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화 〉 후타츠바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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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한 다짐에 용기가 얼마나 필요했을지 나로서는 가늠할 수가 없었다.
트라우마일 수도 있고, 남은 알지 않았으면 싶을 수도 있는 그런 과거. 메이는 지금껏 감춰왔지만 이내 드러내기로 마음먹었다.
후시오를 곁에 두고 메이는 주변을 휘둘러본 후, 아츠베를 노려봤다.
창백해지면서 분노에 일그러지는 아츠베.
그도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 짐작하고 있을 테다. 그렇다 보니 아츠베는 에이르를 돌아보며 다급하게 외쳤다.
“에, 에이르 여왕! 당장 저들의 입을 막아야 합니다!”
에이르는 흘긋 아츠베를 봤다. 아츠베가 자기 절제력을 점점 잃어갈수록 에이르와 알케테르가 그를 보는 시선이 달라지고 있었다.
알 수 있다. 이 얘기가 나오면 아츠베의 쓸모는 없어진다는 것을.
“알케테르! 이봐! 뭐 하는 거야! 당장 저 입을 막지 않고!”
가볍게 눈을 감고 뒤로 물러선 알케테르는 싸늘한 시선으로 아츠베를 바라봤다. 그 시선을 두려운 듯 보던 아츠베는 이어서 상왕을 향해 몸을 돌렸다.
“아바마마. 메이와 후시오는 거짓말을 하는 겁니다. 그들의 간사한 꾀임에 넘어가지 마십시오!”
상왕도 말을 삼갔다. 메이가 꺼낼 말을 기다리며 짐을 내려놓듯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
주변의 누구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걸까? 아츠베의 과녁이 이젠 주변 귀족들에게로 넘어갔다.
“듣지 마십시오, 여러분! 이 둘은 저를 쫓아내기 위해 거짓을 속삭이는 겁니다! 저를 믿어주십시오! 제가 이룬 성과들은 절대 거짓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절 믿어야만 해요!”
하지만 아츠베가 보이는 성급함과 초조함은 오히려 귀족들을 의심케 했다. 귀족들도 이상함을 눈치채곤 눈치 보며 메이의 말을 기다렸다.
자기편이 없다는 사실에 패닉이 찾아온 아츠베는 사방을 둘러 보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아까 전 기세는 어디 가고 이젠 내게 매달렸다.
“이, 이봐. 가축. 나를 도와라. 너라면 메이의 말을 막을 수 있지? 내 말만 들어준다면 네 노예 신분을 박탈하고 귀족으로 만들어주마. …도, 도와달라고!”
어림없지. 주인님이 자주 짓는 비웃음을 흉내 내보았다. 나름 똑같지?
아츠베의 시선은 이어 주인님께 닿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주인님이 도와줄 거론 보이지 않았는지 아무 말도 없이 시선을 돌렸다. 이젠 진과 마주쳤다.
“지, 진… 내가… 내가 잘못했으니….”
“잘못했으면 벌을 받아야지. 설마 죽는 그 순간까지 영원히 감춰질 줄 알았어? 추악한 것.”
진의 마무리 타격이었다. 아츠베가 힘없이 주저앉고, 메이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나 후타츠바 메이 황제는 황녀 시절 세 명의 태자에게 몇 년을 노예처럼 겁탈당했습니다.”
틀리지 않게 또박또박하게 말했다. 말의 흐트러짐도 없는 것이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듯 감흥이 없었다.
그래서일까? 바로 반응이 터져 나오지 않고 주변 가득 두려운 고요함만이 맴돌았다.
귀족들이 반응을 보인 건 후시오가 말을 이었을 때였다.
“사실입니다. 저와 아츠베, 마에다는 메이를 겁탈하였습니다. 이유에 대해서 여쭤본다면, 황위 쟁탈 관련해서 유치하고 시시한 경쟁이 붙었던 저희는 후시오가 메이를 겁탈했단 얘기마저 경쟁으로 삼고 그녀를 겁탈하고 만 것이죠.”
