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화 〉 그분의 자비 (2)
* * *
엉덩이 사이로 손가락을 비집을수록 눈앞의 주인님 얼굴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히죽이며 손마디를 구부리고 이리저리 돌릴수록 보기 좋게 일그러지는 표정은 즐거움을 더했다.
“장난치지 말고.”
이렇게 재미를 보고 있으면 주인님이 성질을 낸다.
“알겠습니다.”
히죽 웃으며 알겠다곤 해도 순순히 말을 들어선 안 된다. 마구 골려주듯이 주인님의 애널 주위를 손가락으로 돌려가며 풀어줘야 한다.
동시에 남근으로 주인님의 속내를 찔러준다. 주인님의 엉덩이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진다.
“흐으으….”
신음이 나오려 할 때가 되면 주인님과 입을 맞추었다. 흠칫 어깨를 떨던 주인님이 살포시 내 목 뒤로 팔을 걸쳐 끌어안아 키스에 열중했다.
평소랑 다른 점이 있다면 주인님이 내 입안으로 혀를 집어넣었을 텐데 이번에는 내가 직접 파고든다는 점.
혀를 깨물어 화를 내야 하는 주인님이 이번만큼은 가만히 있었다.
“하음… 쯔읍. 후아….”
숨결이 끈적하게 흐르고 열렬히 서로의 침을 교환하며 흥분에 도취 됐다.
입술이 부딪히는 것도 모자라 치아마저도 딱딱 부딪치다 보니 살짝 놀라 입술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다시 입술을 포개고 치아가 또 닿았다.
그러기를 반복하니까 주인님이 피식 미소를 지었다.
“프흐흐흐….”
부드럽고 매끄러운 혀와 떨어져 나도 웃음을 흘렸다. 시답잖은 농담으로 맥없이 웃는 남녀처럼 잠깐을 히죽이며 웃다가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웃다니… 몹쓸 노예구나.”
주인님이 돌연 내 몸을 확 밀쳤다. 훅 넘어진 난 침대에 등을 눕혔고 주인님이 다리 아래에 앉아 자지에 손을 얹었다.
“선심 썼느니라. 짐이 특별히 만져주마.”
이거 별일이군. 주인님이 내 거를 만지지 않았던 적은 없지만, 마치 자신이 해보겠다는 듯이 호언장담한 적은 처음이다.
자지로 침을 흘려 고루 발라준다. 길고 보드라운 손가락이 귀두부터 불알 위까지 부드럽게 쓸어내려 갔다가 올라온다.
금세 촉촉해진 자지. 침을 꿀떡 삼킨 주인님이 손가락으로 귀두를 살살 긁었다.
“으윽….”
손가락 끝이 귀두의 바깥 선을 따라 한 바퀴를 돈다. 그러다 요도 선을 따라 움직였다가 돌아와 손바닥이 귀두에 닿았다.
약하게 누르면서 귀두를 문지르면 이젠 내가 힘겨워질 차례가 된다.
“크윽… 으앗!”
침대보를 꽉 움켜쥐고 허리를 들려고 하자 주인님이 내 허벅지에 다리를 올려 움직임을 차단했다.
힘이 장난이 아니다. 다리가 꼼짝도 못 하겠다.
“자, 잠깐만요, 주인님! 좀 천천히!”
그러는 사이에 주인님의 손 움직임이 빨라졌다. 마치 괴롭히는 장난기 많은 여자처럼 미소를 머금고 한 손은 기둥을 잡아 고정하고 다른 손은 귀두를 마구 괴롭혔다.
“크아앗!”
오래가진 못했다. 정액이 뿜어져 주인님의 손에 잔뜩 고였고, 움직임도 멎었다.
손아귀에 묻은 정액을 바라본 주인님이 한 손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고 우아하게 손바닥을 핥았다.
‘정액을 누가 저렇게 먹어?’
그 야하고 매혹적인 장면 때문에 순간 넋을 잃고 말았다.
덕분에 휴식이 필요한 자지로 다시 피가 몰려든다.
조금도 남김없이 손가락 마디까지 핥아 먹은 주인님이 나를 향해 야릇한 눈웃음을 지었다.
