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화 〉 테르세르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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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밝고 나서 내가 전한 말은 해산이었다.
뜬금없는 내 결정에 세 명의 여성들은 당연히 반발하고 나섰으나, 내 뜻은 확고했다.
단호하게 거부하고 내 수중의 모든 돈을 고향으로 돌아갈 차비 겸 수고비로 나눠줬다.
“날 도와줘서 고마워. 하지만 나 하나 때문에 너희까지 불편함을 겪을 필요는 없어.”
싫증 났다는 것처럼 돌아선 레베나와 달리 에밀리는 착잡하게 미소지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너희는 관계가 없는데 이만큼 도와준 것만으로도 충분해. 더 이상의 빚은 지기 싫어.”
“너 혼자서 어떻게 다닐 건데?”
얇고 가느다란 손이 내 목까지 다가왔다. 외투와 넥타이를 정리해준 에밀리가 손가락을 틱 올려 내 턱을 건드렸다.
“넌 인간이야. 흡혈귀 세상에서 넌 어떻게 다닐 건데?”
볼을 쓰다듬는 부드러운 손길.
“우리랑 다니니까 안전했지만 혼자서 다니는 순간은 달라. 경찰에게 붙잡히거나, 불량배들에게 잡혀서 죽을 수도 있어.”
다음에 닿은 건 내 입술이었다. 손가락이 입술을 쓸다가 입안에 살짝 넣어졌다.
내 치아를 건너 혀를 손가락으로 만지다가 뺀다.
에밀리는 그 손가락을 머금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침 냄새난다고 질겁하겠지만 내게서 나는 달콤한 냄새에선 악취 따위 없다.
에밀리의 볼이 붉어졌다.
“이런 냄새를 가지고 무사할 거 같아 보여?”
“…….”
“누가 널 도와주겠다고 한 거잖아.”
눈치가 빠른 에밀리는 내 선택을 꿰뚫어 봤다.
숨길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난 말을 삼갔다.
시선을 피하고 멋쩍게 웃다가 날 올려다보는 아츠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츠나를 부탁해. 아마 카에데가 데리러 올 거야.”
“그 애 걱정이 아니라 네 걱정을 해.”
“걱정할 거 없어. 다 생각이 있어.”
밝게 웃어주어 안심을 시켰다.
이어서 아츠나가 내 가슴팍에 폭 안겼다.
“살겠다고 약속해.”
“죽으러 가는 게 아니라 계획이 있는 거라니까.”
몸을 낮춰 아츠나도 살포시 안아줬다.
“언제나 날 믿어줘서 고맙다. 철없는 애인 줄 알았는데 역시 넌 어른이 맞네.”
장난기 섞인 발언에 아츠나가 목을 조를 기세로 꽉 끌어안았다.
으악, 작게 소리 내며 비틀댔을 때, 아츠나가 내 볼에 입을 맞췄다.
멀어진 아츠나는 볼을 붉히며 레베나의 손을 잡았다.
이어서 레베나가 나직이 한숨을 내뱉고 못마땅하단 눈길을 줬다.
“에밀리나 아츠나 울릴 생각은 마. 알았어?”
“알았어. 넌 철 좀 들고.”
그렇게 작별을 하고 각자 길을 떠나기 위해 돌아섰다.
미처 한 걸음 떼기도 전, 누군가 내 팔을 확 끌어당겨 몸을 돌렸다.
그런 내 얼굴로 에밀리가 다가와 입을 포갰다.
곧바로 혀가 튀어나와 입으로 들어오고 잠깐 놀랐지만 나도 같은 방식으로 화답했다.
추릅, 츄르릅.
섹스할 때의 그 찐득한 키스처럼, 혹은 그 이상으로 에밀리는 격렬하게 내게 매달렸다.
주변에서 보는 시선 따위 아랑곳없이 에밀리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가슴 쪽으로 올라오는 손길과 바지 속을 파고드는 손.
조금 놀랐어도 나도 똑같이 해줬다. 옷 안으로 손을 넣어 만지고 치마 속으로도 손을 넣으려 했으나,
얼굴을 붉힌 레베나가 우리를 떨어뜨리고 화냈다.
“기, 길가에서 뭘 하려는 거야! 이 변태들아!”
“제일 변태는 너잖아. 브랙퍼스트라면서 일어나자마자 에밀리 치마 속에 머리 파묻는 애가 무슨.”
“나는 남들 보는 길바닥에서 그러진 않는다고!”
흥분한 에밀리의 붉어진 얼굴을 돌아봤다. 에밀리는 눈물을 작게 흘렸다.
“안 좋은 일은 아니지? 그치?”
“…그래.”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은 없지? 따라갈 순 없어?”
“…….”
고개를 젓다가 문득, 한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사태가 어떻게 될진 모르지만, 그래도 보험 정도는 남겨놓는 게 좋을지도.
그래서 에밀리에게 하나의 부탁을 속삭였다.
처음엔 얌전히 듣던 에밀리의 눈이 살짝 커졌다가 잔잔해졌다.
묵직하게 끄덕인 에밀리가 말했다.