주변으로 분노에 치를 떠는 목소리들이 하나둘 속속히 튀어나왔다.
“이… 이 쳐죽일 놈…!”
“그러고도 뻔뻔하게 혼례를 입에 올린 건가! 무슨 낯짝으로 이곳에 온 거야!”
“사업이니 뭐니 그것도 이 사실을 감추기 위한 간사함에 지나지 않아! 경비병! 당장 내쫓으시오!”
“내쫓는 거로는 안 돼! 옥에 가두시오! 저자를 돌려보내면 다시 어떤 계략을 꾸밀지 모른단 말이오!”
“그냥 죽여! 황제 폐하를 건드린 저 파렴치한 놈의 머리를 참수하고 몸에 말뚝을 박아!”
“불로 태워야 해!”
“거세를 시키게! 재생하지 못하도록 음경을 불로 지져서 상처를 막아!”
“그것도 결국 재생하고 말아. 차라리 신분을 노예로 강등하고 가축들과 똑같이, 그보다 더 밑바닥 신분을 만들어 죄를 묻게 해야 해!”
하나였던 분노는 몰려오는 먹구름처럼 순식간에 번졌다. 그걸 기점으로 모든 귀족이 열변을 토하며 아츠베에게 죄를 묻기 시작했다.
창백해진 아츠베는 주저앉은 채로 동공을 세차게 흔들었다. 아직은 황자로 취급해줬던 귀족들이 이젠 자신을 가축보다 못하게 생각한다.
대꾸하지도 못하고 벌벌 떨며 욕을 듣던 아츠베의 눈이 상왕에게 향했다. 거만하기 짝이 없던 황자는 그 순간 어릴 적 아버지에게 떼를 쓰던 나약한 어린아이가 되어있었다.
“아버지! 저, 저자들은 반역자요! 내, 내게 욕을 하고 언성을 높였다고! 그걸 보고만 있을 겁니까? 아, 아들을 위해서….”
“네가 어떻게 내 아들이냐. 내게 너와 같은 아들은 없다.”
이미 떠난 손길은 다시 내밀어지지 않는다. 매정하게 돌아선 상왕에 아츠베가 기어와 상왕의 다리에 매달리려 했다.
그러나 병사들이 다가와 아츠베를 포박했고, 그는 끌려가는 와중에도 버럭 소릴 내질렀다.
“이, 이거 놔! 나, 난 아츠베다! 후타츠바 아츠베! 카나츠미 황족의 제2황자라고! 감히 이건 반기를 드는 행위야! 이건 사형감이다!”
“폐하께서 네놈을 사형하거나 옥살이를 하지 않고 추방하는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겨라! 역겨운 놈!”
“아, 안 돼!”
끌려가던 아츠베는 에이르의 옆을 지나치다가 눈에 불똥이 튀겼다. 병사들의 팔을 뿌리친 그가 에이르를 붙잡으려던 순간.
푸욱!
“끄아아아악!”
알케테르가 검을 뻗어 아츠베의 손등을 꿰뚫었다. 그의 비명에 상왕이 흠칫 놀랐으나 꿋꿋이 눈을 감고 참았다.
비록 매정하게 내쳤으나 자식의 정이란 건 무서운 것이다. 그러나 그 정이 주는 배려도 추방이 한계다.
“감히 에이르 폐하께 역겨운 손을 올리는 것이냐!”
완전히 아츠베를 버린 알케테르는 벼락같이 외쳤다. 그의 검이 빠지고 꿰뚫린 손을 바르르 떨던 아츠베가 에이르를 바라보며 간절히 구걸했다.
“에, 에이르 여왕. 우리 처음 거래 기억나나? 내가 황위를 빼앗으면 함께….”
