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화 〉 납치 (2)
* * *
“너 어떻게 나를….”
“내가 시미르랑 재미 볼 때 내 앞에 나타나선 안 됐어. 목소리는 제법 숨기려 노력했는데 네 분위기나 덩치가 좀체 귀해야 말이지.”
이를 바드득 간 알케테르가 날카로운 손톱을 내 눈앞에 들이밀었다.
“시미르가 알렸나?”
나름 위협해보겠단 시도였지만 난 보란 듯이 콧방귀를 꼈다. 표정이 일그러지는 알케테르가 손톱을 이용해 내 볼에 상처를 냈을 때, 비아냥하듯 답했다.
“몰라. 너 같으면 말해주겠냐?”
“젠장… 그년을 요새 신용할 수가 있어야지.”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내 목을 뜯고 쏟아내는 피를 마시고 싶겠지만, 알케테르는 손을 거뒀다.
뒤로 확 물러선 그가 문득 손톱에 조금 묻은 내 피를 유심히 들여다봤다.
말이 없던 그의 턱이 미약하게 떨리더니 혀가 손톱을 핥았다.
“하… 미치겠군. 이 냄새 잊지를 못하겠어.”
내 피를 지나가듯이 맛보더라도 흡혈귀인 이상 잊질 못한다. 그 달콤함은 지독한 중독성을 가져오고 사람을 초조하게 만든다.
굳건한 알케테르라도 달콤함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고양이에겐 캣닢이 있듯이, 흡혈귀에겐 내가 있는 것처럼.
“뭐지. 도대체 왜 이런 맛이 있는 거지? 그래서 라니아 여왕이 저놈을 아끼는 거냐?”
“어이, 알케테르? 이게 무슨 상황이야.”
지켜보던 보라 머리가 이맛살을 한껏 찌푸렸다. 저놈이 누군지는 몰라도 알케테르가 내게 들킨 상황을 용납하지 못할 테다.
“들키지 않을 자신 있었지 않아? 왜, 왜 저 가축이 널 알아챘어?”
“아직 모릅니다. 조용히 하세요.”
“어디로 정보가 유출된 거야? 너, 너희는 이런 일에 전문가잖아! 왜 허무하게 들키게 된 거냐고!”
목청을 높이는 보라 머리의 행동에 주변에 돌아다니던 흡혈귀들이 이곳에 집중됐다. 술렁이는 소란에 알케테르가 험악하게 노려보며 입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제가 분명 조용히 하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할 거야! 이, 이날을 위해서 내가 얼마나 참아왔는데!”
“아직 일이 틀어진 게 아니라고요. 말실수하지 말고 제발 조용히 하라고요!”
알케테르보단 상급자에 해당하는 보라 머리였지만, 실세는 알케테르인 모양이다. 입을 다문 보라 머리가 나를 향해 송곳니를 드러냈다.
“그래. 아는 만큼 정보를 불게 시켜야지. 피 좀 빨아내면 술술 불 거야.”
“안 됩니다. 그 가축의 피를 마시지 마십시오!”
이런 면에선 알케테르는 자제력이 우수하다. 마성의 달콤함을 가진 내 피가 가져올 악재들을 눈치챈 알케테르는 말리는 것도 모자라 보라 머리를 끌어당겼다.
손쉽게 뒤로 당겨진 보라 머리는 열불을 내며 소리쳤다.
“무슨 짓이야!”
“절대… 저나 당신을 포함한 어떤 흡혈귀도 이 가축에게 다가가선 안 됩니다. 냄새를 맡는 것도 더더욱.”
“뭔데? 쟤 피에 독이라도 흐르고 있어?”
“독보다 훨씬 위험한 게 흐르고 있습니다. 두 번 경고하지 않겠습니다. 이 가축에게 접근하지 마십시오.”
불만은 많아 보이지만 알케테르가 이렇게까지 강조하는 경우는 없는지 보라 머리는 별 대꾸 없이 동의했다.
“그러면 이놈을 어떻게 심문할 건데? 이대로 내버려 둘 거냐?”
