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화 〉 후타츠바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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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이 빠져나간 듯 아츠베의 얼굴에선 생기가 사라졌다. 안 그래도 흡혈귀 특유의 창백함을 가진 아츠베인데 얼굴에 피가 싹 가시더니 정말 죽은 사람처럼 변했다.
달달 떨리는 그의 눈동자가 돌연 주변 귀족들을 향했다.
흠칫 놀란 귀족들은 불똥이라도 튈까 싶어 뒤로 물러나고 아츠베의 시선은 사방을 둘러보다 다시금 자신의 아버지에게로 닿았다.
상왕은 확인 사살하듯 다시 말했다.
“이제 이곳으로 오려고 하지 말아라. 원한다면 다른 나라에서 충분히 자리 잡을 수 있는 경비 정도는 줄 터이니 마음 접고 지금 나라를 떠나거라.”
아츠베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마치 거짓말은 하지 마세요, 아버지! 같은 말이 튀어나올 듯 어이없어하는 미소가 실실 튀어나오려다 눈매가 험악해졌다.
“그럴 순 없어!”
아츠베의 벼락같은 고함에 대기하던 카나츠미 병사들이 나서려 몸을 움직였다. 그때 손을 들어 그들을 제지한 상왕은 부드러이 물었다.
“이거로는 모자라겠느냐? 원한다면 정착할 국가에 부탁해 네게 귀족 직위를 하사할 수 있다.”
“아바, 아바마마, 아니, 아버지. 지, 지지금.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낮은 한숨이 나오고 상왕은 이미 앞서 말한 말을 다시금 꺼내 들었다.
“넌 이제 카나츠미의 사람이 아니란 소리다. 황족은 더더욱. 네게는 여기에 있을 자격이 없으니 떠나거라.”
“웃기지 마시죠, 아버지. 전 카나츠미 제2황자 후타츠바 아츠베입니다. 아버지의 아들 아츠베! 국가와 아버지를 위해서 노예 사업도 확장하고 국가의 문화력도 전파하기 위해 형제의 암해 공작에도 꿋꿋이 제 꿈을 이룬 당신의 자랑스런 아들이라고요!”
아츠베의 말에도 상왕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근엄하고 묵직한 상왕의 눈매에선 아들을 보는 온화함이 없었다.
“네겐 후타츠바란 성을 붙일 자격이 없다. 다시는 네 입에서 후타츠바가 나오지 않도록 하라.”
“나, 난 당신 아들이야!”
“이젠 아니다.”
자신의 분노를 다스리지 못한 걸까. 아츠베는 허리에 걸린 검에 손을 얹었다.
주변에서 비명이 들리고 노한 상왕이 호통을 치려던 순간, 뒤에 있던 알케테르가 아츠베의 손을 당겨 검에서 손을 떼게 했다.
아츠베가 돌아보자 알케테르는 진정하란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건지 아츠베는 심호흡을 통해 화를 다스리고 대화를 이었다.
“아뇨. 아뇨, 아뇨, 아뇨. 아버지, 아니. 아바마마. 당신은 방금 한 말을 후회하게 될 겁니다. 정말 메이가 황위에 어울리는 아이라고 보십니까?”
“메이도 훌륭한 황제가 될 자질이 있다.”
“오, 아니지요. 그 아이가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메이는 긴장한 듯 침을 삼켰다. 어떤 지적에도 대처할 듯 눈에 힘이 들어갔지만 그건 과도한 긴장의 증거였다.
“나라를 위해서 무얼 했습니까? 아니면 바이 힐에 있는 형님이나 세상을 먼저 떠난 동생이 무얼 했습니까?”
아츠베가 눈짓을 하자 대기하던 테르세르의 병사 한 명이 어느 서류철 더미를 들고 상왕에게 다가왔다.
공손히 무릎을 꿇고 서류를 건네니 상왕은 그걸 받아 하나하나 간략히 읽었다.
미묘하게 일그러지는 상왕의 입꼬리. 눈동자만 움직인 상왕이 아츠베를 바라봤다.