“우리가 그런 거래를 했던가? 그대가 설마 이리도 추악하고 역겨운 자였다니. 진작 알았다면 그대를 돕는 게 아니었는데. 내 너를 잘못 보았다. 다시는 만나지 말자.”
다시 병사들이 끌고 가고, 처량하게 다리를 휘적댄 아츠베의 마지막 외침은 거기서 끝이었다.
“안 돼. 안 돼! 안 된다고! 내가 이날을 위해서 얼마나 참아왔는데! 얼마나 긴 시간을 감내해 왔는데! 안 돼! 안 돼애애애애─!”
“면목이 없군. 후타츠바 상왕, 메이 황제. 설마 저런 자였을 줄이야. 사죄하고 싶은데 받아주겠는가? 내 깊이 사과를 청하네.”
전혀 사과하는 자세나 표정이 아니었다. 에이르는 능글맞게 그리 말했고 메이는 어찌할 줄 몰라 매섭게 노려보기만 했다.
에이르가 다시금 말을 덧붙였다.
“이런. 화를 내도 어쩔 수 없지. 하지만 아츠베는 비밀도 많고 연기력도 뛰어난 자였네. 나도 깜빡 속아 넘어갔지 뭔가.”
“그대는 전혀 사과할 자세가 안 됐군요. 진심은 물론 오히려 비아냥거리는 수준 아닙니까? 정말 몰랐습니까?”
에이르는 허리도 살짝 숙이면서 메이에게 사죄하는 척을 했다.
“진심으로 미안하네. 이 정도에서 사과를 받아주고 사죄의 의미로 함께 친선 관계를 가지지 않겠나?”
뻔뻔한 것도 정도가 있다. 메이가 화를 낼 것 같았는데 상왕이 끼어들었다.
“그렇게 하세, 에이르 여왕. 다만 이 일에 대해선 더 떠들지 않기로 하고 서로의 국가에 득이 되는 친선을 가지세. 그 건에 대해선 다음에 따로 얘기하지.”
“지금은 힘들다는 건 알고 있네. 그러도록 하게.”
상왕은 마음을 추스르러 연회장을 나갔다. 에이르는 상왕의 등을 지켜보다 메이를 향해 말했다.
“듣던 대로 옛날보다는 달라졌군, 메이 황제. 우리 좋은 관계 유지하는 게 좋겠어.”
“…그대가 우리를 상대로 숨기는 게 없다면.”
“나를 뭐로 보는가? 아아, 그러지 말게. 메이 황제. 많이 힘들었겠어. 세 오빠에게 그런 학대를 받았다니.”
듣고 있던 후시오가 흠칫 놀랐다. 메이가 괜찮다는 듯 후시오의 팔을 잡고 싸늘하게 대꾸했다.
“그 이야기는 그만하죠. 이제 전 극복했고 더 얘기 꺼내는 건 저를 모욕하는 거로 듣겠습니다.”
“알겠어. 실례했다네.”
그리고 에이르는 알케테르와 함께 뒤돌아섰다. 아무도 묻지 않았는데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그럼 나는 이만 가겠네. 내가 좀 많이 바빠서 말이지. 시간을 내서라도 즉위식에 온 걸 알아주게. 그럼 즉위 경축하네, 메이 황제.”
메이는 답하지 않았다. 떠나려던 에이르는 문득 멈춰섰다.
주인님이 그 앞을 가로막아 섰기 때문이다.
거만하던 그녀가 지나칠 정도로 긴장했다. 잠깐만에 등이 흥건해지고 아예 노출된 몸의 모든 부분이 식은땀으로 번들번들해졌다.
“라니, 라니아 여왕. 오, 오랜만이군.”
저 정도로 두려운 건가. 우리 주인님이 처음으로 자랑스러워 보인다.
“네년은 나를 봐놓고 인사도 안 하고 가려고? 덜 처맞았느냐?”
대놓고 공격하는 저 거침없는 발언!