“그럴게. 나만 믿어.”
“고마워. 이제 가야 해.”
그렇게 비로소 여성들과 헤어졌다.
한참을 내리 걷다가 어느 공원 벤치에 앉았다.
주변의 의심스러운 눈길에도 아랑곳없이 멍하니 기다렸다.
혼자 있는 인간이라서 에밀리의 말대로 과연 누군가가 다가온다.
“야. 주인 없냐?”
다섯 명 정도의 불량배 무리. 이곳 도시에서 사고나 칠 것 같은 새파랗게 젊은 놈들이다.
덩치는 있지만, 전혀 무섭지 않았다. 무심하게 대꾸했다.
“꺼져라. 상대할 기분 아니다.”
“어어? 이 새끼, 말하는 거 봐봐.”
“인간 새끼가 건방지네.”
한 놈이 내 옆에 털썩 앉더니 입맛을 다셨다.
“도시에서 인간이 혼자 다니면 안 돼. 엄마 찾아줄까?”
“세 번까지는 봐준다. 이번이 두 번째다. 꺼져라.”
“까탈스럽네, 이 가축 새끼가.”
멱살이 확 당겨졌다. 짜증이 솟구치는 탓에 이맛살을 찌푸리고 노려봤다.
“놓으라 했다.”
“본때 보여주자고!”
“건방진 가축한테 흡혈귀의 위엄을 보여줘!”
주변에서 돋구는 놈들. 내 멱살을 잡은 놈이 문득 코를 벌름거렸다.
커다래지는 눈동자와 함께 녀석이 놀란 듯 입을 벌렸다.
“뭐야, 이 냄새? 어어? 이거 뭐지?”
향수를 아무리 뿌려도 역시 이 정도 거리에선 냄새가 지워지지 않는다.
점점 얼굴이 붉어진 흡혈귀가 송곳니를 벌렸다.
“미, 미친… 이거 진짜야? 와! 빌어먹을! 우리 땡 잡은 거 아냐? 어, 어떻게 이런 냄새가… 야, 야!”
놀란 놈이 벌떡 일어나더니 외쳤다.
“다른 애들도 불러! 이거 장난 아냐!”
“왜 그러는데?”
“왜? 왜?”
“냄새 미쳤어! 어떤 마약보다도 개쩐다니까? 애들 부르라고 병신아!”
고함을 들은 아마도 서열 낮아 보이는 불량배가 황급히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당장 친구들에게 전화하려는데, 갑자기 누군가 그 폰을 빼앗았다.
“뭐야, 너!”
“미안한데 걔 주인이거든? 비켜줄래?”
“꺼져, 이 새끼야! 뒤지고 싶냐?”
자기보다 한참 커 보이는 상대를 두고도 놈들은 가상하게 겁도 먹지 않았다.
물론 그에 대한 대가는 치를 테지만.
쩌억!
파열음이 느껴질 정도로 커다란 소리가 터졌다.
뺨을 후려 맞은 놈이 비틀대며 물러서더니 입안으로 피와 이빨을 쏟아냈다.
“에… 으에에에….”
무려 다섯 개의 이빨이 부서지거나 빠졌고, 맞은 볼이 커다랗게 부풀었다.
쩌억!
반대편 뺨도 후려 맞자 이번엔 여섯 개의 이빨이 튀어나오곤 기절하고 말았다.
그제야 뭔가 사태가 이상하다 느낀 불량배들은 황급히 알케테르를 에워쌌다.
“이 새끼가 미쳤나!”
“야! 족쳐!”
알케테르가 거창하게 검 뽑을 필요도 없었다.
불쑥 손을 내밀어 가장 가까운 놈을 끌어당겼고, 면상에 무릎을 찍는다.
키가 훤칠하고 다리도 길쭉해서 굳이 도약할 필요도 없다.
빡!
단숨에 콧잔등이 가라앉고 눈이 뒤집힌 놈은 앞니까지 죄다 뽑아내며 기절했다.
뻐억!
이어서 들어 올렸던 다리를 뒤로 뻗어 뒤차기로 다른 놈의 가슴팍을 찍었다.
늑골이 가라앉고 아예 가슴뼈가 부러졌는지 끔찍하게 발이 들어간다.
발에 치인 놈은 무려 10미터나 날아가더니 잔디 속으로 사라졌다.
남은 두 녀석은 덤벼들지 못하고 순식간에 제압된 동료를 보면서 벌벌 떨었다.
지켜보던 알케테르가 쿡쿡, 웃었다.
“어쩔래?”
도발에 이끌리듯 리더로 추정되는 놈이 자기 친구를 붙잡고 알케테르에게 밀었다.
“잡으라고 하잖아!”
하지만 앞으로 밀려난 녀석이 어깨를 당길 새도 없었다.
쯔걱!
달려오던 녀석의 양다리가 단숨에 부러졌다. 그것도 모자라 몸이 붕 떠오르더니 허공을 도는 것이 아닌가?
관절에 꽂힌 로우킥의 위력은 두 개의 다리를 부수고 아예 사람을 한 바퀴 돌게 했다.
