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화 〉 그분의 자비 (1)
* * *
냉장고를 밀던 자세를 거두고 알케테르를 향해 돌아섰다. 속셈은 알 수 없어도 인간들을 탈출시키는 내 행각을 가만히 보면서 이죽대고 있다.
추격하는 건 어렵지 않다는 여유로운 태도? 그것도 아니라면….
“내게서 뭘 원하지.”
내 물음에 제법 만족한 알케테르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넌 말이 잘 통해.”
기댄 엉덩이를 떼고 다가온 알케테르는 오만하게 내려다봤다. 나와 신장 차이가 크기 때문에 거인을 앞둔 것 같은 위압감이다.
“그 전에 놀랍긴 했어. 네가 이럴 줄이야.”
눈이 가늘게 휘어진다.
“설마 흡혈귀를 죽이다니. 무서울 정도로 손쉽게.”
“그게 뭐가 어때서 그렇지?”
“목숨을 포기하겠단 그 태도. 친위대에서도 볼 수 없는 훌륭함이었다. 넌 보면 볼수록 날 놀라게 하고 있어.”
이어서 알케테르가 박수를 쳤다. 정적의 식당 안을 시끄러운 손뼉 소리가 맴돌았다.
“도대체 왜 그런 거지? 그 인간들은 이미 무너진 탑이었어. 다시는 수복할 수 없다고.”
“무너진 공든 탑이든, 다시 세우면 돼. 너희가 장난감 부수듯이 우리의 노력을 짓밟아도 우리가 뭘 하겠어? 다시 일어난다. 넘어져도 또 일어난다. 포기해도 또 도전한다.”
이를 바득바득 갈며 알케테르를 무섭게 노려봤다.
“그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야.”
“한원…. 넌 다른 가축관 전혀 달라. 놀라워.”
이상하다. 이놈이 날 보는 눈에서 적대감이 없다. 그 만족해하는 눈빛과 친근한 분위기. 도대체 녀석은 무슨 속셈이지?
“그럼 이미 저지른 일은 놔둘 셈인가. 여전히 시체는 남아있는데.”
“알아서 뭐하게? 날 놀리려고?”
입술 끝을 올린 알케테르가 날 지나쳤다. 그리고 내가 낑낑대며 밀려고 하던 냉장고를 직접 밀어 문을 가려버렸다.
내가 미간을 찌푸리며 노려볼 때, 그가 키득거리며 돌아봤다.
“나한테 빚졌어.”
“제기랄. 필요 없어!”
“어이, 그러지 말고. 내 얘기 좀 들어봐.”
냉장고의 위치까지 고심하게 맞춘 알케테르가 내게 하나의 달콤한 말을 꺼냈다.
“너. 내가 사업차로 온 게 아니란 건 이미 알겠지?”
그야 당연히 알지. 싸늘하게 노려보며 끄덕임으로 대답했다.
“당연한 거 아냐? 도시가 이 지랄 난 거 구경하러 왔겠지.”
그러자 알케테르가 과장되게 안타까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손을 눈썹에 기대며 고개를 젓는 시늉을 했다.
“이런, 세상에. 너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이거 너무 속상하잖아. 난 그렇게까지 못된 흡혈귀는 아니란 말이야.”
“엿이나 처먹으시지. 네가 온 이유는 그거 하나밖에 없어.”
중지까지 손수 세워줬지만 알케테르는 전혀 불쾌한 표정을 짓지 않았다.
대신 외투 주머니에서 돌돌 만 종이 하나를 내게 내밀었다. 홧김에 쳐낼 뻔했지만, 호기심이 인다.
“뭔데, 이게?”
“일단 읽어봐. 그 후에 설명해주지.”
막상 읽었는데 이 편지는 바이 힐로부터 시작해 저주받은 머시기 이러쿵저러쿵 내용이 적혀있으면 이 새끼부터 죽이겠다.
하지만 긴장하며 펼친 종이는 예전에 본 적 있던 내용이 적혀있었다. 그러니까,
“노예 이전 계약서?”
예전 진을 처음 봤을 때 그가 내게 권했던 노예 이전 계약서. 이번 계약자는 무려 에이르 여왕이다.
도대체 이걸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멍한 표정으로 돌아보자 알케테르가 입을 열었다.
