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화 〉 테르세르로 (3)
* * *
“얘가 걔라고?”
에이르를 보는 건 이번이 두 번째다.
처음은 카나츠미의 궁에서 짧게 한 번. 그리고 지금이 두 번.
그날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에이르 여왕은 라니아에 버금가는, 오히려 더하지 않을까 싶은 파격적인 차림새를 보였다.
타오르는 붉은 머리칼에 외형은 날카로우면서 예쁜 미모.
가슴 사이와 옆구리, 허벅지까지 훤히 드러나는(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만들었는지 궁금한) 드레스까지 입은 여왕.
‘자기 백성들의 성욕을 발산시키려는 의도야, 뭐야?’
진짜 저런 차림새로 다니는 의도가 무엇인가? 그냥 몸매 과시? 아니면 성적 취향? 혹시 바보라서?
옛날 벌거벗은 임금님 이야기의 한 장면이지 않을까 하는 괴상한 망상을 잔뜩 펼치며 에이르를 멀거니 쳐다봤다.
“예. 제가 저번에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미소를 머금고 나를 소개한 알케테르가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어딜 손을 올려! 네가 나랑 친해? 라면서 뿌리치고 싶지만 애써 참았다.
“이상한 체질의 인간입니다. 몸과 피에서 달콤한 냄새와 마약보다 심각한 중독성을 가진 맛을 가졌는데, 위험할 정도입니다.”
“네가 그 정도로 말할 정도면 도대체 어느 정도인 거니?”
에이르가 조금씩 호기심을 보였다.
왕좌에서 엉덩이를 떼고 일어선 그녀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아, 또 피를 먹여야겠구나. 싶은 생각에 목 단추를 풀고 목을 드러내려는데, 알케테르가 막았다.
“폐하. 송구하오나 가까이 오시면 안 됩니다.”
발걸음이 멈춘 에이르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왜?”
“말했듯, 이자의 냄새에 대한 중독성은 폐하일지라도 위험하게 만드는 악마의 냄새를 띄고 있습니다. 그 맛은 더욱이 배가 될 터.”
“그게 무슨 문제더냐? 내가 그 정도도 못 버틸 것으로 보이느냐?”
하지만 알케테르는 면목이 없단 것처럼 고개를 푹 숙이며 진언했다.
“폐하. 이 무례한 기사를 용서해주시길 바랍니다. 이자의 피를 당장에라도 폐하께 선물로 드리고 싶으나, 중독성에 빠진 폐하께서 어떤 부작용을 느낄지 저는 두렵기만 하옵니다.”
역시 시미르를 가르친 놈답게 대사부터가 남다르다.
“부디 제게 시간을 주시옵소서. 부작용이 없을 준비를 마친 다음에 폐하께서 마음껏 즐기실 수 있도록 이자를 대령하겠나이다.”
그런데 알케테르의 목적을 잘 모르겠다.
나를 나중에 줄 거면 괜히 안달 나게 만드는 게 아니라 나중에 밝히고 주는 게 더 낫지 않겠는가?
왜 에이르가 성질나게 할 상황을 만든단 말인가?
“네놈… 설마 나를 기다리게 둘 셈이냐? 나보고 기다리라고?”
역시 내 예상대로 기다리는 행위 자체에 질색하는 에이르가 나섰지만, 알케테르는 유려한 말솜씨를 뽐냈다.
“어찌 폐하의 고귀한 시간을 낭비하도록 만들겠습니까? 그 전에는 이자의 피를 물과 술에 희석해 대령하겠습니다. 요리에도 첨가하여 드릴 터이니 부디 이해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아니다. 저건 오히려 에이르를 안달 나게 만드는 방법이다.
내 피란 게 희석된다고 해서 효과가 반감되는 건 아니다.
물론 조금은 반감될 수 있겠지.
하지만 효과는 늘 최상의 상황을 만들었다.
오히려 에이르를 더 미치도록 만들게 될 테다.
“그럼 알겠다. 내 너를 봐서라도 기다리도록 하마. 감히 나를 실망시키진 않겠지?”
“그럴 일이 없사오니 기대하시면서 기다리시면 되실 겁니다. 저녁에 이 자의 피를 섞은 와인을 대령하겠습니다.”
“그래. 얼른 가져오너라. 만약 이만큼이나 나를 기다리게 해놓고 그 맛이 형편없다면 네게 큰 벌을 내리겠도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홀에서 벗어나 복도를 거닐 때, 난 줄곧 답답한 궁금증을 털어놓았다.
