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화 〉 나약하다는 건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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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복구에 그다지 긴 시간을 들일 필요가 없었다. 성에는 유능한 마법사들이 많았기에 몇 번의 마법과 수리공들이 종일 달라붙기만 해줘도 성은 비교적 예전의 위엄을 되찾을 수 있었다.
침소나 기타 사무실이 복구되고 나자 성의 일부 사람들은 일상으로 복귀하였고 인간들에 의해 입은 내적인 피해만이 그곳에 남아 가라앉은 분위기만 맴돌았다.
주인님도 이번 일로 스트레스를 오지게 받았는지 침대 위에서 내 몸을 짓누르는 강도가 심해졌다.
이러다 내가 복상사로 죽을 수 있겠구나, 라는 생각마저 드는 순간이 되어서야 주인님이 피로에 지쳐 간신히 잠들었다.
침대에 걸터앉아 부은 것처럼 통증이 드는 음경을 달래며 숨을 골랐다.
“후우. 시작하자.”
양 뺨을 짝짝 때린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옷을 챙겨 입고 주인님이 쓰는 향수를 감히 내 몸에 짙게 뿌려준 다음에 침소에서 나왔다.
‘우리가 도와줄게. 뭘 하면 돼?’
저녁에 나눴던 에밀리와의 대화가 귓가에 맴돌았다. 처음엔 나를 한심한 가축으로 여겼던 일반적인 흡혈귀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내게 마음을 열고 진심으로 나를 도와주길 원하는 흡혈귀가 됐다.
‘믿을 수 있는 흡혈귀란 에밀리 같은 친구여야 하지.’
덕분에 나도 에밀리에게 진심이 되기도 했고, 그녀와 지내는 시간이 즐겁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물론 그렇다고 에밀리가 내 연인이라던가 그런 건 아니다.
그녀는 내 성노예다. 내 성노예 계획의 첫 실험자.
‘혼자서 끙끙거릴 생각 말고 도움을 받아! 도와줄 테니까.’
레베나도 믿을만한 친구였다. 그녀와는 설마 이렇게 신뢰할 수 있는 관계가 되리라곤 생각 못 했다.
원래 생각 없는 녀석이고, 걔는 오직 하나부터 열까지 에밀리만 원하면 되니까 그다지 나와의 관계를 깊게 생각하진 않는 것 같다.
두 흡혈귀 여성이 나를 도와주겠다고 나섰지만, 난 씁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번엔 됐어. 나 혼자 할 수 있으니까 둘은 가만히 있어.’
이번 탈옥은 다른 이의 도움을 받길 거절했다. 내가 원하지 않았고, 내부 누군가가 끼어들어선 안 되는 거니까.
오직 나. 오직 나 혼자서만 해야 한다.
계단을 내려가다가 메이드용 청소도구함 창고로 들어갔다. 누가 와서 피하려는 움직임이 아니다.
창고 안에서 내가 찾은 건 깨끗하게 닦고 놓아둔 분무기였다. 뭔가 특별한 장치를 넣지 않은 평범한 분무기.
“후우. 할 수 있다.”
나 자신을 최면하듯 자신감을 되뇌고 분무기에다 물을 채워 넣었다. 가득은 아니고 반 정도만.
다음은 주머니에서 칼을 꺼냈다. 저녁에 몰래 슬쩍 가져온 적당한 나이프. 호신용에 쓰지 못하고 고기 자를 때나 쓸법하지만 칼날이 제법 잘 드는 그런 것.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제기랄, 이거 아프겠지?”
작게 중얼거리고 나이프를 내 손에 얹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나를 세뇌했다.
나는 흡혈귀를 무한히 증오한다. 나를 차별하고 괴롭힌 흡혈귀들을 떠올려라. 그들이 얼마나 사악하고 혐오스러운 존재들인지를 깨우쳐라.
자, 떠올려라. 내게 보였던 흡혈귀들의 끔찍한 만행을.
“아아, 개자식들….”
