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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혈귀 여왕을 성노예로 만들어라-27화 (27/59)

〈 27화 〉 카미츠미 (1)

* * *

한때 노예였던 인간들은 적지 않은 수임에도 불구하고 발소리를 최대한 죽이고 이동했다.

오랜 염원이었던 탈옥을 놓칠 수 없기에 모두는 나나 아츠나의 지시에 불만 하나 없이 얌전히 따랐다.

몇 번을 발각될 뻔한 상황에서도 무사히 몸을 숨기며 나아간 우리가 도달한 곳은 아츠나가 드나들던 정원이었다.

하지만 탈옥이란 것이 쉽지는 않은 모양이다. 병사와 메이드 한 명이 몰래 연민을 꽃피우는 정원은 쉽사리 자리가 빌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사랑은 다른 데에서 하지… 하필이면 지금 같은 상황에.”

몸을 섞으며 뜨겁게 불타오르는 커플에게 아츠나는 분노를 불태웠다. 나마저도 초조한 마음에 손톱을 깨무니 나의 반응에 사람들이 크게 동요했다.

불안한 목소리들이 흘러나오자 그들을 진정시키기 위해서라도 난 확신을 갖고 움직여야 한다.

“저 흡혈귀들을 다른 데로 옮겨야겠어. 무슨 방법이 좋을까?”

내 말에 아츠나가 고개를 저었다.

“오히려 이목을 끌까 봐 걱정이야. 여긴 사람이 많다고.”

“그러면 다른 출구도 있어. 좀 돌아가야 하지만.”

“…….”

어느 방향이 있을까. 가능한 이곳과 가까운 비밀 출구를 떠올려야 한다. 내가 찾아놓은 여러 가지의 출구들. 어느 곳이 좋을까.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아츠나가 내 소매를 잡았다. 그녀의 눈이 이상할 정도로 착잡했다.

“……의심하지 마.”

“무엇을?”

“따라와.”

어디를? 라고 묻기도 전에 아츠나가 뒤로 돌아갔다. 사람들이 그녀를 따르고, 나는 수상한 반응에 불안함을 느꼈다. 그녀가… 내게서 뭔가를 숨기고 있다.

아츠나가 향한 곳으로 가까워질수록 내 기억도 또렷해졌다.

‘아냐… 아츠나가 여길 어떻게?’

여러 개의 출구 중에서 내가 기억한 출구 중의 하나였지만, 나 같은 성인 남자의 체격은커녕 성인 여성도 지나갈 수 없는 길이다.

기껏해야 아츠나가 간신히 왔다 갔다 가능한 길.

그곳은 성의 도개교 아래 수로로 통하는 길이다. 거기로 가기 위해선 성벽 계단 아래, 기자재 창고로 들어가야 한다.

수로가 곁에 있다 보니 창고는 습하고 눅눅해서 벽에 곰팡이가 슬고 부식된 공간이라 자칫 긁히기라도 했다간 파상풍에 걸릴 수 있는 더러운 창고.

안 쓰는 기자재를 처박아두고, 창고 문조차도 녹슬어 잘 안 열리는 곳. 혹시나 비밀통로로 이용될까 싶어서 벽을 두들겨보다 뚫린 구멍이 내가 생각한 비밀통로였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파상풍의 위험이나 여러 가지로 더러운 공간, 그리고 애초에 조금만 걸어도 나오는 성문이 바로 옆에 있기에 내가 지정한 비밀통로 항목에서 제일 먼저 탈락했다.

“어떻게 여길 알아?”

어지간히 꼼꼼히 보더라도 찾을 수 없는… 찾아도 별 방법이 없는 곳이다.

창고 앞에 선 아츠나는 내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작은 손으로 바닥 철문을 힘겹게 들어 올리곤 대뜸 쥐 소리를 냈다.

“찍! 찍!”

잠시 후, 창고 안에서 같은 쥐 소리가 들려왔다.

“찍! 찍찍!”

“찍! 찍찍찍!”

규칙 있는 대답을 미루어보아 그것이 일종의 신호임을 알았다. 돌연 창고 안에서 라이트 빛이 비추어지더니 얼굴을 보인 건 정세환이었다.

“계획에 차질이 생겼군. 대장님께는 미리 신호를 보내놨다.”

“고마워요, 오빠. 먼저 사람들부터 받아줘요.”

감사 인사를 하는 사람들을 안으로 들인 정세환이 내게서 신민애를 받았다. 공주님 안기로 받쳐진 신민애를 데리고 창고 깊숙이 사라지자 아츠나와 나도 내부로 진입했다.

그리고 내가 생각한 장면이 묘하게 달라진 모습에 넋을 잃었다.

농구공 크기 정도였던 구멍은 성인 남성 크기만큼 커졌을 뿐 아니라 이음새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같은 크기의 판막이 옆에 세워져 있었다.

구멍 너머엔 서너 명의 군인들이 작은 간식거리와 담요를 사람들에게 둘러주는 중이다. 신민애도 담요로 몸을 두르고 초코바 하나를 입에 털어 넣었다.

