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화 〉 아, 난감하네.
* * *
인간? 도시를 터뜨린다고?
그 두 가지의 상황이 연계되면 떠오르는 건 역시 하나밖에 없다.
“인간 군대?”
“그렇다, 흡혈귀!”
인간 군대는 지금 테르세르와 카나츠미의 국경선에서의 문제인데, 어떻게 먼 거리에 있는 우리나라로 온 거지?
그나저나 군대에서 이런 어린 소녀마저도 징집하는 건가?
“후우, 잠시만 기다려. 생각 좀 하자.”
“후후후후! 겁나나 봐? 인간 군대의 병사를 눈앞에 두니까!”
아무리 봐도 뭔가 이상해. 인간 군대야 그럴 수 있다 치지만.
이런 멍청한 애가 군인일 수 있어?
“그래, 네 말이 맞다고 치자. 근데 왜 너 혼자야?”
내 의견이 핵심을 찔렀는지 소녀는 돌연 입을 닫고 눈을 부라렸다.
“넌 많이 쳐봤자 열여덟 살 정도의 소녀밖에 안 돼. 하는 행동도 부실하고 허술하고 어눌한 판단력과 근력 하나 없는 조그만 몸. 정말 군인 맞아?”
“난 성인이야!”
“그런 설정 정도는 누구나 예상했어.”
“난 군인 맞아!”
“진짜? 어디 보자. 그 옷이 군복이야?”
내가 아는 군복은 초록색의 개구리 무늬다. 그런데 소녀가 입고 있는 옷은 달랐다.
내 트렁크 팬티보다 짧아 보이는 청바지에 달라붙는 하얀색 면티. 신발은 수수한 운동화. 멜빵과 빵모자.
가벼운 외출할 때나 입을 법한 복장이 아닌가.
내 시선을 느낀 소녀는 양팔로 몸을 감쌌다. 성추행범을 보는 혐오에 찌든 눈까지 합세하자 난 내게 덮인 누명을 벗겨야 했다.
“너 같은 꼬맹이한테는 관심 없어!”
“아무튼, 군인 맞아. 이, 이건 내가 사복 군인이라서 그래!”
그딴 거짓말 잘도 속겠다.
“어휴, 그래. 우리 용맹한 군인께서 사복에 홀몸으로 적진에 침투하셨군요. 왜 오셨을까? 습격이라도 하려고?”
“…후후, 네가 아무리 날 압박해도 난 우리 계획을 설명하지 않을 거야.”
“이미 네 정체를 들킨 시점에서 계획도 다 들킨 셈이거든?”
내 한심한 시선에 발끈하는지 소녀가 양팔을 퍼덕이며 씩씩대기 시작했다.
“우, 웃기지 마! 네가 뭘 아는데?”
“척하면 척이잖아. 테르세르와 카나츠미 국경선을 이미 쑥대밭 만들어놓고 우리 도시 근처에서 발견된 거면 다음 차례는 우리나라인 거지.”
내가 살면서 이렇게 자기 속내를 드러내는 동공 떨림을 본 적이 없다. 마구 빗나가는 동공 에임을 주체못한 소녀는 내 얼굴이 아닌 내 배를 노려봤다.
“하, 하하… 하하하! 아닌데?”
“어딜 보는 거야?”
“다 틀렸어! 우리가 여기 있는 이유는… 음… 어… 여, 여기 도시에서 파는 핫도그가 맛있다는 얘기를 듣고 단체 회식하러 온 거거든?”
얼씨구.
여전히 시선은 정면만 보면서 소녀는 내 얼굴이 있는 부근을 향해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하하, …하하하! 그러니 안심하고 발이나 뻗고 잠이나 청하시지? 헛다리 흡혈귀!”
“어휴, 이런 바보를 후임으로 둔 네 선임들은 얼마나 골치 아플까.”
주먹을 치켜들자 소녀가 머리를 감싸며 눈을 감았다. 파르르 떠는 소녀에게 꿀밤 대신 이마를 밀었다.
“아!”
뭐, 아무튼 정리해보자.
상황이 어떻게 흘렀듯, 도시 어딘가에 인간 군대가 숨어있다. 그것도 뛰어난 위장실력으로 흡혈귀들의 눈을 속이면서.
그렇담 빠르게 들킬 염려는 없으니 걱정은 안 된다만, 가장 큰 걱정은 저들이 성과 도시를 습격하는 순간이다.
국경선에서의 활약으로만 보면 실력은 상당할 테다. 그렇다면 도시나 성이나 큰 타격을 입을 테다. 아마 그들은 성공하겠지.
이곳을 습격해서 뭘 얻고자 할까?
노예 해방? 성과 도시 곳곳에 노예가 잡혀있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수용소나 지하감옥 위주로 습격할 테고.
단순 피해를 주기 위해서? 이건 순수 복수심에 물든 보복행위. 그러면 국가 재정(은행 등등)이나 사람이 많은 시장 혹은 나라에서 중요한 건물(성이나 군사적 교육학교 등등)들을 노릴 테다.