“기억나나? 너를 납치했을 때. 네게 테르세르에 협력하라는 권유를 했었지.”
“그리고 엿 먹으라 했지.”
“다시 권하지. 테르세르에 협력해라.”
당연하게도 콧방귀를 꼈다.
“내가 두 번 세 번 얘기해줘야 해?”
“그러면 네 목숨을 살려주마.”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필요 없어.”
“그럼 정말 죽게? 네 살인을 여왕이 안다면 이번조차도 네 죄를 사면할까? 라니아 여왕도 한계란 게 있어. 더욱이 인간 군대의 공격에 도시랑 성이 난장판이 된 지금으로선 말할 것도 없지.”
알케테르가 이죽댔다.
“흡혈귀를 죽이고 인간 군대를 탈옥시켰어. 정말 이번만큼은 봐주겠어?”
“…….”
“그러지 말고 계약서에 서명해. 그럼 넌 생존할 수 있다. 그리고 인간 군대도 살아남겠지.”
마지막 말에 눈을 치켜떴다. 알케테르가 들어보란 듯 손을 내밀었다.
“내가 인간 군대가 가만히 도망치도록 놔두는 줄 알았어? 이봐. 난 네 편이 아니야.”
“흥. 저번엔 노예들을 미끼로 삼아서 날 간 보더니, 이젠 인간 군대들로 날 간 봐?”
흘긋 눈길을 옆으로 돌렸다. 주방인 만큼 그곳엔 무기가 가득했다.
“좆 까라 해. 그들은 실력 좋은 군인이야. 내 도움이 없어도 알아서 잘 도망쳐.”
이어 알케테르를 향해 살의를 내비쳤다.
“그리고 죽은 사람 거들떠보지 마. 길동무 삼고 싶으니까!”
나로서도 놀랄 만큼, 원목 식칼 꽂이의 칼을 뽑아 휘둘렀다. 그러나 상대가 순순히 맞을 거란 생각을 하진 않았다.
알케테르는 공중에 날파리를 쫓아내듯 손쉽게 내 공격을 걷어냈다. 충분히 반격도 들어올 수 있었으나 그는 히죽 웃으며 반격은 하지 않았다.
“크읏!”
대신 상처 난 손을 휘둘러 피를 뿌렸다. 적어도 피 냄새를 맡으면 빈틈은 생기리라.
하지만 알케테르는 동요하는 기색 없이 내 손을 낚아채어 오히려 자기 입술에 붙였다.
“젠장! 기분 나빠!”
손을 빼려 해도 빠지질 않는다. 알케테르는 천천히 내 손을 핥았고, 손으로 느껴지는 혓바닥의 감촉에 소름이 돋았다.
적당하게 핥은 다음에야 알케테르가 놓아줬다.
“흠. 제기랄, 장난 아닌 맛이야.”
“젠장! 빌어먹을 새끼!”
그 감촉이 손에서 떠나질 않아서 수돗물에 내 손을 씻었다. 그리고 소리쳤다.
“도대체 속셈이 뭐야!”
“말했잖아. 테르세르에 붙어.”
“그게 목적일 수는 없어. 진짜 목적을 말해.”
나지막이 한숨을 쉰 알케테르가 팔짱을 끼고 말했다.
“거짓말 아니야. 정확하게는 네가 있으면 내 개인적인 목적을 수월하게 이룰 수 있을 거 같거든.”
개인적인 목적? 한쪽 눈썹을 올려 의문을 던지자 알케테르가 신난 것처럼 히죽대며 말을 꺼냈다.
“어이, 난 원래 에이르 여왕 폐하의 영원한 기사야. 그런데 널 만나고, 네 냄새에 취한 이후로 뭔가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고.”
팔짱을 낀 알케테르가 천천히 얘기를 꺼냈다.
“우스갯소리 같은 성노예 계획. 너라면 진짜 할 수 있겠는 거야. 그래서 편승하기로 했어. 난 에이르 여왕 폐하가 아닌 네 열차에 탑승하겠다.”
“…뭐?”
이게 무슨…. 속임수에 속임수를 더하겠단 소리가 아닌가. 즉 그의 말뜻은 나를 포섭해 삼국을 먹도록 도우면서 테르세르마저 잡아먹겠단 야망을 내비친 셈이다.
그 도구로서 날 이용하겠다니.
