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화 〉 나약하다는 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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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이이이익
검은색 차량이 호기롭게 옆으로 미끄러졌다. 완벽하다며 손뼉 칠 만큼의 깔끔한 드리프트 다음에 차량은 길목을 막아섰다.
뒤로 오던 차량들도 비슷하게 멈춰섰고 내부의 흡혈귀들이 우르르 내려 벌어진 광경에 입을 벌렸다.
도시가 타오르고 있었다. 전부가 그러지 않은 건 천만다행이다. 하지만 내 예상이 맞다면 도시의 중요 건물들은 전부 검은 연기를 내뿜고 주변에서 다른 이들이 소방호스로 불을 끄려 열심일 테다.
“어기적거리지 말고 움직여라! 1조와 2조는 소방에 도움을 주고, 3, 4조는 테러 지역과 성으로 진입해 인간 군대의 흔적을 찾아!”
지휘자의 명령에 흡혈귀들이 행동에 돌입했다. 그 많은 인원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흡혈귀 특유의 빠른 움직임 때문에 사라진 것처럼 보인 거다.
늦게 차량에서 내린 주인님은 화가 났거나 놀라진 않았다. 평소처럼 무감각한 얼굴이지만 그 고요한 정적이 주인님이 얼마나 대로했는지를 설명했다.
지휘자가 다가와 현재 상황을 전달했다.
“폐하. 성의 잔여 병력의 무전에 의하면 인간 군대의 진입 경로는 풍화로 생겨난 지하 바닥과 성벽 계단 아래 기자재 창고, 정원의 구멍, 회당 단상 아래, 1층 여자 화장실 변기입니다. 현재 성 외곽 하수도에 인간 군대의 거처 흔적도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보기보다 많은 것이 발각됐다. 들키지 않겠다고 자만했으나 흡혈귀 수색팀의 실력을 얕본 것이다.
주인님은 모든 내용을 전달받으면서도 무심했다. 차분히 눈을 치켜뜨고 명령을 하달했다.
“하수도 관리하는 시설에 연락해서 지도를 가져와라. 인근 시민들 전원 대피시키고 도시 바깥 변두리에서 하수도 출입구를 찾아 죄다 차단해라.”
“알겠습니다.”
뭘 할 건지 예상이 간다. 침을 꿀떡 삼키곤 주인님께 다가가 말했다.
“주인님… 저, 저….”
“피해있거라. 내 너를 피해서 힘을 쓸 자신이 없다.”
“…알겠습니다.”
즉시 달려갔다. 지금으로서 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다. 누구든 좋으니 인간 군대의 병력 아무나 만나야만 한다.
뒷골목을 통해 들어가 짐작만으로 인간 군대가 어디 있을지 떠올려봤다. 그들이 아무리 빨라도 바로 도망치지 못했을 테다.
흡혈귀들은 예상보다 빠르게 인간 군대를 추적하고 그들의 이동 경로를 파악했다. 주인님이 명령하기도 전에 모든 하수도 출입구를 막았을 터.
그들은 아직 하수도에 있나? 아니면 바깥 어딘가에서 돌아다니는 중?
“카에데! 카에데!”
누가 들을 수 있다는 위험도가 있지만, 지금은 눈치 볼 상황이 아니다. 부디 인간 누구든 좋으니 내 부름을 듣고 나오길 빌었다.
콰아앙!
어딘가서 들려오는 폭음. 내가 그곳으로 달려가니 어느 자회사 건물 안에서 일어난 폭발이었다. 막 대피해 나오는 흡혈귀들이 보였고, 입구에 칼로 찢겨진 인간과 흡혈귀 시체가 보였다.
“꺄아아악!”
막 튀어나온 어느 여성에게 어깨를 부딪쳐서 넘어졌다. 아파할 기색도 없이 일어나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누, 누구… 기다려!”
폭발은 2층이었으니 계단을 올라갔다. 가까운 입구는 문짝이 이미 날아간 상태고, 안쪽에선 총성까지 들려왔다.
타다다당!
자동소총 소리가 들리고 경비원으로 보이는 흡혈귀 하나가 총에 걸레짝이 된 채로 걸어 나왔다. 몸을 부르르 떠는 그 흡혈귀 뒤로,
“개새끼야!”
군인이 워커 발로 머리를 걷어찼다. 튕겨 날아간 흡혈귀는 계단 난간에 몸이 걸렸고, 머리부터 떨어져 계단에 박았다.
우득!
