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화 〉 내가 이상한 건가
* * *
“아니 이 귀한 계약서를 꼬깃꼬깃….”
“구긴다고 해서 계약 효력이 무효가 되는 것도 아니잖아?”
난감하지만 그건 나중으로 하자.
“왜 하필 저죠?”
“말했잖아. 넌 정신이 혼미한 달콤한 냄새를 가지고 있어. 처음 네 냄새를 맡았을 때, 그리고 여왕 폐하가 널 애지중지하는 모습. 그때 확신했지. 네 존재 자체가 얼마나 희귀하고 귀한지.”
진의 손가락이 내 가슴팍을 눌렀다.
“현재 황태녀님은 황제 폐하의 옥좌를 계승 받으실 준비에 한창이시다. 하지만 천성적으로 마음이 여리고 소심한 황태녀님은 옥좌는 물론 황태녀라는 자리 자체에도 부담감을 느껴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셔.”
그런가, 그러고 보니 예전 회의에서 진의 국가, 카나츠미 국가에서 황위 계승 얘기가 오갔던 기억이 난다.
“그래도 황태녀님의 도움이 되어주는 것이 그분의 오랜 수행원으로서 도리지 않겠어?”
“근데 절 노예로 데려가겠다는 거랑 무슨 연관이 있죠?”
“너 정도의 달콤함이라면 황태녀님도 만족하고 좋아하시겠지.”
쉽게 설명하자면 요새 스트레스로 이만저만이 아닌 황태녀를 위해 스트레스라도 해소하라고 나를 선물하겠다는 소리다.
“그리고 걱정하지 마라. 황태녀님은 보기 드문 착한 심성을 타고난 분이셔서 널 괴롭히지도, 화내지도 않으신다. 오히려 널 충분히 대우해주실걸?”
잠시 입을 다물고 고민했다. 진이 제시한 계약서는 이름만 노예계약서이지, 복지는 절대 어디서도 볼 수 없이 귀하다.
이런 기회는 드물게 오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오지 않는다. 이건 어쩜 기회일까?
물론 여기도 나쁘지 않은 대우를 받는다. 여기 흡혈귀들이 내게 잘 대해주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당장 지하감옥에 갇혀있는 인간 노예들만 떠올려도 내가 어떤 대우를 받는지 알 수 있다.
탐나지. 누가 이 기회를 날리고 싶겠어?
하지만 안 된다. 내 계획은 그곳이 아니다.
“저에겐 천운이 따라주는 기회이지만, 정중히 거절하겠습니다.”
예의 있게 계약서를 돌려줬다. 예상치 못한 거절에 진의 눈동자가 커졌다.
“분명 여기로 간다면 훨씬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겠으나, 그러해도 이곳 생활에 익숙해져 있는 저로서는 꺼려지는군요. 죄송합니다.”
“그게 네 대답인가? 아쉽긴 하군.”
계약서를 다시 꼬깃꼬깃 접어 주머니에 넣은 진은 아쉬운 기색을 역력히 드러냈다. 그래도 깔끔하게 포기할 줄도 아는….
“그래도 너 정도 되는 가축을 포기하기엔 넌 너무 귀해.”
포기하긴 염병.
뒷걸음질로 물러났지만, 진은 피식 웃기만 했다.
“그렇다고 널 납치하거나 할 생각은 없어. 라니아 여왕 폐하와 전쟁이라도 벌이지 않는 이상은.”
“무슨 속셈이죠?”
“속셈? 오해하지 마. 그런 거 없어. 진짜야.”
히죽 웃은 진은 가볍게 내 어깨를 두들겼다.
“이게 안 된다면 여왕 폐하께 직접 건의라도 드려볼 생각이다. 정 안된다면 널 며칠만이라도 대여하는 걸 생각해봐야지.”
“그렇게 까지요?”
“그럴 가치가 충분하니까.”
말을 마친 진은 이어 다른 용건을 꺼냈다.
“그리고 목적은 이게 아니지. 지하감옥이 어디인지 아나?”
“감옥은 무슨 용건이시죠?”
“이곳에 지내는 동안 인간 노예를 먹어도 된다는 여왕 폐하의 허락이 있었거든. 그래서 라미에르를 찾고 있어. 그놈은 적당히를 몰라서 저번처럼 노예들을 싹쓸이할 수 있거든.”
라미에르의 이름이 나오는 순간 다리가 휘청거릴 정도의 두려움이 다가왔다.
