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화 〉 나약하다는 건 (2)
* * *
그저 걸어올 뿐인 주인님… 라니아 여왕. 카에데가 군용조끼에 매달린 나이프를 빼 들어 휘둘렀다.
달려오는 기세를 실어 휘두른 나이프는 빨랐다. 분노에 이성을 잃었어도 검의 정확도는 완벽했고 속력은 오히려 평소보다 더 빠른 듯했다.
하지만 스치지도 못하고 공기를 베었고, 라니아의 무릎이 카에데의 복부에 박혔다.
콱!
비록 방탄복도 껴입었지만 카에데는 충격에 뒤로 날아가 바닥을 굴렀다. 그래도 단숨에 회복해 일어나 다시 뛰어들었다.
“죽어버려!”
휘둘러지는 검이 라니아의 눈을 베었지만, 허리만 뒤로 움직여 궤도를 피한다. 굴하지 않고 연계 공격. 단검이 궤도를 바꾸어 사선으로 라니아의 가슴을 베었지만, 그마저도 뒤로 한 걸음을 물러나 피하고 말았다.
“하앗!”
카에데는 오히려 휘두르는 기세를 이용해 몸을 낮춘 상태로 한 바퀴 돌았다. 피할 수 없도록 라니아의 몸에 붙듯이 접근해 옆구리에 칼을 찔러넣었다.
끄기긱!
하지만 보이지 않는 철판에 은박지를 휘두른 것처럼 단검이 찌그러졌다.
“쳇!”
뒤를 향해 굴러 거리를 벌린 카에데는 바로 권총을 꺼내 라니아의 머리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탕! 탕!
하지만 쏘아나간 탄환은 라니아의 머리에 1미터도 닿질 못했다. 허공에 멈춘 탄환이 바닥에 떨어졌고, 여전히 무심한 눈길의 라니아는 팔짱을 꼈다.
“이게 끝인가?”
“아직이야!”
발을 박차고 튀어나가 이번엔 육탄전에 돌입했다. 흡혈귀를 상대로 육탄전은 무모하다 못해 멍청한 짓이지만, 카에데는 생각이 있었다.
튀어나간 손은 주먹이 아닌 손끝을 세운 채였다. 손가락의 끝이 라니아의 눈을 향해 뻗어졌지만, 고개만 옆으로 빼 공격을 피했다.
뻗은 팔을 옆으로 휘둘러도 그마저 유연하게 허리를 움직여 피했다. 이어서 발등을 향해 발을 찍었고 라니아는 발만 옆으로 돌렸다.
이어서 무릎이 튀어나가도 몸을 돌려 피하고, 팔꿈치를 연계 동작으로 덤벼도 마찬가지로 스치지도 못했다.
라니아는 자신이 선 자리에서 몇 걸음 움직이지도 않았다. 그에 비해 카에데는 몸을 날리고, 던지고, 달렸다. 그렇게 지치는 쪽은 카에데다.
숨이 턱까지 차올라도 멈추지 않는다. 눈에 보이도록 움직임이 느려지고 숨을 몰아쉬어도 카에데는 절대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빠악!
맞추지 못하는 카에데와 달리 라니아는 느긋한 동작으로 전부 적중했다.
라니아의 장저가 카에데의 가슴팍에 박혔고, 무려 십여 미터를 날아간 카에데는 굴하지 않고 다시 일어섰다.
“라니아!”
“후우, 가축 주제에 끈질기구나.”
슬슬 질려 하는 눈빛이다. 라니아가 손가락 하나를 세워 카에데를 노렸다.
행동의 의미를 모르는지, 상관하지도 않는지 달려들던 카에데를 본 순간, 이번엔 내가 달려들었다.
뛰어드는 카에데를 온몸으로 들이받고 그녀를 안은 상태로 바닥을 굴렀다. 바닥의 구멍을 향해 떨어지기 직전, 라니아의 염력이 나를 잡아 떨어지지 않도록 막아주었다.
“이거 놔!”
“이제 다 끝났어. 이러다간 너만 죽는다고.”
“내… 내 부하들이 다 죽었어. 저년 때문에!”
“…그만. 졌으니까 그만해.”
내 부탁에도 카에데는 숨 쉴 새도 없이 손을 뿌리치고 일어났다.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은 카에데는 작은 물병을 꺼냈다.