가슴이 아릴 정도로 야하고 예쁘다. 순간이지만 충동에 혹해 가슴에 매달릴 뻔했다.
“아직 더 쌀 수 있겠느냐?”
“주인님. 잊으셨습니까? 저희 매일 밤늦게까지 몸을 섞는 사이입니다. 이 정도로 식으면 제가 아니죠.”
“허세하고는. 그럼 이리 누워 보아라.”
내가 잘못 본 건가? 지금 주인님이 자기 무릎에 누워 보라고 한 건가?
“어디에요?”
주인님이 자신의 허벅지를 탁탁 치며 약간의 성질을 냈다.
“여기지 어디더냐! 오늘은 짐이 주도할 터이니 넌 가만히 있거라.”
“아… 네.”
어정쩡하게 기어가 주인님의 허벅지에 머리를 눕혔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주인님의 가슴과 굴욕 없는 아름다운 외모.
바로 눈앞에 가슴이 있어서인지 유달리 커 보인다.
“주인님?”
“자. 마음껏 빨아라.”
분홍빛 유두가 내 입으로 다가온다. 흠칫 놀란 내가 입을 벌렸다.
“네, 네?”
“빠, 빨리!”
역시 부끄러운지 얼굴이 붉어진 주인님이 억지로 유두를 입에 물렸다.
임신하지 않았으니 모유는 안 나오지만 마치 아기처럼 쪽쪽 빨고 혀로 핥고 깨물어보기도 했다.
주인님이 눈을 감고 입을 일그러뜨리며 신음했다.
“하읏. 사, 살살.”
쯔읍. 쭈웁.
내 얼굴에 가슴을 문대며 기댄 주인님이 손을 뻗어 내 자지를 잡았다. 아, 이거 그거구나!
손이 움직인다. 마치 아기가 된 듯한 기분을 느끼며 행복하게 가슴 속에서 숨을 헐떡였다.
‘너, 너무 기댔는데.’
이 가슴이 원체 크다 보니 얼굴 전체가 가슴에 파묻히고 말았다. 그래도 꾸준히 유두를 빨아주며 주인님에게 내 자지를 맡겼다.
“너무… 열심히 빠는 것 아니냐.”
주인님이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로 대딸을 한다.
가슴을 쭉쭉 빨다가 손을 뻗어 반대편 가슴을 잡고 주물렀다. 말랑한 가슴이 손가락에 꽉 잠기는데 탱탱하게 내 손을 밀어낸다.
장난감 가지고 놀 듯이 가슴을 주무르면서 유두를 살살 꼬집었다. 주인님의 가쁜 숨결이 들려온다.
“하읏… 하아… 거, 건방지게 주인의 가슴을….”
솔직히 이보다 행복할 수가 있을까. 무릇 남자들의 소망이 커다란 가슴에 숨 막히게 파묻혀 행복을 누리는 건데, 지금 내가 그러고 있다.
이 포근하게 느껴지는 감각 덕분인지 다음 사정이 빠르게 찾아왔다.
“으읍… 읍읍…!”
그런데 말을 하고 싶은데 가슴이 꾹 누르는 탓에 말을 할 수가 없다.
손으로 가슴을 툭툭 두들겨도 주인님은 아예 흥분했는지 내 신호를 받질 못했다.
“흐읏… 흐아아… 사, 살살 빨라니까.”
“읍읍읍! 으읍─!”
하는 수 없이 신호도 주지 못하고 정액을 뿜어냈다. 정력 좋게 쭉 튀어 오른 정액이 침대를 벗어나 바닥 멀리 쏟아졌다.
놀랐는지 주인님이 말이 없었다. 곧 가슴이 멀어지고 가슴 지옥에서 가까스로 생존한 나는 힘겹게 숨을 몰아쉬었다.
“푸하아… 수, 숨 막혔습니다.”
“그래. 그럼 이제 짐의 차례다.”
살며시 웃으며 주인님이 뒤돌았다. 침대에 엎드리고 배 사이에 쿠션을 넣어 엉덩이를 들어 올리자 흠뻑 젖은 보지와 살살 벌어지는 애널이 보였다.
주인님이 부끄러운 듯 귀를 붉히며 말했다.
