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화 〉 후타츠바 (2)
* * *
그 충격을 어찌 말로 표현할까.
보라색 머리에서 내가 빠르게 눈치를 챘어야 한 건가? 아니, 머리 색이란 건 당장 거리만 나가봐도 다양하다.
무엇보다 카나츠미의 황제 메이가 보라색 머리이기에 현재 젊은 여성들의 트렌드 컬러는 보라색으로 지정될 정도로 흔했다.
허리도 흔들지 못하고 멍하니 사진만 들여다봤다. 몸을 사로잡던 그 흥분이 그 충격 덕분에 싹 사라진다.
속에서 쪼그라진 음경에 놀란 메이가 당황한 듯 말했다.
“미, 미안해. 내가 괜한 소리를 해서 분위기를 망쳤지?”
내가 받은 충격의 원인이 본인의 가정사로 착각한 메이가 사과를 건넸다. 난 고개를 세차게 젓고 물었다.
“메이. 너 오빠랑 마지막으로 만난 게 언제쯤이야?”
“첫째 오빠는 3년 전에. 연락은 꾸준히 하고 있어. 오늘 아침에 황위 즉위 축하한다는 편지도 받았는걸.”
“둘째 오빠는?”
“그날 도망친 이후로 전혀. 어디서 뭘 하는지는 몰라. 그게 왜?”
“…….”
바로 대답하진 못했다. 도망친 둘째 태자가 테르세르와 편을 먹어 뭔가를 꾸미고 있다고 말하기엔 내가 가진 정보가 많이 협소했다.
무엇보다 함부로 떠들었다간 알케테르가 메이를 곤경에 빠뜨릴 가능성이 크다. 성장한 메이라곤 해도 아직은 어리숙한 면이 많다.
입을 꾹 다물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그날 밤은 도저히 분위기를 이끌어갈 의지가 없었다. 메이에겐 다음으로 미뤘고, 자신이 실수했다고 오해한 메이는 거의 울 듯이 사과를 했다.
주인님께 알릴까도 생각해봤지만, 주인님이 내 말에 따라줄지가 문제다. 얘기를 듣자마자 곧바로 알케테르의 목을 뽑아 국가 갈등의 시발점이 될 수 있다.
메이도 아직은 알려줄 시기가 아니다. 그녀는 아직 문제 해결에 능숙하지 못하고, 무엇보다 오빠가 배후에서 사악한 짓을 꾸민다는 사실을 알면 큰 충격에 휩싸일 테다.
상왕한테도 알리는 건 안 된다. 그렇다면 도움받을 사람은 그가 유일하다.
“그 개자식! 그때 확실히 추격해서 죽였어야 했는데!”
탁자를 쾅! 내리친 덕분에 술잔이 엎어졌다. 진이 무심히 잔을 바로 세우고 니아가 행주로 술을 닦았다.
“정말 확실한 거야?”
“확실합니다. 그 비열한 미소에 교활한 눈매는 잊을 수가 없어요.”
“후우… 그의 이름은 후타츠바 아츠베. 설마 살아있었을 줄이야.”
진의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 상상만으로도 화가 치미는지 진은 주먹이라도 날릴 눈빛으로 날 바라봤다. 얼떨결에 내가 죄인이 된 기분이 들었다.
“세 태자 중에서 가장 승부욕이 심하고 목적 달성을 위해선 뭐든지 하던 양반이지.”
“얘기 나눠본 적 있어요?”
“응. 그는 처음에 날 호위 무사로 고용하려 했어. 그런데 그의 사악함은 영 별로고 남자이기도 해서 거절했지. 그 이후로 메이 폐하의 호위 무사가 됐고.”
“여자는 참 잘 밝히시네요.”
“그래도 건드리는 여자는 니아 뿐이다. 폐하한테는 전혀 손 안 댔어.”
참나. 말은 잘해요.
책상에서 몸을 떨어뜨리곤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그리고 기지개를 피며 물었다.
“아무튼, 어찌할 방도가 없어요. 어떻게 할까요?”
“글쎄다. 일단 알케테르가 문제겠는데.”
