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화 〉 메이 (1)
* * *
“혹시 진을 사랑해?”
표정만 보면 한바탕 뺨이라도 때릴 정도로 긴박한 얼굴이었지만 니아는 함부로 손을 휘두르는 사람은 아니었다.
“아… 음. 잘 모르겠네요.”
차마 아니라곤 못 한다.
“진 주인님은 좋은 분은 확실하지만… 그래도 흡혈귀시고 전 노예라서 사랑한다는 건 아무래도 이상하죠. 헤헤, 우습지도 않잖아요. 흡혈귀와 인간의 사랑이라니.”
귀까지 벌게진 니아는 횡설수설 말을 길게 늘어놓았다. 평소 조용하고 말수가 없던 니아는 당황하면 말이 많아지는 타입이다.
난 참을성 있게 니아가 진정할 때까지 기다렸다. 그사이에 딱히 알 필요 없던 사생활까지 늘여놓은 니아는 진이 아침마다 섹스를 거르는 날이 없다는 얘기까지 꺼내 놓고서야 진정했다.
얼굴의 열이 내려간 니아가 심호흡을 찬찬히 하고 불안한 눈을 흘겼다.
“이건 비밀로 해주세요….”
뒤늦게 자기가 뭘 떠들었는지 깨달은 니아의 부탁에 난 멋쩍은 미소로 대답했다.
묵직한 강당 문을 열자 바람이 안을 향해 쏟아져 들어갔다. 조금은 요란한 소란이 있던 강당 내부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수십 명의 흡혈귀가 붉은 눈을 빛내며 우릴 쳐다봤다. 당장에라도 목을 뜯으러 달려올 모습들이었지만 흡혈귀들은 이내 관심을 끄고 고개를 돌렸다.
“괜찮은 거 맞지?”
“그럼요.”
단상 위에는 화려하게 붉은색과 주홍색, 금색 등으로 수놓은 묵직한 드레스를 입은 여성과 주위에서 주의와 응원을 주는 노년의 하녀들이 있었다. 보아하니 뭔가 연습 중이다.
단상 아래에선 병사와 하인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니거나 불규칙적이게 의자에 앉아있었다. 각자 딴짓 중이거나 단상을 보고 있다.
니아는 강당 계단을 내려가 맨 앞 좌석에 다가왔다. 꾸벅꾸벅 졸고 있는 진의 어깨를 두들기자 그는 아무렇지 않게 눈 뜨고 자세를 잡았다.
졸고 있지 않다는 걸 증명하려 듯 침을 닦거나 양팔을 휘두르지 않고 고개만 바짝 들어 처음부터 단상을 보고 있었단 자세를 취했다.
“황태녀님. 그 자세 좋습니다.”
“주인님. 김한원 씨를 데려왔습니다.”
“음… 김한원….”
고개를 홱 돌린 진은 눈에 힘을 빡 줬다. 잠시 내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다가 깨달은 듯 힘을 준 얼굴이 풀렸다.
“아, 아~ 한원. 아이고, 언제 왔어?”
“입에 침이나 닦으시죠?”
히죽이며 입가를 닦은 진은 옆에 앉으라는 듯 손짓했다. 나와 니아가 양옆에 앉아 단상을 바라봤다.
이젠 누군지 짐작이 가는 화려한 차림새의 여성은 우리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어 보였다.
하녀들의 지적에 따라 자세나 표정, 걸음걸이를 고치는 그녀는 각본을 흘겨보며 열심히 대사와 자세를 연습한다.
즉위식에 있을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지만, 어딘가 묘하게, 정말 묘~하게 어리숙하다.
한참 열심히 하던 여성이 지친 기색을 보이자 하녀가 휴식을 취하자고 알렸다.
하녀들이 물러나 각자대로 휴식하고, 황태녀는 숨을 몰아쉬며 단상에서 내려왔다.
진이 우리를 데리고 일어섰다. 황태녀에게 다가가 온화한 미소를 짓는다.
“힘들죠?”
“응… 힘들어.”
둘은 편안한 분위기로 대화를 나눴다. 무거운 옷을 입고 강당에서 춤추듯 움직이고 대사까지 외치고 있으면 나라도 지쳐 쓰러질 것 같다.
“즉위식… 꼭 해야 하는 거야?”
황태녀는 슬며시 그리 물었다. 진이 잠깐 나를 보더니 살며시 답했다.
“이 친구가 듣습니다. 그런 안일한 소리 마세요.”
그제야 흠칫 날 돌아본 황태녀가 벌겋게 달아올랐다. 진한 화장에서도 황태녀의 얼굴색이 고스란히 보인다.
“아, 아… 죄송합니다. 제가 정신이 없어서 하인인 줄 알았습니다.”
“황태녀님. 이 친구는 노예입니다.”
내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던 황태녀가 아, 하며 작게 소리 냈다. 긴장한 어깨가 내려가고 얼굴엔 안도의 빛이 서렸다.
“처음 뵙습니다, 황태녀 전하.”
“아, 인간이었구나. 후타츠바 메이라고 한다.
인사했는데 문득 이 인사법이 맞나 싶다. 한 나라의 여왕이 될 사람에겐 어떤 인사가 좋지? 조아려야 하나?
