한 협박이 없었다. 만약 제이드가 어윈의 말을 따르지 않으면, 분명 가족의 안전을 물고 늘어질 거였다. 더는 아무것도 바랄 수 없는 가족이지만, 제이드는 적어도 그들의 불행을 원하지는 않았다. 이제 정말 그들을 놓아줄 때인 것 같았다. 제이드는 제게 선택권이 없음을 알았다.

“알았어요. 짐 좀 챙길게요.”

"이 집에 있는 짐 중에 기념할 게 있습니까?"

당연히 그럴 만한 건 없었다. 제이드가 가진 몇 개 안 되는 소지품들은 다 생필품이었다. 지금도 그저 제가 늘 쓰는 두건이나 갈아입을 옷 같은 것을 챙길 생각이었다.

“그런 건 없는데요.”

“그럼, 그냥 가시죠. 필요한 것은 다 준비해 놨습니다.”

제이드는 당황했다. 벌써 다 무엇을 준비해 놨다는 것인지 몰랐다. 어원은 성큼성큼 현관문 앞으로 걸어가 문을 열었다.

“가시죠.”

어윈의 손짓에 제이드는 그 뒤를 따랐다. 어윈은 자신의 집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그는 집 뒤에 숨겨 놓은 윤기 나는 흑마 앞으로 갔다. 어원은 사랑스럽다는 듯 흑마를 한 번 쓰다듬고, 줄을 풀었다. 제이드는 숨죽여 어원을 지켜봤다. 그는 말을 끌고 제이드 앞으로 왔다.

“말 타 본 적 있어요?”

"아니요.”

"마차를 준비 못 해서 죄송합니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어원은 조심스럽게 제이드를 들어 올려 말에 앉혔다. 제이드는 어윈의 행동에 놀라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 이렇게 저에게 상냥하게 대하는 사람은 처음이라 제이드는 당황했다.

길이 잘 든 말은 제이드를 태우고도 움직이지 않았지만, 저 혼자 무서워서 중심을 못 잡고 흔들리는 제이드의 팔을 어원이 잡았다.

“가만히 있어요. 뒤에 탈게요.”

어원은 제이드를 잡은 채로 등자를 밟고 가볍게 말에 올라 제이드의 뒤에 앉았다. 고삐를 고쳐 잡는 어윈의 팔 사이에서 제이드는 잔뜩 몸을 굳혔다. 제이드는 처음 타 보는 말도, 너무 가깝게 제 등 뒤에 있는 어윈도 낯설어 불편했다.

“저는 뭐를 잡아야 하죠."

제이드는 말에 처음 타 보는 거라 중심 잡는 게 쉽지 않았다. 말이 움직이면 이렇게 버티고 앉아 있는 것도 힘들 거였다.

“아, 제가 잡아 드립니다.”

어원이 제이드의 허리를 긴 팔로 가볍게 감고, 말을 움직이는 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어원이 박차를 가하자 말은 쉽게 속도를 냈다. 어떻게든 중심을 잡으려고 허리를 세우고 있던 제이드는 말이 속도를 내자 중심을 잃고 어윈의 품으로 쓰러졌다. 다시 몸을 세우려고 하자, 귓가에 감미로운 어윈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냥 편히 기대요. 한참 가야 해요.”

편히 기댄다고 진짜 편한 게 아니었다. 제이드의 몸이 흔들릴 때마다 더 꽉 잡는 어원의 힘센 팔과 말이 될 때마다 제이드의 등 뒤에 딱 붙어 흔들리는 어원의 탄탄한 가슴에 제이드는 어쩔 줄 몰랐다. 남자의 품이 주는 모한 박력과 온기, 그리고 든든함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힘들죠? 거의 다 왔어요.”

흑마는 그레트나의 번화가를 지나 한참을 달렸다. 달빛이 비친 호수를 낀 숲속 길은 마차 두어 대가 같이 다녀도 모자라지 않을 만큼 넓고, 편평하게 잘 닦여 있었다.

“저기가 모건 공작의 저택입니다.”

멀리서 반짝이는 불빛을 보고 어윈이 말했다. 그 불빛은 공작가의 대문 입구 양쪽에 켜 놓은 등불이었다. 어원과 제이드가 탄 말이 입구로 다가가자 문지기 두 사람이 서둘러 육중한 문을 양쪽으로 열었다.

“어서 오십시오.”

“수고 많으십니다.”

간단한 인사가 오가고, 대문 안으로 들어가자 어원이 말을 천천히 몰았다. 그 덕에 제이드는 여유 있게 공작의 저택을 구경할 수 있었다. 어두운 밤이어도 쉽게 알 수 있을 만큼 기세가 대단했다. 너른 잔디와 커다란 분수, 곳곳에 놓여 있는 조각물, 잘 가군 꽃과 나무들로 가득 찬 정원은 너무 조화롭고 아름다워서 감탄 이 절로 나왔다.