진은 침울한 얼굴로 답했다. 역시 현재 가장 큰 적수는 알케테르다.
“진님이 알케테르를 상대할 순 없나요?”
“장난해? 테르세르 친위대는 테르세르의 최고 전력이야. 그중에서 단장을 맡은 알케테르는 테르세르 군사력의 최고봉이고.”
머리 아픈 듯 이마를 짚은 진은 앓듯이 말을 계속했다.
“그 실력 좋은 시미르도 알케테르한테서 배웠어. 검술 실력은 아마 전체 흡혈귀 중에서 최고이고 마법 실력은 마법의 본고장, 홀와트에서 손수 졸업까지 했으니 말할 것도 없고.”
“젠장. 뭐 그런 양반이 다 있어요?”
“그런 놈이라서 테르세르 친위대 단장인 거야.”
손가락으로 탁자를 딱딱 두들기던 진이 문득 물었다.
“지금 단순 실력으로 알케테르를 완벽히 제압할 수 있는 분은 라니아 여왕 폐하가 유일해. 말씀드려.”
“안 돼요. 말했다간 메이 폐하가 위험할뿐더러, 그걸 트집 잡아 국가 전쟁까지 벌어지면 어떡해요?”
진이 미간을 찌푸리며 지적했다.
“테르세르에선 이미 전쟁을 선포한 거나 다름없어! 인간 군대를 이용해서 이미 사태를 다 벌여놨잖아.”
“그래도 피 안 볼 방법이 있지 않을까요? 젠장! 알케테르가 여자였다면 곧바로 조교 했을 텐데.”
“아, 그래! 너 알케테르를 꼬셔라. 하루만 엉덩이 대주면 되잖아.”
“진짜 또라이세요?”
티격태격 의견충돌을 벌이며 방법을 찾던 순간이었다. 니아가 문득 문으로 가더니 바깥의 누군가와 몇 마디 대화를 주고 나눴다.
다시 돌아온 니아는 불안한 듯 말했다.
“진 주인님? 시미르 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세상에. 비밀 유지를 위해서 입막음하러 온 건가?”
“아뇨. 시미르 씨는 아마도 다른 의미로 온 거 같은데요?”
난 그리 짐작했다. 진이 들어오라는 말에 따라 뚜벅뚜벅 들어온 시미르는 예의 독사의 얼굴로 나와 진을 바라봤다.
“시미르. 무슨 일이죠?”
진은 경계심을 잔뜩 머금은 태도로 물었다. 나도 긴장한 채로 바라보는 가운데, 시미르가 심호흡을 한 번 하곤 말했다.
“제가 도와드리죠.”
의외의 말에 진이나 나나 당황한 표정으로 마주쳤다. 잠깐 눈빛을 이용해 대화를 나누곤 내가 대표해서 물었다.
“시미르 씨? 그게 무슨 소리예요?”
시미르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나를 쳐다봤다. 그 독사 같은 눈은 자주 봤었지만 각오한 눈은 처음이다.
“저흴 도와준다니요. 별 의미도 없이 할만한 소리는 아니잖아요.”
“한원. 내가 널 도와주겠다고.”
당황한 나머지 떨리는 목소리로 진이 끼어들었다.
“잠깐만요. 시미르. 저희가 무슨 대화를 나눈 줄 알고 도와준다는 겁니까? 저희는 당신들과 전쟁이라도 각오할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진. 뭘 모르는 척합니까. 단장님과 아츠베님의 계획을 제가 알려드리고 당신들을 도와준다는데 뭘 고민하시는지요.”
“…잠시만요. 저희끼리 회의 좀 하죠.”
결국에 시미르를 앞에 두고 나와 진은 머리를 맞댄 채 회의를 나눴다.
“뭐냐, 이 상황? 시미르가 왜 우릴 도와준대?”
“말했듯 시미르는 절 구해줬어요. 어쩌면 심경 변화가 있었지 않을까요?”
진은 입술을 비죽이며 콧잔등을 찌푸렸다. 그는 시미르에게 끝없는 불신을 드러냈다.
“흥. 내 고향을 박살 낸 여자를 어떻게 신뢰하냐? 오히려 저지른 잘못을 되돌리기 위해 음모를 꾸미는 걸지도 모르지.”