둘의 시선이 내게 와닿았다. 알케테르는 흠, 짧은소리를 냈다가 문득 주변을 돌아봤다.
“저희 대신에 행동할 노예는 충분히 있습니다. 밀폐된 공간에서 따로 행동해야겠군요.”
“뭐든 지원해줄 테니까, 저놈에게서 정보를 빼내고 군대에 들일 건지 말 건지 제대로 정해. 제기랄, 뭔가 달콤한 냄새가 나는데 뭐지?”
“…빨리 움직여야겠군요. 어이, 너. 가서 말 잘 듣는 여성 가축들을 데려와.”
알케테르의 지시에 부하가 달려나갔다. 조금 후 다섯 명 정도의 초췌한 여성들을 데려오자 알케테르가 날 가리키며 지시했다.
“저놈을 데리고 와라. 구속을 풀지 말고 통째로.”
과연 친위대 대장답게 똑똑한 놈이다. 같은 인간은 내 냄새가 통하지 않는 걸 알아채고 인간을 이용해 날 옮길 셈이었다.
다섯 명의 여성들이 낑낑대며 날 의자째로 집어 들었다. 알케테르를 따라 이동하면서 내가 입을 열었다.
“시미르도 이 상황과 너의 정체를 알고 있었구만. 그런데 그녀가 왜 날 도운 걸까?”
“…네놈이 내게 말을 안 했듯, 나도 너에게 해줄 말은 없어.”
“뭐든 간에 내분이 있었다는 소리지. 그렇다면 이건 독단적 행동이 아닌 친위대의 행동, 그건 곧 테르세르가 꾸미는 일이지?”
“…….”
하하, 난 바보는 아니다. 알케테르는 입을 열지 않았으나, 이미 다 들킨 셈이나 다름없는 상황에 아예 입을 열지 않기로 한 모양이다.
“이래 봬도 3년간 눈치 하나만 주야장천 길러온 몸이라서 말이야. 숨기려 해도 나 꽤 잘 추리한다?”
“…….”
“저 보라 머리는 누구야? 말하는 꼴을 보아하니 나름 카나츠미에서 이름 좀 날린 흡혈귀 같은데? 그와 협력 관계를 유지 중이지? 어떤 조건을 걸었길래 전쟁이라도 일으킬 법한 상황을 꾸미는 걸까?”
“…….”
“너희 여왕은 뭘 꾸미는 걸까나. 주인님께 뺨을 맞은 게 그렇게나 싫었어? 그래서 몰래 습격하고자 친위대를 시키고. 그렇게 비겁한 여왕이야?”
문 앞에 멈춰선 알케테르가 무섭게 돌아봤다. 난 가쁘게 뛰는 심장박동을 애써 무시하며 끝까지 도발했다.
“인간 군대는 개뿔. 그들의 이름에 먹칠을 할 생각 마. 너처럼 추악한 사람들이 아니니까.”
“흥. 카에데가 과연 나처럼 추악하지 않아 보이나?”
덜컹, 심장이 내려앉았다. 조소를 한껏 머금던 입아귀에 힘이 풀리고 등골이 싸늘해진다.
쟤가 어떻게 카에데의 이름을 아는 거지?
“드디어 보기 좋은 얼굴이 되었군.”
“카에데… 어떻게든 이름을 알아냈나 본데, 그녀와 널 동일시하게 생각하는 건 집어치우시지.”
“정말 그렇게 생각해?”
문을 열어 여성들과 나를 안으로 들인 알케테르가 큭큭, 웃음을 흘렸다.
“엉덩이를 쑤셔주니까 카에데가 좋아 죽지?”
“너 도대체….”
“이런 얘기는 부끄러워? 아니면 다른 사람 좀 얘기해볼까? 아츠나랑 진세환은 어떻냐. 네 메이드와 함께 노예를 탈출시키고 엉뚱한 흡혈귀 직원에게 덮어씌우고 다니면 네가 영웅이라도 된 것 같았어?”
