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화 〉 카나츠미
* * *
“보기보단 일찍 왔군요.”
몇 달은 있을 줄 알았던 황위 즉위식은 진이 돌아가고 약 한 달 정도가 흐르고 나서야 일정이 확정 났다.
약 이 주일 후에 개최할 즉위식 초대권을 읽던 난 초대장을 책상에 내려놨다.
시녀들의 도움을 받아 침의로 환복한 주인님은 창문 앞에 서서 밤공기를 맡고 있었다. 우아한 검은 머릿결이 옅게 흔들리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내 철천지원수이기도 한 흡혈귀지만, 주인님은 지나칠 정도로 아름답다. 요사스러운 외모임에도 아름다운 외형은 매번 볼 때마다 반한 듯 넋을 놓게 된다.
“카나츠미의 황제는 너무 늙었다. 왕좌를 너무 오래 지킨 게 그에겐 최악의 변수로 남았는지도 모르지.”
“재임 기간이 그렇게 오래될 수 있을지. 그분께는 메이 황태녀 말고는 자식은 없었습니까?”
주인님의 손끝에서 옅게 피어오른 빛은 하나의 반딧불처럼 밤하늘로 뾰로로 날아갔다.
어두컴컴한 허공을 외로이 날아가던 불빛은 어둠이란 입아귀에 먹혀 눈에 보이지 않게 됐다.
주인님의 곁으로 와 함께 창밖을 살폈다.
하늘은 구름이 꼈는지 달조차도 보이지 않지만, 밤거리의 불빛은 여전히 불빛이 피어올라 있다.
거리는 이제 마감 준비를 하는지 곳곳에서 구멍이 뚫리듯 불빛이 하나둘 꺼져간다. 통금시간이 되면은 가로등과 주택가의 불빛을 제하곤 전부 새까매질 테다.
“짐이 알기론 자식은 여럿 있었다.”
놀라운 사실은 아니지만, 예의상 놀란 듯 반응해줬다.
“그런데 어째서?”
“짐이 옆 국가 가정사까지 알아야 할 건 아니잖느냐?”
가볍게 미소짓는 주인님이 가까이 오라 손짓했다. 차분히 주인님의 허리를 감싸 안자 그분의 입술이 다가왔다.
기꺼워하듯 입술을 맞댔다. 잡아먹을 것처럼 입술을 깨물며 내 목을 감싼 주인님은 차분히 내 몸에 가슴을 붙였다.
진하게 키스 후에 입을 떼고 나를 향해 환하게 미소 짓는다. 심장이 뛰고 주인님의 관심을 갈구하고 싶은 충동이 앞선다.
흡혈귀만이 가지는 매혹. 인간을 홀리는 흡혈귀 특성이다. 이 특성이 아니더라도 주인님은 충분히 주변을 매혹할 수 있는 외모를 가졌지만 말이다.
마음속에서 작은 연민의 감정이 피어오르지만 난 잔혹하게 조그맣게 피어오른 감정의 싹을 짓밟아 없앴다.
넘어가지 말아라. 내 눈앞의 여성은 흡혈귀다. 그것도 흡혈귀 여왕.
내가 굴복시켜야 하는 최종 악당이란 말이다.
“이 주일 후에 카나츠미 수도로 가려면 산더미처럼 쌓인 일거리를 하루빨리 처리해야겠다.”
“이 주일간은 주어진 업무를 빡시게 진행해야겠군요.”
“쉴 틈도 없이 업무실에만 틀어박혀야지.”
내게서 벗어나 사뿐히 침대에 누운 주인님은 양팔을 머리 위로 뻗고 허리를 약간 틀었다.
유혹하는 자세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성욕에 하마터면 주체하지 못하고 덮칠 뻔했다.
주인님은 진심으로 한숨을 뱉었다.
“힘들구나. 이번에 파견시킨 수색팀도 이렇다 할 보고가 없다. 인간 군대는 흔적 하나 발견되지 않고, 카나츠미와 테르세르의 견제 때문에 이래저래 걱정이 많아 죽겠다.”
“그런 상황에서 황제 즉위식을 진행한다는 건 무리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내 말에 주인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짐도 동의하는 바다. 그러나 말했듯 황제는 너무 늙었어. 즉위식은 카나츠미의 중요한 의식과도 같으니 생략할 수는 없는 데다, 더 늦기 전에 후타츠바 메이의 얼굴을 공식적으로 널리 알려야 하니 어쩔 수 없이 진행해야겠지.”
주인님의 옆으로 함께 누워 키스했다. 연인처럼 진득하게 입술과 혀를 맛보다 부드럽게 주인님의 목으로 입술을 끌어왔다.
“흐응… 즉위식 축제는 본디 석 달은 진행된다.”
“…너무 깁니다.”
“상황도 이러하니 이번엔 한 달로 축소되지만 그러해도 한 달간 성에 왕이 없다는 것은 크게 위험하겠지. 인간 군대가 눈에 불을 켜고 어느 나라를 덮칠지도 모르는 상황에.”