“이제 짐에게 봉사하거라.”
봉사라니. 단어 표현이 그것뿐인 건가.
그래도 주인님의 엉덩이 사이로 입을 파묻었다. 혀를 음부 안으로 집어넣어 키스 중에 혓바닥을 찾는 남자처럼 이리저리 헤집었다.
“하아앗… 아아아!”
주인님의 신음이 커지면서 물이 잔뜩 배어 나온다.
덕분에 코와 입, 얼굴 전체가 흠뻑 젖고 가끔 숨을 쉬기 위해 얼굴을 떼야 했다.
“프하아… 하읍! 쭈르릅. 추릅.”
주인님의 애액을 빨기도 하고 혀를 쑤셔서 흔들기도 하고, 손가락으로 클리톨리스를 살살 건드려 자극도 줬다.
그럴수록 질내가 좁혀지거나 주인님이 가버릴 것처럼 허벅지에 힘을 준다. 그렇게 한참을 그러다가,
입을 떼고 자지를 음부에 부착시켰다.
“하읏… 하아….”
내 혓바닥 테크닉에 정신을 못 차리는지 주인님이 숨을 고른다. 어지럽게 흐트러진 뒷모습을 본 순간, 나도 모르게 손이 올라갔다.
짜악!
나를 미쳤다고 보더라도 난 할 말이 없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주인님의 엉덩이를 때려버렸다.
다른 여자들이 아니다. 주인님의 엉덩이를 때려버렸다고!
“이… 이이…! 무슨 짓을!”
역시 분개한 주인님이 상체를 들어 올리려 할 때, 난 황급히 등을 눌렀다.
주인님이 생각보다 손쉽게 상체를 눕혔다.
“주, 주인을 때려? 정녕 미친 게냐?”
그런데 보기보다 주인님의 분노는 덜했다. 그래서일까, 죄송하다는 사과도 없이 보지 속으로 자지를 쑤셔 넣었다.
푸욱!
“후읏!”
얇게 내지르는 신음. 주인님이 골반을 살짝 떨다가 고개만 돌렸다.
“건방진 놈이… 감히!”
“후우. 후우. 용서하십시오.”
아마도 마지막이라서 그럴까. 이 일이 끝나면 사형당하니까?
그럴 수도 있다. 난 뒤를 생각하지도 않고 팡팡 허리를 움직이면서 손을 다시금 들어 올렸다.
“그, 그만둬!”
그만두라는 주인님의 말에도 난 다시금 엉덩이를 짝 때렸다.
짝!
“흐긋!”
어깨를 흠칫 떤 주인님이 양팔을 몸에 붙이고 날 노려봤다. 그 눈길이 내 가학심을 자극해서일까?
난 이성을 잃고 말았다.
짝! 짜악! 짝!
푹. 푸욱! 푹!
박는 것과 때리는 것을 동시에 이용했다. 주인님은 더는 반항하지도 않고 얌전히 내 손길과 허리를 느꼈다.
그 느낌은 뭐랄까. 내 뇌를 하얗게 태워버리는 자극이다.
이성이란 고삐가 내 손을 벗어난 탓에 폭주하는 말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후읏. 크윽! 제기랄! 제기랄! 제기랄!”
오랜 염원 때문에 평소보다 흥분했을지도 모른다. 주인님을 언제나 내 밑에다 둬서 마음대로 다루고 싶었다.
엉덩이를 때리는 건 예사고 그냥 노예처럼 다루고 싶었다. 에밀리나 레베나, 시미르, 메이를 거칠게 다뤘던 그 모습과 똑같이. 혹은 더.
그런 행동을 주인님에게만큼은 못했다. 내가 가장 무서워하면서 또한 가장 마음 편했던 주인이기에.
함부로 다루면 죽을 수 있다는 감정 브레이크가 있었기에.
그런데 지금은 무의식적으로 브레이크가 고장 났다. 그 순간만큼 내 눈앞의 여성은 나만의 노예로 변질됐다.
“젠장! 빌어먹을! 진짜 개 같다고! 씨발!”
양팔을 붙잡아 강하게 끌어당겼다. 팔이 꺾일 수도 있다는 걱정도 지금만큼은 없었다.
