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화 〉 탈출
* * *
“여왕이 부재중인 성을 공격하겠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나와 했던 성을 공격하지 않기로 한 약속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카에데는 사전 동의도 없이 그렇게 통보했다.
물론 그녀에겐 이보다 놓칠 수 없는 절호의 기회란 건 누구라도 알 수 있으나, 나에게 그건 받아들일 수 없는 결과다.
“그럴 순 없어요.”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다. 예상한 반응처럼 표정에 약간의 변화도 없는 카에데는 무섭게 바라보기만 했다.
“저와 한 약속은 잊었습니까? 저를 믿고 비밀리의 협력 관계를 유지했잖아요.”
“…결렬이다.”
단호하게 대답한 카에데가 일어섰다. 그날은 벗은 모습만 보다가 바깥에서 군복으로 완벽히 무장한 카에데의 모습은 언뜻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한 치의 군더더기 없는 각진 자세나 손가락이라도 대면 칼로 단숨에 찌를 것 같은 매서운 눈길.
그녀가 날 이런 눈으로 보던 사람이었던가?
“왜 생각이 바뀌었습니까? 아츠나에게 미리 귀띔도 없이 갑자기 혼자 결정하고,”
“…….”
바로 대답하지 않은 카에데가 뒤로 물러나더니 구석진 곳에 몸을 붙였다. 정원 복도를 가로지르는 사용인들의 발걸음을 듣고 나도 아무렇지 않은 척 주변을 감상하는 척했다.
조용해진 다음에 카에데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생각은 바뀌지 않았어. 늘 그대로였지.”
화난 듯 카에데를 노려봤다. 정원의 구석에 몸을 붙이고 귀신처럼 나를 바라보는 카에데의 눈에서 조금의 경멸감이 보였다.
이와 같은 눈을 어디선가 본 기억이 난다.
“그대로라고요? 처음부터 절 믿지 않았다는 소리 아닙니까?”
“…조금은.”
“조금 수준이 아니라 많이 화가 나네요. 그럼 첫 대면 때 보여줬던 그 신뢰랑 친절함은 도대체 뭐였습니까? 그냥 심심풀이 정도였나요?”
내 말에 혀를 찬 카에데는 비웃음 비슷한 걸 지었다.
“심심풀이라….”
말끝이 흐려지고 머리가 핑 돌았다. 핑 도는 게 아닌 정말로 머리가 돌고 있었다.
나로선 반응하기도 힘든 속도로 튀어나온 카에데가 내 옷깃을 당기며 발을 걷어찼다.
그 무지막지한 힘으로 넘어뜨린 덕분에 한 바퀴 돈 난 정신 차리니 바닥에 쓰러진 상태였다.
내 위에 올라탄 카에데는 단검으로 내 목을 노리고 있었다.
“무… 무슨 짓이에요.”
깨닫기도 전에 제압당한 덕분인지 통증이 뒤늦게 몰려왔다. 넘어지며 허리를 바닥에 찧은 탓에 하반신이 욱신거린다.
조금의 변화도 없는 표정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제대로 설명해달라고요!”
“너나 제대로 설명해봐.”
영문도 모르는데, 문득 떠올랐다. 카에데의 불신의 눈. 그건 아까 봤던 노예들의 눈과 똑같다.
“카에데?”
“우리 앞에선 인간 편이니 실실 웃고는, 뒤에선 노예들 관리나 하는 위선적인 행동에 대해서 네가 설명해봐.”
이 얘기는 아까 있었던 그 일을 말하는 것 같다. 그녀는 성의 구석구석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다는 말인가. 처음부터 전부?
“어떻게 아십니까?”
“네가 알 바는 아니야.”
“…뭔가 오해하시는가 본데, 그건 흡혈귀들의 지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한 겁니다. 절대로 하고 싶지 않았다고요.”
단검이 가까이 다가온다. 목에 닿는 차가운 감각에 겁이 더럭 났다.