문득 지하도에 숨어있는 군대를 떠올렸다. 즉위식 때문에 왕조차 없는 성을 습격하기에 가장 최적의 상황이지 않은가?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불안함에 실수로 주인님의 어깨를 지그시 깨물었다.
“피를 마시고 싶은 게냐?”
싸늘한 목소리를 듣자 더럭 겁이 났다. 급히 입을 뗐다.
“죄, 죄송합니다.”
“인간이 흡혈귀 여왕의 피를 탐하다니. 죽어 마땅하다.”
내 목을 덥석 깨문 주인님이 쭉 피를 빨아 마셨다. 목의 피가 빨려가는 느낌에 오한이 돋는다.
“으으윽.”
목 부근이 아려오고 상처 부위를 당겨오는 통증으로 파르르 팔이 떨렸다.
적당히 피를 마신 주인님의 얼굴은 단숨에 상기됐다. 천상의 음식을 맛본 듯 황홀한 표정을 짓고 다시금 키스를 나눴다.
입에서 느껴지는 비릿함. 내 피를 내가 맛보는 게 썩 좋은 기분은 아니다.
행복한 듯 주인님이 날 꽉 끌어안고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가슴이 조여오니 숨쉬기가 힘들다.
“짐이 없는 동안 섭정이 고생 좀 하겠지. 그때는 국가의 방위력을 크게 강화하고, 수색팀도 일부 복귀시킬 생각이다. 이는 카나츠미도 마찬가지의 행동을 하리라 본다.”
“저… 주인님. 그러면 이번 즉위식에서 테르세르 국가에서도 올까요?”
주인님은 내 앞섶을 풀고는 젖꼭지를 입에 물었다. 송곳니로 가슴에 상처를 내 핥아 먹다 잠시 후에 답했다.
“…오리라 본다. 다만 그 여왕은 이번조차도 얼굴을 보이지 않겠지.”
“카나츠미에서 분명 불만을 보이겠군요. 주인님은 참여하는데 테르세르에선 안 온다니….”
“흥. 그래서 안 오는 걸 테다.”
날 침대에 눕히고 주인님이 올라탔다. 스르륵, 침의가 흘러내리고 주인님의 얇은 어깨선과 풍만한 가슴 굴곡이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보였다.
꿀꺽, 침을 삼키고 아무도 볼 수 없는 귀한 장면을 감상했다.
“그러고 보니 주인님은 예전에 에이르 여왕과 붙은 적이 있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음, 그랬었지.”
“그러면 여왕이 직접 축하하러 오지 않는 이유는 역시 과거의 다툼 때문에?”
까르르, 웃은 주인님이 내 가슴 위로 푹신한 가슴을 얹었다.
“그건… 다툼이라고 하기엔, 애매하지.”
“어떻게 싸우셨기에…?”
“그냥… 음, 그때가 무슨 상황이었었지?”
기억을 되짚는지 눈동자가 위를 향한다. 입술에 힘을 주고 생각하던 주인님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에이르가 자신의 성으로 초대했던 때 같구나. 건방지게 짐을 깔보기에 뺨을 후려쳐줬다. 그때 그 여자가 눈물을 뚝뚝 흘리던 모습은 여전히 놀림거리로 남아있지.”
사실 확인을 위해 에밀리와 레베나에게 물어보니 둘은 확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진짜 그랬어. 신하들 사이에서 아직도 화제 되는 최고의 명장면이야.”
“본 적은 없어. 우리가 메이드로 들어오기도 전의 일이라서.”
에밀리를 꼭 끌어안은 레베나가 허공에 손을 휙 휘둘렀다.
“진짜 이렇게 때렸다고 하더라고. 확실한지는 모르겠는데 아마 이빨도 부러졌던가?”
“미쳤네. 다툰 게 아니라 일방적으로 팬 거잖아. 타 국가에 가서 여왕의 뺨을 후려치는 게 가능해?”
불가능한 게 기본 상식이다.
비록 상대방이 예의 따위 밥 말아 먹었다고는 하나, 우리 국가가 아닌 엄연한 상대방의 국가에서 그 여왕의 뺨을 모두가 보는 앞에서 후려쳤다는 건 말도 안 된다.
어떻게 체포되지도 않고 무사히 돌아온 걸까?
“당시엔 난리였지. 여왕님을 체포하려고 친위대가 몰려오고 이를 계기로 전쟁 선포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어. 그런데 못 했지.”
“왜?”
“에이르 여왕님이 말렸데. 본능적으로 안 거지. 체포하더라도 과정에서 일어나는 피해는 본인들이 가장 막심할 테니까.”
에밀리는 옅게 미소지었다.
“그만큼 여왕님의 강함은 상상할 수 없어. 그 강력한 테르세르 친위대도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주인님이 강하다곤 해도 하나의 군대를 홀로 대등하게 싸울 실력자란 건 어디 먼치킨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내용이었다.
괜스레 침이나 꿀떡 삼키며 주인님의 강함을 속으로 가늠해봤다. 내 위에서 엉덩이를 흔드는 주인님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문득 레베나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너도 카나츠미 국가에 간다고?”
