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화 〉 나약하다는 건 (3)
* * *
“이거 꽤 심각하군요.”
도대체 그가 어떻게 안 걸까? 하는 고민은 나로선 할 필요가 없는 고민이다. 이 상황은 알케테르가 지시한 상황이니 그가 우리 수도의 처참한 꼴을 알아챈 것도 이상하지 않은 셈이다.
보도블럭도 망가지고 도로는 하수도가 끄집어진 탓에 구멍이 생기고, 주변 건물은 무너지거나 폭발했지, 건물 너머로는 검은 연기가 치솟고 있지.
알케테르는 분명 속으로는 웃고 있으면서 겉은 안타까움을 연기했다. 주인님이 팔짱을 낀 채로 싸늘하게 물었다.
“돌아갔던 것 아니었느냐. 왜 사전연락도 없이 왔느냐?”
“이런. 제가 실례를 범했군요. 테르세르와 엘 에이라 간의 사업차 찾아왔는데, 연락을 아무리 드려보아도 답장이 없더군요. 그런데 이런 상태라면 안 한 게 아니라 못 한 거군요.”
사업은 개뿔이다. 상황을 보고 비웃으러 온 게 틀림없다. 그나마 다행인 건 공격하러 온 태세는 아니란 소리다.
찾아온 수행원들도 소수였고 지도자는 알케테르가 전부였다. 시미르나 라미에르는 없었다.
“이거 상태가 이런데 묵을 자리가 없군요.”
한창 복구 작업에 들어간 성을 바라보며 알케테르가 쯧쯧, 혀를 찼다. 주인님이 한숨을 나직이 내쉬더니 곁의 직원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알케테르에게 말했다.
“도시에 피해를 받지 않은 호텔이 있다. 비용은 성에서 지불할 테니 그곳에서 묵도록.”
“아아, 감사합니다. 그런데 비용은 저희가 낼 테니 호의는 괜찮습니다. 오히려 친절함과 자비로움에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우아하게 인사한 알케테르가 부하들에게 호텔로 짐을 옮기라는 말을 건네고, 주인님께 물었다.
“그런데 저희가 도와드릴 게 있을까요? 저희도 나름 마법에 일가견이 있답니다.”
계속해서 신경을 긁는다. 주인님의 턱에 힘이 들어갔지만, 지금 알케테르에게 신경 썼다간 사고라도 벌어질지도 모르기에 적당한 말로 거절했다.
“필요 없으니 돌아가거라. 내일 중까지 알현실과 객실의 복구를 완료할 터이니 그때 얘기를 나누도록 하지.”
“저희를 위해서 서두르실 필요는 없습니다. 눈치 보시지 말고 느긋하게 하시지요.”
알케테르가 떠나고 주인님이 이를 바득 갈았다. 송곳니를 드러내고 붉은 눈매가 험악해졌다.
“건방진 놈…. 여기고 저기고 짜증 나게 굴고 있어!”
나와 주인님은 성으로 돌아갔다. 이튿날 에밀리가 아츠나가 깼다는 얘기를 전해왔다.
“우린 처음엔 동의하진 않았어. 카에데 언니도 하루 동안 고민을 했었고.”
공식적으로 에밀리의 전용 노예가 된 아츠나는 이제 어디를 가든 그녀와 함께 다녀야 했다. 때론 메이드 일을 돕기도 하고 에밀리와 같은 침대에서 잠도 잤다.
다행히도 에밀리는 동정심에 그녀를 보살폈다. 흡혈도 남들이 보는 앞에서 예의상으로만 할 뿐, 주기적으로 하진 않았다.
“하지만 창립자 쪽에서 거세게 지시해왔어.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고. 그래도 우리는 의심하진 않았어. 그분은 종종 우리에게 찾아와 친절하게 대했고, 우리를 아꼈어.”
“알케테르… 비겁한 놈.”
“그를 믿는 게 우선이라 여겼고, 모두가 결국엔 공격을 감행했어.”
누군가 들을 수 있다는 염려로 성 뒤 소각장에서 얘기를 나눴다. 아츠나는 태우기 전의 부서진 벤치에 걸터앉아 설명했다.
곧 허탈한 미소를 지은 아츠나가 무릎을 당겼다.
“그런데 이렇게 됐네.”
예전의 쾌활하고 엉뚱했던 소녀가 무서울 정도로 얌전해졌다. 뭔가 통달한 사람처럼, 혹은 포기한 사람처럼 기운이 없고 고요하다.
“습격 당시는 모두가 자신만만했어. 절대 실패하지 않을 거라고 여겼고. 그건 우리의 사기를 증진했고 10분도 안 돼서 거점을 들켰어도 절대 흔들리지 않았어.”
타닥. 레베나가 나무 조각을 소각로 안에다 던져 넣었다.
“다 끝났어. 모든 게 다. 설마 그렇게 강할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 후후, 이게 인간의 운명인 거지.”
아츠나의 입으로 들을 리 없다고 생각한 말이었다. 그녀의 앞에 주저앉은 채의 난 어찌 말하면 좋을지 몰랐다.