“과거에 외딴 인간 정착지가 있었지. ”
그 무서운 눈길을 한 카에데는 단검을 약간만 거뒀다.
“흡혈귀들을 눈을 피해 숨어든 가장 외딴 지역에다 오랜 기간 숨어서 살기에도 가장 적합한 최적의 지형이었다. 인간들은 그곳에 숨어 살며 흡혈귀는 생각하지도 않고 평화롭게 살았어. 그런데 문제가 하나 생겼지.”
칼날이 볼을 타고 올라와 눈앞에 멈춰섰다.
“마을에 살던 청년 하나가 허락도 없이 바깥을 다녀왔는데, 수상쩍은 행동을 하는 거야. 유달리 불안해 보였고. 겁이 난 마을 어른들이 청년을 붙잡아 추궁했지. 혹시 흡혈귀에게 들켰냐고. 그런데 아니래. 들킨 적 없데.”
“거짓말이겠군요.”
“너처럼 말이지. 그 말을 하고 날이 저물기 무섭게 흡혈귀들이 습격을 해왔어. 마을 보초병은 소리도 없이 사살당하고 어린아이 할 것 없이 모두 붙잡혀 노예로 전락 당했어. 그런데 청년은 곱게 모셔가더군. 그때 깨달았지.”
칼끝이 내 미간에 닿았다. 그대로 찌를 심산처럼 카에데는 양손으로 단검을 쥐었다.
“이제 다시는 너 같은 놈을 믿지 않겠다고.”
“젠장, 내 말은 하나도 안 듣고 그대로 저를 배신자 취급하는 겁니까? 나도 좋다고 한 짓거리가 아니라고!”
“지하실에서 고문당하는 형제들을 보면서 무슨 생각 했지? 너도 흡혈귀처럼 고문하고 싶다고 생각했나? 아니면 자기는 저런 처지가 아니라 다행이라고 여겼나?”
화가 치밀었다. 무슨 자신감인지 미간에 닿은 칼을 후려쳐 떨어뜨리고 카에데를 밀었다.
밀려서 넘어질 줄 알았던 카에데는 능숙하게 자세를 수복했다. 대신 메고 있던 소총을 잡았다.
일어선 내 가슴팍에 총구가 닿았지만 난 도박을 걸었다.
“쏘세요. 소음기도 없는 총으로 쏘면 저는 죽겠지만 당신은 붙잡히겠죠.”
“정말 못 쏜다 생각해?”
“당연하죠. 당신은 2주 후에 성을 습격하겠다고 말했어요. 그런데 지금 절 죽이면 무슨 사태가 벌어질지 모르는 멍청이가 아니잖아요.”
카에데의 미간이 찌푸려졌지만 내 말은 맞았다. 방아쇠를 당길 듯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지만, 총구는 거둬졌다.
심장이 벌렁거린다. 정말 통할 거라 생각은 반반이지만,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생존이었다.
흡혈귀가 아닌 같은 인간에게 죽는단 건 정말 씁쓸하고 슬펐을 것 같다.
“카에데. 제발 절 믿어줘요. 전 여전히 당신들 편이고, 인간들을 관리한 건 어쩔 수 없었다고요.”
“그 청년도 너와 똑같이 말했어.”
“제기랄! 도대체 왜 나를 못 믿어요!”
피식, 비웃은 카에데는 떨어뜨렸던 단검을 주웠다. 무심히 칼을 털고 방탄복 오른쪽 검집에 꽂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단 것처럼 돌아봤다.
“제가 뭘 해야지 믿을 수 있어요?”
“그건 네가 직접 증명해야지.”
마른 침을 삼켰다. 카에데는 내게 덮어진 누명을 벗길 기회를 주었다. 아직 눈동자에선 나를 완전히 신뢰하는 빛은 없었지만.
이런 상황에서 그녀가 증명하라는 것이 뭔지는 충분히 안다. 하지만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인간들을… 탈출시키도록 도우라는 말이군요.”
