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화 〉 네가 누구라고?
* * *
“진님도 이제 가십니까?”
“테르세르도 돌아갔고, 별문제가 없어 보이니 돌아가야지.”
테르세르가 떠나자마자 진도 떠날 채비를 했다. 카나츠미 사절단들도 준비하는 모습을 살피며 아쉬운 마음을 삼켰다.
“흡혈귀하고 이토록 친해진 건 처음이었습니다.”
내 말에 진이 의아한 듯 눈썹을 들었다. 그러다 피식 웃으며 내 가슴을 주먹으로 툭 쳤다.
“나도 니아 말고는 이렇게 친해진 가축은 처음이다.”
“그러면 저도 니아처럼 가축이 아니라 이름으로 불러주면 안 됩니까?”
“응? 생각해볼게.”
모든 짐을 리무진 짐칸에 채우고 나서 진이 뒷좌석을 열었다. 미리 탑승해 있던 니아가 옆 좌석에 보였다.
진은 우아하게 차량에 탑승했다. 창문이 내려가고 진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 황태녀님 황위 즉위식 때 보자.”
“…저도 초대할 겁니까?”
“여왕 폐하께 건의 드려볼 거야. 그러니 그때 잘 부탁한다.”
진은 동그랗게 만 손가락 안으로 검지를 쑥 넣으며 얄궂게 웃었다.
“황태녀님 애널 실컷 쑤셔봐.”
“아…! 시끄럽고 얼른 가요!”
“하하핫!”
차량이 출발하고 진이 손을 흔들었다. 옆에 있던 니아도 손을 흔들자 나도 손을 흔들어주었다.
한바탕 몰고 간 폭풍이 멎은 기분이다. 다시 평화가 찾아온 성으로 들어갔다.
<2/>
잔잔한 일상이 찾아올 거라 여겼다.
다시 주인님의 노예로서 하루하루 잠자리와 더불어 혈액을 제공하고, 또한 나도 에밀리를 통해 성욕을 푸는 일상.
하지만 폭풍이 지나가니 다른 폭풍이 몰아쳤다.
“비켜, 가축.”
“억!”
에밀리와 소소한 대화나 나누던 와중에 난데없이 등을 가격당했다.
악의가 고스란히 묻어나는 어깨빵으로 에밀리의 부드러운 가슴을 얼굴로 느껴볼 수 있었지만, 짜증은 별개의 문제다.
어림짐작해 열 명 정도의 흡혈귀들이 지나쳤다.
하나같이 검은 정장을 빼입은 그들은 눈길 하나 주지 않고 업무실로 사라졌다.
구멍으로 들어가는 일사불란한 개미들의 모습처럼 원활한 그들의 교통에서 유일한 피해자는 나 혼자였다.
“어휴, 내 팔자야.”
좀 더 에밀리의 가슴에 묻히고 싶었지만 일어나라 재촉하는 에밀리의 등쌀에 못 이겨 일어섰다.
“이번에 복귀했나 보네.”
같은 흡혈귀여서인지 에밀리는 단번에 그들의 정체를 알아봤다. 뒤늦게서야 나도 그들의 정체를 떠올렸다.
“수색 전문 팀이죠? 저 흡혈귀들이 인간 사냥에 도가 튼 전문가들이고.”
“응.”
기억난다. 3년 전의 그 사건이.
일명 수색 전문 팀이라 불리는 팀과 주인님이 함께 합세해 마지막 정착지를 습격했었지.
“아직 복귀 날짜가 아니지 않나요?”
“이번에 사절단이 온 이유 때문이지 않을까? 인간 군대 때문에.”
그렇다면 주인님은 수색 전문 팀에서 지원 인원을 모집한 후, 파견을 보내겠다는 건데.
‘기분 나쁜 놈들.’
나 같은 피해자가 더 생긴다는 생각이 들자 흡혈귀 혐오감이 가슴속에서 피어오른다.
다행인 건 그들이 우리나라에선 날뛰지 않는다는 사실.
피바람이 주변에 불지 않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난 안심했다.
“에이르의 요구는 짐의 원정이었지.”
정원을 거닐던 주인님의 말에 내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떻게 그런 요구를 할 수 있죠? 엘 에이라가 테르세르의 명령을 받는 소국도 아닐 텐데.”
“본인들은 그렇게 믿고 싶은 게다. 그러니 씨알도 안 먹히는 요청이나 들고 와 짐에게 욕이나 먹었었단다.”
아무튼, 인간 군대의 소탕 작전에 지원 요청이 아닌 여왕을 요청하다니.
물론 주인님이 역대 최강의 흡혈귀라는 낯간지러운 수식어가 붙어있기에 도움을 요청하겠지만, 그래도 한 나라의 여왕을 멋대로 부르는 건 상식 머리가 없다는 소리다.
“괘씸하다고 생각 안 드십니까?”
“괘씸하고 몰상식한 놈들이지만 원래 그런 놈들이라서 크게 화는 안 나는구나.”
본인들을 대국이라 생각하며 주변 나라마다 횡포를 놓는 테르세르의 행위는 이미 대륙 전체에 널리 알려진 상태다.