뼈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흡혈귀는 몸을 잠깐씩 움찔할 뿐 다른 움직임은 없었다. 힘겹게 달려 나와 시체를 살핀 군인이 어딘가 정신을 놓은 듯 폭소했다.
“크헤헤헤! 으히히히힛! 죽어라! 빌어먹을 흡혈귀들!”
한참 웃던 군인은 갑자기 내 머리를 향해 소총을 돌렸다. 이미 그가 정신을 놓은 상태에서 이렇게 행동할 걸 예상했기에, 난 소총을 쳐올리고 군인의 몸에 매달렸다.
“이 썩을 흡혈귀!”
하지만 훈련된 군인답게 들고 있는 총을 이용해 내 옆구리를 후려친다. 늑골이 비명을 지름과 함께 바닥에 엎어졌다.
“커허억….”
“죽어!”
총구가 다시 겨눠지고, 난 황급히 외쳐야만 했다.
“난 인간이야!”
내 외침은 다행히도 군인의 귀에 닿았다. 방아쇠에 힘이 들어갈 순간, 군인이 총구를 치우고 나를 유심히 살폈다.
“오… 너 그놈이야!”
천만다행으로 구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난 그를 모른다.
그가 내미는 손을 잡아 일어선 난 다급히 물어야 했다.
“왜… 왜! 왜 습격했어요! 난 분명 카에데에게 습격하지 말라고 했단 말이에요!”
하지만 군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탄창이 몇 개 남았는지 확인하더니 약실을 체크하고 계단을 내려갔다.
“우린 대장 명령에 따를 뿐이야. 나한테 물어봐도 대답할 수 없어.”
“기다려요! 지금 인간 쪽 상황은 어떻게 됐어요?”
“빌어먹을. 정해진 습격대로 행동했는데 흡혈귀 수색팀이 지나칠 정도로 빨랐어. 놈들은 습격이 있고 십 분도 안 돼서 우리 거점을 찾아내 버렸어.”
“다, 다른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래도 대장의 기적에 가까운 행동 덕분에 계획은 가까스로 성공했어. 우리는 계획을 마치고 이제 도망치는 일만 남았으니 너도 하수도로 가.”
“노예도 다 탈출했나요?”
“무전을 받았을 때는 일부만 탈출했어. 도시만 나가면 끝이야.”
그래도 그들은 성공한 모양이다. 마른침을 꿀떡 삼키고 물었다.
“카에데는 어딨죠? 만나야겠어요.”
“대장님은 자신을 미끼로 거리로 뛰어가셨어. 그래서 우리가 성공할 수 있었던 거야. 그 후론… 잘 모르겠어.”
사실을 알려준 군인은 자신도 대장을 위해 싸울 거라며 거리 어딘가로 달려가 버렸다. 그를 따라가는 건 의미가 없었기에 난 다른 방향을 향해 달렸다.
“끄아아아악!”
막 모퉁이를 돌던 순간, 비명이 터져 나왔다. 팔 한쪽과 얼굴의 반이 날아간 흡혈귀가 보였는데 남은 팔이 군인의 가슴팍에 박혀있었다.
군인은 남은 힘을 다해 나이프를 흡혈귀의 목에 박아넣었다. 둘은 그렇게 바닥에 쓰러지고 목숨을 잃었다.
“아… 아아….”
충격에 빠진 기분에도 다가갔다. 이들은 서로가 군인이다. 인간 쪽의 군인과 흡혈귀 쪽의 군인. 그때 흡혈귀 쪽에서 무전이 들렸다.
“……발견……. …지원… 지…….”
흡혈귀 몸을 뒤져서 무전기를 꺼내 귀에 댔다. 거의 박살 나기 직전이지만 다행히도 작동은 하고 있었다.
“인…… 대장…… ……테 거리에서 ……교전 중.”
띄엄띄엄 들리지만 어딘지 안다. 무전기를 내던지고 알려준 거리로 향해 달렸다.
숨이 턱 막힐 듯이 달리다 시체가 발에 걸려 넘어지고, 불길에 화상도 입고, 날 인간 군대로 착각한 병사의 습격도 받을 뻔했다.
힘겹게 내달려 거리에 도달했을 때는 한창 총격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세환! 엄호 부탁한다!”
“예, 대장님!”
정세환이 엄폐물로 삼은 트럭의 보닛 위에 총을 올리고 정확한 사격을 했다. 맞은편 건물과 바리케이트에 몸을 피한 흡혈귀들은 고전 중이고, 그 사이에 카에데는 날렵하게 달려가 가로등 뒤에 있던 아이를 데리고 돌아왔다.