달려드는 동시에 물을 뿌렸지만,
“내가 두 번이나 당할 줄 아느냐?”
물은 보이지 않는 막에 부딪힌 듯 튕겨 나가 바닥에 흩뿌려졌다. 그걸로 저 물의 정체가 성수임을 알았다.
바닥을 박차 뛰어올랐지만 뻗어진 라니아의 손이 카에데의 목을 움켜쥐었다. 라니아가 더 작은데도 허공에 들린 건 카에데였다.
“커허어억!”
발을 버둥거리면서도 주먹은 라니아의 팔을 때렸다. 그 순간마저 공격하려는 의지는 훌륭해도 상대가 상대다.
그런 상태에서 카에데는 조끼에 달린 수류탄을 꺼내 핀을 뽑았다. 그러나 갑자기 위로 올라간 수류탄은 하늘 높게 떠올라 공중에서 피해 없이 폭발했다.
“재밋거리도 안 된다. 정녕 이게 전부라고? 이런 놈들에게 도시가 당했다니.”
싸늘해지는 라니아. 손에 힘이 들어가는 그 순간, 내가 뛰어들었다.
라니아의 팔에 매달리고 급한 대로 외쳤다.
“주인님! 제발 죽이지 말아 주십시오!”
어떻게 변명해야 할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그저 내가 할 일은 비는 거였다. 지금 상황에서 더 큰 피해 없이 끝맺을 수 있는 건 오직 나뿐이다.
“건방진 놈! 당장 나와라!”
라니아는 나를 잡고 집어던졌다. 바닥을 굴러떨어진 난 다시금 일어나 팔에 다시 매달렸다.
“제발… 용서해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나오라고 했다!”
다시 던져졌다. 셀 수 없이 구르다 다시금 뛰어들어 라니아, 주인님을 정면으로 끌어안았다.
“넌 도대체 왜 이러는 거냐? 대체 왜 그래!”
“제발… 저를 봐서라도 그만둬 주십시오. 천한 노예이지만 감히 제가 이런 부탁을 드립니다. 더는 인간이 죽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습니다. 제발… 제발….”
목소리가 떨렸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연기가 아니었다. 저도 모르게 터진 울음이었다.
그래도 효과는 있었던 모양이다. 침묵하던 주인님이 놓아주었고 바닥에 엎어진 카에데는 기침을 토했다.
주인님은 전혀 내 기분을 모르는지 등을 토닥였다. 어르고 달래는 애처럼 나를 진정시키려 했다.
“알았다. 여기까지만 하마. 괜찮아.”
전혀 괜찮지 않았다.
그렇게 사건은 종결되었다. 도시가 엉망진창인지라 수복하는데 시간이 들겠지만, 문제가 있다면 다른 국가들의 반응이다.
만약 수도가 이런 상태가 벌어졌단 사실을 알면 테르세르에서 습격을 감행할 수도 있다. 언제나 눈독을 들이는 테르세르가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리 없다.
벽에 등을 기대고 진정하려 노력하지만 불안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걸까.
비록 다수가 죽었지만, 다행히도 생존한 인간들이 있다. 그중 반은 생포됐고 나머지는 놀랍게도 도시를 탈출했다.
하지만 너무 많은 인간이 죽었다. 인간 군대는 궤멸이나 다름없고 그 수장인 카에데는 전의를 상실했다.
망연자실하게 넋을 놓던 난 트럭에 넣어지는 이들을 지켜봤다. 슬픔이나 분노는 없어지고 허탈함만이 남았다.
그런 내 눈에 라미에르가 보인 건 어쩜 놀랍지 않을 수 있다.
골목길에서 그가 보였다. 그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후드를 뒤집어쓴 채 상황을 지켜보다 자리를 피했다.
내가 그놈의 덩치를 모를 수가 없다. 미친 사람처럼 라미에르를 뒤쫓았다.
“라디에이터!”
내 외침에 라미에르가 우뚝 멈춰섰다. 후드를 벗고 뒤돌아 이를 바득 간다.
“이젠 가축 놈이 나를 그따위로 부르는구나.”
“왜 네가 여기 있지? 아니, 에이르 여왕이 시켰겠지. 역겹고 역겨운 년의 명령에만 움직이는 멍청한 개새끼야.”
정말 내 입에서 나온 소리가 맞나 싶다. 그만큼 난 흥분했고 분노에 정신이 헤까닥 돌아있었다.