상대를 골라도 잘못 골랐다는 생각에 리더 놈이 벌벌 떨었다. 물론 알케테르는 용서할 마음 따위 없다.
“죄, 죄송합니다….”
“넌 혼 좀 나야겠어.”
마지막 남은 놈의 멱살을 잡고 뺨을 때렸다.
짝! 짜악! 쩌억! 쩍! 쩌걱! 쯔걱! 뻑!
때릴수록 피가 튀기고 이빨은 죄다 빠지면서 턱이 어긋난다.
고막도 터졌는지 피가 흐르다가 아예 광대가 폭삭 가라앉았다. 이어서 볼도 헐렁하게 찢어질 정도가 됐다.
“그만해.”
보다 못한 내가 말렸다. 그제야 손을 멈춘 알케테르가 짧게 웃었다.
“다음부턴 모르는 어른 함부로 시비 터는 거 아니야. 알았지?”
밝고 부드럽게 대답하는 것치고는 대가가 처참하다.
진짜 죽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엉망이 된 녀석이 경련하다가 바닥에 쓰러졌다.
뭔가 만족한 듯 자신의 작품을 둘러본 알케테르가 호탕하게 웃어젖히고는 나를 향해 물었다.
“다 보냈나?”
“그래. 보냈다. 가지.”
“그래, 파트너. 너 후회할 일은 없을 거야. 우린 새로운 혁명을 만들러 떠나는 거라고.”
알케테르와 함께 피투성이의 난장판에서 벗어나 도롯가로 나왔다.
미리 준비한 테르세르 리무진에 탑승했다,
“어?”
그런데 안쪽으론 모르는 여성들이 앉아있었다.
벗은 거나 마찬가지의 얇은 옷과 겁에 질린 채로 돌아보는 눈길들.
인간이다.
“아, 근처 시장에서 샀어. 테르세르까지 가려면 많이 걸리거든? 긴 주행시간에선 간식거리 사는 건 기본이잖아.”
뒤이어 탑승한 알케테르가 진짜 간식거리를 산 마냥 설명했다.
이 불편한 상황에 치아를 악물었지만 지적하진 않았다.
참아야 한다. 무조건.
그렇게 차량이 출발했다.
한참을 고속도로를 지나던 중, 알케테르가 돌연 무언가를 권유했다.
“너도 하나 먹어.”
“뭐?”
마치 가지고 있는 과자를 주는 어투였다.
알케테르가 벌벌 떠는 여성 한 명을 낚아채더니 거칠게 옷을 찢었다.
“흐으으윽!”
겁에 질렸지만 비명은 참는다.
찢어진 옷 사이로 자그마한 가슴이 보였다. 알케테르는 그 가슴을 붙잡고 송곳니를 박아넣었다.
“꺄아아악!”
고통에 비명을 질러도 반항은 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흡혈귀에게 반항하지 않도록 조교 받는 것이 노예의 의무다.
맛있게 흡혈을 한 알케테르가 내게 다시금 권유했다.
“먹으라고. 맛있다니까?”
“미안하지만 난 흡혈귀가 아닌데?”
“젠장. 누가 그걸 몰라? 섹스하라는 소리잖아.”
섹스? 같은 인간을 내가 덮치라고?
살며시 눈동자가 여성들을 향했다.
흠칫 놀라면서도 나를 바라보는 그 눈길들. 성욕은 전혀 피어오르지 않고 오히려 분노만 차오른다.
고개를 저은 다음에 시선을 피했다.
“별로 됐어.”
“흥. 그런 태도 테르세르에선 좋지 않을 거다.”
흡혈을 마친 여성을 다시 던져서 돌려보낸 알케테르가 만족한 듯 입가를 닦고 웃었다.
“네가 우리 테르세르에 협력한다는 증거를 보이려면 못해도 같은 인간을 덮치는 게 좋을걸?”
“젠장! 그런 건 내가 알아서 하니까 그런 사소한 거까진 신경 꺼!”
“이봐. 난 너를 도우려는 거란 말이야.”
히죽 웃는 알케테르의 역겨운 얼굴. 치가 떨린다.
“우리가 계획을 이루기 위해 협력 관계가 된 이상, 내가 권유하는 건 빼지 않는 게 좋아. 테르세르에서 그런 태도는 한심하고 나약하단 증거니까. 곧바로 밑에 놈들에게 먹힌다니까?”
턱에 힘이 들어간다. 어금니를 깨물다가 불쑥 손을 뻗었다.
그저 손에 잡히는 아무 여성이나 끌어당겼다.
순순히 끌려온 여성의 어깨끈을 내리자 여성의 가슴이 눈앞에 드러났다.
“크윽…!”
진짜 이래야 하나? 정말로? 같은 인간에게 이러는 게 옳아?
나 자신을 향한 혐오감이 피어오르면서 난 여성의 유두를 깨물었다.
신음을 옅게 흘리는 소리 사이로 알케테르의 조소가 담긴 중얼거림이 들렸다.
“그래. 이런 사소한 것도 다 너를 위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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