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화 〉 카미츠미 (5)
* * *
박차고 달려나가 알케테르와 시미르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알케테르가 적안을 빛내며 노려봤다. 그의 표정에서 흡혈귀다운 공포가 스며 나온다.
“나와. 가축.”
“당신이나 그만둬요. 이게 그렇게까지 할 일입니까?”
“가축이 흡혈귀에게 언성이나 높이도록 네놈 주인은 교육을 그따위로 하나?”
시미르를 물러서게 하려 그녀를 밀며 조금씩 뒤로 이동했다.
내가 시미르를 때린 건 어디까지나 플레이의 일종으로 폭력의 적정선이 있지만, 지금 알케테르의 폭력은 단어 그대로의 폭력이다.
흥분이니 뭐시기니 그 범주 내의 폭력이 아니란 소리다.
“못 나옵니다.”
“호오, 이거 신기한 놈이군.”
알케테르의 손아귀가 내 목에 걸렸다. 손톱까지 세운 덕분에 목을 조름과 함께 기다란 손톱이 목에 파고들었다.
“또 달콤한 냄새… 내가 미친 건가? 어떻게 이런 냄새가 나지?”
피에서 나오는 냄새에 알케테르가 또 반응했다. 점점 그의 표정에서 분노가 아닌 흡혈 욕구가 생겨나자 언뜻 겁이 더럭 났다.
“단장님… 모든 것은 저의 잘못입니다.”
그 순간 나선 시미르가 무릎을 꿇었다.
“이 가축을 꼬드긴 것도, 행한 모든 행위도 전부 제가 지시한 행동들이며 가축은 그저 저의 지시에 따랐을 뿐입니다.”
시미르의 얘기를 들어도 알케테르는 무심했다. 무뚝뚝하게 나를 노려보곤 눈동자만 돌려 시미르를 내려다봤다.
“그러한데?”
“테르세르 부단장으로서 보이기 부끄럽고 부단장의 직위에 걸맞지 않은 간음은 변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 가축에겐 죄가 없습니다. 벌은 제가….”
“뭐, 벌? 나도 이 가축이 했던 것처럼 널 겁탈이나 해야 하냐?”
시미르의 볼이 붉어졌다. 이를 악물고 치욕을 삼킨 그녀는 무릎에 얹은 주먹을 꽉 쥐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그 가축을 놓아주십시오.”
“하아, 시미르, 시미르. 너 정말 그날 이후부터 변했어.”
알케테르가 손을 놓았다. 손톱자국으로 피가 흐르는 목을 소매로 닦으며 물러났다.
알케테르는 쪼그려 앉아 무릎 꿇은 시미르와 눈높이를 맞췄다. 고개를 들지 못하는 시미르의 턱을 잡고 고개를 들게 했다.
“라미에르가 그러더라. 네가 사절단으로 다녀온 이후로 네 행동이 너무 이상해졌다고. 예전의 부단장으로의 위엄이 무뎌지고 그 뾰족했던 시미르가 뭉툭해졌어.”
“……전 그대로입니다.”
“오, 아냐. 이거 봐, 이거.”
턱을 잡고 이리저리 돌리며 시미르의 얼굴 각도들을 하나하나 봤다. 알케테르는 이를 악무는지 턱에 힘이 들어갔다.
“그 독사 시미르가 아니야. 이건 소녀 시미르야. 여자가 됐다고.”
시답잖은 소리지만 시미르가 여자가 아니면 뭐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괜히 말 하나 꺼냈다가 혼쭐날까 봐 얌전히 있었다.
“단장님….”
“이래선 테르세르 친위대라 할 수 없어. 그 잔혹하고 사악한 시미르가 어디로 사라졌니?”
“전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대로입니다!”
알케테르는 일어섰다. 시미르의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손톱에 묻은 내 피를 핥았다.
돌연 흠칫하며 놀란 알케테르가 나를 돌아봤다.
“무슨 맛이…? 아니 이럴 수가 있나?”
이놈은 남의 말 따위 귀담아듣지 않는 고약한 버릇이 있는듯하다. 잘 이야기 나누다 갑자기 혼자서 화제를 변경한다.
열심히 핥던 녀석이 뭔가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 시미르. 혹시 카나츠미 황태녀의 호위 무사, 진을 아느냐?”
