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화 〉 인간 군대
* * *
“그… 그 흡혈귀는….”
“그 흡혈귀는?”
“그 여자 메이드… 에밀리는….”
“이름도 알아? 아무튼, 에밀리는?”
성……. 까지 입이 벌어지다가 꿍! 아츠나의 머리를 찍었다.
“아! 왜 때려어어어─!”
“조, 조용히 해! 누가 들으면 어떡하려고 그래!”
입을 꾹 다물고 아츠나는 눈물이 찔끔 맺힌 성난 눈으로 날 노려봤다. 난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그녀의 추궁에서 도망칠 수 없다. 손목을 살피곤 과장되게 외쳤다.
“아이고! 이런 세상에! 시간이 이렇게 되었네에?”
“너 손목시계 없잖아.”
“이런! 주인님이 찾을 시간이야. 그럼 이만 가볼게, 아츠나. 우리 내일 보자꾸나, 홍홍.”
“그런 식으로 넘어갈 생각 집어치워!”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지는 아츠나를 뿌리쳤다. 하지만 아츠나는 이로 내 허벅지를 깨물면서까지 나를 붙잡았다.
“끄으아악! 이 년아! 어른에겐 어른만의 관계가 있다고!”
“나도 어른이야! 당장 말해!”
“크으윽. 안 돼! 넌 안 돼! 다른 어른 데리고 와!”
그제야 놓아준 아츠나는 바닥에 주저앉아 씩씩 숨을 몰아쉬었다. 물린 허벅지를 문지르며 구멍을 가리켰다.
“적어도 너한테는 설명 못 해. 어른을 데리고 와.”
“안 온다고….”
“왜?”
“안 온다고─!”
빼액, 소리 지르는 아츠나의 입을 틀어막았다.
손안으로 왁왁 소리지르는 아츠나의 머리를 이마로 꿍, 찍어 조용히 시켰다.
“아프…아읍─!”
“제발 부탁이니까… 너한테 설명하기 좀 그래. 다른 어른을 데리고 오면 설명할 테니까 그 주둥이 좀 진짜로 닥쳐줘!”
이토록 애걸복걸 부탁하니 분노한 아츠나마저도 조용히 해줬다.
“안 와…. 언니 오빠들은 내 말은 전혀 듣지를 않아.”
“왜 널 무시하는지 이해는 가지만… 그럼 언니 오빠들한테 나를 설명해주면 되잖아.”
“그것도 안 믿어.”
“그 정도도 안 믿으면 넌 군대에서 어떤 존재인 거야?”
볼을 부풀리고 내 시선을 피한다. 어휴, 나한테 삐지면 어쩌자고.
“그래도 어른을 데려와. 이거 말고도 말하고 싶은 게 있으니까.”
“나한테 말하면 되잖아.”
“네 말은 안 듣는다면서?”
잠시 꿍한 표정을 짓던 아츠나는 문득 한가지 생각이 떠오르는지 내게 수상한 시선을 보냈다.
“그러면 네가 오면 되잖아.”
“그럴 시간 없어.”
“그런데 너 탈출 경로를 알고 있으면서 왜 도망치지 않아?”
“그거도 설명하기 복잡한데… 결론만 말하자면 난 도망 안 칠 거야.”
더욱 아츠나의 시선이 불신으로 물들어간다.
“아, 제기랄. 어른을 데려와. 군인을!”
“안 오니까 네가 와!”
주먹을 휘둘렀지만, 서당 개 3년이면 글을 읊는다고 아츠나는 날렵하게 내 꿀밤을 피했다.
쪼르르, 구멍으로 도망간 아츠나는 엉덩이를 구멍에 밀어 넣고 상체만 내밀었다.
“…알았어. 어떻게든 데려와 볼 테니까 너도 내 제안을 고려해줘.”
“휴우, 그래. 들어줘서 고맙다.”
“내일 같은 시간에 봐.”
쏙, 사라지자마자 진이 빠졌다. 벤치에 늘어져 앉았지만, 어째선지 걱정거리는 없다.