“그런, 그런 군주답지 않은 언행을. 인사 안 하려는 게 아니었다네. 봐봐! 지금 만났으니 인사하려 하잖아.”
“흥. 젖가슴만 디룩디룩 찐 년이 말하는 꼬라지 하고는. 내 길게 얘기 안 하고 용건만 딱 말해줄 테니 귓구멍에 잘 처넣어라, 젖가슴 년.”
성큼성큼 다가간 주인님이 큰 가슴을 내세워 에이르의 가슴에 밀착시켰다. 두 개의 말랑한 수박이 꾹 눌러졌다.
지지 않으려고 버티지만 누가 봐도 위축된 에이르와 당장 잡아먹을 듯 송곳니를 드러낸 주인님.
저분이 내 주인님이다.
“네년이 뭘 꾸미고 있다는 건 네 눈만 봐도 안다. 이상한 짓 꾸미다 들키는 순간 그땐 뺨 맞는 정도로 끝나지 않아. 옷을 죄다 벗기고 젖가슴 흔들며 사죄하는 장면을 영상으로 찍어 전국적으로 퍼뜨려주마.”
“그, 그딴 천박하고 추한 언행을! 나도 여왕이다! 그런 모욕을 가만히 들어줄 거 같아?”
“가만히 들어주지 않을 거면 뭐할 건데. 정녕 못할 거로 보이느냐?”
하고도 남을 주인님이다. 에이르는 이를 악물며 주인님을 지나 바깥으로 나갔다.
테르세르의 병사들이 모두 연회장을 벗어나고, 마지막으로 시미르가 나를 보며 옅게 미소지었다.
내가 감사하다는 말이라도 남기기 위해 그녀에게 가려 했으나 시미르는 오지 말라는 듯 손을 저었다.
시미르도 테르세르 병사들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나도 이만 갈게. 분위기 보니까 갈 때는 안 태워 주려나 봐.”
후시오가 말했다. 그도 뒤이어 나가려고 할 때 메이가 후시오의 손을 잡았다.
“갈 건가요, 오빠?”
“그래. 가야지. 난 여기 있으면 안 돼. 지금도 귀족들의 눈살이 따가워.”
진이 다가와 후시오와 마주했다. 흠칫 놀란 후시오였지만 이내 미소를 짓고 그의 어깨를 툭 쳤다.
“메이 지켜줘서 고마워. 넌 계속 메이 옆에 있어 줬으면 해.”
“제가 황자 전하를 살해했단 사실을 모두에게 알려야만 합니다.”
“아니. 그건 메이와 내가 짊어질 거야. 넌 평소처럼 메이의 곁을 지켜만 줘.”
후시오는 더 미련 두지 않았다. 깔끔하게 돌아서서 밝은 미소만 지은 채 연회장을 나가게 되었다.
후시오마저 나가고 나자 기다리던 귀족들이 슬금슬금 다가왔다. 메이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고 잘 버텨왔다며 대단하다며 얘기를 꺼냈다.
자연스럽게 뒤로 밀려난 나와 주인님은 자리를 피해 주기로 했다.
카나츠미의 위기는 이대로 끝나게 되었구나.
위기가 끝났다고 누가 그랬냐? 아, 방금 내가 그랬지.
오금이 아찔하게 메이를 노려보는 주인님과 당돌하게 주인님을 마주 노려보는 메이.
그리고 그 사이에서 피 말리고 있는 나. 지금 나를 중심으로 두 흡혈귀가 맞붙기 직전이다.
“메이 황제. 다시 말해보시게. 내가 잘못 들었나 본데.”
“라니아 여왕. 못 들은 척 마시죠. 저는 언제든 똑같이 말해줄 수 있습니다.”
이를 바드득 간 주인님이 피부가 아릴 만큼의 매서운 살기를 흘렸다.
“건방진 년…!”
“한원을 제게 넘겨주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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