처음엔 어려웠지만 하나가 떠오르자 다른 기억들이 새록새록 줄줄이 떠올랐다. 자 하나하나 살펴보자.
먼저 가슴. 두 개의 커다란 가슴이 내 음경을 짓누른다. 묵직한 가슴의 정체는 무려 주인님이다.
얼굴을 붉히고 날 노려보면서도 가슴을 움직이는 주인님. 그때 기분 정말 좋았지.
“아앗! 이게 아니잖아!”
고개를 휘둘러 이 기억을 멀리 던져 패대기쳤다. 이 기억이 아니라 다른 기억이라고. 자 생각하라.
다음에 떠오른 건 등이었다. 옷 하나 걸치지 않은 매끈하고 깨끗한 하얀 등.
땀에 절어있고 엉덩이는 내 허리에 부딪혀 출렁거리는데 하도 맞았는지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녀가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메이. 그녀는 정말 최고의 여인이다. 마음씨도 곱고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바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매력적인 여성이다.
“아아악! 이게 아니라니까?”
이것도 휘저어 버리고, 다시 생각을 떠올렸다.
커다란 가슴과 적당한 가슴이 서로 맞물려 그사이에 내 음경이 튀어나와 있다. 두 여성은 무려 에밀리와 레베나. 서로 키스를 하며 나를 야릇하게 쳐다본다.
“미쳤나? 왜 이런 기억만 떠오르지?”
다음은 굳이 떠올리지 않아도 나머지 한 명이 내 눈앞에 나타났다.
시미르. 분명 내가 떠올린 여성 중에서 가장 불신하는 여자이지만 내게 큰 도움을 준 여성이기도 하다.
카나츠미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 큰 정보를 주고 우리에게 유리하도록 도움을 준 그녀. 이 일로 그녀는 직급을 박탈당하고 옥살이를 할 테다. 자기 자신을 버려가며 날 도와줬다.
그 생각을 하는 순간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읏!”
나이프로 손바닥에 상처를 냈다. 통증은 없었지만, 살을 파고드는 날의 느낌은 역시 흠칫 놀라고 만다.
분무기 안으로 내 피를 흘려 넣었다. 피가 안 나온다 싶으면 일부러 쥐어짜서 가능한 많이 분무기에 내 피를 섞었다.
어느 정도 되었다 싶을 때 미리 챙겨온 붕대로 상처를 단단히 감쌌다. 한 손으로 붕대를 감는 건 이젠 익숙하다.
“가자.”
흡혈귀들은 인간들에게서 몰수했던 무기, 장비, 기타 물품 등을 수색팀 사무실 압류품 창고에 보관해놨다.
원래 자물쇠로 단단히 잠근 다음에 창고 간부급들에게 출입허가를 받아야만 들어갈 수 있는데, 하도 많은 인원이 수사차 들락날락해서 아예 활짝 열어둔 거로 내가 기억한다.
수색팀 사무실 문 앞에 서서 심호흡을 했다. 습 후 스읍 훅.
당당하게 문을 열어젖혔다. 안에선 당직을 서는 중인 두 명의 흡혈귀가 피곤한 눈으로 각자 자리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거나, 책을 읽다가 나를 돌아봤다.
잠시 피곤한 눈들과 시선을 교환하고, 그중 한 명이 문득 물었다.
“뭐야. 여왕님 가축이 이 시간에 어쩐 일이냐?”
그다지 놀라워하지 않던 그들은 당황하기보단 신기해하며 물었다. 난 미소를 지어주곤 들고 있던 분무기를 칙 칙 뿌렸다.
어리둥절한 표정의 흡혈귀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뭐냐?”
“야. 너 뭐해?”
아끼지 않고 듬뿍 온 사방에 분무기를 뿌릴수록 흡혈귀들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한 놈이 벌떡 일어났다.
“이 새끼가 갑자기 무슨 짓이야? 야! 뭐 하는 거냐고.”