“아, 미리 말하는데. 오해하지 마. 이 계획의 중심은 너야. 난 네 줄에 서겠다는 뜻이지.”
알케테르는 반역을 대놓고 드러낸 발언을 서슴없이 내뱉었다. 도대체 이놈은 얼마나….
“배신자 새끼.”
“그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너도 흡혈귀에게 붙어서 전용 노예로 거듭났는데도 인간 군대를 돕고 있어. 내가 배신자이기 전에 너도 배신자야.”
아니야… 난 그런 배신자가 아니야.
“웃기지 마… 너랑 나는 달라.”
“아니. 똑같아. 너는 나랑 닮았어.”
그딴 역겨운 소리를! 치를 떨 때, 알케테르가 문득 손목시계를 살폈다.
“서둘러. 곧 교대 순찰이 시체를 발견할 거야.”
“…….”
“후후, 대답 못 하겠어? 시간은 주지. 그런데 네가 지체할수록 난 널 외면할 거야.”
잠깐의 고민을 해도 역시 내 대답은 이거뿐이다. 손을 들었다. 알케테르가 내 손을 보고는 선선히 끄덕였다.
내 손은 중지였다.
“아쉽게 됐어. 그래도 널 포기할 순 없을 거 같아.”
“가서 네 여왕 보지나 빨러 가.”
“흥. 그건 너도 마찬가지지 않나? 다음을 기약하지.”
알케테르가 복도를 향해 우렁차게 소리쳤다.
“경비병! 경비병! 탈옥이다! 노예들의 탈옥이야!”
이어서 그가 미소를 지으며 돌아봤다.
“비밀통로는 입 다물어주겠어. 내게 빚진 건 잊지 말라고.”
칫, 혀를 차고 시선을 돌렸다.
상황은 꽤 길게 이어졌다. 이른 아침부터 긴급비상회의가 열렸고 탈옥방조죄와 흡혈귀 살인죄, 공무상 표시 무효죄 등등 여러 가지의 혐의로 내가 입건됐다.
상대가 흡혈귀가 아닌 노예였던 인물인 데다 그 노예가 무려 여왕의 노예라는 점에서 혼란이 빚어졌으나, 이 때문에 상황은 더욱더 악화됐다.
과거부터 종종 내 죄는 사면되거나 약한 처벌로 넘겨졌다. 크게 문제가 될만한 죄는 아니었어도 그게 쌓이고 쌓이다 보니 흡혈귀들의 불만이 누적된 것이다.
그러다 보니 가장 큰 사건이 일어났고, 그 대상자로 내가 잡히자 불만 가진 흡혈귀들이 옳다구나 합심해 들고 일어났다.
“우리에게 도움 요청해도 됐잖아.”
내가 갇혀있던 감옥으로 찾아온 이는 에밀리였다. 그녀의 표정은 울기 직전이었다.
“아츠나는?”
“레베나가 데리고 있어.”
고개를 휘휘 저은 에밀리가 소리쳤다.
“지금 상황에 걔 걱정밖에 안 돼?”
“이때 이런 말 해서 미안한데… 아츠나는 나중에 보내줘.”
“그건 알아서 할 거야. 네 걱정부터 해.”
에밀리가 철창을 잡았다.
“이번에 사태가 너무 나빠졌어. 널 안 좋게 보던 흡혈귀들이 이번만큼은 절대 넘어가지 못하도록 사건을 물고 늘어지고 있어. 그들이 요구하는 건 네 사형이야.”
“예상했어.”
“그게 진짜 할 소리야? 진짜 죽으려고 작정한 거야?”
에밀리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눈물을 봤으면서도 난 못 본 척 고개를 떨어뜨렸다.
“차라리 같이 도망치지 그랬어. 살고는 봤어야지.”
“…글쎄다. 나까지 도망쳤으면 쉽게 추격당했을걸? 내가 잡혔으니까 흡혈귀들의 주목은 노예들이 아닌 내게 쏠렸어.”
“그들이 그렇게 중요해?”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끄덕였다.
“중요해.”
그렇게 에밀리가 떠나고 한참 동안 아무도 없는 감옥 속에서 홀로 침묵했다. 벌써 해가 저물고 어둑해질 때쯤에, 병사 한 명이 나를 꺼내주었다.
“사형인가요?”
“여왕님의 호출이다. 조용히 이동해.”