같은 인간들이 희망을 놓지 않는다는 사실, 그리고 너무 오랜만에 인간과 열불 내면서 대화했다는 경험만으로 살아있다는 현실감이 떠오른다.
그래, 우리의 삶을 되찾을 수 있어.
검은 리무진들이 정문을 통해 밖으로 나간다. 흡사 단체 이동하는 물소들의 모습.
이번 인간 군대 사건으로 지원해 뽑은 파견팀들의 7할 이상은 죄다 수색팀이었다. 수색팀들이 빠지면 도시 외의 부대는 거의 빠진 셈이나 다름없다.
이에 대한 대처로 몇몇 흡혈귀를 수색팀에 임시 지정하여 수색 원정을 보냈으나, 역시 이전에 비해선 부실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미 인간들의 소탕은 완료된 것으로 보고되었기에 안일한 결과가 이렇게 드러난 거다.
전부 인간을 과소평가하는 흡혈귀들의 인식 때문이다.
‘그러다가 뒤통수 크게 맞지.’
인간 군대가 우리 도시 지하도에 숨어있다는 사실을 아는 나로서는 전부 부질없음을 알고 있다. 그런데 내가 그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할 이유는 없다.
창문에서 고개를 집어넣고 결재할 서류들에 갇힌 주인님을 봤다.
이런 업무는 행정팀이 처리하고 주인님께 보고해도 되지만, 이번 원정에 행정팀 일부도 출동하였다.
이번 원정 때 필요한 식자재나 식량용 노예들, 각종 보조금이나 기타 부수품 등등.
심지어 테르세르와 카나츠미 두 국가를 오가야 하니 국경방문 허가증과 통행세도 계산해 보내야 하니 쉴 날이 없다.
뜻하지 않게 주인님도 골치 아프게 되었다. 퇴근 시간이 하루하루 멀어짐에 따라 주인님의 짜증 지수도 함께 높아졌다.
거기서 다행인 건, 주인님이 나를 건드릴 시간이 없다는 소리다. 밤에 와서도 피곤해서 바로 잠드는 상황에서 난 난데없는 긴 휴가를 맞이했다.
“한원.”
“예, 주인님.”
피곤과 짜증이 곁들어진 주인님은 나를 보지도 않고 손짓했다.
“옆에 있으니 거슬린다. 나가도록 하라.”
“…예.”
기꺼이 밖으로 나가줬다. 설레는 마음으로 에밀리에게 가보았지만, 에밀리도 시간이 남아돌지 않는지 바삐 돌아다니는 모습만 보고 나왔다.
내게 이런 날이 있었던가? 멍청한 표정으로 복도나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냈다.
‘좋긴 한데, 매일 바쁘다가 갑자기 한가로우니 가만히 있질 못하겠네.’
괜스레 창문에 묻은 지문을 옷으로 쓱쓱 닦았다. 뭔가 할 일이 없을까 싶을 때,
휘익 휘익
휘파람 소리를 내고 싶은데 바람 새는 소리만 흘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휘익 휘….
“야. 한원!”
응? 나?
에밀리나 주인님 외로 나를 이름으로 부르는 흡혈귀는 없다. 긴장한 채로 돌아보니 복도 벽에 달라붙은 아츠나가 나를 향해 손짓한다.
“이, 이런 미친년! 무슨 생각으로 안에까지 들어온 거야!”
주변을 살피곤 아츠나를 데리고 청소도구 창고로 들어갔다.
밀대나 양동이, 걸레 등등 퀴퀴한 물 때 냄새가 가득한 곳이지만 여기만큼 남들 눈 속이기 좋은 곳은 없다.
냄새에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아츠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한원. 오늘 파견팀이 나가는 걸 봤어.”
“그래, 나도 봤다. 그런데?”
“대장 언니가 데려오래.”
뭐?
“하지만 난 성에서 벗어날 수 없어.”
“괜찮아. 가까운 데에 언니 오빠들이 작은 거처를 만들었어. 거기로 가자.”
어떻게? 라고 말할 새도 없었다. 아츠나가 먼저 나갔고 난 그 뒤를 따라야 했다.