아츠나에게 담요를 둘러준 정세환이 내게 다가왔다. 메이드복을 입고 있는 나를 의아하게 바라보다가 돌연 손을 내밀었다.

“의심해서 미안하다. 넌 우리 편이 맞았어.”

“…….”

“이제 너를 완전히 믿을게. 그날 너에게 저질렀던 무례한 태도들에 대해서 사과한다.”

“……언제부터였어요?”

내 물음에 정세환이 못 알아챈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를 대신해 다가온 아츠나가 정세환을 보내고 내 손을 잡았다.

“한원… 의심하지 말고 들어봐.”

“이건 찾아본다고 찾아지는 통로도 아니야. 도대체 여길 어떻게 찾았어? 언제부터 이런 작업을 했고… 애초에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

“카에데 언니가 시킨 거야. 진정해.”

진정하기엔 내 속에선 배신감만 타올랐다. 카에데는 말만 믿었다고 할 뿐, 전혀 날 믿지 않았다.

사실 내게 사실을 숨겼단 배신감에 속상할 정도는 아니다. 그들에게 난 흡혈귀에 아양 부리는 인간이나 다름없으니까.

내가 이런 기분을 느끼는 건 다름 아닌 비밀통로의 출처다.

“여기 말고 또 몇 개가 더 있어?”

“…아마 네가 아는 곳 전부.”

“제기랄… 도대체 어떻게 찾았어? 너희… 인간 군대가 아무리 탐지능력에 뛰어나도 성에 들어오지 않고는 못 찾는 통로들이 거의 전부야. 설마 회당 내부의 단상 아래도?”

아츠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그녀의 대답을 알 수 있었다.

“너희들 뭐야. 당신들 너무 이상해.”

분위기의 이상함을 감지한 정세환이 다가왔다. 그가 손을 저으며 내게 안정을 요구했다.

“무슨 상황인진 모르겠는데. 김한원, 이건 네가 그렇게 부정적인 반응을 보일 게 아니야. 우리 모두 통로가 발각될 위험도를 오히려 줄이면서 통로를 개조했어. 오히려 좋은 거야.”

“그게 아니에요. 이것들을 어떻게 찾았어요?”

정세환도 입을 열지 않았다. 점점 그의 눈에서 작은 의심의 빛이 피어오르는 게 보이는 순간, 구멍 안에서 카에데가 모습을 드러냈다.

급하게 온 탓에 약간 상기된 카에데가 대신 대답했다.

“너 말고도 스파이가 더 있다.”

“…인간 중에서 저만이 성 이곳저곳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어요. 그럼 당신들은 누구에게 스파이를 시켰죠?”

잠시 입을 닫은 카에데가 작게 한숨 쉬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흡혈귀.”

“……누구?”

“대답해줄 순 없어.”

카에데의 태도에 버럭 소리쳤다.

“당신 그거 이용당하고 있어요!”

격한 나의 모습에 정세환이 황급히 총구를 내밀었다.

“조용히 해. 기껏 탈출한 사람들을 다시 감옥에 집어넣으려고 작정했어?”

“흡혈귀한테 정보통 역할을 줬다는 게 말이에요? 그렇게 흡혈귀를 증오하는 당신이 왜 그런 짓을 하는 거냐고요!”

카에데는 쯧, 혀를 찼다. 대답은 바로 들려왔다.

“그 흡혈귀는 좀 달라. 그 녀석 덕분에 내가 노예로서 탈출하고 인간 군대를 창설할 수 있었거든.”

이어서 카에데가 강하게 외쳤다. 그녀의 말은 내 가슴에 칼을 꽂았다.

“그럼 너는 왜 모순적인 태도를 보이는 거지? 흡혈귀의 도움을 받고 그의 정보를 받는 게 이상해? 너도 마찬가지잖아. 흡혈귀 메이드들의 도움을 통해 인간들을 구했으면서.”

“…에밀리와 레베나는 다른 의미에요.”

“같아! 무슨 노예니 뭐니, 결국엔 너와 같은 배를 탄 동료지. 나도 마찬가지야. 내가 증오해 마지않는 흡혈귀지만 나를 구한 은인이야. 다른 종족이어도 우애가 깊다고.”

하지만 불안감은 전혀 떨어지지 않았다.

만약에… 정말 만약에 인간에게 호의적인 흡혈귀가 있다면 오히려 흡혈귀가 없는 먼 곳으로 도망치라며 풀어줬지, 절대 군대를 만들게 돕고 남의 국가의 허점을 알려주지 않는다.

왜 기껏 살린 인간들을 사지로 내모는 짓을 하겠는가.

“그럼 말해주세요. 그 흡혈귀는 누구예요?”

“말해줄 순 없어. 그건 그 흡혈귀와 내가 맹세한 약속이니까.”

카에데가 손짓하자 군인들은 인간들을 데리고 사라졌다. 머뭇거리던 아츠나도 카에데의 명령에 따라 떠났다.

카에데도 떠나려는지 등을 돌렸다.