“방금 왜 그런 거야?”
알케테르는 걸으면서 나를 흘긋 돌아봤다.
“왜냐니. 감 오잖아.”
“여왕을 안달 나게 하는 거? 그러다가 못 참고 너를 기만죄로 체포하면 어쩌려고 그러냐?”
“흐흐, 그런 상황을 원하는 거지.”
뭐? 그런 상황을 원한다고?
“체포되려는 거야? 이 자식. 그런 취향이구나.”
“뭐? 아니야. 당연히 여왕 폐하를 압박하는 거잖아.”
아니라면 뭐 할 말 없고. 그런데 압박이라니?
알케테르와 내가 계획하는 궁극적 목표는 역시 에이르 여왕을 함락시키는 것.
그러기 위해선 내 피를 당장에라도 여왕에게 먹여 괴롭힌 다음에 내 소유로 만들어야 하는데, 오히려 먹이지 않고 압박한다니?
“좀 설명해주시지?”
“흐응, 조금만 생각해봐도 알 텐데.”
키득키득, 웃은 알케테르는 하나의 방에 나를 안내했다.
친위대 단장 집무실. 그러니까 알케테르 전용의 집무실이다.
“자 일단 앉아서 얘기하자고.”
고급 원목으로 우아하게 깎고 마감한 화려한 책상을 사이에 두고 우리는 마주 본 채로 앉았다.
푹신한 의자에 등을 기대고 마음 편하게 누운 알케테르가 눈동자만 흘긋 떠 설명했다.
“너 여왕이나 그 외 흡혈귀들을 어떻게 조련했지?”
갑자기 남의 경험담을 묻는다고?
내가 나랑 잠자리를 가진 여자들을 네놈에게 자랑 마냥 떠들어놓겠냐?
“말하겠냐? 이 매너라곤 쥐똥만큼도 없는 놈아.”
“내가 네 경험담 듣고 흥분이라도 할 거로 보여? 대강 설명해봐.”
도대체 뭘 듣고 싶은 건지. 조금씩 기억을 더듬어 말했다.
“별거 없지. 내 피를 먹게 하거나, 냄새를 맡게 하면 알아서 흥분해버리거든. 그러면 그냥 섹스하는 거야.”
“그러니까 네가 그 여자들을 정복하지 못하는 거야.”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내 섹스 기술에 훈수라도 두겠다는 소린가?
“네가 뭘 알아. 그녀들은 내 성노예인데.”
“그게 성노예냐? 성노예의 정의를 몰라?”
책상에 몸을 기울여 기댄 알케테르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성적으로 네가 뭘 하든 거역하지 않고 따르는 노예라고. 네가 때리면 맞고, 덮치면 몸을 맡기고, 죽이면 죽는 대로 따르는 노예라고.”
“…죽일 생각까지는 없어. 그게 왜?”
“넌 노예를 만든 게 아니라 네 친구를 만든 거잖아.”
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라고 말하고 싶지만 문득 생각해보니 또 틀린 말은 아니다.
에밀리나 레베나, 메이, 시미르를 떠올려보면 내가 주도를 하고 다룬다고 보지만 그건 흥분했기에 그랬을 뿐.
그 외로는 노예보단 친구에 훨씬 가깝다.
“그래도 내 지시엔 잘 따른다고.”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게 아니야. 줄 듯 말 듯 안달 내게 하면서 상대방을 초조하게 만들어야지. 그 사람이 네게 빌빌 길 정도만큼.”
알케테르가 책상 위에 놓인 종을 집어 들었다.
“노예란 건 주인을 무서워해야 하는 법이야.”
종을 가볍게 흔들어 소리를 냈다.
소리가 들리자 조금 후 노크와 함께 누군가가 집무실로 들어섰다.
모르는 인간 노예와 함께 들어온 건 무려 시미르.
다시 내 얼굴에 반가움이 떠오르려는데, 어째 시미르의 표정이 좋지 못하다.
“보라고. 이게 노예인 거야.”
알케테르가 손가락을 딱 튕기자 시미르와 노예가 갑자기 주섬주섬 옷을 벗기 시작했다.
내가 당황해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시미르와 노예는 단숨에 알몸으로 섰다.
“기다려… 시미르는 왜….”
인간은 뭐 그렇다고 치자. 그런데 시미르는 도대체 왜?
“말했잖나. 시미르는 일주일 후에 새로운 직급으로 강등된 다음에 새롭게 편성된다고.”