고개를 숙이고 땅바닥만 쳐다봤다. 소각로에서 날아온 재 하나가 바닥에 떨어져 부스러졌다.
“…왜 아무도 알케테르가 속이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 거야?”
정말 순수하게 궁금해서 물었다. 아츠나가 피식 미소를 지었다.
“한원. 그럴 생각을 할 수 없었어. 우리는 물론 흡혈귀를 증오하지만, 눈앞의 그 흡혈귀는 뭔가 달랐어. 우리는 내심 정신적 지주가 필요했던 거야. 그 역할을 그 흡혈귀가 하니까 의심을 할 수 없었지.”
“후우, 멍청이들.”
이렇게 멍청하다 욕해도 이젠 의미가 없다. 내 욕을 들을 이들은 죽거나 지하 감옥에 갇혀 죽어간다.
흡혈귀들은 현재 인간들을 향한 학대와 멸시가 심해진 상태다. 노예들을 다루는 그들의 행위들이 전보다 훨씬 심해졌다.
무려 하룻밤 만에 서른 명 가까이가 고문에 죽거나 쇼크로 사망했다. 방심한 사이에 자결한 이들은 열 명 정도.
그중에 대장이라는 이유로 카에데는 진짜 말 그대로 도구처럼 다뤄지고 있었다. 오늘 아침에 카에데가 눈도 뜨지 못할 정도로 얼굴이 부은 상태로 어딘가로 끌려가던 모습을 보았을 정도다.
카에데는 날 알아보지 못했다. 앞을 볼 수 없었으니까.
“어떻게 할 거야?”
에밀리의 물음이었다. 비록 그녀는 흡혈귀이지만 인간을 위해서 움직이고 또한 진정한 동료가 되어줬다.
덕분에 난 에밀리를 가장 신뢰할 수 있게 됐다.
“맞아. 이제 어쩔 거야. 그냥 포기하게?”
아, 한 명 추가. 레베나도.
“잘 모르겠다. 즉위식 축제로 기분이 좋았는데 모조리 잡쳤네.”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답했다. 진짜 어쩌면 좋을지 감이 잡히질 않는다. 모든 희망이 무너졌기 때문인지 의욕이 무너져 내렸다.
“일단은… 지금 상황에 익숙해지도록 있는 수밖에 없겠어. 아츠나는 에밀리 곁에서 지내고 있어.”
“그다음은?”
그다음은. 아무런 대답도 못 하자 아츠나가 화난 듯 목소리에 힘을 넣었다.
“어떡할 건데? 지금 상황에 안주할까? 지하에 갇혀 고문받는 언니 오빠들을 구경하면서?”
“…….”
“차라리… 나를 구하지 말지 그랬어. 언니 오빠들처럼 고문을 받는 게 마음 편해.”
저런 말에도 난 위로나 지적을 못 했다. 나도 저런 생각을 지금껏 수도 없이 해왔으니까.
마치 반성하는 아이처럼 눈을 내리깔고 침묵했다.
고요하게 소각로 속 타닥타닥 나무 타는 소리만 들렸다. 불길을 지켜보며 침묵을 느끼던 레베나가 갑자기 성큼성큼 다가와 아츠나의 머리를 내려쳤다.
딱!
“아야! 뭐야!”
그 순간 아츠나는 과거의 바락바락 대들던 그녀로 돌아왔다. 그 모습을 본 순간 마음속 한쪽이 편안해졌다.
“갑자기 왜 때려! 흡혈귀!”
“어린 꼬맹이가 세상을 달관한 듯이 말하는 게 우스워서 그랬다. 뭐 해보지도 않고 그러고 있을래?”
“네가 뭘 알아! 난 성인이라고!”
“알아. 이것아.”
다시 꿀밤이 들어오고 아츠나가 씩씩대며 덤벼들었다. 한 손으로 아츠나를 저지하며 레베나가 이번엔 나를 돌아봤다.
“침울해할 건 어젯밤만으로도 충분해. 이제 방법을 찾아.”
“방법을 찾으라니. 무엇을?”
“난 답 안 해줄 거야. 이러니저러니 널 도와줘도 난 흡혈귀니까. 알아서 생각해.”
무슨 소리야? 놀리는 건가 생각하며 노려보는데 에밀리가 피식 웃으며 다가왔다. 벤치 조각에 앉고 아츠나를 자기 무릎에 앉힌 에밀리는 예전의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레베나 말이 맞아. 하루하루 비관적이게 살 바에 뭐라도 해봐야지.”
“내가 뭘 해야 하는데?”
“나도 말 안 해. 난 흡혈귀잖아.”
뭐야 쌍방으로 날 놀리는 거야? 입술을 비죽 내밀고 삐졌다는 표정으로 시위하자 레베나가 내 입술을 낚아챘다.
“느르….”
“우리 괴롭히고 태도 당당하던 변태적인 인간이 어디 갔담?”
“느르그….”
“야, 가축. 한원. 너 잘 생각해봐.”
팔을 뿌리치고 그녀를 올려다봤다. 레베나가 팔짱을 낀 채로 자신만만한 미소를 보였다.