라미에르에게 느꼈던 공포심 대신 당장 눈앞의 놈을 찢어 죽이고 싶은 살의만 들끓었다.
“허… 허허.”
라미에르는 어이없는지 넋을 놓고 웃었다. 그가 눈에 불을 켜고 다가와 내 목을 쥐었다.
“오늘은 인간이 미치는 날인가? 감히 내 앞에서 내 주군을 모욕하고 날 개새끼라고 불러?”
“죽여봐! 내 주인님이 널 죽여버리고 에이르 년도 똑같이 죽일 거야!”
“주인 믿고 까부나 본데. 내가 진짜 못 죽일 거 같아?”
“죽이라고!”
하지만 라미에르는 날 놓았다. 내 분노가 재밌는지 킥킥 비웃으며 등을 돌렸다.
“당장 찢어서 네 피를 마시고 싶지만, 그깟 도발에 걸려들었다간 일이 수포가 되어버리거든. 너도 이건 입 다물고 있는 게 좋아.”
“좆까! 날 안 죽이면 널 반드시 죽여버릴 거야.”
“허이고~ 무서워라. 우리 인간님께서 나약한 흡혈귀님께 그런 살인 예고라니. 흐흐, 입이나 다물고 있어. 만약 그러지 않는다면 너와 인간 군대의 협력을 다 떠벌릴 테니까.”
고약하게 비웃어준 라미에르는 천천히 바깥을 향해 사라졌다.
“그 인간들을 살리고 싶다면 얌전히 입 다물고 있어라. 네가 바보가 아니라면 홧김에 행동해선 안 된다는 걸 충분히 알겠지.”
난 그 자리에 쓰러져 앉아 침울하게 머리를 감싸 쥐며 괴로워했다.
성으로 복귀하니 발 디딜 틈도 없이 난장판이 된 성은 어디부터 손봐야 할지 감이 안 왔다. 일단은 인간들을 가둬둬야 하니 흡혈귀 마법사들이 감옥을 가장 먼저 수리했다.
두 시간의 노동 끝에 어느 정도 감옥이 자기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상태가 되어서야 인간들이 투옥되었다.
난 그곳에서 고문을 받는 군인들을 보았다.
“끄아아아악!”
“저 새끼 제대로 붙잡아!”
인두로 지져지는 남자 군인을 지나치고,
“그, 그만…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야! 이 년 봐! 우리 동족 죽여놓고서 뻔뻔하게 목숨 구걸해!”
“저년 세워봐! 이 년이!”
쿵!
여자 군인은 발개 벗겨진 채로 거친 폭행을 당했다. 방금 발에 복부를 차여 벽에 부딪친 여성이 바닥에 쓰러졌고 흡혈귀들은 낄낄 비웃었다.
맞은편 감옥에선 겁탈하고 있었다. 평소 하던 겁탈 행위가 장난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꺄아아악! 아아아아아악!”
“시끄럽네, 진짜! 이빨을 좀 뽑던가 혀를 뽑아!”
“혀를 뽑겠습니다.”
누군가가 벽에 걸린 집게를 가져와 여성의 혓바닥을 잡았다. 난 차마 그 이후를 보지 못하고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카에데였다.
“끄으으윽… 꾸으으으윽….”
뒤에서 체격 좋은 흡혈귀가 카에데의 목을 팔뚝으로 잡고 목을 졸랐다. 카에데가 발버둥을 치면 다른 흡혈귀가 양다리를 잡고 손을 음부에 쑤셔 넣었다.
“캬아! 이년 대장이라더니 엄청 버티는 거 봐!”
“이년 테르세르의 노예였다던데? 인장 어딨어? 지웠어?”
“인장을 지울 수 있다고? 솜씨 좋은데? 이년아!”
복부에 주먹이 박혔다. 무섭도록 깊게 들어간 주먹에 카에데가 몸을 부르르 떨고는 실금을 하고 말았다.
“이년 싼다!”
“마조네! 더 때려봐!”
더 볼 수 없어 자리를 피했다.
안으로 더 들어가기도 전에 한 감옥에서 아츠나를 발견했다. 옷도 다 벗겨지고 그녀의 작은 음부에 커다란 음경을 쑤시려는 흡혈귀를 보는 순간, 아츠나만큼은 구해야 한단 생각으로 뛰쳐들어갔다.