“그건 제가 지금껏 해온 성과들입니다. 황자 시절의 성과들과 제 장례를 치른 탓에 하는 수 없이 가명을 써서 사업을 넓히고 국가에 도움을 보탠 제 모든 사업 증명서입니다.”
“흠. 꽤 많구나.”
그때 알케테르가 나섰다. 둘의 호흡은 마치 연습한 것처럼 치고빠지기가 좋았다.
“상왕 전하. 고귀한 황족분들의 대화에 감히 저 같은 것이 끼어드는 불경을 용서하십시오. 아츠베 황자 전하는 놀랍게도 카나츠미를 떠난 시점부터 테르세르에 몸을 의탁하여 카나츠미를 위한 사업을 시작하였습니다.”
주변 귀족들의 놀라워하는 반응이 터져나왔다.
“아츠베 전하는 여러 방면으로 뛰어난 인재입니다. 경영적인 재능도 있고, 사업에 관한 안목도 뛰어나며, 밑의 사람들을 아우를 줄 알아 신망도 두텁고, 전하를 거뜬히 돕길 바라는 충실한 인맥도 넓습니다.”
대단하다는 얘기가 흘러나오고 과거에도 사람이 괜찮았다는 얘기가 나돌기 시작했다. 아츠베는 그 수군거림을 애써 못들은 체하며 우쭐한 듯 미소지었다.
“서류를 읽어보시면 아시듯, 아츠베 전하는 테르세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오직 카나츠미의 발전을 위한 사업만을 추진했습니다. 그의 국가를 사랑하는 마음은 저희 에이르 여왕 폐하께서도 감탄하시어 아츠베 전하를 탐내기도 하셨습니다.”
이어 미소를 지은 알케테르는 우수한 예법이 묻어나는 자세로 절을 하였다.
“하지만 자신은 오직 카나츠미를 위한 인물일 뿐, 언젠간 카나츠미의 도움이 되기를 원하여 에이르 폐하의 손길도 거부하시어 이렇게 오게 되었습니다. 에이르 폐하도 아츠베 전하께서 황제의 자리를 얻는다면 국가 간의 친밀한 관계를 기대한다고 전하셨습니다.”
거짓말! 난 이를 악물었다. 알케테르는 내게 그랬다. 테르세르의 목적은 엘 에이라와 카나츠미를 차지하겠다고.
그런데 친밀한 관계? 웃기시네. 에이르는 아츠베마저 이용할 속셈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알 리 없는 귀족들이나 신하들은 오히려 감탄하는 추세를 보였다. 진과 메이가 당황한 듯 주춤거리고 상왕은 조금 놀라운 듯 입매를 움직였다.
“나중에 읽어보도록 하지.”
상왕은 들고 있던 서류를 재상에게 넘겼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그럼 네 목적은 메이의 황위를 돌려받는 것이더냐?”
“아닙니다. 앞서 말했듯 그건 혼란만 가져다줄 터이니 메이와의 혼례를 허락해주십시오, 아바마마.”
“네 동생과 그러고 싶으냐?”
“남들의 시선에는 절대 곱지 못하겠지요. 저도 처음엔 망설였으나, 이건 나라의 발전을 위한 최선의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아츠베는 한 걸음씩 다가왔다. 시선은 메이에 고정한 채.
“그리고 메이와 저는 제법 사이가 좋습니다. 비록 마지막으로 만났던 시절엔 틀어졌으나, 저는 메이를 여전히 사랑하고 그녀를 용서하였습니다.”
거짓말인 건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메이. 우리 그때를 화해하자. 그리고 혼례를 맺자.”
내민 손은 메이에게 가까웠다. 입술을 깨물고 고민에 빠진 메이가 손을 들려던 순간, 상왕이 메이의 손을 잡아 내렸다.
미소가 일그러진 아츠베가 말했다.
“아바마마. 부디 허락해주십시오. 이제 황가에 피바람은 불지 않을 것이며 저희는 다시 사이가 좋아질 수 있습니다.”
“그렇지는 못하다. 아츠베. 네 노력은 나도 감탄할 정도의 가상함이 느껴지나, 모두 거절하겠다.”
“아바마마….”