푹! 퍽! 퍽! 츠벅! 퍼억! 처퍽!
“핫! 하악! 하으악! 하앗! 하아!”
주인님… 라니아도 더는 반항을 보이지 않았다. 내 거친 손놀림에 몸을 맡기고 느끼기만 했다.
라니아와 섹스하면서 이렇게 격앙된 적이 있던가를 생각해보면 없다.
가끔 장난치는 경우는 있어도 그건 장난에 불과하다.
팔을 잡고 당기는 짓도 모자라 아예 라니아를 일으켜 가슴을 거칠게 움켜잡았다.
손가락이 가슴을 파고들어 손톱이 상처를 낼 정도로 꽉 쥐고 허리를 때리듯이 박았다.
뻑! 뻐억! 퍼억!
“헉! 흐앗! 꺄아앗!”
라니아의 신음도 이젠 비명과 비슷하게 변해간다. 한 번도 이러한 섹스를 해본 적 없었을 그녀인데,
격분하여 날 죽여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텐데 오히려 가만히 참는다.
내 입조차도 노예 신분을 벗어났다. 누차 말하지만 난 진짜 미쳐있다.
“씨발… 주인…… 라니아! 빌어먹을! 라니아!”
“하읏! 하악! 하앗!”
“좋아 죽는 거지? 변태 같은 년! 내 자지에 그냥 미친 거야! 자지에 살고 자지만 보고 사는 변태년!”
“흐윽! 하앙!”
“내 정액이 그렇게 좋아? 내 자지에 평생 박히고 싶은 거잖아! 제기랄! 제기랄!”
머리가 돌아버렸다. 가슴에 상처가 날 정도로 쥐다가 짝! 때리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라니아는 가만히 몸을 맡겼다.
“조… 좋다! 좋다! 좋아─!”
“개 같은 년! 씨발! 씨발! 난… 난 노예가 아니라고. 노예는 네가 돼야 해!”
아예 라니아의 목을 졸랐다. 속에서 미쳤냐고 소릴 질러도 내 몸은 이미 본능에 잠식된 채다.
난 아예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다.
“이것도 좋은 거겠지! 늘 이렇게 하고 싶었다고! 노예처럼! 제기랄! 사랑한다!”
“크윽… 끄으으윽!”
“빌어먹게도 사랑한다고! 죽이고 싶을 정도로 사랑하고! 평생 내 자지만 보게 하고 싶을 정도로 사랑한다고!”
나는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보지에서 자지를 빼고 이젠 벌렁거리는 애널에 푹 쑤셔 넣었다.
“흐긱!”
“여기를 제일 좋아하잖아! 미치도록 좋아하잖아!”
“조, 좋다! 너무 좋아!”
“사랑한다고 해!”
“사랑한다… 사랑….”
아무래도 이런 변화는 앞선 여성들과의 잠자리로 인한 결과물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엉덩이가 무너질 정도로 허리를 박다 보니 내 골반이 아파 왔다. 허리가 벌겋게 물들고 라니아의 하얀 엉덩이도 새빨갛게 변했다.
“제기랄! 제기라아아알!”
“아아아앙!”
폭발하는 화산처럼 내 속에 담겼던 모든 응어리와 성욕을 라니아의 애널에 죄다 쏟아버렸다.
울컥울컥 솟아난 정액의 양은 아마 내 사정량 최대치를 기록한 순간일 테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탈수증이 오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온몸이 젖어있었다.
침대보는 반쯤이나 벗겨졌고 이불은 바닥 어디에 떨어졌는지도 모르겠다.
심지어 침대가 기울어져 있었다.
라니아도… 주인님도 나 못지않게 온몸이 땀에 젖은 채로 널브러졌다. 풍성한 머리칼도 젖어서 뭉쳐 있고 번들번들한 등이 묘하게 야했다.
‘아, 빌어먹을. 나 무슨 말을 했지?’
뒤늦게 사태를 떠올려도 엎질러진 물이다. 뒤늦게 현실감이 공포심과 함께 찾아와 나를 비웃는다.
저절로 턱이 떨리자 자지를 빼고 일어섰다. 퐁! 하고 빠지는 소리와 함께 주인님이 엉덩이를 파르르 떨었다.