한창 바쁜 성내에선 우리 모습을 포착할 한가한 흡혈귀는 없다. 아츠나는 정원 구멍을 통해 나간 후, 내게 손짓했다.
“미, 미치겠네.”
머뭇거렸지만 결국엔 구멍으로 빠져나왔다.
작은 초원 너머로 도시 건물들이 보인다. 뭔가 학원을 땡땡이치는 불안한 기분이 몸을 감싼다.
아츠나는 생쥐처럼 초원을 쪼르르 달렸다.
초원을 지나면 작은 언덕 아래에 하수도 입구가 있다. 하수도 문엔 자물쇠가 걸려있진 않았다.
여기까지 나와본 적은 없었다. 그래서 이렇게 가까이 하수도 입구가 있을 줄도 몰랐다.
“얼른 들어와.”
보기보다 악취는 나지 않는다. 아츠나가 먼저 안으로 들어가고, 나도 꺼림칙하지만, 함께 들어갔다.
어두컴컴하다. 바닥엔 얕은 웅덩이가 있고 들어갈수록 찝찝함이 몸을 감싼다. 눅눅한 공기랑 종종 하수도를 달리는 쥐들 덕분에 없던 결벽증이 생길 기분이다.
아츠나는 가까운 데에 숨겨둔 등불로 앞을 밝히면서 이동했다.
“너무 멀리 가면 돌아갈 길이 막막해. 아직이야?”
“이제 곧이야.”
쏙하고 아츠나가 갈림길로 빠졌다. 나도 그 뒤를 따라 갈림길로 움직이자,
찰칵.
익숙한 쇳소리와 함께 내 이마로 차가운 쇠가 닿았다.
이 소리. 그래, 공이치기가 당겨지는 소리다. 그렇다면 내 이마에 닿은 이것은 총구겠지.
“랍스터.”
…랍스터라고?
“랍스터. 이 새끼야.”
내 이마에 총구를 들이민 남자는 총구로 밀면서 랍스터를 내놓으라 협박했다. 하지만 랍스터를 하수도에 가지고 오겠는가?
“소고기! 소고기! 이제 총 내려놔!”
먼저 앞에 있던 아츠나가 다급히 외치며 손을 휘저었다. 그 소리와 함께 사방 곳곳에서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리고 하나둘 등불을 켰다.
하수도 길을 가로막은 바리케이트엔 군복을 입은 남녀들이 보였다. 숫자로는 스무 명 가까이 되고, 하나같이 소총을 들고 있는 상태였다.
남들은 총구를 다 내렸는데 내 이마에 권총을 겨눈 남자는 여전히 총구를 거두지 않았다.
“소고기라고! 암구어 댔잖아!”
“아츠나. 조용히 해.”
살며시 고개를 내려 군복에 수놓아진 이름표를 살폈다. ‘정세환.’
세환은 나보다 열 살 정도 많은 외형의 건장한 남자였다. 숱한 전쟁 속에서 꾸준히 살아남은 것이 보이는 날카로운 눈빛에선 불신만 찼지 신뢰는 없었다.
“너 누구냐.”
“저, 저요? 김한원인데요?”
“이름을 물었어? 너 누구냐고!”
다 얘기가 끝난 거 아냐? 떨리는 동공으로 아츠나를 살폈지만 아츠나도 나랑 같은 표정이다.
마른 침을 꿀떡 삼켰다. 뭔가 서로 간의 소통에 문제가 있는 모양이다. 아츠나 대신 내가 직접 말했다.
“여기 대장이 절 데려오라고 했습니다만.”
“대장님이?”
금시초문인지 사람들은 저마다 의문 가득한 대화를 나눴다.
방아쇠에 걸린 세환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는 게 눈에 보인다. 난 살기 위해서 다급히 외쳤다.
“그래서 아츠나가 대장의 명에 따라 절 데려왔습니다. 대장을 만나게 해주시죠.”
“저 친구 옷차림을 봐.”
군인들 사이에 누군가가 내 옷을 가리켰다. 모두의 시선이 내 예복으로 향했고, 바닥을 향했던 총구들이 한꺼번에 내게 겨눠졌다.