“지하감옥은 1층 복도 맨 끝으로 가면…”
“데려가 주겠나? 걱정은 마, 그놈이 지랄하면 도와줄 테니까.”
턱이 떨릴 정도로 두려웠지만 그래도 진을 믿어보기로 했다.
지하로 향하는 문을 열었을 때였다.
꺄아아아─
계단 아래에서 여성의 비명이 메아리쳤다. 놀란 건 나뿐만이 아니라 진도 함께였다.
“라미에르 놈이 또 뭔 짓을 하고 있을 수 있어. 얼른 가자.”
진이 먼저 앞장서서 내려갔고, 나와 니아는 그 뒤를 조심스럽게 뒤따랐다.
지하감옥은 역시나 진이 염려한 상황이 펼쳐져 있었다.
“그만 먹으라고요!”
“아가리 닥쳐! 너네 여왕 폐하가 허락했다고!”
역시나가 역시나다. 그는 자신에게 화를 내는 호위팀 흡혈귀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욕구를 마구잡이로 부풀리고 있었다.
감옥 안에 멋대로 들어간 라미에르의 주변에는 이미 시체가 잔뜩 쌓여있었다.
피를 모조리 빼앗겨 미라처럼 변한 시체나 머리가 잘린 시체, 다리가 잘려 벽에 매달린 시체, 아니면 상체나 혹은 하체가 날아간 시체 등등.
흡혈을 당하고 살아남은 인간은 바다에 엎어져 꿈틀대고 있었다.
라미에르는 시체들의 위에 서서 한 여성을 자신의 고간에 끼운 채였다.
한 손으로 여성을 지탱하며 나로선 흉내 낼 수 없는 거친 피스톤 질을 하고, 다른 손으론 비명을 지르는 다른 여성의 머리채를 쥐고 있다.
“제기랄! 계속 이렇게 군다면 당신을 고발할 수밖에 없습니다!”
“고발해? 나를?”
호위 흡혈귀의 말에도 라미에르는 코웃음을 치며 머리채를 쥔 여성을 호위팀에게 집어 던졌다.
호위팀은 일사불란하게 피했고 여성은 바닥을 구르다 머리를 잘못 찧었는지 미동도 없이 축 늘어졌다.
그 광경은 나나 니아에겐 참을 수 없는 충격으로 다가왔다. 니아는 참지 못해 계단 위로 도망쳤고, 나는 피어오르는 각종 혐오감에 치를 떨었다.
“테르세르 국가의 사절단을 고발하겠다고? 해봐! 개자식아.”
이죽대며 라미에르가 거친 마무리로 허리를 박았다. 그 힘이 어마어마해서 허리에 박힌 여성은 비명이나 신음 하나 못 지르고 숨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숨넘어가다 기절하듯 눈이 뒤집히자 라미에르는 그 여성마저 던져버렸다. 철창에 부딪혀 떨어진 여성은 음부에서 피와 정액을 흘리고 구멍은 쉽게 닫히질 못했다.
“우리나라였다면 어떤 누구도 나한테 이따위 언성 하나 못 높였어.”
알몸이었지만 오히려 갑옷 같은 근육 덕분에 더 거대해 보이는 라미에르는 거친 걸음으로 다가왔다. 호위팀의 여성 흡혈귀는 라미에르의 남근을 보자 도리어 겁을 먹었다.
라미에르는 도대체 뭔 짓을 한 건지 자지가 상상을 초월하는 크기를 보였다. 이 정도의 크기는 쾌락의 범위를 넘어서 고통을 주는, 비유가 아닌 진짜 흉기였다.
거기에 더해서 그 흉기에다가 온갖 보형물을 박아 넣은 탓에 그 형태는 이미 끔찍한 수준을 달렸다.
“아니면 너도 한 번 맛봐볼래? 인간들은 내 물건을 단 조금도 감당 못 해. 같은 흡혈귀만이 내 자지를 버틸 수 있더라고. 어때?”
“이런 무례한 짓들… 하나도 남김없이 고발하겠습니다.”
“흐흐흐. 그래도 섹스기술로는 누구한테도 뒤지지 않는다고.”
껄떡대며 움직이는 남근에 성욕을 느끼는 여성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 겁을 먹거나 혐오감을 느낄 뿐이지.
이 모든 걸 지켜본 진은 정말 혐오감에 비틀어지는 표정으로 다가갔다.
“그 역겨운 좆이나 집어넣고 꺼지시지, 라디에이터?”
진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라미에르의 이마로 힘줄이 새겨졌다. 라미에르의 자지는 흥분감이 줄어들고 음경이 쪼그라들었다.