어린아이, 노인 할 거 없이 테르세르의 개념 없는 행동에 경멸하고 비난을 일삼는데 테르세르 국가를 앞두고 입 하나 벙긋할 용기 있는 인물은 없었다.
그만큼 테르세르가 대륙을 지배하는 네 국가 중 높은 군사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런 그들에게 어느 누가 욕을 하겠는가?
유일하게 주인님을 제외하고 말이다.
“그러해도 인간 군대로 인한 피해가 보기보다 심각하다는 이야기가 있기에 이번에 지원팀을 보내기로 했다.”
“그럼 우리나라의 수색팀은 한동안 정지입니까?”
“더 이상의 인간 정착지는 없고, 소수의 수색팀만 남겨 놓겠지.”
그래, 얼마 전에 마지막 정착지도 없앴다고 했으니 수색팀의 일거리가 줄어들긴 했다. 그러니 지원팀에 수색팀이 출동하는 거다.
인간 군대라.
내가 노예가 되기 전에는 군대는커녕 대항해보겠다는 모임 하나 없었다.
모두 자신의 상황에 낙담하고 한탄하고 개중에는 왜 자신은 흡혈귀로 태어나지 않았는지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곤 했다.
그렇게 부정적인 생각만 가지며 구차하게 살아남다가 죽거나 노예로 잡혀간 이들을 너무 많이 봤다.
자신이 살아보겠다고 흡혈귀에게 인간 정착지에 대한 정보를 팔아넘기는 인간도 있었다.
그런 인간들만 남은 세상에서 돌연 인간 군대의 등장이란 건 처음엔 당연히 믿기 어려웠다.
작은 희망의 불씨인가. 자유를 갈망하는 인간들의 희망만이 모여 만든 군대라.
응원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과연 그들이 흡혈귀를 상대로 승리할 수나 있을까?
주인님과 함께 정원을 산책하다 보니 나만의 탈출 경로로 들어섰음을 알았다.
정원을 둘러싼 잔디 벽. 성에서 유일한 허술한 벽이면서 잔디 벽을 넘으면 바로 도시를 마주할 수 있는 곳이다.
그런 잔디 벽의 구석에는 성인 남성 한 명이 드나들 수 있는 작은 구멍이 존재한다.
탈출할 생각은 없지만, 혹시나 모를 상황에 대비해 구멍을 가릴 수 있도록 앞에다가 풍성한 회양목을 심어두었었다.
그런데, 어째서.
회양목은 어디 가고 허술한 판자 하나가 기대어져 있지?
다행히도 주인님은 눈치채지 못했다. 우아한 걸음으로 정원을 지날 뿐, 주변 장식들엔 일절 관심이 없었다.
그래도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난 어떻게든 여길 벗어날 이유를 떠올렸다.
“주인님. 슬슬 날씨가 추워집니다.”
“흡혈귀들은 추위에 저항력이 있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
“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의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감히 말씀드려 보았습니다.”
주인님은 역시 의아하게 날 쳐다봤다. 난 수상하지 않도록 무례하지 않게 해맑게 웃었다.
“그래…. 알겠다. 이만 들어가 보도록 하자.”
내 연기 실력 하나는 일품이다. 주인님은 큰 의심 없이 내게서 시선을 거두고 성으로 향했다.
뒤를 따라가며 난 허술한 나무판자 때문에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저녁 식사를 마치면 내게 짧은 휴식시간이 주어진다.
이 시간이라면 에밀리에게 달려가 그녀와 섹스를 하거나 하염없이 성 이곳저곳을 떠돌며 시간을 낭비할 텐데.
난 식사로 주어진 스프와 빵을 비우자마자 곧바로 정원을 향해 달렸다.
천만다행으로 정원을 떠도는 흡혈귀는 없고 구멍을 가린 나무판자도 그대로였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도대체 뭐야? 이게 왜 여깄어?”
나무판자를 슬며시 들어 올려보니 구멍은 그대로였다. 누가 구멍을 발견하고서 임시방편으로 세워둔 나무판자는 아니란 소리다.
이 구멍은 나만 아는 유일한 통로 중의 하나다. 그만큼 흡혈귀들에게서 꼼꼼히 숨겨져 있고 들킬 염려는 거의 없다는 의미다.
그러면 나 말고도 누가 이 통로를 이용하는 거란 소린데.
그런데 어떤 멍청한 놈이 기껏 가려둔 멀쩡한 회양목을 자르고 누가 봐도 허술함의 극치를 달리는 나무판자를 세워둔 거야?
나무판자를 노려보며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어느 멍청한 놈이 저지른 광경에 무한한 증오를 쏘아 보냈다.
“아무튼 누가?”
흡혈귀가 이런 곳을 드나들까? 그럴 리가 없다. 멀쩡한 정문이 있는데 왜 이런 비좁은 구석진 비밀 개구멍을 드나들겠는가.
누군가에게 들키지 않고 성에 침입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정황상 이 조건이 지금 상황에 가장 부합한다.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도대체 어떤 흡혈귀가 이런 곳을 드나드냔 말이다.