무릎을 꿇어 인사하려는데 메이가 황급히 손을 저으며 날 일으켰다.
“그, 그럴 필요 없어. 그런 예의는 싫어한단다.”
“네? 아… 네.”
얼떨떨하게 일어섰다. 모습을 지켜보던 진이 피식피식 참다가 빵!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하하핫!”
주변에서 돌아볼 만큼 호탕하게 웃은 진이 서슴없이 메이의 어깨를 두들겼다. 아무리 친하대도 황태녀를 저렇게 건드려도 되는 거야?
“황태녀 전하. 이 친구가 누구신지 알겠어요?”
나를 가리키며 물었기에 메이가 갸웃했다. 내 얼굴을 유심히 관찰하지만, 고개를 저었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그렇겠죠! 오늘 처음 만났으니까요.”
“진. 나 좀 그만 놀려. 이 친구가 누군데?”
진은 킬킬 웃고는 친근하게 내 어깨에 팔을 둘렀다.
“기억하세요? 저번에 제가 말씀드렸던 라니아 여왕 폐하의 가축.”
곰곰이 생각한 메이의 얼굴에 놀라움이 올라왔다.
“그 달콤한 인간?”
명칭만 따지면 달콤한 쿠키 인간 같은 느낌이다.
“네가 정말 달콤한 냄새가 난다는 인간이니?”
한달음에 다가온 메이가 눈을 반짝였다. 이런 반응을 보일 정도라니. 도움을 청하는 눈길을 진에게 흘기자 진이 성큼 다가가 어깨를 잡아끌었다.
“전하. 그 친구가 제가 말한 그 가축은 맞지만, 사용인들이 보는 앞에서 노예의 냄새를 맡는 모습은 좋지 않겠죠?”
주변을 둘러본 메이가 착잡하게 눈을 가라앉혔다.
“너무 흥분했어. 미안해.”
짧게 대화를 나누고 하녀들의 부름에 메이는 단상으로 올라갔다. 아까 했던 즉위식 예행연습을 시작하자 다시 즉위식에 심취한다.
어째 아까보다 힘이 들어가고 당당해진 메이의 모습에 하녀들의 칭찬이 터져 나왔다. 감탄하는 소리에 메이가 발그레 볼을 붉히며 웃자 진이 만족한 듯 엄지를 세웠다.
어느 정도 메이가 연습 성과를 드러내자 진은 자리를 비켜주기로 한 모양이다. 내 어깨를 두들겨 나가잔 듯 턱짓하자 그 뒤를 따라갔다.
“으하하핫!”
강당을 나온 진이 한참이나 복도를 걷다가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나와 니아가 의아한 눈길을 교환하는데 진이 나를 돌아보곤 만족한 미소를 띄웠다.
“황태녀님은 네가 마음에 드시나 봐.”
“아닐걸요? 제 피가 마음에 드시나 보죠.”
“그것도 있겠지만, 남자인 너도 마음에 드시나 본데?”
역시 내 미모란 여자들의 마음을 훔치는 괴도와도 같지. 아아, 죄많은 남자. 어찌하면 좋을꼬. 에잉, 헛소리는 됐고.
“그거 다행이긴 한데, 제가 그렇게 뛰어난 외형은 아닙니다만?”
뛰어난 미모의 남자란 내 눈앞에 있는 진이다.
나로선 상상으로만 가능한, 걷기만 해도 뭇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우편함은 고백편지로 가득 차 보험금 납부서 따위 올 기회조차 없는 그런 인생을 실현 가능한 진을 눈앞에 두고 내게 반한다고?
그건 아니다.
“야, 야. 물론 네 얼굴이 흔한 외모이긴 하지만, 그래도 자신감 좀 가져봐. 마냥 꿇리진 않는 얼굴이라니까?”
입꼬리를 아래로 내리고 미간을 좁혔다. 낄낄 웃은 진이 벽에 등을 기대고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뭐, 그건 됐고. 즉위식은 사흘 후에 실시할 예정이야.”
“압니다.”
“축제는 한 달 정도. 원래는 석 달을 진행할 예정인데 인간 군대가 있어서 줄였어.”
“그것도 압니다.”
웃음기 머금은 진이 동그랗게 만 손안에 손가락을 쑤셔 넣었다.
“준비는 됐어?”
“아, 젠장! 그거 언제 얘기하나 했다.”
머리카락을 뜯을 듯 감싸 쥐었다. 정말로 하는 거야? 진짜 한 국가의 황제가 될 여인과 잠자리를 가지는 거야?
음부가 아닌 애널을 정말 쑤셔?
“그런데 진짜 해요?”
“응. 진짜 해.”
진은 거짓 아닌 진심이라는 눈을 보였다. 한 치의 거짓말도 들어있지 않는 진중한 눈동자를 보고 있으니 그가 시답잖은 거짓말은 안 할 거란 걸 알았다.
하지만 그런 기회가 올까?
“그런데 어떻게 합니까? 저녁에는 제 주인님과 함께 지내야 해서 자리를 비울 틈도 없는데. 낮에 시간 내서 가능합니까?”