“너무 예뻐요.”

"낮에 보면 더 좋을 겁니다. 내일 구경시켜 드리지요.”

어원은 끝이 제대로 안 보이는 위압감 있는 건물 앞에 말을 세웠다. 중앙 건물은 4층 높이였고, 양옆에 이어져 있는 건물은 3층 높이였다. 모든 벽에는 커다란 창문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제이드는 몇몇 귀족 집에서 일한 적 있지만, 이렇게 큰 저택이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한 적 없었다.

“여기가 본관입니다.”

먼저 말에서 내린 어윈이 제이드를 향해 팔을 뻗었다. 제이드는 어원의 억센 팔에 몸을 맡기고 말에서 내렸다. 말을 타느라 너무 힘을 주고 있었더니, 다리가 뻐근했다.

“오셨습니까?”

본관 앞을 지키던 하인 중 하나가 어원에게 달려왔다. 어원은 하인에게 뭐라고 작게 이야기를 건넸다. 어원과 간단히 대화를 나는 하인은 마구간으로 말을 데려갔다.

"들어가시죠.”

저택의 문을 열자 한눈에 담기지 않는 로비가 보였다. 어둑어둑한 불빛 사이에서도 금색으로 휘감긴 높은 기둥, 양쪽으로 휘어져 올라가는 계단, 화려한 무늬의 카펫, 큼직한 조각상 등 보는 것마다 위용이 대단해서 제이드의 눈이 커졌다. 이게 진짜 사람 사는 집이 맞나 싶었다.

“도대체 이렇게 큰 저택에는 뭐가 있나요?"

“로비와 연회실, 응접실, 서재, 사우나, 식당, 드레스룸 등이 있습니다. 침실이 몇 개인지는 확실히 모르지만, 스무 개 이상은 될 겁니다.”

제이드는 계단을 오르는 어원의 뒤를 졸졸 쫓으며, 집을 구경하기 바빴다. 긴 복도에 걸려 있는 그림들과 중간중간 놓여 있는 고급스러은 화분에 꽂힌 꽃들이 제이드의 눈길을 확 사로잡았다. 3층의 중간에 있는 방 앞에서 어원이 걸음을 멈췄다.

“여기가 아가씨가 머무르실 방입니다.”

어원이 문을 열자 제이드는 환하게 불을 밝혀 놓은 방을 슬쩍 살펴보았다. 방이라고 하는데, 제이드가 살던 집보다 훨씬 넓었다. 하얀색 천이 늘어진 캐노피 침대와 한쪽 벽을 가득 채우고 있는 화려한 태피스트리, 묵직하고 고풍스러운 가구들이 조화롭게 놓여 있었다. 넋을 놓고 구경하는 제이드를 보고 살짝 웃은 어원이 그녀에게 손짓했다.

“이쪽은 욕실입니다.”

어윈은 한창 방을 구경하던 제이드를 데리고 욕실 문을 열었다. 방보다는 작았지만, 욕실의 크기도 상당했다. 한쪽 벽에는 작은 벽난로가 있었고, 두세 사람은 너끈히 들어갈 커다란 욕조 옆에는 밖을 내다볼 수 있는 둥근 창이 나 있었다. 제이드에게는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마음에 드십니까?”

이렇게 좋은데, 마음에 안 든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싶었다. 제이드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모건 공작이 왜 자신을 입적했는지, 이제 알 것 같았다. 이런 저택을 모자람 없이 유지하려면 정말 흑룡의 도움이 없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똑똑, 욕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제이드가 깜짝 놀랐다. 그러나 어윈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여상히 답했다.

“들어와요.”

메이드복을 입은 나이 지긋한 여성이 욕실로 들어왔다. 인자한 인상의 그녀는 방긋 웃으며 제이드와 어원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제이드는 그녀보다 더 깊이 허리를 숙이고 꾸벅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아가씨의 시중을 맡은 앨런 입니다.”

“아...... 저는 제이드 멀링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자신의 시중을 들 하녀는 꿈에도 생각해 본 적 없었던 제이드는 어쩔 줄 몰라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어윈은 제이드의 인사에 부드럽게 토를 달았다.

“이제 아가씨는 제이드 모건입니다. 하녀에게는 고개 숙여 인사하지 않아도 되고요.”

"아...... 네.”

"앨런이 목욕 준비를 할 동안, 식사 먼저 하시죠.”

"저는 저녁을 먹었는데요.”