“그래도 오늘 우리를 도운 건 잊지 않을 거야. 너도 기다려. 우리가 구해줄 테니.”

“늘 말하듯, 도움 필요 없습니다. 당신들을 돕는 흡혈귀가 누군진 모르지만… 후회하고 말 거예요.”

“후회할 일이 없었으면 좋겠군.”

구멍으로 나간 카에데는 판막을 집어 들어 구멍에 맞췄다. 마치 구멍이란 게 애초에 없었다는 것처럼 이음새 하나 안 보이게 벽으로 막혔다.

마치 예언의 일종처럼 나의 불안감은 카에데에게 강하게 표시하고 있다.

분명 큰 사건으로 번진다는 걸.

뒤늦게 잠에서 깬 서니에겐 그녀가 잠결에 감방문을 따고 다수의 인간을 잡아먹었다고 둘러댔다. 시체는 모두 소각시켰고 증거로 사망 체크란의 본인 사인을 보여줬다.

처음엔 당황한 서니가 아니라고 둘러댔지만, 내가 뻔뻔하게 연기할수록 그녀는 점차 거짓말을 현실로 믿었다.

그러면서 찔리듯 과거에 비슷한 사건으로 사고를 저지른 참회까지 하자 내심 안심했다.

난 사태를 정리하고 침실로 돌아왔다. 어느새 잠들어버린 레베나를 때려 깨우고, 서로의 역할을 되찾아 제자리로 맞춰졌다.

얼마 못 자겠지만, 그래도 뿌듯한 마음에 푹 잠들었다.

상황이 어떻든나는 사람들을 살릴 수 있었으니까.

<5/>

서니는 징계를 먹었다. 허락도 없이 새벽에 지하감옥을 들른 것도 모자라, 멋대로 다수의 인간을 죽인 탓에 몇 달간 엘 에이라 변두리 도시로 좌천이 확정되었다.

억울하다는 변명도 없이 서니는 자신에게 내려진 징계에 수긍했고 덕분에 난 그녀에게 미안한 감정을 느꼈다.

몰래 시간을 내어 만난 서니는 흡혈귀의 위엄은(사실 어젯밤의 체위에서 위엄 따윈 사라졌다) 어디다 잃어버렸는지 눈물을 펑펑 흘리며 내 옷자락에 눈물 콧물을 잔뜩 묻혔다.

“흐아아앙­ 나는 기억 안 난단 말이야!”

“진정해봐요, 서니. 괜찮아요. 알아보니까 그 도시엔 맛있는 가게가 많다고 하더라고요. 너무 외진 곳이라 선임도 별로 없데요!”

“그게 무슨 상관이야­! 네가 없는데!”

아, 그게 문제였어? 아예 내 품에 매달려서 애처럼 울기 시작하자 주변 시선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황급히 그녀를 떼어내고 눈물을 닦아줬다.

“진정해봐요. 몇 달이에요, 몇 달. 그동안 실적 좀 내주고 얌전히 할 일만 해도 정상 참작해서 일찍 복귀를 허락할 수 있어요.”

“그럼 뭐해! 몇 달이나 떨어져 있는데!”

“아니… 장거리 연애하는 커플도 아니고 왜 이래? 좀 나와봐요. 비싼 옷이라고요.”

간신히 떼어내니 서니도 진정했다. 잘 달래어 그녀를 보내곤, 나도 내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하루, 이틀.

그 날짜가 왔다.

카나츠미로 떠날 인원들을 버스에 태우고, 여왕 전용의 명품 방탄차량에 나와 주인님이 탑승했다.

“카나츠미에 가본 적 있느냐?”

“없습니다.”

“나름 편안한 곳이다. 사람들의 인식도 좋고 문화도 즐길 거리도 많지.”

출발하자 동서남북 에워싼 호위 차량 때문에 바깥 풍경을 볼 수가 없었다. 검은 유리창 덕분에 캄캄한 바깥을 최대한 보기 위해 노력했다.

“주인님께선 카나츠미에 가보신 적 있으십니까?”

“있었다. 칠 년 전에 잠깐.”

“괜찮은 곳이었습니까?”

내 물음에 주인님은 옅게 미소지었다. 나를 끌어당겨 어깨에 머리를 기대곤 내 허리를 감싸 안았다.

“좋았단다. 그래, 아주 좋았단다. 짐의 마음에 들 정도로 나쁘지 않았지.”

“오… 저도 기대됩니다. 주변에서 이 카나츠미 얘기만 나오면 눈에 불을 켜고 흥분하더군요.”

주인님의 웃음에 의아함마저 들었다. 언뜻 비웃음으로 느껴지는 웃음이 그치자 주인님이 야릇한 숨소리를 섞으며 말했다.

“넌 하나를 알면 둘은 모르는구나. 그래, 네가 가도 즐길 거리는 충분하다. 그런데 그건 알아둬라.”

“…불길합니다. 무엇입니까?”

웃음기 머금은 목소리는 살짝 흥분에 빠져 있었다.

“흡혈귀에게 즐거운 공간은… 인간에겐 아주 끔찍한 공간임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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