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화 〉 카미츠미 (3)
* * *
우리 병사의 시체 수습과 조국으로의 운송은 카나츠미 병사들에게 맡겼다.
수습을 완료한 수송기들이 하늘로 날아오르고 불명의 테러리스트들에 대비한 호위 헬기들이 곁을 함께했다.
도청의 위험을 걱정해 카나츠미에서 건넨 보안 핸드폰으로 여황제와 통화하러 주인님은 자리를 비우셨다. 사태를 정리하는 일사불란한 사방에서 벗어난 나는 시미르에게 다가갔다.
뒤늦게 온 테르세르의 병사들에게 주의할 것을 명령하는 시미르는 다가오는 나를 향해 돌아섰다.
“감사합니다.”
시미르는 겉으로 부정하거나 좋아하는 티를 내진 않았다. 무덤덤한 그녀에게 덧붙여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저희의 뒤에서 오셨죠? 테르세르 국가에서 오는 길하곤 전혀 다른데.”
내 말에 시미르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래도 겉으로 불편함을 드러내진 않았다.
“여러 방해물 때문에 멀리 돌아왔다. 너희는 길을 뚫어서 갔다지? 우리는 뚫지는 않고 열려있는 길을 찾으러 돌아가던 와중에….”
시미르가 손으로 전화기 모양을 만들어 귀에 댔다.
“불명의 테러리스트 습격을 받았다는 연락을 받았다. 혹시 몰라 먼저 숲을 가로질러 이곳에 왔지.”
“오토바이 타고 숲을 가로질렀다고요?”
“내겐 어렵지 않아.”
그래, 그렇다면 됐다. 허리를 숙여 시미르에게 감사를 표했다.
“두 번 말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시미르님이 없으셨다면 정말 끝이었을 수 있어요.”
“…….”
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내 감사 인사에도 무심히 듣고는 오토바이에 기대앉았다. 독사의 표정으로 날 노려보다가 서서히 무서운 표정이 풀어졌다.
“그, 그러면…….”
“뭐 원하는 거라도 있으세요?”
“…….”
선뜻 답은 오지 않았다. 눈치 보는 듯 나를 살피던 시미르가 간신히 입을 열었는데,
“시미르.”
주인님이 다가오셨다. 일순 표정으로 아쉬운 빛이 스쳤다가 독사의 얼굴로 돌아왔다.
오토바이에서 일어나 공손하게 허리를 숙인 시미르에게 주인님은 차갑지만 어색하게 감사를 건넸다.
“설마 네게 도움을 받을 줄은 몰랐다. 네 공로를 높게 치하하마.”
“마땅히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 뒤에서 왔느냐?”
시미르는 내게 했던 대답을 주인님께도 설명했다. 주인님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 건에 대해서는 이전 사절단으로 왔을 때 있었던 무례를 용서할 수 있겠구나.”
“그 날 저희의 무례는 지금에 와서도 면목이 없습니다.”
“이젠 없던 일이다. 에이르에게 네 얘기를 해두도록 하지.”
황송하다는 마냥 깊이 고개를 숙인다. 어색하게 느껴지는 이별이었지만 제법 괜찮은 재회 덕분인지 시미르에게 불편함은 없었다.
오히려 내가 걱정이다. 마지막에 그녀에게 했던 말이 새록새록 떠오르자 어색함이 앞섰다.
주인님은 반파나 다름없이 변한 우리 차량을 바라보며 골치 아픈지 이마를 짚었다.
“차량이 이렇게 되다니… 카나츠미의 부주의에서 일어난 사건이니 카나츠미에 손해배상을 청구해야겠다.”
“그럼 저희는 뭘 타고 가죠? 무사한 차량이 있지만 아무래도 비좁게 가야겠습니다….”
남은 차량은 제법 있지만, 여왕을 병사들 사이에 끼여 태울 노릇은 아니다. 속으로 건장한 병사들 사이에 눌려있는 주인님을 상상했다.
주인님이 고개를 저었다.
“황제가 특급 방탄차량을 제공했다. 그걸 타고 가마. 특히 그들이 ‘특급’에 강조를 할 정도면 이번엔 바렛에 뚫리지는 않겠지.”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그런데 넌 못 탄다.”
응… 예?
“…저, 저는 같이 못 탑니까?”