노예로 잡혔던 인간 아이였다. 카에데는 다른 부하에게 아이를 넘겨 대피시켰고 자신은 정세환과 함께 사격을 가했다.
“세환! 수류탄!”
“예!”
정세환이 수류탄을 꺼내 핀을 제거 후 집어던졌다. 청력에 예민한 흡혈귀들은 소리만으로 알아채고 엄폐물에서 빠져나왔다. 하지만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카에데가 저격했다.
타탕! 타당!
정확한 2점사. 피하던 흡혈귀 두 명의 머리가 수박 터지듯 박살 났다. 다시 엄폐한 카에데는 돌연 나를 발견했다.
골목길에 우두커니 서서 바라보는 내게 카에데가 갑자기 어느 손짓을 보냈다. 뭔가 싶어서 유심히 보니 자신을 도우라는 신호처럼 보였다.
갑자기 화가 치밀었다. 그녀는 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내 계획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놓고 저리 뻔뻔하게 대한단 말인가?
내가 고개를 젓자 카에데의 표정이 안 좋아졌다. 그녀는 내게서 시선을 거두고 세환에게 어떤 신호를 줬다.
다시 세환이 사격을 재개하자 들고 있던 화기를 집어던지고 앞으로 달려나간 카에데가 바리케이트 위로 몸을 던졌다. 동시에 권총을 이용해 공중사격. 엄폐물 뒤로 피가 솟구쳤다.
바닥을 유연하게 구른 카에데는 엎드린 상태에서 다른 흡혈귀를 조준. 마찬가지로 빠른 사격. 흡혈귀들도 어찌 못하는 놀라운 운동신경이었다.
정리 완료했다는 손 사인이 오가고, 정세환이 내게 다가왔다.
“너 왔군! 그렇단 건 여왕도 왔겠지?”
그에게 신경 쓸 시간이 없다. 이곳을 향해 달려오는 카에데에게 다가가며 소리쳤다.
“지금 장난해요!”
나로서도 이렇게 격앙된 큰 소리는 처음 낸다. 나조차 외치면서도 놀랐지만, 감정을 드러내진 않았다.
흠칫 놀란 듯 눈이 커졌어도 그녀의 몸은 전혀 움찔하지 않았다. 카에데는 칫, 혀를 차더니 나를 싸늘하게 노려봤다.
“돕지도 못할 거면 대피나 해라. 지금 난 미끼 역할 중이라서 같이 있으면 너만 손해야.”
“이건 약속하고 다르잖아요!”
내 외침에 카에데는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싸늘하게 눈을 흘기다가 돌아섰다.
“시간 없어! 당장 가!”
“소용없다고요!”
돌아선 카에데의 표정은… 그래. 나를 한심하게 보는 눈이다.
하지만 그녀는 모른다. 내가 누누이 말했음에도 믿으려고 하질 않았다.
“지금 다 성공한 거 안 보여? 지금 전원 하수도로 대피 중이야. 너도 늦기 전에 도망치라니까?”
“이미 하수도 출구 쪽은 다 폐쇄됐습니다. 당신들이 나갈 길은 없어요.”
내 말에 카에데는 예상했다는 듯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
“그런 거야 알고 있다. 다른 경로도 봐뒀으니 걱정 마.”
“후우… 제발… 제발, 제발! 그게 문제가 아니라고요. 여왕이 움직였어요. 하수도 지도를 가져갔다고요.”
“그게 뭐가 어때서! 우리는 하수도 지도가 없는 줄 알아?”
화가 치민 카에데가 내 멱살을 잡고 집어 던졌다. 바닥을 한 바퀴 구른 난 자세를 수복해 일어섰다. 다시 그녀에게 다가갈 때 카에데는 날 밀쳤다.
“겁쟁이처럼 도와주지도 못할망정 방해나 하지 말란 말이야! 넌 뭔 생각으로 여길 온 거야!”
“왜 약속을 안 지켰냐고요. 대답해요!”
“군대를 도와주는 창립자의 명령이다. 지금 당장 습격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어.”
머리에 피가 싹 가시다가 목에서부터 뜨거운 열이 치고 올랐다. 피를 토하듯 거칠게 소리치며 오히려 내가 카에데를 밀쳤다.
“알케테르를 왜 믿냐고! 이 병신년아!”
너무 화난 나머지 욕설까지 튀어나왔다. 카에데는 잠깐 휘청일 뿐 멀쩡했지만 다른 의미로 물러섰다.