“아, 안돼요! 얘는 안돼요!”
“뭐야! 가축! 너 왜 그래?”
“제발… 얘만큼은 살려주세요.”
흡혈귀를 밀치고 아츠나를 끌어안았다.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한계다.
“한원….”
“제발, 제발 아츠나만큼은….”
“너 미쳤어? 얘 왜 이래?”
당황한 흡혈귀의 목소리. 그때 감옥으로 메이드 한 명이 들어섰다. 에밀리였다.
에밀리는 착잡한 눈으로 나를 지켜보다가 병사에게 말했다.
“에밀리? 무슨 일이냐.”
“죄송합니다. 저 노예는 제가 살게요.”
잠시 눈을 흘긴 병사는 한숨을 나직이 내쉬곤 자리를 비켜줬다.
“에휴, 뭐 마음대로 해라. 난 다른 애 가지고 놀련다.”
에밀리를 돌아봤다. 고맙다는 얘기가 나와야 하는데 도저히 입 밖으로 나오질 않는다.
그러는 이유에 대해선 확답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흡혈귀라서 본능적으로 그런다거나, 아니면 그럴 기분이 안 난다거나.
그래도 에밀리는 다가와 날 끌어 안아줬다. 흡혈귀지만 이상할 정도로 따스한 품이었기에 또 눈물이 흘렀다.
“에밀리… 에밀리….”
“그만 울어. 남자가 왜 계속 울어. 뚝 그치고 애나 달래줘. 네가 아니면 누가 그 애를 구해주겠어.”
진정하기까지 오래 걸렸다. 우리 셋은 감옥을 나와 이리저리 떠돌았다. 쉴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정원은 잔뜩 헤집어졌고, 복도는 병사들이 마구 뛰어다녔다. 의무실은 다친 흡혈귀들로 북적였고, 그래서 우리가 간 곳은 메이드 숙소였다.
성 바깥에 지어진 메이드 숙소는 한적했다. 충격에 빠진 메이드가 쉬고 있지만, 이쪽에 신경 쓸 정신은 없어 보였다.
“잠들었어.”
아츠나를 자기 자리에 재운 에밀리는 내 옆에 앉았다. 현재 나는 레베나의 침대에 걸터앉아있었다.
“괜찮….”
차마 괜찮냐는 물음은 안 나오겠지. 그야 괜찮지 않을 테니까. 그랬기에 에밀리는 말없이 내 손을 잡아주었다.
“손이 계속 떨리네. 추워?”
에밀리가 말해주고서야 지금 내가 떨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춥지는 않은데 몸이 계속 떨린다.
난 미약하게 웃었다.
“아니. 괜찮아.”
“응….”
더 무슨 위로를 해줘야 했을까. 에밀리는 입을 다물었고 나도 그게 낫다는 걸 알기에 가만히 있었다.
그렇게 침묵 속에서 헤매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에밀리의 시선이 닿았다.
“그 장면을 봤을 때… 무서워졌어. 자신도 없어지고. 그런데 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야. 만약 내게 이런 체질이 없었다면 나도 저렇게 죽었겠지란 생각마저 들고.”
다시 주먹이 떨렸다.
“뭔가 안도하고 있는 나 자신이 너무 역겹고 이렇게밖에 못하는 게 한심해서… 싫었어.”
“한원….”
“그냥 평생 노예로 살아야겠다고 생각해. 탈출한다거나 다른 계획은 꿈꾸는 게 어리석었어. 지금 내 자리에 안도하고… 그냥 평생….”
“한원. 에밀리.”
뒤를 돌아보니 다가오던 건 레베나였다. 한참 성 이곳저곳을 뛰어다닌 탓에 꼴이 엉망인 레베나인데 표정이 다른 방향으로 나빠 보였다.
“지금 상황에 더 안 좋은 소리를 해야 해서 미안해.”
“무슨 일인데?”
나 대신 에밀리가 물어줬다. 레베나는 힘없이 알렸다.
“테르세르 친위대 단장이 도시로 왔어. 철저히 숨겼는데 수도가 공격당했단 소식이 누출됐나 봐.”
알케테르. 그가 왔다는 소식.
갑자기 몸에 힘이 올라왔다. 활기가 돌고 앤돌핀이 솟구치는지 몸이 뜨겁고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아, 이건 그거다.
살인 욕구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