“안타깝게 생각하고는 있다. 그런데 황제가 테러리스트의 정체를 인간 군대로 확정시켜서 너는 탑승할 수 없구나.”
주인님과 나는 적을 흡혈귀로 추측했고 그건 사실로 판명 났다. 빠르게 달리는 말(말이 유독 특이하긴 했지만)에서 바렛으로 주인님을 저격하는 솜씨는 인간에게서 볼 순 없다.
실제로 그놈은 총도 맞고 오토바이에 치이기까지 했잖은가. 그런데도 멀쩡하게 후퇴까지 했다.
“하지만… 흡혈귀인 건 확실하지 않습니까? 저도 주인님도 그 녀석이 흡혈귀인 걸 알고… 시미르도 짐작할 수 있잖습니까.”
그때 시미르가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내 말에 존중은 하더라도 동의는 못 했다.
“바렛은 모르겠는데… 차량과 똑같은 속도에서 쏠 수 있을 정도라면 몸을 극한으로 단련하고 반동을 견딜 수 있는 보조장치를 장착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어. 국경선을 습격하고도 꼬리를 잡히지 않는 철저함이라면 마냥 넘겨짚을 순 없지.”
“초, 총에 맞았잖아요?”
“방탄복을 입고 있었을 수 있어.”
내 의견에 하나하나 반박하다가 시미르가 설명을 덧붙였다.
“사실 카나츠미에서 목격하지 않고도 인간 군대라 확정 지은 것은 국경선 습격 사건의 영향이 제일 커. 지금 현재에서도 세 국가의 파견 팀이 흔적을 조사하고 있는 과정인데 성과는 단 1도 없을 정도로 용의주도한 면을 보면….”
“흡혈귀가 가담했을 수 있다.”
주인님이 말을 가로채고 시미르가 동의해 끄덕였다.
“한원. 너도 성수를 보았잖느냐. 백 년 전에 폐기한 성수를 놈들이 가지고 있었다. 인간들이 그걸 보관했을 순 없고, 아무래도 흡혈귀가 몰래 가로챘겠지.”
“…….”
정말 인간 군대라고? 그들은 현재 엘 에이라 수도 지하에 주둔해있다. 세계적으로 활동할 만큼 규모가 클 수도 있지만, 카에데는 직접 여왕을 공격하는 방식은 선호하지 않는다.
카에데가 말한 도움을 주고 인간 군대 창설을 도운 흡혈귀. 만약 우릴 습격한 녀석과 동일인물이라면 또 틀린 말은 아니다. 그렇다면 뭔가 아귀가 맞긴 하다.
“그러니 한원. 비좁더라도 병사들 차량에 타서 오너라. 카나츠미의 병사들은 노예일지라도 인간인 널 용의 선상에 두고 있다.”
조금 찔리지만, 내가 범인은 아니지 않은가.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동의하려다 문득 차량을 돌아봤다.
나에게 불신만 가득하고 못마땅하게 여기는 건장한 흡혈귀들과 수도에 도착할 때까지 몸을 붙이고 있으라고?
“저… 주인님?”
“안다. 자칫 냄새 때문에 물 수는 있지.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잖느냐.”
“저 트렁크에 있거나 눈과 입을 가린 채로 구속해도 상관없으니 주인님 곁에 있으면 안 됩니까?”
“황제가 너를 직접 지목하며 거절했다. 짐도 어쩔 도리가 없구나.”
제기랄! 사슴 한 마리를 사자 무리에 끼어놓고 무사 하라는 소리나 다름없잖아! 사색이 되어가는 내 표정을 물끄러미 보던 시미르가 끼어들었다.
“여왕 폐하. 제가 무례한 부탁을 드리는 게 아니라면 한원을 제 뒤에 태워도 괜찮겠습니까?”
매섭게 돌아보는 눈길에 시미르가 고개를 조아렸다. 이런 반응이라면 당장 말을 철회하겠으나 시미르는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저는 맹세코 한원을 물지 않을 수 있습니다.”
“네년의 무엇을 믿고?”
“한원을 믿으시면 됩니다.”
주인님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여기서 내가 무슨 대답을 해야 좋지?
우물쭈물 고민했다. 물론 시미르의 등에 타는 게 나로선 거부할 일이 없는 좋은 방법이다.