“그것도 이미 준비가 마련되었어.”
콧김을 뿜으며 칭찬해달란 듯 우쭐한 미소를 지은 진이 어깨를 쭉 폈다.
“우리 도시는 어둑어둑한 밤 시간대의 야경이 제법 아름다워. 황제 폐하께서 라니아 여왕 폐하를 초대해 야경을 즐기시며 담화를 나누실 거야.”
“저도 데려가는 거 아닙니까?”
“그럴 가능성도 있는데, 문제가 있었잖아.”
진의 표정이 약간 착잡해졌다.
“나로서는 면목 없고 부끄러운 상황이지만, 오는 도중에 습격을 당했지?”
말을 탄 테러리스트들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위험했죠. 나는 물론이고 여왕님도 자칫 죽을 수 있었어요.”
“그래. 우리는 그걸 인간 군대로 추측하고 있어. 어떻게 카나츠미 국경을 넘었는지, 그런 무기들은 어디서 구했는지. 모든 게 불명인 그들이 어디서 매복하고 있을지 알 수 없어. 황제 폐하께선 노예임에도 너를 담화 장소에 부르지 않을 거야.”
“그럼 그 틈에?”
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황태녀님의 애널을…….”
“상스러운 얘기 좀 그만!”
시무룩하게 입술을 빼죽 내민 진이었다. 옆에선 니아가 고개를 숙이고 얼굴이 빨개졌다.
나도 부끄러운 기분에 괜한 헛기침을 했다.
“큼큼. 그런데 괜찮겠어요? 저를 황태녀 전하와 단둘이 방에 남기여도?”
“물론 남들에겐 비밀이지. 황제 폐하께서 아시면 널 참수하는 것과 더불어 내 목도 날아갈걸? 그러니 나서지 말고 내가 부를 때까지 기다려.”
“젠장, 섹스 한 번에 모가지 날아가게 생겼네.”
이후로 셋이서 돌아다니며 그간 있었던 이야깃거리를 꽃피웠다.
성적인 관계가 아닌, 정말 같은 생명체로서의 우애를 깊게 다진 진과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다 진이 시계를 살피더니 대화를 중지시켰다.
“곧 담화가 끝날 거야. 이제 돌아가는 게 낫겠다.”
“벌써 그렇게 됐어요?”
“그래. 즉위식 끝나면 부를게. 즉위식 선물이 되어줘.”
진은 니아를 시켜 나를 바래다줬다. 본인은 여러 임무로 바쁘다는 이유에서다.
니아의 안내를 받아 원래 있었던 침소로 돌아왔을 때였다.
“저, 한원 씨?”
진이 시킨 게 아니라면 니아가 내게 말을 걸 일이 없다. 그간 니아완 딱히 친해지질 못해 어색했는데 이게 하나의 기회라 여겼다.
“응. 왜?”
나름 친절하고 친근하게 웃음기 머금고 돌아봤다. 그러나 니아는 전혀 밝지 못한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한동안 테러리스트 때문에 경비가 삼엄할 거예요. 주의하세요.”
“하하, 고마워. 꼭 주의할게.”
“그리고….”
뭔가 머뭇머뭇 말을 고민한다. 떨리는 그녀의 눈을 보고 있자니 단순한 대화거리가 아님을 짐작했다.
웃음기를 지우고 잠시 복도를 둘러봤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 후, 물었다.
“왜? 무슨 문제가 있어?”
“성뿐만이 아니라 도시 이곳저곳을 다닐 때, 주의 깊게 살피지 마세요. 차라리 돌아다니지 않는 게 좋아요.”
이유를 묻고 싶으면서도 그래선 안 될 것 같은 불안감이 느껴졌다. 침을 꿀꺽 삼키고 얌전히 동의했다.
“알았어. 이유는 굳이 묻진 않을게.”
“흡혈귀들의 평판이 좋다는 건 인간에게 있어서 최악의 평이란 걸 알아주세요.”
니아가 문을 대신 닫아주며 말했다.
“저나 당신이나 흡혈귀들에게 얼마나 좋은 대우를 받고 있는지 기억하세요. 그게 제가 진 주인님을 신뢰하는 이유에요.”
니아가 알려준 말의 의미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흡혈귀의 평이 좋은 건 인간들을 희생 삼아 만들어진 문화란 소리다.
그녀는 분명 내가 충격받을 것에 대비해 알려줬다. 괜한 장면을 목격하고 절대 상처받지 말라는 그녀의 배려.
하지만 그런 문화의 중심지에서 보고 싶지 않아도 염려한 장면은 어느 곳에나 존재한다.
주인님과 성을 둘러보고 있을 때 얼핏 보인 것은 발가벗겨진 인간 여성이었다. 그저 창문 밖으로 보인 장면에 불과하지만.
여성은 사지가 없었고 흡혈귀에게 들쳐져 이동되고 있었다. 그런 여섯 명의 인간 여성들을 세 명의 흡혈귀들이 마치 짐을 들고 가듯 했다.
충격받거나 화나진 않았다. 그저 내가 느낀 건.
어떤 곳이든 인간에겐 같은 지옥이란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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