여러모로 그들은 쉽게 회복 못 할 큰 타격을 줄 작정임은 틀림없다. 그게 언제인지는 몰라도 소녀가 성에 잠복하려고 한 행위를 보면 아직 탐색이 진행 중으로 예상된다.
단기간 내에 테러가 일어나진 않는다. 그게 내 추측이다.
“인간 군대는 그럼 어디에 숨어있지?”
“그걸 내가 말할 거 같아?”
“어휴! 진짜로! 군대에서는 인간 구별법도 안 가르치냐?”
뭐가? 라고 되묻는 소녀에게 일일이 설명할 시간은 없다. 정원 복도에서 흡혈귀들의 재잘거림이 들려오자 소녀의 멱살을 잡고 구멍에 밀어 넣었다.
“꺄아악!”
“닥치고 내일 이 시간에 다시 와. 그때 다시 얘기하자.”
“날 보내준다고? 대체 무슨 속셈이야?”
거슬리는 나무판자도 잔디 벽 위로 힘껏 집어 던졌다. 회양목으로 구멍을 가리며 고개를 빼꼼 내밀고 바라보는 소녀를 향해 싱긋 웃어줬다.
“난 인간이야, 멍청한 꼬마야. 내 이름은 김한원. 다음엔 오빠라고 불러라.”
“아… 하시모토. 하시모토 아츠나.”
아츠나가 떠나고 복도로 메이드들이 서로 재잘대며 지나갔다. 다행히 그녀들은 목청 좋은 아츠나의 말소리는 일절 듣지 못했다.
홧김에 아츠나에게 내일 보자고 얘기하긴 했지만, 도대체 왜 그랬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그냥… 어른을 데려오라고 말할걸….
날이 밝고 다시 저녁. 난 정원 벤치에 앉아서 회양목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 꼬맹이가 제발 내 휴식시간 안에 와야 할 텐데. 초조하게 손톱을 깨물며 기다리는데 내 옆으로 누군가가 털썩 앉았다.
아, 제기랄. 에밀리… 오늘은 안 돼. 제발…!
“한원? 여기서 뭘 해?”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안 에밀리는 가볍게 볼을 붉히며 내게 가슴을 붙였다.
그 부드러운 가슴이 싫다는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없지만 제발 지금은 아니다.
“아… 그, 잠시 생각 좀….”
“오늘 내내 표정도 안 좋고. 혹시 여왕님께 혼났어?”
“아뇨. 혼나진 않았어요. 저기… 그런데 오늘은 좀….”
하지만 에밀리는 내 앞으로 무릎을 꿇고 앉았다. 내가 그만두라고 하기도 전에 그녀는 내 바지 지퍼를 입으로 물어내렸다.
“에, 에밀리… 누가 볼 수도 있으니까 나중에 하면 안 될까요….”
“후후, 한원님. 여기 아무도 없는데 눈치 보지 마요.”
아냐… 누가 볼 수도 있어! 여전히 미동도 없는 회양목을 슬쩍 살피곤 에밀리의 어깨를 잡았다.
“에밀리. 오늘은 하고 싶은 날이….”
“기분이 안 좋으면 제가 풀어드릴게요. 뭘 할까요? 야외플레이도 좋고… 원하면 알몸 산책할까요? 짜릿할 거 같은데….”
“오오, 그거 괜찮은…게 아니라. 그런 플레이는 도대체 어디서 찾아오는 거야?”
“아, 그거 동료 메이드 중에 SM 소설을 가지고 있는 친구가 있는데….”
그거 읽고 싶군. 하지만 제~발 지금은 아니란 말이야!
좋게 말해선 넘어가지 않을 듯싶다. 나는 최후의 수단을 꺼냈다.
구둣발을 들어 에밀리의 치마 속에 넣었다. 그녀의 팬티스타킹 사이를 누르자 에밀리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에밀리. 이 발정 난 년. 네 머릿속은 온통 내 자지뿐이지?”
“하아, 네. 저는 매일매일 주인님의 자지에 시간, 장소 관계없이 매일매일 박혔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그래선 안 되지. 에밀리.”
비비적, 내 구둣발 위에서 에밀리가 허리를 요염하게 흔들었다. 구두 끝으로 에밀리의 음부가 꾹꾹 눌리며 문질러진다.
“내일까지 자위랑 섹스 금지야.”
난데없는 내 지시에 에밀리의 표정이 날벼락 맞은 꼴이 됐다.
“어, 어째서?”
“참아. 꾹 억눌러 온 그 성욕은 내일 터뜨려야지. 참을 수 있지?”
에밀리의 가슴을 주무르며 명령했다.
당장에라도 명령을 거부하고 자지를 물고 싶어 안달 난 표정이지만 꾹 참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말 잘 듣는구나. 작은 포상으로 혀를 나누며 키스했다. 섹스 대신으로 에밀리는 열정적으로 혀를 넣어 키스했다.
약속하고 돌아가는 에밀리는 미련이 계속 남는지 연신 뒤를 돌아봤다.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어주며 보내고, 안도의 한숨을 뱉었다.
돌아보니 회양목 뒤로 아츠나가 입을 벌린 채 크게 뜬 눈을 떨며 보고 있었다.