“빌어먹을! 귀족의 노예잖아!”
“세환! 빨리 쏴버려!”
인간들에게 귀족의 노예란 인식은 흡혈귀의 편에 붙은 인간들인 모양이다. 저마다 소리치는 외침들에 난 낭패한 심정으로 외쳤다.
“아니에요! 전 인간이라고요!”
“닥쳐! 흡혈귀 끄나풀!”
더는 내 이야기를 듣지 않겠다는 것처럼 세환이 방아쇠를 당겼다. 하지만,
탕
총알은 내 옆을 지나쳤다. 미친 새끼가! 진짜 쐈어!
그래도 나를 쏘진 않았다. 쏘지 못했다는 소리가 맞겠지.
어느새 옆에서 튀어나온 누군가가 총구를 밀어주었으니까.
“대장님….”
“들여보내.”
“흡혈귀 끄나풀입니다. 당장 죽이지 않으면 무슨 일이 생길지 장담 못 합니다.”
“내가 데려오라고 한 게 맞아.”
세환은 그제야 총을 거두었다. 나를 향한 불신의 눈초리는 여전하지만 믿기로 한 모양이다.
세환을 따라 다른 군인들도 총을 거뒀다.
“들어와.”
대장은 수로 더 깊숙이 날 데리고 들어갔다. 노려보는 군인들을 피해 대장의 뒤에 붙었다.
안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군인들이 더 많이 보인다. 수로 양옆 인도에는 침낭들과 비상식량 상자, 탄약상자, 여러 군용품이 쌓여있다.
대장은 거기서 의자 하나를 가져와 길 한가운데에 떡하니 앉았다. 나도 똑같이 의자를 가져와 바로 앞에 앉았다.
그제야 대장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가슴까지 닿는 검은 장발에 까무잡잡한 피부. 여성임에도 체격이 나보다 좋고 근육질이다.
처음엔 살 색 티를 입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자세히 보니 아니다. 이 여자는 윗도리를 벗고, 브래지어도 차지 않은 채 상체를 드러낸 상태다.
에밀리처럼 큰 가슴은 아니지만 작은 가슴도 아니다. D컵 정도로 예상되는 가슴은 머리카락으로 가려져 있었지만, 그 사이로 갈색의 젖꼭지가 슬쩍슬쩍 보였다.
이런 차림새인데 왜 아무도 신경 쓰지 않지?
눈을 어떻게 둬야 할지 몰라 대신 주변을 둘러봤다. 그리고 여기선 이런 차림새가 흔하다는 걸 알았다.
남자고 여자고 옷을 벗고 다니거나 때로는 아예 팬티 하나만 덜렁 입고 지나가는 여성도 있었다. 신기한 건 아무도 그런 차림에 지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신 노골적이게 쳐다보는 보는 남자들이 있다. 그러면 여자들이 그만 보라고 지적하거나 장난스럽게 유혹하며 낄낄 웃는다.
“사람이 너무 많이 죽어서 그래.”
내 시선의 의미를 알아챈 대장이 설명했다. 다시 시선을 대장에게 돌렸고, 대장의 몸에 난 상처들이 뒤늦게 발견됐다.
다양한 상처들인데 유독 눈에 띄는 건 전신에 새겨진 송곳니 자국들이다.
특히 송곳니는 팔, 목, 특히 가슴에 많았다.
대장은 건빵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지포 라이터로 끝을 태우며 터프하고 내숭 따위 없이 시원하게 뱉었다.
“그래서 섹스해서 자손을 많이 늘리려는 거야.”
“그게 벗고 다니는 거하고 뭔 상관이죠?”
“원할 때 바로 섹스해서 임신해야지. 왜? 너도 섹스할래?”
제기랄, 섹스 좀 그만 말해.
“아, 아뇨. 섹스하려고 온 건 아니거든요.”
“그래? 알았어.”
대장은 담배 연기를 내게 뱉었다. 고개를 틀어 연기를 피했다.
“아츠나에게 얘기 들었어요?”