“방법을 꺼낸 건 너다.”
“너무 위험해요. 사소한 실수 하나만 걸리면 끝장나는 거예요. 심하면 저뿐만이 아니라 군대의 존재마저도 들킬 수 있고.”
카에데는 고개를 저었다. 손가락으로 내 가슴팍을 쿡 짚으며 정말 군인답게 말했다.
“방법을 찾아라. 네 말이 진심임을 증명하고 싶다면.”
“제기랄. 난 남들보다 조금 대우를 받을 뿐인 한낱 노예일 뿐인데 이런 사명까지 주네.”
막상 이렇게 되긴 했지만, 어떤 방법이 있을까, 싶을 때.
구멍 속에서 누군가가 기어오고 있었다.
“들~! 어봐! 카에데! 진짜 오해가 있는 거라니까!”
아츠나다. 저렇게 시끄럽고 촐싹대는 말투는 아츠나말곤 없다.
힘겹게 머리를 뺀 아츠나가 우리를 올려다봤다.
“한원은 그럴 애가 아니라니까!”
나나 카에데나 무심하게 아츠나를 내려다봤다. 씩씩대던 아츠나는 우리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더니 슬그머니 돌아가려 했다.
“가지마, 이것아.”
“으갸악!”
도로 돌아가려는 아츠나의 머리채를 잡았다. 바둥거리며 내 손을 깨무는 걸 지켜보다가 문득 뇌리를 스치는 한 가지 방법에 눈이 번뜩 뜨였다.
“카에데. 제가 인간들을 탈출시키면 절 믿는다고 하셨죠?”
“그런데?”
“제가 잘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이 잘 해주셔야 합니다.”
카에데를 보며 장담하듯 미소지었다.
“알겠습니까?”
서니를 다시 만난 건 지하실 입구에서였다. 이전 달아나던 내 모습을 떠올린 서니는 우스움과 안타까움의 중간 지점의 미소를 지었다.
“여긴 어쩐 일이야, 가축?”
“…알아서 뭐하게요.”
“또 저번처럼 도망치려고 온 거야?”
그 날을 떠올리게 하며 날 놀리는 서니에게 건조한 미소를 지어줬다.
“이젠 됐어요. 포기했어요.”
“그래? 그러면… 나랑 같이.”
나를 시험해보겠다는 듯이 서니가 지하실을 가리켰다.
“즐기러 가볼래?”
지하실로 내려왔을 땐 언제나 보던 장면만 펼쳐졌다.
피를 빠는 흡혈귀나 성욕을 채우는 흡혈귀. 실컷 가지고 놀다가 사망한 인간은 수레에 쌓아 소각장으로 가져갔다.
서니와 나는 그곳을 가로질러 낯익은 감옥 앞에 섰다. 맥이 탁 풀린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던 신민애는 우리가 입구로 다가서자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
온몸을 벌벌 떨며 벽으로 기어간 신민애가 머리를 감싸 쥐며 두려워했다.
“그만… 이젠 그만….”
처참한 모습이었다. 무표정하게 지켜보는데 서니가 내 등을 툭 쳐 감옥 안으로 넣었다.
“자. 마음껏 쑤셔봐.”
“삽입은 안 합니다. 했다간 주인님이 절 가만 안 두실 거거든요. 그리고 제 냄새 감당하실 수 있어요?”
“아, 음…… 그래? 그럼 알아서 즐겨봐.”
성큼성큼 다가가자 뒤늦게 내 정체를 알아낸 신민애가 눈을 크게 떴다. 경멸감이 떠오르지만 반항할 힘도 없는 그녀는 그저 울상만 지을 뿐이다.
나올 눈물이 더는 없는지 신민애의 눈가엔 마른 눈물 자국만 보였다.
“일어나요.”
“제발 살려줘. 차라리 날 죽여달라고….”