어, 어디서부터? 라고 생각하기에는 붉어진 얼굴이나 놀란 눈이 볼 건 다 봤음을 말한다.
“크, 크흠. 왔니, 아츠나?”
“아, 아아아… 미안해! 나중에 올게.”
“어딜 가, 인마. 거기 가만히 있어.”
도망가려는 아츠나의 다리를 끌어당겨 잘 보이지 않게 회양목 뒤에 잘 숨겼다.
난 그 앞에 걸터앉아 사색에 잠긴 멋진 남성을 연출하며 아츠나와 대화를 나눴다.
“…인간 군대가 지하도에 있다고?”
“아직 지하도 전체를 다 파악한 건 아니지만 우리가 갈 지역 정도는 얼추 파악 완료했지.”
그들은 예상보다 탐지능력이 월등히 뛰어났다.
사절단보다 먼저 도시에 도착하고 이주일 채 지나지 않은 시간에 그들은 은행, 군사학교, 성, 무역도로로 향하는 지하도를 전부 파악했다.
그 외로도 병사들이 출동할 경로도 파악하고 있고, 그들이 쉽게 접근 못 하게 하는 방해방법까지도.
내가 놀란 듯한 반응을 보이자 아츠나는 신난 듯 다른 계획마저도 떠들었다.
“그리고 우리는 탈출 경로도 다섯 군데나 짜놓을 정도로 세세하게 파악해놨어! 그뿐인 줄 알아? 혹시나 있을 추적에 대비해서 우리는 각종 함정과 미끼까지 이미 준비를 배치해놨고 흡혈귀들의 눈을 완벽히 속일 수 있도록 변장에도 능하다고!”
인간 군대는 긴 시간을 이날만을 꿈꾸며 복수를 다져왔다.
전문적으로 갖은 계획을 꾸민 테러 훈련과 교육을 혹독하게 마치고 신체 능력이 뛰어나고 마법마저 쓰는 흡혈귀에게서도 동등하게 대응하기 위한 교전술마저도 익힌다.
“그런데 그런 계획을 나한테 알려줘도 돼?”
“어, 어? 너 인간이잖아?”
“인간이지만 흡혈귀의 노예이기도 하지.”
그래도 인간이잖아? 식의 시선을 보내는 아츠나의 순수함에 혀를 내둘렀다.
이 아이, 역시 군인이 아니다. 군인이라기엔 너무 순수하고 흡혈귀에 대해서 무지하다.
난 내 차림새를 손으로 가리켰다. 씁쓸한 감정이 든다.
“나처럼 차려입은 노예는 귀족의 전용 노예야. 네가 보고 들은 인간 노예들보다는 좋은 대우를 받으며 살고 있지.”
“…그런데?”
“그런데라니. 대우를 받으며 사는 노예는 모든 행동을 감시당하며 살거나 아예 흡혈귀에게 복종하는 경우가 많아. 안 그러면 지하에 갇혀있는 노예들과 같은 취급이 될 테니까.”
입을 닫고 아츠나가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봤다.
“너는… 복종했어?”
“…그래야지. 나도 죽는 건 무서우니까.”
아츠나에게 내 계획은 설명하지 않았다.
실은 설명하기 어렵고 난감했다. 흡혈귀를 성노예로 만들어 인간 세상을 돌려받는단 소리가 얼마나 어이없고 우습겠는가.
하지만 난 진심이다. 나만이 지닌 달콤한 체질이라면 가능하다.
“그럼… 내 계획을 흡혈귀에게 일러다 바칠 거야?”
더럭 겁을 먹는 아츠나에게 안심하라는 듯 미소지었다.
“아니. 그래도 난 인간들 편이야. 안심해.”
“그렇구나. 다행이다.”
아츠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잠시 대화의 침묵이 흘렀다. 나도 복잡한 생각들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침묵을 즐기던 중, 아츠나가 회양목 뒤에서 고개만 내밀어 나를 봤다. 얼굴을 마주 바라보는데 아츠나가 볼을 붉혔다.
“그럼 아까 그건 뭔데?”
“뭐가?”
“모르는 척 마! 아까 너 흡혈귀를… 여자 흡혈귀를 대하는 행동은… 전혀 노예가 아니었단 말이야.”
아, 드디어 이 질문인가? 어디부터 어떻게 설명할지 몰라 은근슬쩍 넘기려 했는데 역시 아츠나는 그 주제를 가져와 내 얼굴에 들이밀었다.
부끄럽기도 하고 설명하기 난감해서 나도 볼을 붉혔다.
한 손으로 아츠나를 향한 시야를 가리고 우물쭈물 입가만 벙긋거리니 아츠나가 내 허리를 쿡 찔렀다.
“도대체 뭐냐고! 너 인간은 맞는데 흡혈귀를 그… 노, 노예처럼 다루고! 진짜 정체가 뭐야?”
“그, 그게 말이다…. 그 혹시 너 어른 데려오면 안 될까?”
“설명해!”
아, 어떡하지? 그냥 솔직하게 말해버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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