갑자기 진의 이름이 나오자 놀랐다. 놀란 건 나만이 아니라 시미르도 마찬가지인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다.
“압…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의 이름이 왜?”
“인간은 가축이다. 흡혈귀의 먹이로 태어났으면서 평생 흡혈귀의 시중을 들며 죽어가는 가축에 불과해.”
모든 흡혈귀가 저렇게 생각한다는 건 알지만 막상 내 눈앞에서 저따위 소리를 하니까 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맞설 용기는 없기에 혼자 화를 삭였다.
“그런데 종종 낙천적인 흡혈귀들이 이상한 감정에 사로잡히는 경우가 있어.”
시미르를 차갑게 바라본 알케테르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혐오감을 내비쳤다.
“인간과 사랑에 빠지는 흡혈귀가 있다고. 그깟 무미건조한 감정에 사로잡히는 것도 우스운데 하찮은 가축 놈하고 사랑에 빠졌다고. 진이 그런 경우야. 이게 말이나 되니?”
진이 니아랑 사랑에 빠졌다고? 내게 딜도를 주며 니아를 가보게 하라던 진의 말이 떠올라 난감하면서도 둘 사이에 미묘한 기류가 있음이 떠올랐다.
“…사, 사랑? 단장님은 제가 이 가축을 사랑하고 있다는 말을 하십니까?”
시미르가 떨리는 손으로 날 가리켰다. 이것에 대해선 생각조차 안 했는지 시미르의 표정엔 온갖 감정들이 떠올라 복잡한 얼굴이 됐다.
나도 이건 예상치 못한 발언이기에 아마도 비슷한 표정을 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전… 저는 그저 즈, 즐기기 위한….”
말하다가 부끄러웠는지 나를 눈치 보다 목소리가 기어들어 간다.
“이 가축의 피는 냄새는 물론이고 맛은 천상의 맛이야. 이런 맛과 냄새라면 세상에, 여왕 폐하께 드리는 생각을 넘어서 내가 가지고 싶어.”
더럭 겁이 났다. 이런 남자 흡혈귀에게 잡혀서 매일매일… 오, 세상에. 끔찍하다.
“정말 넌 이 가축에게 반하지 않았어?”
“그, 그럴 리가 없습니다….”
천천히 일그러지는 시미르와 문득 눈을 마주쳤다. 다른 의미로 얼굴이 새빨갛게 물드는 그녀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기분 탓인지 시미르가 정말로 소녀다운 표정을 지었단 기분이 든다.
“전 용납할 수 없습니다. 제, 제가… 테르세르 친위대 부단장인 제가 사랑에 빠졌다니.”
당황하는 시미르를 구경하던 알케테르가 미소를 머금었다.
“그럼 증명하면 되지.”
알케테르의 길고 단단한 손가락이 내게 닿았다.
“죽여라. 저놈의 목을 뜯고 피를 마셔. 그거면 예전의 너를 되찾을 수 있어.”
머리의 피가 싹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를 죽이라고?
시미르의 복잡한 시선이 내게 닿았다. 잠시지만 우리 둘은 서로의 눈을 통해 갖가지 감정을 교환했다.
감정에 혹해 고민하던 시미르였지만 이내 마음을 잡았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알케테르를 봤다.
“그럴 순 없습니다.”
“아, 세상에.”
이마를 짚으며 등 돌린 알케테르가 탄식했다. 시미르는 그의 등에다 확신한 듯 힘 있게 외쳤다.
“가축에 불과할지라도 제 전용 노예가 아닌 이상 함부로 죽일 수는 없습니다.”
“그럼 내가 그 노예를 살게. 누구의 노예야?”
이 부분에 대해선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자신감과 힘을 담아 내가 대신 외쳤다.
“여왕 폐하의 노예입니다.”
한쪽 눈썹을 올리고 돌아본 알케테르가 당혹감을 삼켰다. 그가 머뭇머뭇 희미하게 물었다.
“…어디 여왕님?”
“라니아…….”
“아닙니다! 여왕 폐하의 노예가 아닙니다. 지인의 노예를 제가 빌렸습니다.”
갑자기 훅하고 말을 가로챈 시미르 때문에 난 말을 잇질 못했다.