“감옥에 갇힌 인간들은 어떻게든 버티고 있어. 너희 대장이란 여자도 고문당하는 와중에도 끝까지 버티고 있다고. 그런데 넌 아무것도 안 하고 펑펑 울게?”
“…도대체 나한테 뭘 말하고 싶은 건데?”
“얘기해줘도 눈치를 못 채네.”
질렸다는 표정의 레베나가 하는 수 없이 내게 속삭였다. 눈이 크게 뜨이고 입이 벌어졌다가 그게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란 걸 깨달았다.
감옥으로 돌아와 카에데와 철창을 사이에 두고서 내가 계획했던 방법을 그녀에게 설명했다.
일어설 기력마저 잃어버린 카에데는 바닥에 쓰러져 누운 그대로 내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녀의 가슴팍이 가쁘게 오르내리며 입이 파르르 떨렸다.
“잘 생각해. 저번이야 방법이 있었겠지만, 이번엔 상황이 너무 나빠.”
“다 각오했습니다. 이대로 있다간 당신들은 모조리 죽어요.”
카에데가 작게 쇳소리를 흘렸다. 가슴이 작게 떨리는 걸 보니 지금 웃고 있다는 걸 알았다. 나도 마주 웃었다.
“그런 각오도 안 하면 안 되죠.”
“나 말이다. 잡히고 난 이후로 포기할까 엄청 많이 생각했다.”
카에데가 얼굴을 내게 향했다. 붓기는 가라앉았지만 차마 지켜보기 괴로운 얼굴이었다. 찢어지고 상처 난 얼굴 사이로 카에데의 충혈된 눈이 보였다.
“왜 뻔히 보이는 속임수를 보고도 바보처럼 깨닫지 못한 건지, 나 자신이 바보 같게 느껴졌어. 내가 홀린 건가? 아니면 그 흡혈귀를 사랑하기라도 한 건가?”
“아뇨. 바보인 거예요.”
“알케테르가 찾아왔었다. 내 모습을 보더니 비웃고 가더군. 진짜 미치도록 화가 나는데… 무력하게 누워만 있었어. 한심한 놈인 거야. 내 바보 같은 선택에 부하들을 잃었는데 비웃는 걸 보고도 가만히 있어야만 하다니.”
“복수의 기회는 남았어요.”
움직이는 자체만으로도 고통에 눈이 번쩍일 텐데도 카에데는 이를 악물어 몸을 일으켰다. 힘겹게 등을 기대고 숨을 헐떡였다.
“너 잘 생각해야 해. 이번에는 진짜 달라. 네 말대로 실행하면 무조건 범인은 너밖에 정해져 있지 않아.”
잠시 멈추고 숨을 몰아쉰 카에데가 말했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 네가 죽을 수 있다.”
“각오했습니다.”
“각오가 문제가 아니라니까. 지금 인간 군대가 궤멸한 상태에서 인류의 희망은 네가 유일해. 그런데 널 죽게 놔둘 순 없어.”
미약하게 웃으며 눈을 내리깔았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고 머리를 철창에 기댔다.
“기적이 있기를 빌어야죠.”
“기적은 우리가 만드는 거야.”
“그럼 제가 기적을 만들겠습니다.”
“말은 쉽다고.”
“말이라도 쉬워야죠. 현실은 빌어먹게도 어려운데.”
내 하나하나 대꾸에 카에데가 머리를 흔들었다. 아마 고개를 젓는 행동일 테다.
“내가 뭘 해주면 되지?”
“체력을 보충하세요. 힘들겠지만 누군가에게 짐이 되지는 않도록 하세요.”
“어렵지 않다. 그게 끝이야?”
“제가 다 할 겁니다. 나만 믿어요.”
카에데는 말이 없었다. 대신 내게로 꿈틀꿈틀 다가와 철장에 머리를 기댔다. 난 손을 뻗어 카에데의 볼에 손가락을 문질렀다.
“아파.”
“…….”
“실패하면 죽겠는데… 만약에 성공하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일단은 숨고 회복하세요. 전쟁으로 입은 외적인 상처나 내적인 상처 모두 회복하도록 하세요. 그리고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도록 숨어 계세요.”
그러다 절로 웃음이 튀어나왔다. 내 웃음을 들은 카에데도 웃음 비스무리하게 소리를 내다가 통증에 끅끅, 숨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끄으윽… 대장으로서 체면이 말이 아니군.”
“지금까지 잘 해왔잖아요. 제 말대로 숨어계시고… 몸 좀 제대로 회복시켜요.”
문지르던 손을 뻗어 카에데의 볼을 쓰다듬었다. 내 손길을 느끼던 카에데가 볼을 비볐다. 잠깐이지만 강아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찾아갔을 때 섹스나 원 없이 합시다.”
“이런 상황에선 좀 멋지게 말할 순 없어? 그게 뭐야. 천박하게.”
“에이, 섹스섹스 잘만 얘기하던 사람이 뭘 부끄러워합니까.”
낄낄, 웃어준 다음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이전의 과정을 보여야 한다. 이번엔 속임수나 그런 거 없이 모두를.
“오늘 밤에 모두 탈옥시켜드리죠.”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