“아니.”
아츠나 이 멍청한 꼬맹이가!
“아, 세상에. 그럼… 아무것도 들은 게 없는데도 절 구해준 거네요?”
“아츠나가 아무나 데려오는 애는 아니라서.”
“휴우, 그럼 제가 설명하죠. 전 성에 갇혀있는 노예입니다. 보다시피 귀족의 노예고요.”
대장은 무덤덤하게 듣다가 중얼거렸다.
“그럼 아츠나가 주장한 게 전부 사실이었군.”
“말하긴 했어요?”
“하긴 했지. 그런데 누구 하나 안 믿었어. 쟤는 좀… 가볍거든. 알지?”
알지. 그 의미를 모를 수가 없지.
“휴우. 그래요. 아무튼, 대장께서 데려오라고 한 건 아니긴 하네요.”
“음, 꼭 그런 건 아니지. 네 말이 맞으면 데려오라고 놀리긴 했었거든.”
대강 어떤 상황이 있었는지 짐작이 간다. 저 꼬맹이 말만 믿고 나섰다가 죽을 뻔했다니.
그때 아츠나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봤죠, 언니? 내 말이 맞다니까! 나 진짜로 성에 잠입했다고!”
“그래, 아츠나. 네 말이 맞네. 이리와.”
칭찬할 거라고 여긴 아츠나가 싱글벙글 가까이 왔다. 하지만 대장은 아츠나를 집어 들어 무릎에 엎드려놓더니 바지를 내렸다.
“꺄아악! 뭐해!”
“군인도 아닌 꼬맹이가 멋대로 행동하지 말랬지?”
“하, 한원이 보고 있다고!”
팬티까지 내리고 대장이 아츠나의 엉덩이를 때렸다. 파닥거리며 반항하지만, 대장의 손아귀에서 도망치질 못한다.
짝! 짝! 짝!
당해도 싸다. 얼굴을 붉히며 엉덩이를 맞던 아츠나는 총 일곱 대 정도 맞으니 훌쩍이며 얌전해졌다.
더 때리진 않고 아츠나의 엉덩이를 문지른다.
“김한원? 난 카에데. 좋을 대로 불러.”
“아, 예… 카에데. 아츠나가 군인이 아니라고요?”
“정확히는 군인 지망생. 내 심부름꾼으로 쓰고 있어.”
뭐, 반은 맞는 셈이네. 빨개진 엉덩이를 문지르며 내게서 시선을 피하는 아츠나를 지그시 노려봐 줬다.
“그래요, 대강 서로 인사는 끝냈으니 본론으로 갑시다. 카에데. 도시를 공격할 셈이죠?”
“도시랑 성이랑.”
“좋아요. 그럼 말하겠습니다. 소용없습니다. 그만두세요.”
내 말에 카에데가 왼쪽 눈살을 찌푸렸다.
“싫다면?”
“국경선에서는 그럭저럭 피해를 줄 수 있다 하더라도, 여왕이 있는 성을 공격했다간 전원 죽습니다. 타격은 주더라도 결국 인간 군대는 전멸해요.”
하지만 카에데는 비웃듯이 한쪽 입꼬리만 올렸다.
“상관없어. 우리의 죽음이 후대에게 희망으로 전해진다면 얼마든지 죽을 수 있다.”
“그런 뜻이 아니에요! 여왕의 힘은 당신들이 본 흡혈귀들하곤 차원이 달라요.”
“그럼 우리보고 퇴각하라고?”
카에데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자 의자와 아츠나가 넘어졌다.
“인간들이 흡혈귀들의 먹이로 죽어가는데 그걸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라고? 너라면 그 끔찍한 장면들을 수도 없이 봐왔을 거면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하지?”
“알아요. 하지만 저에게 한가지 계획이 있습니다. 누구도 피를 보지 않을 방법이!”
입이 바짝 마른다. 카에데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지만 그래도 내 계획을 뱉었다.
“흡혈귀들을… 여왕을 성노예로 만들 겁니다.”
하수도로 숨 막힐 정도의 침묵이 흘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