“그게 왜!”
“그렇게 되면 시미르의 일상이 이렇게 변하는 걸 미리 보여줄게.”
알케테르가 이어 눈짓을 보이자 시미르 혼자 바닥에 꿇어앉았다.
침통한 표정의 시미르가 차분히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뒤에 선 노예가 다리를 후들후들 떨며 눈치를 봤다.
“뭐해? 저번에 했던 대로 하라니까?”
알케테르의 재촉. 그러자 노예가 눈을 딱 감고 손을 들었다.
짜악!
그러더니 시미르의 뺨을 후려치는 게 아닌가?
그뿐만이 아니라 꿋꿋이 버티는 시미르를 마구 때리기 시작하다 발로 걷어차기까지 한다.
그런 모욕을 당하는데도 시미르는 이를 악문 채로 꾹 참고 있었다.
“이해를 못 하겠군.”
도대체 알 수 없는 상황에 알케테르를 돌아보며 차갑게 물었다.
“네가 무슨 고약한 심보로 시미르를 괴롭히는지 묻진 않겠어. 그런데 왜 내게 이런 장면을 보여주는 거야?”
“뭐긴. 노예는 늘 주인을 무서워해야 한다는 예시를 보여준 거야. 저 가축이 무슨 용기로 흡혈귀를 때리겠어? 못 때려. 아무리 판 깔아줘도.”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걸어 나온 알케테르가 노예의 팔을 잡았다.
주먹이 벌게진 채로 시미르를 때리는 행동이 멈추고, 눈물을 흘리며 숨을 헐떡이던 노예가 알케테르를 올려다봤다.
“하지만 주인이 무서우면 아무리 흡혈귀를 때릴 수 없어도 따라야만 하는 거야. 노예라면 주인의 어떤 명령에도 따라야 한다는 걸 보여준 거라고.”
그리고 노예의 목을 물어뜯어 마신다.
전신을 바들바들 떨며 흡혈을 당한 여성이 이내 기절함과 동시에 실금을 흘렸다.
“칫. 더럽게.”
바닥에 흐른 소변을 불쾌한 듯 보던 알케테르는 노예를 집어던지고 명령했다.
“시미르. 핥아 마셔라.”
그 명령에 시미르는 거리낌 없이 바닥의 소변에 입을 맞추려 했다.
내가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다. 단지 마음이 앞서는 대로 행동한 게 옳은 건지.
바닥에 입을 가져가려던 시미르의 어깨를 당겨 세웠다.
“그만. 하지 마.”
놀란 듯 돌아보는 시미르.
그리고 깊게 한숨을 뱉은 알케테르가 한탄했다.
“야. 그러면 안 된다니까.”
“내 마음이야. 시미르한테 이런 거 시키지 마. 시미르도 이런 거 하지 마. 명령이야.”
내 마지막 말이 의아했는지 알케테르가 어처구니없이 물었다.
“명령이라니? 네가 왜 시미르에게 명령해?”
“내가 말했었지? 날 테르세르에 넣어주는 조건으로 내세운 건 너와 같은 직급을 달라는 거. 시미르는 계급이 강등될 거라던데 그럼 내 말에 따라야지.”
거침없는 내 발언에도 알케테르의 비웃음이 나왔다.
“틀린 말은 아니긴 하지. 하지만 시미르는 아직 강등 안 됐어. 너도 직급을 수여 받지 못했고.”
“그럼 너도 시미르에게 이런 취급 해서는 안 되지. 아직 강등되지 않은 애한테 이런 노예만도 못한 취급을 할 거면 내 이후에 받을 직급도 배려해주시지?”
허, 소리를 낸 알케테르지만 반박은 못 한다.
입꼬리를 비틀어 올린 알케테르가 무심히 끄덕였다.
“알았다. 네 말을 듣고 보니 그것도 맞네. 일주일까지 그녀를 건들지 않겠어.”
“알아주니 고맙군.”
“나머지 계획에 대해선 시간이 많으니 차근차근 대화해보자고. 시미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시미르가 자신에게 이런 취급을 한 상관에게 각진 자세로 답했다.
“예, 단장님.”
“미래 네 상관이 될 분에게 지급될 숙소와 집무실을 안내해줘.”
“알겠습니다.”
알케테르의 집무실을 나왔다.
주섬주섬 옷을 챙겨입으며 걸어간 시미르는 아프거나 속상한 심경도 없이 하나의 방에 날 안내했다.