내 목을 언제라도 뜯어버리고 싶어 호시탐탐 입맛 다시는 남정네 놈들보다 좋은 방향은 아니어도 한때 몸을 섞었던 이쁜 여자가 낫지 않겠는가.
내 고민을 보던 주인님이 한숨을 내쉬었다. 돌아서고는 나를 차갑게 노려봤다.
“그럼 그렇게 하여라. 바로 출발하겠다.”
“아… 네, 네….”
이거 한동안 혼쭐나겠네. 카나츠미에서 제공한 거대한 방탄차량에 탑승한 주인님은 뒤돌아보지도 않고 출발했다.
그 뒤를 따라 세 국가의 병사들이 호위하며 출동하고, 난 시미르가 가리킨 오토바이 뒤에 착석했다.
“내가 괜한 짓을 했나?”
내 머리 위에 헬멧을 얹은 시미르의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하… 하하. 아뇨, 괜찮아요. 한동안 혼 좀 나면 돼요.”
“그래.”
짐승의 울음처럼 울보 짖은 배기음으로 오토바이가 진동했다. 어디를 잡을지 살펴보다 오토바이 안장을 잡았을 때, 시미르가 돌아봤다.
헬멧 때문에 표정이 안 보이다 보니 시선의 의미를 모르겠다.
“왜요?”
“…그걸로 되겠어?”
“뭐가요?”
“아니. 겪어보면 이유를 알겠지.”
시미르가 스로틀을 당기자 바이크가 맹렬하게 울었다. 호랑이의 울음을 듣고 안장을 꽉 움켜쥐었다.
“사, 살살 가요!”
“후후, 싫은데?”
클러치를 놓는 순간, 바이크가 단숨에 치고 나갔다. 그 기세가 원체 강렬했는지 뒷바퀴가 앞으로 치고 나오고 앞바퀴가 들려져 윌리를 이루자 난 급히 시미르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살살 가라고!”
내 경악을 시미르가 들었는지 모르겠다. 오토바이는 무서운 속도로 앞으로 달려갔다.
한창 달려가고 있을 때였다. 저 앞 너머로 차량 행렬의 뒤꽁무니가 보였다.
무섭게 달리던 바이크의 속도도 익숙해졌다. 차분함을 되찾고 몸에 부딪치는 바람을 즐길 즈음이 되자 시미르가 몸에 힘을 주고 있음이 느껴졌다.
‘긴장했네. 왜?’
혹시 뭔가 느꼈나? 싶다가도 그건 아닐 거라 여겼다. 왜 몸을 경직시켰을까, 생각하다가 문득 속내에서 설마?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시미르.”
나름 크게 불렀어도 시미르는 못 들었다. 못 들은 척인지도 모르겠지만, 난 슬며시 허리를 감싼 손을 아래로 내렸다.
“──!”
깜짝 놀란 시미르 때문에 바이크가 휘청거렸다. 놀란 나머지 꽉 잡자 시미르가 허리를 파르르 떨었다.
“아… 죄, 죄송합니다.”
애초에 안 들린다. 이거 장난이 지나쳤나? 시미르가 날 때려도 할 말은 없는데.
하지만 시미르는 반항하지도, 멈추지도, 돌아보지도 않았다. 얌전히 앞만 주시했다.
“흐흥.”
진짜 위험하고 따라 해서는 안 되는 무모한 행동임을 안다. 하지만 시미르가 절대 실수하지 않을 거란 사실을 믿기 때문에 손을 조금씩 움직였다.
사타구니에 얹었던 손가락을 살살 움직였다. 바이크 수트는 방수가 철저한지 그녀가 젖었는지 안 젖었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
하지만 알 수 있다. 그녀의 수트 안은 흠뻑 젖어있다.
“시미르님. 이런 거 원했잖아요.”
그녀가 못 듣는다는 사실을 알고도 말했다. 시선 하나 옮기지 않는 시미르지만,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을 테다.
“왜 당신이 나를 뒷자리에 앉혔겠어요?”
열심히 문지르면서 다른 손은 시미르의 작은 가슴을 잡았다. 움찔하는 시미르의 등에 몸을 밀착시키고 손을 마구 움직였다.
그녀가 헐떡이는 게 손아귀로 고스란히 느껴진다. 계속 만져주니 그녀의 허리가 문득 짧게 떨렸다.