진의 반응은 사실 당연한 거다. 시미르는 진의 고향을 없애고 그를 고아로 만들었던 장본인이다.
진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난 내 마음에 확신하기로 했다.
“그래도 전 믿어보고 싶어요. 시미르가 비록 절벽 가슴만큼 마음이 넓을진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저희를 도울 거란 감이 와요.”
말이 끝나고 시미르가 내 귀밑머리를 잡아당겼다.
“흐게엑! 비, 빈유라 해서 죄송합니다!”
“제가 없으면 당신들은 뭘 할 수도 없을 텐데요.”
“하지만 테르세르 계획의 일부인 당신을 저희가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시미르. 저희의 입장으론 당신도 적입니다. 지금 당신 생각을 알 수 없는 마당에 어떻게 당신을…….”
진은 말을 잇질 못했다. 황급히 의자를 뒤로 물린 그가 자기 눈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동그랗게 떴다.
니아도 마찬가지로 뒤로 물러나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난 충격에 빠진 눈으로 시미르를 지켜봤다.
“이러면… 믿을 수 있습니까?”
시미르는 옷을 벗었다. 외투만 벗은 게 아닌 예복 전부를 훌러덩 벗은 것이다. 속옷마저도 벗어 태초의 실오라기 없는 상태가 된 그녀는 무릎을 꿇었다.
역시 부끄럽긴 한지 그녀는 잠깐씩 몸을 떨었다. 얼굴도 진하게 상기된 그녀는 애써 부끄러움을 참는지 표정이 경직되어 있었다.
우리가 지켜보는 앞에서 천천히 벗어둔 옷들을 곱게 갠다. 옷가지를 앞에 둔 시미르는 머뭇거렸지만, 이내 우리를 향해 절을 했다.
“도와줄 테니 저를 믿어주십시오.”
그녀의 목소리는 떨리는 몸만큼이나 동요하고 있었다. 알몸으로 엎드려 절을 했기에 그녀의 엉덩이 사이와 몸의 구석구석이 적나라하게 다 드러난다.
시미르는 거기서 끝내지 않고 도저히 그녀의 입에서 나올 리가 만무한 말을 꺼냈다.
“원한다면 절 노예처럼 다뤄도 됩니다. 인간보다 튼튼할 테니 더 심하고 거칠게 다뤄도 좋습니다.”
물론 그런다고 우효옷! 공짜 오나홀 겟또다제! 하면서 홀라당 벗고 덮쳐들 수는 없다. 그러고 싶지도 않고.
진도 마찬가지의 기분인지 떨떠름한 표정으로 날 흘겼다. 나도 마찬가지의 표정으로 진을 보다가 나직이 한숨을 뱉었다.
직접 내 외투를 벗어 시미르의 몸에 걸쳐줬다.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어요. 괜찮으니 다시는 그러지 말아요.”
“…….”
일어선 시미르는 침울하게 눈을 가라앉혔다.
“하, 시미르 씨가 자의로 직접 이렇게 하는 건 또 처음 보네요.”
내가 희미하게 웃으며 말하자 시미르의 표정이 흠칫 놀란 감을 보였다. 내 말의 의미를 곱씹은 그녀는 부끄러운 듯 노려봤다.
“그, 그건 닥쳐!”
“흐흐, 저랑 따로 있을 때 그렇게 해주면, 으억!”
복부에 박히는 팔꿈치에 의해 뒤로 발라당 넘어지고 말았다.
니아의 도움을 받아 옷을 챙겨 입던 그녀는 진에게 물었다.
“절 믿으실 수 있습니까?”
“뭐… 테르세르에서 그렇게까지 하라고 명령하지는 않았겠죠. 일단 믿겠습니다. 그렇지만 당신을 신뢰한다곤 생각하진 마세요.”
“그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외투까지 도로 입은 시미르는 의자에 앉았다. 덕분에 우리 세 사람은 탁자를 빙 둘러앉은 채로 머리를 맞댈 수 있었다.
“저희가 물어볼 테니 당신은 대답만 하십시오. 테르세르는 정확히 무엇을 목적으로 일을 꾸미는 겁니까?”