성큼성큼 다가오던 그놈의 발걸음은 가까워질수록 느려졌고, 아예 멈춰 서서 코를 벌렁거렸다.
이윽고 숨을 헐떡이며 흥분하기 시작했다.
“이… 이 미친… 허억… 후욱… 후욱….”
“야… 너 왜 그래?”
“이리 와봐. 냄새 맡아봐.”
곧 두 명의 흡혈귀는 내 곁으로 와 코를 벌름거렸다. 눈이 벌게질 듯 커진 상태에서 흘기다 나를 바라봤다.
난 싱긋 웃어주곤 분무기를 건네줬다. 그리고 손을 감았던 붕대를 풀어서 그것마저도 줬다.
“이, 이게 무슨… 왜, 왜?”
“달콤한 냄새… 젠장, 이 냄새 미친 거 아니야? 여왕 폐하는 맨날 이 냄새를 맡으면서 자는 거 아냐!”
내 예상대로 그들은 각자 분무기와 붕대를 들고 코를 박거나 벌컥벌컥 들이키기 시작했다.
내가 준 미끼에 정신이 팔린 흡혈귀들을 뒤로하고 방해 없이 압류품 창고로 들어갔다.
“휴우. 다행히 있구나.”
조마조마했는데 다행이다. 그곳에서 자동소총 한 정과 탄창 네 개 정도를 꺼내 주머니에 넣고, 나이프 하나도 꺼내 허리에 걸었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의 주요 목표. 성수를 찾았다.
카에데에게서 압류한 성수. 양은 얼마 안 남았지만, 이 정도면 충분하다.
성수마저 챙기고 밖으로 나온 다음, 흡혈귀들을 바라봤다.
초점도 흐려지고 분무기에 있던 피 섞인 물도 비운 다음에 서로 붕대에 코를 박고 있던 녀석들이 나를 돌아봤다.
그들이 중얼거렸다.
“젠장, 젠장, 젠장. 쟤가 먼저 한 거야. 나 이제 못 참는다.”
“안 되는데… 폐하께 걸리면 진짜 죽는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 둘은 나를 향해 다가왔다. 송곳니를 드러내고, 내 피를 입과 코에 덕지덕지 묻힌 이들을 위해 성수 뚜껑을 열었다.
“미안… 아니, 미안 안 해요. 역겨운 흡혈귀 새끼들아.”
성수를 그들에게 뿌렸다. 이전 주인님이 그러했듯 놈들은 성수가 피부에 닿자마자 경련을 일으키며 쓰러졌다.
“끄… 끄으으윽.”
“으드드득.”
턱을 떨며 괴로워하는 이들의 목에 나이프를 겨눴다. 힘없는 미소를 지어주고 손에 힘을 줬다.
지하 감옥도 어렵지 않았다. 냄새를 풍겨서 흡혈귀들의 주의를 교란하고 성수를 뿌려서 움직임을 봉한 다음에 나이프로 급소를 찔러 죽인다.
말장난으로 느껴질 만큼 쉬운 습격이 전부 성공하자 난 허탈함마저 느꼈다.
“저 왔어요.”
지하실로 내려가 카에데 감옥 문 앞에 섰다. 그때까지 잠들지 않고 기다리던 카에데는 돌연 내 모습을 보곤 입을 벌렸다.
그녀는 힘겹게 일어나 내 몸에 묻은 피를 가리켰다.
“누구 피지?”
“누구긴요. 흡혈귀죠.”
“어떻게 한 거야. 총소리는 없었는데.”
“다 방법이 있어요. 그런데 얘기할 시간이 없거든요? 움직일 힘 있죠?”
감흥 없고 감정 없는 힘 없는 내 목소리에 카에데가 안타까운 눈으로 변했다. 난 미소 한 번만 지어주곤, 감옥의 모든 잠금을 해제했다.
그들을 뒤에 줄 세운 채로 입구를 향해 이동했다. 흡혈귀와 마주칠 위험이 있으면 아까 했던 방식대로 손쉽게 죽였다.