“아바마마라고 부르지도 말 거라. 네게 메이를 허락할 수 없다. 네가 메이에게 정말 행복을 줄 수 있는 인물이더냐?”
입술에 경련이 온 아츠베가 문득 눈가를 야릇하게 휘었다.
“아, 물론입니다. 메이를 충분히 행복하게 해줄 수 있습니다. 실제로 저는 메이를 행복하게 해주기도 했습니다. 그렇지 않니?”
튀어나가려던 진을 주인님이 가까스로 막았다. 아츠베가 말한 것은 그녀를 겁탈하고 괴롭혔던 그 시절을 얘기하는 거다.
그게 오빠들을 위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 여긴 메이였기에 그 말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창백해진 메이는 아랫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예. 마, 맞습니다.”
“보았죠? 아바마마. 형제들 누구도 메이를 아끼진 않았으나 오직 저만이 메이를 웃게 만든 자입니다. 오히려 메이도 저와 혼례 하면 행복할 겁니다.”
“크흠….”
어찌하면 좋을지 모르던 그때, 우리 쪽 국가 병사가 슬그머니 다가와 주인님께 속삭였다. 표정이 싹 변한 주인님이 눈을 치켜떴다.
“…그년이?”
“예. 곧 들어올 거랍니다.”
“제기랄, 그 병신년이 진짜….”
도대체 무슨 일인데 저리 잘 들리게 욕을 하는 걸까?
누군지 궁금증을 참을 필요는 없었다. 문이 열리고 노출도가 높은 원피스를 빼입은 우아한 여성이 들어선 것이다.
주변에서 경악에 찬 탄식들이 터지고 아츠베가 뒤를 돌아보고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상왕과 메이는 긴장한 눈으로 들어온 여성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 오는 줄 알았는데. 에이르 여왕.”
“이리 늦어서 미안하다네, 후타츠바 황제. 즉위식이 지났으니 후타츠바 상왕인가.”
매끄럽고 풍성한 긴 적발에 몸에 달라붙는 얇은 드레스. 가슴과 배, 허벅지까지 노출이 있는 드레스인지라 주변의 시선이 따갑게 박힐 테다.
저것이 에이르 여왕. 확실히 주인님과 같은 분위기이지만, 날이 서 있고 무거운 주인님과 달리 불처럼 타오르고 야망에 넘쳐 보인다.
일단 확실한 건 저 가슴이다. 주인님과 똑같은 거대한 가슴이 가장 먼저 보였다.
“오면서 상황은 들었네. 남의 가정사에 내가 끼어들어도 되려나? 거절하더라도 난 말하고 싶은데.”
과연 거만하다. 주인님이 왜 그녀의 뺨을 때렸는지 알만하다.
상왕은 전혀 불편한 기색 없이 익숙하게 답했다.
“지금 상황에서 뭘 말하고 싶은 건가?”
“아츠베와의 혼례를 허락해주었으면 싶네.”
“난 허락하지 않을 걸세.”
“그러면 카나츠미와 테르세르의 교류가 원활하지 못할 텐데.”
대놓고 내뱉는 발언에 상왕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저건 대놓고 불화를 암시하는 말이다. 상왕도 테르세르와 아츠베의 관계는 대강 짐작했을 테니, 저건 협박이나 다름없다.
“아츠베의 사업을 우리 쪽으로 돌리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지만 그는 오로지 자국을 위한 사업을 했지. 그대가 아츠베를 내친다면 그 사업은 오롯이 내게로 와야 하겠으나 그는 그럴 시엔 사업을 그만둘 거라 으름장을 놨네.”
에이르의 눈가가 야릇하게 휘었다. 그 매혹적인 눈길은 자체만으로도 보는 이들을 유혹하는 기운이 품어져 있다.
“그 사업이 공중분해 되는 모습을 차마 두고 볼 순 없네. 그를 받아주고 혼례를 한다면 사업도 건재할 테고, 테르세르와 카나츠미의 협력사업을 추진해서 우리의 오랜 숙적 관계를 청산하지 않겠나.”