왜 끼어들었냐고 시미르를 노려보지만 시미르는 닥치고 있지 않겠다면 진짜 죽이겠다는 눈으로 흘겨봤다.
결국에 입을 다물고 얌전히 있었다.
“하아… 거짓말하는 가축에다가 가축과 사랑에 빠진 제자라니.”
“면목 없습니다, 단장님.”
영문도 모르겠다. 이젠 질린 표정으로 돌아본 알케테르는 자신이 타고 온 하얀색과 금색으로 도색 한 오토바이에 탑승했다.
“네겐 실망했다, 시미르. 옛적의 독사 부단장의 위엄은 물론이며 내 제자로서 갈고닦던 그 살기는 온데간데없어.”
“단장님….”
“징계를 줄 만한 건 아니지만… 그 무딘 생각을 바로잡지 않는다면 너를 부단장으로 인정할 수 없어. 만일 즉위식이 끝나고 복귀했을 때까지 그대로라면.”
오토바이를 타고 알케테르는 먼저 앞서갔다. 그가 남긴 말은 나나 시미르를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했다.
“네 부단장 해임에 대해서 여왕 폐하와 상의해야겠다.”
시미르의 뒤에 앉은 채로 온갖 생각에 잠겼다. 그냥 참았으면 됐을 텐데, 왜 한순간의 성욕에 잡혀서.
그냥 얌전히 갔으면 됐잖아. 아니면 누가 오는지 조심만 했어도 됐는데!
저 단장이란 놈은 부하들이 먼저 앞서갔는데 이제야 오는 건 뭐야? 시미르야 후미를 담당했으니까 남들보다 늦게 가는 건 이해 가능한데.
왜 저 남자는 혼자서 뒤늦게 온 거지?
시미르는 이후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내게 어떤 지시도 하지 않아서 오히려 더 무서웠다.
조용히 바이크만 운전하는 그녀의 등을 보며 자책하고 있을 때, 바이크가 느려졌다.
도시가 보인다.
숲이 끝나고 대나무 길을 넘어 한참 후에야 수도에 도착했다. 이미 짐도 다 내려 카미츠미에서 마중 나온 병사들에게서 주의할 점을 듣던 병사들 사이로 주인님이 나를 발견했다.
다가온 주인님이 짐짓 화난 듯 물었다.
“한원! 도대체 왜 이렇게 늦었느냐?”
“죄, 죄송합니다. 가는 도중에 제가 배탈이….”
“배탈? 괜찮으냐?”
“지금은 괜찮습니다. 하하.”
대충 둘러대자 주인님은 화는 집어넣고 나를 걱정했다. 내 옷깃을 잡은 주인님이 조금은 귀엽게 느껴지듯 올려다봤다.
“테러리스트들의 공격이나 어디 다친 건 없지?”
“그런 건 없었습니다. 저 때문에 오래 기다리게 해드려 면목 없습니다. 얼른 들어가도록 하죠.”
“그래. 들어가서 정리하고 짐과 함께 구경이나 하자꾸나. 마침 진이 우리를 직접 안내하겠다더구나.”
카나츠미 병사들 틈에서 진이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반가운 마음에 미소를 짓고 손을 흔들어줬다.
“가자꾸나.”
“예… 아, 잠시 시미르에게 인사하고 가겠습니다.”
“그러도록 하여라.”
헬멧도 벗고 착잡하게 바라보는 시미르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내가 다가오니까 살짝 놀란 눈을 보였다.
“시미르님. 아까….”
차라리 화를 내줬으면 좋겠는데 시미르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눈을 돌렸다.
“신경 쓰지 마. 그냥 없던 일로 하면 돼.”
“죄송합니다. 제가 못된 짓을 해서…”
“아무 일도 없었다고.”
가볍게 사과하고 말도 다시 튼 김에 물어봤다.
“그런데 왜 제 주인님이 여왕님임을 설명할 때….”
“넌 바보야? 네가 솔직하게 라니아 여왕 폐하의 노예란 걸 말하면 단장님이 폐하께 물어볼 거란 걸 생각 못 해?”
아, 아… 그러면 시미르와의 행위도 모두 들키겠구나.
“그나저나 걱정이다. 일단 둘러대긴 했는데, 넌 즉위식 내내 여왕 폐하와 함께 다닐 거 아니냐?”