카에데는 내 방식에 감탄이 아닌 허무함의 탄식을 흘렸다. 내 피만 있으면 흡혈귀들은 이성을 잃고 판단력이 흐려진다.
아츠나도 죽일 수 있을 만큼 모든 행위가 쉬웠다. 전투에 능하지 못한 나는 말할 것도 없다.
카에데도 지금껏 체력을 숨겨왔던 건지 조금만 움직여주자 암살까지 할 수 있을 정도로 금세 몸을 회복했다.
우리는 어이없을 정도로 당당히 복도를 지나 식당으로 왔다.
이곳엔 길이 없다는 카에데의 말은 비웃어주고 사람들끼리 합심해 커다란 냉장고 하나를 옆으로 밀어 치웠다.
냉장고 아래에 무려 놀랍게도 조그만 문 하나가 존재했다.
당황한 카에데가 말문이 막히자 난 손가락 하나를 세우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제가 지정한 성 탈출구 베스트 파이브의 1위에 해당하는 탈출 경로입니다. 냉장고는 저 혼자 옮길 수 없어서 이용은 못 하거든요.”
“이런 곳이 있었으면 왜 알려주지 않았어?”
“이건 저만 이용하는 곳이 아니거든요.”
고개를 갸웃한 카에데에게 싱긋 미소지어줬다.
“종종 사랑에 빠진 흡혈귀들은 성 바깥으로 몰래 나가기 위한 길을 만들곤 합니다.”
“허, 안전하긴 하지?”
“성이 이 꼴이 났는데 어떤 누가 마음 편하게 사랑을 꽃피우러 다니겠어요?”
그렇게 인원들을 탈출로를 통해 이동시켰다. 마지막까지 남은 카에데가 물었다.
“아츠나는?”
“저번에 저를 도와줬던 메이드 흡혈귀가 샀어요.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 마요. 기회 되면 보내드릴게요.”
“흥. 흡혈귀한테 도움을 받다니. ……뭐, 내가 할 소리는 아니로군.”
계면쩍게 웃은 카에데가 문을 통해 내려가고, 그녀에게 남은 성수와 유일한 자동소총 한 정, 나이프를 넘겼다.
이어서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난 미소를 지어주곤 문을 닫으려 했다.
카에데가 문을 손으로 막고 작게 외쳤다.
“뭐해! 너도 와야지!”
“누군가는 추적을 늦추기 위한 미끼를 자처해야 해요.”
고개를 저은 카에데는 내 손을 잡았다. 난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이제 누군가가 죽는 꼴은 보기 싫다. 너도 제발 이리와!”
“카에데. 반드시 숨어 계세요. 인간 군대는 꿈꾸지 말고 흡혈귀가 절대 찾지 못하는 곳에 가서 회복하세요. 제가 저녁에 말했던 대로. 알겠죠?”
입을 굳게 다문 카에데의 눈가에서 작은 눈물방울이 흘러내렸다.
“살아남겠다고 약속해.”
“에이, 안 죽어요. 안 죽어.”
“이번엔 죽을 수 있어.”
“걱정 마요. 저 여왕님이 애지중지하는 가축입니다. 벌은 세게 받겠지만 죽진 않아요.”
내 표정을 살피던 카에데는 잠시 침묵을 가지다 나를 향해 굳건하게 경례를 했다. 난 군인은 아니기에 어리숙하게 경례를 받았다.
“영광의 자유를.”
“영광은 개뿔. 자유나 찾으러 가요.”
문을 닫고, 냉장고를 밀었다. 나 혼자 힘으론 영 역부족이지만 어떻게든 밀어서 가려야만 한다.
낑낑대며 냉장고를 밀고 있을 때였다.
“눈물 없인 못 봐줄 드라마였어.”
심장이 덜컥 내려앉기 전에 소리가 난 방향을 돌아봤다. 알케테르가 히죽이며 싱크대에 기댄 채로 내 행각을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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