벌어진 애널 사이로 정액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후우… 후우…. 그래.”
주인님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흐트러진 표정이 나를 향하고 미소가 살며시 지어진다.
“짐을 그렇게 생각했느냐?”
“아… 아아….”
욕 한 번만 더 하겠다. 좆됐다.
흥분이 아니라 두려움과 당혹스러움에 얼굴이 벌게지고 머리가 하얗게 변했다.
도통 제어가 안 되는 동공으로 주인님을 보고 있었는데,
“죄, 죄송…….”
“그 애들이랑 할 때도 이렇게 했느냐?”
대답하려다가 입이 멈췄다. 지금 뭐라고?
“에밀리, 레베나, 시미르, 카에데, 서니, 메이. 하하, 많은 여자랑도 했구나. 그 애들이랑 할 때도 이렇게 했느냐고 물었다.”
“주인님…?”
“됐다. 이제야 와서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누가… 누가 말했을까? 주인님이 처음부터 알고도 모른 척할 리가 없다. 그건 주인님답지 않으니까.
문득 알케테르가 머릿속을 스친다. 이 빌어먹을 새끼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있으니 주인님이 내 콧잔등을 딱 때렸다.
“아야.”
“이제 주인님 아니다.”
뭐? 당황한 눈길로 주인님을 돌아봤다. 그리고 숨이 멎는 기분이 들었다.
주인님은 웃고 있지만… 동시에 울고 있었다.
눈물이 볼을 타고 떨어지는 모습.
시간이 멈추다 못해 거꾸로 돌아가는 기분이다.
“몰래 나가는 통로는 네가 더 잘 알고 있을 테다. 지금 당장 가거라.”
“주인님?”
“이제 주인이 아니니 그렇게 부르는 것도 그만두거라.”
침대에서 일어난 주인님… 이제 라니아는 찢어진 속옷을 벗어버리고 천천히 방을 가로질렀다.
옷장에 다다른 라니아가 서랍 속에서 보석함을 꺼냈다. 그리고 미리 준비한 주머니에 보석을 아낌없이 가득 담았다.
다시 돌아와 무심하게 툭 던졌다.
“이게… 뭡니까?”
“에밀리나 레베나를 통해서 보석상에게 팔면 충분한 돈이 될 테다.”
“아니… 왜, 왜 그러시는 겁니까?”
라니아는 아예 등을 돌리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마음 변하기 전에 얼른 가거라.”
“아니 주인님….”
라니아의 곁으로 기어갔지만, 오히려 거칠게 날 밀쳤다. 비틀대며 밀려나 아예 침대에서 떨어졌다.
그래도 꿋꿋이 라니아의 앞에 꿇어앉아 얼굴을 살폈다.
그녀는 분명 가장 싫어하던 흡혈귀였다. 끔찍이도 싫어해서 증오하고 멸시하는 그녀였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면 그건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나날일 테지.
그런데 막상 눈물을 보고 있으니 가슴이 찢어질 것처럼 아파 왔다.
원하는 눈물이 아니어서인지, 내 심경에 변화라도 있던 건지 잘 모르겠다.
“가라. 이제 넌 자유다.”
“……….”
침묵하다가 이내 일어섰다. 옷을 마저 챙겨입고 보석 주머니도 챙기고 흘끔 라니아를 살폈다.
아까와의 자세에서 움직이지 않던 라니아가 천천히 몸을 기울여 침대에 누웠다.
착잡하게 눈을 가라앉히곤 조용히 방을 나갔다.
이상할 정도로 복도엔 보초가 없었다. 돌아다니는 메이드도 없고, 모두가 쥐죽은 듯 조용했다.
대신 식당으로 왔을 땐 그곳에 에밀리와 레베나, 아츠나가 있었다.
어떻게 알았냐고 묻을 필요도 없다. 쓸쓸히 미소 짓곤 냉장고를 밀었다.
바닥의 문을 통해 내려가고, 함께 들어간 에밀리와 레베나가 팔 힘만으로 냉장고를 원 상태로 돌려놨다.
우리 네 사람은 그렇게 어둠 속에서 하염없이 걸어가 수도에서 도망쳐 나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