떨려오는 내 눈을 만족스럽게 감상한 알케테르는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그래. 인간 군대도, 엘 에이라 성 정보도 난 다 알고 있다. 너만 알았던 성으로 통하는 길이라던가, 네가 라니아 여왕을 성노예로 만든단 소리라던가.”
얼굴로 열불이 뻗쳤다. 분노 때문에 얼굴이 후끈거리고 치아가 바득 갈린다.
“너였구나. 카에데를 구출시키고 인간 군대를 창설하도록 도운 흡혈귀가.”
“비밀을 전부 알아채니까 퍼즐이 다 맞춰지나?”
“사절단이 왔을 때도… 진은 테르세르가 과민반응하는 모습을 이상하게 여겼었어. 그건 과민이 아니라 국경선 습격부터 꾸민 계략이야. 사절단이랍시고 시미르와 라미에르를 보내서 성의 빈틈을 찾으려 했고.”
눈을 치켜떴다.
“시미르는 스파이 임무에 뛰어난 실력을 내포하고 있지. 왜 그녀가 우리 성을 유달리 관찰했는지 이제야 알겠네.”
알케테르가 비웃었다.
“네 말대로 3년간 노예 짓만 한 건 아니로군. 여느 흡혈귀보다 쓸만한 머리를 가졌어.”
“너희 테르세르는 그렇게 해서 뭘 얻으려는 거야?”
“그런 방면으론 눈치가 없네.”
양손을 확 펼친 알케테르는 잘생긴 얼굴에 가려진 비열하고 사악한 미소를 드러냈다.
“카나츠미와 엘 에이라를 차지하려는 속셈이지 않겠어?”
“…허, 강대국인 두 국가를 상대로 단신으로 이겨보려고? 아무리 비밀을 많이 쥐고 있다고 해도 넌 못해.”
“그래. 솔직히 힘들겠지. 카나츠미의 뛰어난 무사들과 라니아 여왕이 있는 이상은.”
손을 떨군 알케테르는 다시 미모를 내세운 상냥하고 다정한 미소로 돌아와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네 모습을 보니까 깨달은 게 여럿 있다.”
“집어치워.”
“처음엔 우스갯거리로 치부했던 성노예 계획… 어쩌면 진짜 이룰지도 모르겠어.”
“그건 나만의 계획이야. 내 계획에 숟가락 얹을 생각 마.”
“그러면 거래하지 않을래?”
밝게 웃은 알케테르가 뒷짐을 지고 나를 향해 악마 같은 권유를 했다.
“인간 군대가 아닌 테르세르와 협력해라. 그러면 엘 에이라와 카나츠미에 있는 모든 노예를 해방해주겠다.”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내가 어떤 식으로든 반응하기 전에 난 겁부터 먹었다. 그 이유는,
바로 내 주위에 있던 다섯 명의 여성 때문이다.
나로선 겁이 날 정도로 소름 돋는 눈동자로 바라보는 여성들. 그녀들은 우리의 대화를 이해하진 못했지만, 저 말만은 또렷하게 들렸을 테다.
해방.
“저… 저, 저기….”
한 여성이 조심스럽게 나를 향해 말을 걸지만 이렇다 할 단어는 나오지 못했다.
교활한 놈. 역겨운 놈. 이걸 노렸구나.
“너도 노예에서 벗어나기 위해 인간 군대의 정보통 노릇을 했잖아.”
“만약 내가 협력하면 난 뭘 하면 되지?”
“넌 네 일만 그대로 수행하면 돼. 라니아 여왕이 네게 완벽히 굴복한다면 피를 흘릴 필요 없이 엘 에이라를 먹을 수 있어.”
“그 이후는?”
“모든 것을 너의 공으로 돌아가게 해주겠다. 내가 추천만 하면 넌 흡혈귀보다 더 높은 명예 신분을 받을 수 있어. 정말로 흡혈귀들을 발아래로 둘 수 있다고.”
간 보듯 물었다.
“내 피… 달콤하지?”