“머리 아프지만, 제가 어떻게든 피하거나 둘러대 보죠. 시미르님은 혹시라도 단장님이 물어보면 여왕 폐하께 잠깐의 선물로 드렸다고 둘러대세요.”
“알겠다. 최대한 조심해라.”
“예.”
인사를 끝내고 돌아가려고 할 때,
“순수하게 웃던데.”
돌아서서 시미르를 봤다.
“예?”
“진이나… 여왕 폐하 앞에서는 사람 좋게 웃던데.”
내가 그렇게 웃었었나? 단지 반가워서 웃었을 뿐인데.
“그랬나요?”
“…아니다. 난 갈 테니 부탁한다.”
“아, 네.”
시미르는 부하들의 틈으로 가서 그들과 함께 이동했다. 시미르를 보며 뭔가 의아했다.
내가 웃는 게 왜?
“여왕 폐하께서 지내실 방은 이곳입니다.”
진이 안내한 침소는 병사들이 지내는 손님방과는 차원이 달랐다. 주인님이 성에서 지내는 방과 거의 흡사하게 넓은 침소는 손님방이 아닌 진짜 왕이 지내는 침소였다.
“진 씨. 여기 황제 폐하의 침소 아니에요?”
물어보니 진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황후 전하의 개인 침소였어. 황제 폐하께선 원하실 때가 아니면 황후 전하와의 동침을 허가하지 않으셨거든. 그만큼 몸이 노쇠하시고 잠자리에 민감하셔서.”
“카나츠미 황제는 예부터 엄청 예민한 인물이었다. 사소한 거 하나라도 용납하지 않는 철저한 남자였지. 그랬기에 카나츠미가 지금껏 무너질 기미 하나 보이지 않은 거다.”
주인님이 설명에 덧붙였다. 진이 그 말이 맞다고 미소 지었다.
“그럼 황후 전하는?”
“황태녀님을 낳으시다 별세하셨어. 황후 전하를 그리워하신 황제 폐하께선 이 방을 그대로 보존하셨지.”
그런 귀한 방을 주인님께 선뜻 내어주시다니. 어떤 의미론 감사하면서도 불편한 감이 든다.
“괜찮은 방이구나. 황제에겐 짐이 깨끗하게 쓸 터이니 마음 놓으라고 전해다오.”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전 일이 바쁘니 혹시라도 필요한 경우는 근처 시녀들을 불러주시면 되겠습니다.”
진이 물러나고, 나는 가져온 짐을 적당히 풀었다.
가볍게 정리하던 중, 문을 두들기는 소리와 함께 소심하지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 여왕 폐하. 황제 폐하께서 담화를 원하십니다.”
“황제는 나이가 나이인 만큼 대화를 즐기는 인물이지. 함께 가겠느냐?”
“하하… 제가 가면 눈치 보여서 어쩐답니까? 전 주변 구경만 하고 오겠습니다.”
“테러리스트가 어디에 있을지 모르니 호위병을 붙여주마. 누굴 데려가겠느냐?”
“그… 저희 병사보단 진에게 성 구경 좀 시켜달라 부탁하겠습니다.”
그러라며 주인님은 어깨를 으쓱였다. 문을 열고 나간 주인님의 뒤로 수행원들이 따라붙고, 문틈으로 니아가 살며시 고개를 내밀었다.
반가운 마음에 한달음에 다가가 인사했다.
“역시 니아 목소리였네. 안녕.”
“아… 안녕하세요.”
“바빠? 진님한테 도시 구경이나 시켜달라고 하려는데 같이 갈래?”
“안 그래도 주인님이 찾으세요. 따라오세요.”
니아를 따라 이동했다.
하얀 원피스를 입고 조신하게 걷는 니아의 뒤를 따라가고 있으면 종종 카나츠미 병사나 하인들이 니아에게 가벼운 인사를 건넸다.
니아도 목례로 인사하고 지나가는 모습을 보니 제법 존중을 받고 있다는 걸 알겠다.
그러다 문득 알케테르의 말이 떠올랐다. 니아와 사랑에 빠진 진이라고?
“저기 니아.”
“예?”
“혹시 진을 사랑해?”
니아가 새빨개진 얼굴로 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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