“일어나서 벽 짚고 엉덩이나 내밀어요.”
거부하듯 고개를 저었지만, 서니가 재촉하는 바람에 내 말에 순순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 훌쩍이며 벽을 짚고 엉덩이를 내민다.
얼마나 때렸는지 흉터와 송곳니 자국이 남아있는 엉덩이에 노예 낙인이 그려져 있다. 그 낙인 위로 손을 가볍게 덮자 신민애가 조금씩 떨었다.
그녀에게 몸을 붙이고 남은 손으로 봉긋한 가슴을 주물렀다.
“후으으… 흐으윽.”
마른 줄 알았던 눈물을 다시금 흘리는 신민애의 귓가에 입을 가져갔다. 그녀의 귓불을 깨무는 척을 하며 작게 속삭였다.
아무런 반응도 없다.
조용히 침묵하는 그녀에게 할 말만을 전하고 손을 뗐는데 서니가 의아한 듯 물었다.
“뭐야? 뭐했어?”
내 이상한 행동에 의심하자 난 최대한 힘없는 웃음을 짓고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그냥 같은 인간에게 괴롭힘당하는 기분이 어떠냐고 속삭였습니다.”
“그걸 그리 수상하게 말해야 해?”
“수상할 정도는 아니잖습니까.”
퉁명스럽게 대꾸하곤 신민애의 엉덩이를 톡톡 두들겼다. 펄떡! 움찔한 신민애가 몸을 돌리고는 나를 향해 넙죽 절을 했다.
“죄송합니다… 제발 살려주세요.”
안도의 한숨을 조용히 뱉었다. 그리고 요새 연습하는 사악한 웃음을 지었다.
“그럼 성의를 보여주시죠.”
서니의 도움을 받아 신민애의 양팔을 천장에 묶고 그녀의 가슴을 마구 희롱했다. 입술로 괴롭히고 손으로 주무를 때마다 신민애는 작게 느끼며 흐느끼는 소리를 냈다.
그녀의 목을 깨물 듯 고개를 파묻고 난 몰래몰래 계속 속삭였다.
그 외로도 그녀의 고간을 괴롭히면서 각종 얘기를 전달했고, 적당히 나도 만족한 다음에 철장에서 나왔다.
서니는 어딘가 못마땅한지 심드렁한 표정으로 날 지켜봤다.
“보기보단 잘 못 노네.”
“…그건 제가 당하는 처지라서 그래요.”
“당하는 입장이면 잘 알아야 하는 거 아냐?”
의심을 덮기 위해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서니에게 성큼 붙었다. 놀랐는지 서니가 다가오는 내 가슴을 밀며 당황한 표정을 보였다.
“그럴 수도? 그런데 지켜보면은 부담돼서 잘 집중 못 하거든요. 정 그러면 저랑 따로 한 번 해보실래요? 잘 하는지 못 하는지 시험해보게.”
“가축 주제에 무슨 건방지게…!”
하지만 내 무례한 언행에도 서니는 나를 제대로 밀어내질 못했다. 그럴 게 나한테서 나는 냄새는 전혀 맡아보지 못한 중독적인 달콤함이니까.
방금까지 신민애를 괴롭힌 게 자극이 된 상태였다. 내게서 풍겨오는 냄새에 서니의 얼굴이 조금씩 붉어지기 시작한다.
“에잉, 알겠어요. 그럼 전 가보겠습니다. 다음에도 놀러 올 건데 그때도 같이 오실래요?”
“…그, 그래. 시간 내서라도 와보지, 뭐.”
내가 서니에게서 받을 건 오직 신뢰. 그녀에게 내가 완벽한 흡혈귀 끄나풀이란 인식을 심어주어야만 한다.
그리고 더는 날 의심하지 않을 때가 되면… 작전 개시다. 2주 안에 이 모든 걸 해결해야만 한다.
주변의 의심을 받지 않고 무사히 해내기 위해선 잠깐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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