자칫 실수하면 그대로 엎어져 크게 다치거나 조금만 엇나가면 사망할 수 있는 위험한 상황이다. 굳이 이런 행동이 아니더라도 장난 자체를 해선 안 되지만,
나나 시미르나 이런 위험한 상황에서 느끼는 스릴을 즐겼다.
계속 만지다 보니 나도 자극이 온다. 발기된 자지를 시미르의 엉덩이 부근에 붙여 문질렀다.
“좀 궁금하네요. 절 만나자마자 이런 걸 원할 정도면 그날 복귀하고서 어떻게 지냈어요?”
“…….”
“단둘이서 진득하게 얘기 나누고 싶네요. 마지막까지 고집부리던 시미르님께서 얼마나 힘들었으면 저에게 먼저 접근하실까.”
“…….”
“아, 슬슬 수트 위로도 축축함이 느껴져요. 도대체 언제부터 젖었어요? 절 봤을 때부터? 아니면 제가 즉위식에 참석한다는 걸 알았을 때부터?”
예전에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놀이공원 같은 심장이 가쁘게 뛰는 놀이기구를 타고나면 곁에 있는 사람과 사랑에 빠진다는 사실.
당연히 그건 진짜 사랑이 아닌, 빠르게 뛰는 것에서 느끼는 착각, 귀인오류라고 불리는 심리학적 용어가 있다.
그럼 지금처럼 심장이 빠르게 뛰는 스릴에서 하는 위험천만한 야한 장난은 어떨까?
평소보다 훨씬 흥분되지 않을까. 하는 뇌피셜 추측을 해본다.
“…읏… 흐으… 으읏….”
문득 바람을 타고 흐르는 시미르의 신음을 들은 거 같다.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는데 착각은 아니었다.
“흐아… 하읏. 하아아… 흐응.”
하하, 이 여자도 참. 상황 가리지 않고 흥분하기는. 아, 내가 먼저 시작했었나? 이젠 아무렴 어떤가.
한참을 만져주는데 갑자기 시미르의 머리를 숙였다. 화들짝 놀라 손이 닿은 부위를 마구 두들기며 외쳤다.
“아, 앞에 봐요! 위험하게 뭐해요!”
생각해보면 나도 참 뻔뻔하다. 내가 위험을 만들고 있는데 오히려 시미르를 재촉하고 있다.
가까스로 고개를 든 시미르는 속도를 줄였다. 점점 너머의 행렬이 멀어지고 아예 우리와 큰 거리를 벌렸다.
속도를 줄이던 시미르는 오토바이를 멈췄다. 가쁘게 움직이는 어깨를 가만히 보며 내가 선을 넘은 건 아닐까 걱정했다.
“시미르님?”
“이… 가축 놈이!”
아니나 다를까! 시미르가 내 팔을 잡고 집어던졌다. 휙 날아간 내가 바닥을 구르고 나무에 등을 박았다.
“우악!”
이쯤 되면 발정 난 나 자신이 문제다. 숨이 턱 막혀도 급히 일어나 등을 기대고 헬멧을 벗었다.
“자, 잠깐만요! 죄송합니다! 제가 지나쳤습니다!”
하지만 시미르는 헬멧도 집어 던지고 다가와 내 멱살을 움켜잡았다. 흡혈귀의 완력 때문에 난 나보다 작은 여성에게 들려졌다.
“가축…! 장난질 봐주는 것도 정도가 있어!”
시미르의 얼굴 전체가 확 달아올라 있다. 다시금 그날의 무너지는 시미르의 표정이 떠오르자 나도 살며시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우으… 하, 하지만 원했잖아요?”
“아니야.”
“그러지 않고는 절 뒤에 태웠겠어요?”
“그, 그만해!”
점점 몸이 내려와 시미르와 눈높이를 맞췄다. 나를 위협해도 그녀에게선 살기 따위 느껴지지 않는다.
피식피식 웃으며 멱살을 쥔 손을 잡아 천천히 손가락을 풀었다.
“그냥 이건 구해준 보답이에요. 저희 짧게 즐기고 갑시다.”
“크윽… 발정 난 가축 놈이….”
나만 발정 난 건 아닌데?
멱살을 쥔 손을 풀고 그녀의 손에 깍지를 껴 잡았다. 표정이 점점 소녀답게 부끄러워하는 걸 보고는 입을 움직였다.
시미르의 입술을 덮쳤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