“그래. 나도 초대받았다. 주인님이 가는 곳이면 나도 당연히 가야 하니까 흔쾌히 승낙하셨지.”
“좋겠다~. 카나츠미 국가는 문화적으로 가장 유명한 국가잖아. 카나츠미 수도 시장에 가봤어?”
등 뒤로 깍지끼고 빙그르르 돈 레베나가 마치 무언가를 집어먹는 흉내를 냈다. 풍부한 상상력 덕분인지 실제로 침을 흘리고 행동 하나하나가 생생하다.
“카나츠미에서만 만드는 음식들 먹어본 적 있어? 우리 국가에선 쉽게 접할 수 없는 감칠맛 나는 음식들과 국으로 이루어진 면하고 맛있는 부위만 꿰어서 만든 돼지 바비큐.”
“먹어본 적 있냐?”
“어릴 적에 가족 여행을 갔었어. 거기 옷들도 형형색색 재밌고 분위기도 온화해. 오락거리도 많고 축제도 매달 하나씩은 꼭 있을 정도로 즐거운 곳이야.”
얘기를 들은 에밀리도 점점 구미가 당기는지 양손을 모아쥐고 눈을 빛냈다. 에밀리가 참지 못하고 외쳤다.
“나, 나도 가보고 싶어. 난 엘 에이라 토박이라서 타 국가는 구경 한 번 못했거든.”
“후후, 분명 후회 안 할걸?”
“황위 즉위식 축제에 여왕님을 보좌할 메이드를 모집하지 않을까? 나 무조건 지원하고 싶은데.”
이번 즉위식 때 에밀리는 나라도 데려가고 싶다. 그녀는 일 처리도 뛰어나고 거기서 노예 하나 없이 지내는 건 나로선 욕구불만이니까.
떠보듯 의견을 꺼내봤다.
“내가 에밀리 데려가 달라고 주인님께 허락받으면 되지 않을까?”
“안 될걸.”
찬물을 끼얹은 레베나가 착잡하게 고개를 저었다.
“카나츠미에 가고 싶은 흡혈귀가 몇 명인데. 우리처럼 어린 메이드들은 언급도 못 할걸? 이런 건 선배님들 소유야.”
메이드들 사이에서도 짬처리란 게 존재하긴 하는구나. 역시 흡혈귀나 인간이나 지성체가 사는 곳은 죄다 똑같은 곳이다.
우울하게 축 늘어진 에밀리가 내 어깨에 기댔다. 늘어지다 못해 녹아내린다.
“그런 게 어딨어…. 본인들은 놀러 가고 우리는 성에서 뼈 빠지게 일하고.”
“너희 놀러 가려고 즉위식에 가는 게 아니지 않냐?”
“나도 카나츠미 가고 싶어….”
정말 아쉬운지 에밀리의 눈가에 눈물까지 맺혔다. 안쓰러운 마음에 그녀의 가슴을 주물러주니 레베나가 손등을 때렸다.
“아야.”
“그렇게 가고 싶으면 휴가나 낼래, 에밀리?”
레베나의 말에 솔깃했는지 에밀리가 귀를 쫑긋했다. 잠시 생각하다 다시 축 늘어졌다.
“…앞으로 인력이 모자랄 텐데 휴가나 내면 쓴소리나 듣지 않을까?”
“인력이 필요한 건 메이드가 아니라 병사들이야. 여왕님과 함께 성의 병력이 대거 빠지면 우린 성에서 청소나 빨래, 간단한 잡일만 하면 돼. 즉위식 때문에 손님도 거의 없을걸.”
“수색팀이 복귀한다던데….”
“수색팀은 즉위식에 맞춰 성에 복귀한 후, 일주일 정도 있다가 업무 보러 각 도시로 출동해. 성에는 선배들도 즉위식으로 빠져서 눈치 볼 일도 거의 없을 테고.”
허리춤에 주먹을 올리고 만족스럽게 콧김을 뿜은 레베나가 자랑스럽게 소리쳤다.
“그러니 선배님들 안 계실 때 휴가 내고 우리도 카나츠미 축제에 다녀오자고!”
“너는 어떻게 뺀질거릴 생각만 하냐.”
“가축은 닥쳐.”
아무튼, 그렇게 상황이 넘어갈 것처럼 보였다.
문제가 있다면 마침 이야기를 엿들은 메이드장이 도중 투입돼 레베나와 에밀리를 잡아가고 레베나의 눈물을 머금은 최후의 변명이 복도를 에워쌌다는 것.
조용해지자 날짜를 확인했다. 인간 군대에 보고하는 날짜는 매주 수요일이기 때문에 다음 주 수요일이 될 때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이번 즉위식에 있어서 가장 걱정인 건 역시 인간 군대지.
그들이 혹한 나머지 주인님이 없는 성을 습격해서는 안 된다. 하필이면 가장 습격하기 좋은 위치에 그들이 거주한다는 게 나로선 골치가 아플 지경.
부디 이 불안감이 그저 내 과한 걱정에서 비롯되었기를 바랄 뿐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