“…네, 네가 그분의 이름을 어떻게 알아?”
“왜냐고? 그 새끼랑 싸우고 왔으니까 안다! 걔가 다 밝혔어! 인간 군대는 쓰고 버리는 용도일 뿐이라고! 테르세르의 엘 에이라 정복에 이용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고!”
황색의 피부에서도 드러나는 창백함. 카에데의 동공이 세차게 떨렸다.
“아,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나, 날 구하고 군대 설립에 도움을 줬던 분이야. 그 상냥한 분이 그럴 리가 없어.”
“그게 그 새끼의 무기라고. 남을 속이는 스파이짓! 내가 말했잖아. 당신 이용당하는 거라고. 당신들 전부 이용당하는 거라고! 이 답답한 놈들아!”
“아니야! 모, 모함하지 마…. 이, 인간 해방까지 그리 멀지 않았다고. 그게 전부…… 그래. 넌 흡혈귀 끄나풀이지.”
총구가 내게 향해졌다. 난 매섭게 카에데를 노려봤다.
“진정해요, 카에데. 후회할 짓 해선 안 돼.”
“끄나풀… 너를 믿어선 안 됐어. 나한테 혼란을 줘서 흡혈귀를 도울 속셈이야.”
“진정해!”
“입 닥쳐!”
“대장!”
카에데와 내가 뒤를 봤다. 정세환이 낯빛의 얼굴로 보고 있었다.
하늘을 날면서.
“세, 세환아?”
아니. 정세환만이 아니다. 주변의 모든 것이 자유의지를 가진 듯 하늘로 부유하고 있다.
가로등, 차량, 건물 잔해, 나무, 그리고 도시 곳곳에 숨어있던 인간들까지.
흡혈귀를 제외한 들릴 수 있는 모든 게 사방팔방 하늘로 떠올랐다.
그뿐만이 아니다.
쿠구구구구.
바닥이 갑자기 튀어나오더니 아스팔트 바닥을 뚫고 하수도관이 통째로 솟아올랐다. 여기만이 아닌 도시 전체의 하수도관이 하늘을 향해 솟구쳤다.
“시작됐어.”
누가 말했지? 내 입에서 나온 소리다. 나도 모르게 중얼거린 거다.
“대, 대장!”
“꺄아아아악!”
“살려… 사, 살려줘!”
하수도관에서 하나하나 밖으로 끄집어나오는 건 인간 군대 무리와 탈출한 노예들이었다.
카에데가 주저앉고 말았다. 그녀는 감당할 수 없는 주변의 광경에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시선이 언뜻 정세환에게 닿았다. 정세환의 손이 카에데를 향해 뻗은 채로….
“대, 대장….”
터졌다.
쥐어짜이는 귤처럼 핏물이 바닥에 쏟아지고, 정세환이었던 찌그러진 고기는 바닥에 떨어졌다.
그를 시작으로 하늘 곳곳의 인간들이 마찬가지의 고깃덩이들로 변했다.
하늘에서 비가 내린다. 시뻘건 핏물 같은 비가 사방에 쏟아 내리고 하늘은 튀기는 피를 흡수해 붉게 물들었다.
카에데가 가까스로 일어나 바닥에 뻥 뚫린 구멍을 내려다봤다. 그녀의 온몸이 정세환이었던 것의 피로 흠뻑 젖었다.
“카, 카에데.”
내 부름에 카에데가 돌아섰다.
눈물이 흐른다. 피로 젖은 그녀의 얼굴에서 맑은 물이 피와 섞여 볼에 긴 자국을 그었다.
입가는 미친 사람처럼 휜다. 카에데는 미친 사람처럼 울면서 …웃는다.
“하… 하하하! 하하… 하하핫! 아하하하하하!”
난 뭘 해야 할까? 지금 난 뭘 하고 있지? 그래. 멍청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지.
이제 난 무슨 표정을 지어주지?
“하, 한원….”
뒤를 돌아봤다. 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천만다행으로 아츠나가 거기에 있었다. 상처도 없고 피도 묻지 않았다. 그녀의 표정은 도대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는, 나와 같은 표정이었다.
다시 카에데를 돌아봤을 땐 그녀의 시선이 한 곳에 고정되었다. 미칠 듯이 바라는 감격에 찬 눈으로, 세상 모든 증오와 멸시를 담은 눈으로.
그래, 그런 눈으로 볼 사람은 한 명뿐이지.
“라니아아아아─!”
이성을 잃은 인간은 흡혈귀 군주를 향해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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