거절하면 테르세르의 전면적인 공세를 막아야 한다. 지금껏 후타츠바 상왕이 그들의 고약한 심보들을 막아냈지만 메이가 그걸 다 견뎌낼 수 있을까?
메이가 과거완 다르다곤 해도 천성이란 게 있는 거다. 메이는 초반엔 잘 버텨도 훗날 무너질 수 있다.
그렇다 해서 요구를 받더라도 메이는 아츠베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된다. 그렇게 되면 카나츠미가 테르세르의 꼭두각시가 되는 것도 시간문제다.
현명한 선택을 해야 한다. 하지만 어떤 것이 가장 현명하단 말인가.
“주인님… 저희가 뭘 도울 수 없을까요?”
어떻게든 돕고 싶었다. 어느 선택도 안심할 수 없는 지금으로서 어떻게 해야 좋단 말인가.
“짐도 생각 중이다. 저 교활한 년은 사업 따위 사실 안중에도 없을 테다. 무엇으로든 카나츠미를 곤경에 처하도록 갖은 술수를 썼겠지.”
이어서 주인님이 작게 저년이 덜 처맞았군, 이라고 중얼거렸다. 순간 웃음이 나올 뻔했지만 잘 참아냈다.
상왕은 대답하지 않았다. 어찌하면 좋을지 생각할 때, 메이가 상왕의 손을 잡았다. 상왕과 눈을 마주친 메이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메이가 말했다.
“혼례 하겠습니다. 그거면 됐습니까?”
아츠베의 입가에 사악한 미소. 해냈다는 듯 우쭐해지듯 올라가는 에이르의 턱. 상왕의 착잡해지는 얼굴과 무너지는 진.
그리고 문으로 입장한 시미르.
“어?”
달려온 건지 숨을 헐떡이며 들어온 시미르의 곁에는 마찬가지로 숨 가쁘게 쉬는 키 큰 남성이 있었다. 보라색의 머리에 아츠베와 닮았지만 다른 남자.
설마?
“너는 아직도 잘못이 무엇이었는지 모르겠어?”
시선들이 또다시 뒤로 돌아갔다. 토너먼트도 아니고 차례차례로 등장하는 인물들에 상왕의 표정이 한껏 구겨졌다가 상대가 누군지 발견하곤 표정이 펴졌다.
“후시오.”
“아바마마. 제가 감히 얼굴을 들이민다는 것에 지금만큼은 부디 용서하시길 바랍니다. 저는 오직 전할 말만 하고 다시 떠나도록 하겠습니다.”
후시오는 앞으로 뚜벅뚜벅 다가왔다. 체격만으론 알케테르와 동일시한 후시오는 아츠베를 매섭게 내려봤다.
긴장한 아츠베가 한 걸음 물러서며 경계했다.
“이거 얼마 만이야, 형님?”
“너와의 옛정을 생각해서 참고 있으니 비아냥은 삼가라, 아츠베. 당장 네 이빨을 뽑아버리고 싶은 기분이니까.”
한때 황위를 물려받을 황태자로서는 어울리지 않는 거친 표현이었다.
대신 그것만으로도 아츠베는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옛날 칼을 맞대던 시절의 기억이 남아있는 모양이다.
후시오는 메이와 잠시 시선을 맞댔다. 그는 돌연 메이에게 무릎을 꿇고 각진 자세로 머리를 바닥에 박았다.
주변의 놀란 소리를 모조리 집어삼키는 후시오의 외침이 사방을 메웠다.
“메이! 그날도 너에게 이리 사죄했다! 그날의 넌 용서를 해주었으나 난 앞으로도 죽는 그 순간까지 네게 이리 용서를 빌 것이다! 그러나 다시금 네게 악몽을 일깨우는 말을 해야 한다. 그건 모두가 들을 수 있는 얘기이다. 원한다면 들어야 할 사람들에게만 말할 수 있다. 너만 괜찮다면 부디 허락해주겠니?”
뭘 말할지 알 테다. 아츠베의 다시금 일그러지는 표정. 그걸 지켜보던 메이는 씁쓸하게 웃으며 답했다.
“허락하겠습니다. 모두에게 알려도 좋아요. 대신 내가 말하게만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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