시미르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또렷하게 대답했다.
“카미츠미와 엘 에이라의 정복입니다.”
“허, 그 넓은 땅덩이를 가졌으면서 여전히 땅 욕심이 넘치는 겁니까?”
“저희는 오직 에이르 폐하의 명에만 따를 뿐. 그것이 전쟁이라면 전쟁을 일으킬 것이고, 학살이라면 학살을 일으킬 겁니다.”
“미친 흡혈귀들.”
내가 그리 중얼거렸다. 진도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 군대는 왜 창설했습니까?”
“저희가 갑자기 선전포고할 수는 없지요. 인간 군대는 국방을 흩트리는 도구일 뿐, 그들에게 큰 기대는 하지 않습니다.”
역시 그들은 인간 군대를 그저 이용할 뿐이다. 카에데가 홀딱 속았다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어디까지 꾸민 거죠?”
“당신들이 어디까지를 상상하든 그 이상입니다.”
“젠장. 당신들은 가장 먼저 무얼 꾸밀 겁니까?”
“흠….”
시미르는 돌연 말을 삼갔다. 잠깐 고민하는지 나와 진을 번갈아 보다가 나직이 대답했다.
“황위를 빼앗을 겁니다.”
무슨 소린가, 곰곰이 생각해보지만, 이유를 모르겠다. 황위를 어떻게 빼앗을 건데?
“시미르 씨. 잘 모르겠네요. 황위를 어떻게 빼앗을 건데요?”
“…정확히 그분의 말을 빌리자면 탈취한다고 해야겠지요.”
“네? 탈취?”
잘 이해 못 했던 나는 진에게 부연 설명을 요구하듯 시선을 돌렸다.
내게 신경을 쓸 겨를이 없던 진은 차가운 시선으로 듣다가 송곳니를 드러냈다.
“아츠베! 그로군.”
“진. 당신이라면 바로 알아챌 줄 알았습니다.”
“그는 이미 황위를 포기하고 달아났습니다. 이미 기회를 놓친 자에게 황좌를 요구할 권리 따위 없어요.”
시미르는 착잡하게 반박했다.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어째서죠?”
“황위를 포기한 건 장남 후타츠바 후시오입니다. 아츠베 님은 황위를 포기한다고 말하진 않았습니다.”
바드득, 진의 치아가 갈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그는… 메이 폐하를 겁탈한 파렴치한 쓰레기입니다. 그런 자를 황위에 앉히는 걸 상왕 전하가 허락하겠습니까? 메이 폐하도 절대 물러서지 않을 겁니다.”
“아츠베 님도 그걸 알고 있습니다. 자신은 사망처리가 되었다는 사실도. 그분은 오히려 정면으로 부딪칠 생각이죠. 이번 연회 때 당당히 입장할 생각입니다.”
“…사실 죽지 않았다고 증명한들, 바뀌는 건 없잖습니까?”
시미르가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는 않겠죠. 아츠베 님은 진 당신으로 벌어졌던 그 사건을 다 알고 있잖습니까.”
“……그, 그건 후시오 님이 다 덮어썼습니다.”
“물론 그렇죠. 그러나 상왕 전하께서 비록 실망한 아들일지라도 당신과 피붙이 둘 중 누굴 믿을까요. 아츠베 님을 지원하는 것은 에이르 여왕 폐하시니 반박할 거리가 분명 있을 겁니다. 또한, 메이 폐하의 황위 자질에 대해 지적하겠죠. 어리숙하고 소심한 여자가 황위에 어울릴지, 승부욕 강하고 비전 있는 자신이 황위에 어울릴지.”
여기선 내가 나섰다.
“메이 폐하는 예전관 다릅니다. 그분은 이제 숨어있지 않고 직접 나서시려는 분이에요. 메이 폐하는 황위에 어울리시는 분이 되고 있어요!”
“그렇다면 더 위험할 거야. 승산이 없는 상황이면 아츠베 님은…….”
“날 죽이려 하겠구나.”
문을 향해 돌아봤다. 착잡한 눈동자의 메이가 문 앞에 서서 우리를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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