그것도 허술한 나무판자를 대신 세워두고!
‘젠장, 진짜 누군지 잡히기만 해봐라! 여자면은 조교 하고 남자면은 봐주마.’
남자 흡혈귀를 조교 할 수는 없잖은가. 눈물 삼키고 포기해야지.
일단 구멍을 가릴 적당한 물건을 가져와야겠다.
누가 볼세라 조심조심 주변을 살폈다. 최대한 정원을 벗어나지 않고 떠돌며 구멍을 가릴만한 물건을 찾기 시작했다.
이따금 정원 주변을 떠들며 지나가는 흡혈귀가 있을 땐 아무렇지 않은 척 정원을 감상하는 척했다.
그러다 내가 발견한 것은.
“…여기 있네?”
놀랍게도 내가 심어두었던 회양목이었다.
아무렇게나 버려둔 건 아닌지 회양목들 사이에 끼어있었다.
한숨을 삼키고 회양목을 집어 들어 절단면을 봤다.
‘…칼로 잘랐는데?’
흡혈귀들의 손톱은 사람 목을 단숨에 자를 정도로 날카롭고 단단한 무기다. 흡혈귀들은 종종 끈을 자르거나 불필요한 걸 제거할 때 손톱을 사용한다.
회양목도 손톱으로 자른 줄 알았는데 회양목의 절단면은 칼로 자른 자국이 남았다. 심지어 자르는데 힘들었는지 칼자국이 엉성하게 남아있다.
‘흡혈귀가 손톱을 놔두고 칼을 쓴다고?’
그것도 단검 정도의 칼로 말이다.
아무리 보아도 수상한 점이 한두 개가 아니다. 허술한 면이며 흡혈귀답지 않은 흔적들.
단순한 추측에 불과하지만 혹시… 이 흔적들은….
‘인간?’
인간이 있을 수가 없다. 정착지를 모조리 소탕했고 심지어 이곳은 흡혈귀들이 거주하는 도심 속이다. 심지어 이곳은 성의 정원이고!
일단 회양목을 들고 다시 구멍으로 돌아왔다.
범인을 색출하는 건 먼저 나중으로 미루고, 지금은 여기를 가리는 게 우선이다.
구멍으로 돌아와 나무판자를 가리려는데,
“휴우, 오늘도 역시 안 들켰구나.”
조그만 인영(人?)이 나무판자로 구멍을 가리고 있었다.
이 이상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기로 정했다. 회양목을 든 채로 멍청하게 눈앞의 사람, 그러니까 나보다 어려 보이는 소녀를 내려다봤다.
소녀는 내가 바로 뒤에 서 있는 걸 눈치채지 못했는지 자신이 둔 것으로 짐작(거의 확신)되는 나무판자를 바라보며 뿌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거 봐. 언니 오빠들은 나를 못 믿었지? 그런데 지금 성에 드나드는 사람이 누구야? 나야!”
뭐가 그렇게 자랑스러운지 목청을 높이며 중얼거린다. 어떻게 봐도 이 멍청한 소녀의 엉덩이를 보란 듯이 걷어찼다.
퍽!
“꺄아악!”
어찌나 놀랐는지 제자리에서 펄쩍 뛰며 소리를 지른다.
이 멍청한 도둑 꼬맹이는 돌아보지도 않고 뻔뻔하게 나무판자를 치우더니 구멍으로 도망치려 했다.
도대체 얜 누구야? 소녀의 바지춤을 잡고 확 끌어당겼다.
당겨진 바지는 어찌나 헐렁했던지 확 벗겨졌다. 흰 팬티가 드러나자 다리를 휘둘러 소소하게 반항했다.
“작작하고 나와, 이 년아.”
엉덩이를 짝! 내리치자 움직임이 멈췄지만, 오히려 강하게 발을 휘둘렀다.
“우아앗!”
머리 위를 스치는 발을 피하고 하는 수 없이 소녀의 다리를 끌어당겼다.
“흐갸아악!”
끌어 당겨진 소녀는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탈출은 포기했는지 잔디 벽까지 기어가 등을 기대고 나를 무슨 범죄자 보듯이 봤다.
“야. 너 뭐야?”
“저, 저리 가! 나한텐 백만 대군의 언니 오빠가 있다고!”
얜 또 뭐래?
“그럼 난 백만 대군의 노예를 둘 사람이겠다. 너 뭐야? 누구야?”
“흥! 설마 말할까 보냐?”
그럼 말하게 해줘야지. 꿀밤 한 대를 먹였다.
꿍!
“아파!”
“아프라고 때린 거야. 너 도시에 사는 애야? 여긴 애들이 오고 싶다고 올 수 있는 데가 아니야.”
“흥! 도심?”
소녀는 나름 매섭게 눈을 치떴다. 내 눈에는 그저 똘망똘망 귀엽게 눈을 뜬 거에 불과했지만.
“내가 흡혈귀로 보이나 보지?”
“…뭐?”
“그래! 난 인간이다! 함부로 건드렸다간 여기 도시도 우리 언니 오빠들이 터뜨려버릴 수 있어! 당장 날 놔줘, 이 흡혈귀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