“…응. 갑자기 왜?”
“아, 너라면 나를 에이르 여왕에게 선물하지 않을까 생각해봤어.”
알케테르는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넌 노예가 아닌데 굳이 그럴 필요 있을까?”
“과연 그럴까? 내 피가 그렇게 흔한가? 냄새만 맡아도 남자들을 이성을 잃고 날 죽이려 들고, 여자들은 애액을 줄줄 싸대며 덮치려 드는데.”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날 정말 가만히 둘 거야? 네 충성심이라면 여왕에게 선물하고 싶을 텐데? 진은 이미 그렇게 했어. 날 메이 폐하에게 선물했다고.”
알케테르의 입가에서 점차 미소가 사라졌다.
“날 선물하면 에이르 여왕을 데리고 모든 도시를 순회할 거야. 그런데 여왕은 알몸인 채로 내 자지 위에서 엉덩이를 흔들고 있겠지. 앙앙대며 아헤가오 더블 피스를 하면서.”
그의 이마로 힘줄이 돋아났다. 힘을 준 탓에 턱에 균열이 일어나고 얼굴이 험악하게 변했다.
“삼국의 여왕이지만 보지는 삼류에요오옷!을 외칠 거야. 여자가 그렇게까지 천박하고 야하게 변하는 모습은 처음 볼걸?”
“하하하… 가축. 넌 실수한 거야.”
알케테르는 바깥에서 문을 잡았다. 놈이 여성들을 향해 나직이 말했다.
“두 시간을 주겠다. 두들겨 패던지, 아니면 음경이 말라비틀어지도록 짜내보던지, 어떻게든 저놈을 굴복하게 만들어. 누구든 저놈을 굴복시키면 당장 풀어주겠다.”
“하… 이쁜 여성들한테 둘러싸이는 건 오히려 환영인데?”
“가축… 이름이 한원이지? 그래, 한원. 널 존중해줄게. 그러니 존중받는 게 얼마나 축복 같은 삶인지 잘 생각해봐.”
닫히는 문 너머의 알케테르가 비릿하게 웃는다.
“네 엿대로 굴고 싶으면 어디 마음대로 굴어보라고. 에이르 여왕 폐하의 값어치가 얼만큼의 피를 필요할지 보라고.”
“한 시간.”
닫히던 문이 멈췄다. 문 너머의 알케테르의 눈을 마주 노려보며 호언장담 외쳤다.
“날 굴복하는데 두 시간을 줬지? 그럼 난 너한테 알몸 도게자 할 시간 한 시간을 줄게.”
“웃기지도 않을 소릴.”
“잘 생각해봐,”
난 목 부분을 흔들며 킬킬 웃었다.
“우리 주인님이 네 목을 베어서 에이르 여왕에게 착불로 부친다면 지금을 두고두고 후회하게 될 거다. 등신아.”
문이 닫혔다. 폐쇄된 공간에 다섯 명의 여성들과 나만이 남았다.
“자, 아가씨들?”
그녀들은 마음을 굳힌 듯하다.
“시작합시다.”
한 여성이 내 얼굴에 주먹을 내질렀다. 굶을 만큼 굶고 나약해진 그녀들의 주먹은 그다지 아프진 않았다.
다섯 명의 여성들이 나를 발로 차고 때리기 시작했지만 버텼다. 이렇게는 밤새도록 할 수 있다.
때리다 지친 여성 중 하나가 제지했다.
“그만해. 이대로는 의미 없어…”
폭력이 멈추고 난 약간 부어오른 눈으로 바라봤다.
“어떻게 하시게요?”
“부탁해. 그냥 굴복해줘.”
“안 돼요. 그들은 약속을 지키지 않을 거예요.”
“우리에겐 마지막 희망이야.”
그녀는 내 바지를 벗겼다. 맞아서 그런 건 절대 아니고, 알몸의 여성들을 보다 보니 발기된 내 자지에 올라타고는 감정이 격앙된 애절한 목소리로 말한다.
“우리는 살아야겠어.”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