병사는 은밀하게 날 데리고 침소로 이동시켰다.
침대 위에서 속옷 차림으로 앉아있던 주인님이 날 돌아보곤 착잡하게 한숨을 쉬었다.
“이리 오너라.”
주인님의 곁에 앉았다. 어머니께 혼나지 직전의 아이처럼 심장이 두근거리고 손발을 가만히 두기가 어렵다.
주인님이 말했다.
“속 시원하더냐?”
“…….”
“그래. 뭘 생각했듯, 그건 제쳐두고. 다른 방법도 있었잖느냐.”
“…….”
“못해도 같이 도망치기라도 해야지.”
그 말에 피식 미소가 절로 나왔다.
“남들은 몰라도 전 도망 못 치잖습니까. 주인님은 제 냄새에 민감한데.”
“그래. 건방진 것아.”
주인님이 내 손을 끌어당겨 침대에 눕혔다.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바라보는데, 주인님이 내 옷을 벗겼다.
“저… 주인님?”
“가만히 있어라.”
“제, 제가 벗겠습니다.”
“닥치고 가만히 있어!”
주인님은 한 번도 남의 옷을 벗겨본 적 없었기에 서투르다. 단추 하나 빼는데도 시간이 꽤 걸렸다.
내가 도와주고서야 알몸이 되었고, 주인님은 예열도 없이 내 자지에 올라탔다.
팬티를 옆으로 밀어 살짝 드러난 음부에 내 자지를 밀어 넣는다. 안쪽은 촉촉하긴 해도 평소보단 덜 젖어있다.
“주인님. 그….”
“좋더냐? 그렇게 속 썩이니까 기분 좋아? 그래, 널 그렇게 괴롭히던 짐이 신하들 앞에서 한 마디도 못하는 꼴을 보더니 통쾌했어?”
“…아닙니다.”
“아니야? 아닌데 도대체 왜!”
내 몸을 짓누르며 질내를 꽉 조인다. 커다란 가슴이 출렁이면서 내 음경을 자극해도, 어딘가 평소랑은 달랐다.
내 외적인 쾌락과 내적인 기분 좋음은 동떨어진 채다. 흥분으로 물들어야 할 주인님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눈물이라도 흘릴 듯 일그러져 있었다.
그 얼굴은 한 번도 보지 못한 얼굴이었다. 오죽하면 시간이 멈춘 듯 심장이 멎고, 쾌락도 잊을 만큼 멍해지기까지 한다.
“주인님….”
“닥쳐라. 닥쳐라. 제발 닥쳐라. 그냥 가만히 있어.”
다시 질내가 움직인다. 다시 시간이 움직이고 정신이 돌아온 내가 주인님의 허리를 잡았다.
큰 가슴에 비해 얇은 허리. 그리고 커다란 골반마저 더듬었다.
이후 자세를 바꿨다. 주인님이 눕고 내가 그 위를 짓눌렀다.
지극히 정상적인 평범한 정상위다. 그렇게 허리를 움직이면 가슴이 눕혀진 상태로 출렁거린다. 주인님의 얼굴이 붉어졌지만 내게 시선은 맞추지 않았다.
토라진 듯 눈을 피하고 얌전히 내게 몸을 맡기고 있다.
“기분… 좋으십니까?”
내 물음에 주인님은 고개를 저었다.
“기분 나빠. 하나도 안 좋아.”
“이미 음부가 축축하십니다. 침대가 한껏 젖었는데요.”
한번 탁 강하게 튕기자 주인님이 허리를 움찔거렸다. 표정도 일그러지고 눈도 풀린 걸 보면 분명 갔을 텐데 애써 자신의 감정을 숨긴다.
그러다 피식 미소가 나왔다.
“제가 주인님과 3년이나 몸을 섞었는데 제게 숨기려고 마세요.”
“안 갔으면 안 갔다.”
“그런가요? 읏차.”
일부러 주인님을 끌어당겨 세웠다. 바둥거린 주인님은 몸을 일으켜, 나와 서로 무릎 꿇고 마주 보는 상태로 세워졌다.
그 상태에서 엉덩이 사이로 손을 집어넣어 애널에 손가락을 끼웠다.
“그럼 여기도 만져보고 안 가는지 봅시다.”
“…해봐라. 어차피 이 짓도 마지막일 테니.”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