어원은 제이드가 저녁을 먹었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1층 식당에 데려갔다. 스무 명은 너끈히 앉을 수 있는 긴 테이블에 이미 두 사람을 위해 준비된 음식은 따끈하게 김을 내고 있었다. 제이드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음식들이었다. 더군다나 덩어리째 노릇노릇하게 구운 고기의 냄새는 부른 배도 꺼지게 할 만큼 식욕을 돋게 했다. 아름답게 장식까지 된 음식들은 무슨 맛일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많이 드세요.”

어원은 직접 먹기 좋은 크기로 고기를 잘라 제이드의 접시에 올려 줬다. 제이드는 어윈을 힐끔힐끔 훔쳐봤다. 어원이 그녀에게 따끈하게 준비된 물수건을 건넸다.

"손 먼저 닦으세요.”

제이드는 손을 꼼꼼하게 닦으며 어윈의 눈치를 계속 봤다. 앞에 놓인 갓 구운 빵과 샐러드, 따뜻한 수프를 제가 먹던 대로 먹어도 되는지 몰랐다. 어원은 자신만 바라보고 있는 제이드의 손에 포크를 들려 줬다.

"오늘은 예의 따지지 말고 그냥 먹을까요? 저도 배가 아주 고파서.”

“네.”

싱긋 웃는 어윈의 말이 배려라는 것을 제이드는 금세 알아챘다. 그래도 예의 없이 먹으면 창피할까 봐 제이드는 어원이 먹는 대로 똑같이 따라 먹었다. 어윈은 먹는 것도 아주 우아했다. 배가 고프다고 했는데, 어떤 음식도 급하게 넘기는 법이 없었다. 어윈은 음식의 맛을 느긋하게 즐기는 사람처럼 보였다.

“앞으로는 잘 드셔야 합니다. 제가 식사와 간식을 꼼꼼히 챙겨 드릴게요."

“네.”

제이드는 포크를 쥔 제 손이 부끄러웠다. 살점 하나 없이 마디가 툭툭 불거진 손은 마른 가지 같았다. 하얗고 매끈한 어윈의 커다란 손을 보니 당장 포크를 놓고 제 손을 숨기고 싶었다. 어원은 그런 마음도 모르고, 먹기 좋게 음식을 잘라 제 접시에 올렸다. 음식은 모두 입에서 살살 녹았다. 제이드는 배가 불렀지만, 거절 하지 않고 어원이 주는 것을 다 먹었다.

"잘 먹으니 보기 좋네요.”

어느새 깔끔하게 식사를 마친 어윈은 제이드가 오물오물 먹는 것을 흐뭇하게 보고 있었다. 어윈의 시선 때문에 제이드는 음식이 어디로 들어가는지도 몰랐다.

“다 드셨으면 가실까요?”

식사를 마친 뒤 제이드는 어원의 뒤에 바짝 붙어 걸었다. 이 커다란 저택에서 의지할 사람은 어윈밖에 없었다. 어원은 우아하게 걸어 제이드를 방으로 데려갔다.

"편히 쉬길 바랍니다.”

어원은 제이드의 머리로 손을 뻗었다. 제이드는 그의 커다란 손이 눈앞으로 다가오자, 저를 때리던 아버지의 손이 떠올라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겁먹지 말아요.”

어원은 조심스럽게 검은 머리를 단단히 가리고 있는 두건을 벗겼다. 가족들 앞에서도 벗어 본 적 없는 두건이 벗겨지자, 제이드는 당황해서 제 머리를 두 손으로 가렸다. 남 앞에서 이렇게 제 머리를 드러낸 적이 없어서, 벌거벗은 것같이 창피했다. 제이드는 거의 울먹이면서 발을 동동 굴렀다.

"돌려주세요.”

"앞으로 두건 쓸 일은 없을 겁니다.”

제이드는 어윈의 단호한 말이 믿기지 않았다. 어윈은 꽁꽁 묶어 놓은 제이드의 머리 끈까지 풀었다. 제이드의 검은 머리카락이 어깨 위로 스르륵 툭 떨어졌다.

“이제 검은 머리를 마음껏 자랑해도 돼요.”

제이드는 상냥하게 웃고 있는 어윈을 멍하니 바라봤다. 검은 머리가 자랑이 되다니. 제이드는 혼란스러웠다.

“어떻게 그래요?”

“아가씨는 제이드 모건이니까요.”

어린이 사라진 뒤 제이드는 앨런의 시중을 받으며 우유 목욕을 하고, 몸에 착 감기는 잠옷을 입고, 잠자리에 들었다. 폭신한 이불에 온몸을 웅크리고 누은 제이드는 제게 닥친 현실이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어원은 누가 봐도 멋진 남자였지만, 믿을 수 있는 남자인지는 모호했다. 잠이 오지 않아 한참을 뒤척인 제이드는 어윈의 행동을 하나하나 되짚다가 겨우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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