“여기입니다. 이곳이 한원님의 집무실이 될 곳입니다.”
알케테르의 집무실과 멀지 않은 곳이면서 내부도 그곳과 크게 다르지 않은 방.
딱히 어떤 장소이면서 어떤 내부인진 상관없다.
시미르에게 말을 걸었다.
“시미르. 괜찮아요?”
“경어체 쓰실 필요 없습니다. 저를 하급자 대하듯이 하면 됩니다.”
“그… 걱정 많이 했습니… 했어.”
안내하던 와중 시미르가 멈춰섰다. 잠깐을 서 있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숙소로 가려면 거리가 멀다.
한참을 걷고 있던 그때, 맞은편에서 테르세르 병사 한 무리가 걸어오고 있었다.
잠깐 흘긋 마주친 그들이지만 별 반응 없이 지나치려는데,
“아이구! 손이!”
마치 실수인 걸 강조하듯 입으로 예고를 던지며 후에 몸을 비틀거린다.
그러곤 한 놈이 손을 뻗어 대뜸 시미르의 엉덩이를 만지는 게 아닌가?
깜짝 놀란 시미르가 매섭게 노려보지만, 놈들은 능청스럽게 반응할 뿐이다.
“아~ 죄송합니다, 부단장님. 바닥이 미끄럽네요?”
“하하, 죄송합니다.”
시미르의 말은 듣지도 않고 그렇게 떠나간다.
그들의 뒤를 매섭게 노려보던 시미르는 이내 눈을 가라앉히곤 다시 안내했다.
‘내가… 내가 뭘 본 거야?’
지금 저놈들 자기 상관 엉덩이를 만져놓고 저렇게 도망치는 거야?
부단장이잖아.
라미에르조차 시미르에겐 찍소리도 못하고 예의를 갖추는데 일개 병사들이 지금 부단장한테 저렇게 행동한다고?
그러면 왜 시미르는 가만히 있는데?
“왜 가만히 있어?”
“…….”
“저건 아무리 봐도 일부러 그런 거잖아. 징계를 먹여도 시원치 않은 상황이라고.”
“…….”
“시미르!”
시미르의 어깨를 잡고 돌렸지만 그녀는 별 대꾸 없이 씁쓸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이게 그건가? 나를 도운 대가라는 게.
“이런 취급 받을 거면 왜 나를 도운 거야?”
“…각오한 겁니다. 무시하세요.”
“무시가 되겠어? 이런 거 방치하면 나중에 그놈들이 널…….”
“더 심한 것도 하겠죠.”
다시 우리는 길을 걸어 내 숙소란 곳에 도착했다.
시미르가 직접 문을 열어 나를 안쪽으로 들였고, 함께 들어와 문을 닫았다.
“내부는 꽤 좋네.”
라니아 침소보단 좁았지만, 이것도 감지덕지다.
호텔의 룸 하나와 똑같은 크기라고 보면 될 것이다.
그 외 필요한 가구나 냉장고, 식기, 주방도 존재하고 내부의 방도 세 개나 존재한다.
감탄하면 둘러보고 있는데,
스르륵. 툭.
옷이 떨어지는 소리. 뭔가 싶어 뒤돌았을 때, 시미르가 내게 달려들었다.
“뭐, 뭣!”
시미르는 그대로 날 안아 들어 거실 소파에 밀어붙였다.
그러더니 내 무릎 위로 마주 본 채로 올라앉아 대뜸 입을 맞추는 것이 아닌가.
“읍!”
너무 놀라서 반항하려 해도 시미르는 흡혈귀 힘을 이용해 날 제압했다.
그대로 진하게 키스를 나눈 시미르가 입을 뗐을 때, 그녀가 알몸이란 걸 깨달았다.
“시미르?”
“왜 온 거야?”
내 얼굴을 잡은 채 가쁘게 숨을 몰아쉬는 시미르가 말했다.
“이렇게 되면 널 도와준 의미가 없잖아. 왜 온 거야?”
“나도 나 대로 여러 일이 있었어. 그보다 진정해봐.”
“싫어. 나 그동안 계속 참아왔다고.”
내 바지를 벗긴 시미르가 내 자지 위에 앉았다.
“정말 날 걱정한다면 이곳에 와선 안 됐다고! 내, 내 꼴을 비웃으려고 온 거야?”
속내에 삽입하면서 외친다.
“난 이렇게 될 걸 각오했는데 왜 날 비참하게 만드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