하지만 크기의 위엄은 좀체 사라지질 않는다.
“네놈도 먹으러 왔냐? 아직 많이 남았으니 아가리 닫고, 볼일이나 보지?”
“볼일? 다른 노예한텐 관심 없어. 네 좆이 또 기분 나쁘게 정액이나 싸질러 다니면 그 위를 밟고 지나가는 게 좆같을 뿐이거든.”
“하하! 정액 싸지르면 그 정액이나 핥아 먹고 짜져있어, 진. 아니면 갓난아기 때부터 그토록 아끼고 보살피던 황태녀의 보지나 빨러 가던가.”
다시 맞붙어 싸울 기세를 드러내니 지하감옥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진이나 라미에르의 뒤에서 호위팀들이 싸움이 벌어질 것에 대비해 각자의 무기를 들고 대기했다.
이를 악문 진이 단호히 경고했다.
“한 번만 더 내 주군을 모욕하면 그땐 사절단이고 뭐고 진짜 피 보는 수 있어.”
“흐흐, 황태녀를 모욕하니까 드디어 이를 드러내는군. 그게 싫으면 네 노예는 어때? 그 조그마한 년의 보지는 내 좆을 못 견디니까 후장에다가 박아줄까?”
그 말을 기점으로 검을 뽑은 진이 라미에르의 목을 벴다. 하지만 라미에르는 상체를 뒤로 당겨 공격을 피했다.
결국에 벌어진 싸움에 호위팀이 달려들고, 그보다 먼저 더 깊숙한 안쪽에서 고함이 터졌다.
“다 동작 그만!”
그 목청이 어찌나 쩌렁쩌렁한지, 진도 호위팀도 대응을 못 하고 멈춰섰다.
감옥 더 안쪽에서 얌전히 인간의 피를 빨던 시미르였다. 그녀가 오더니 진을 향해 경고했다.
“앞선 경고는 라미에르의 잘못도 있으니 눈 감아드리도록 하죠, 진. 검을 넣으세요.”
“시미르. 당신은 자기 후임 하나 관리 못 합니까? 여기 와서 이 자가 저지른 만행만 도대체 몇 번입니까. 당신의 군주는 라미에르를 보내서 전쟁이라도 일으킬 속셈입니까?”
시미르를 향해 진도 거침없이 불만을 드러냈다. 하지만 시미르는 진을 무시하고 라미에르를 향해 비난을 퍼부었다.
“라미에르. 너도 그만둬라. 좆이나 휘두르라고 에이르 폐하께서 널 보낸 줄 아느냐?”
“…큭큭. 죄송합니다, 시미르님.”
사과하지만 라미에르는 여전히 그 이죽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진을 향해 도발하듯 웃어준 라미에르는 자신의 옷을 보따리에 집어넣었다.
“아직 쌓여있지만, 이 정도로 만족하지. 그만 가도록 하겠습니다, 시미르님.”
흥얼거리며 진을 지나친 라미에르는 입구에 말뚝처럼 박혀있는 나를 발견했다.
쿡쿡, 웃으며 전혀 달갑지 않은 인사를 건넨다.
“안녕, 가축?”
“….”
“뭘 그렇게 겁먹어? 저번처럼 또 물어버릴까 봐 겁나냐?”
내 도움을 구하는 시선에 진이 나섰다.
“그 가축에게 손대지 말고 얼른 꺼지시지.”
“예, 예. 이제 남의 나라 노예마저도 지키려 드는 백마 탄 기사님. 나 같은 악당은 그만 가보겠습니다요.”
손을 휘저으며 라미에르는 알몸으로 감옥을 벗어났다.
한바탕 소란이 잦아들자 호위팀들은 바닥에 널브러진 광경들에 한숨을 삼켰다.
분노가 삭이지 않는지 진의 잘생긴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지켜보던 시미르가 한숨을 내쉬었다.
“라미에르의 무례는 사과하죠, 진.”
“사과 말입니까? 저놈이 내 주군을 욕할 때 제가 얼마나 참고 있었는지 짐작 갑니까?”
시미르는 표정에 일말의 동요도 없었다.
“그래도 참으셔야죠. 저희가 왜 사절단으로 왔는지 아시잖습니까.”
“가축들의 군대? 큭, 카나츠미와 테르세르 국경선에 등장한 그 가축 군대 말입니까?”
진은 들고 있던 검을 휘둘러 털어내고 절도있게 검집에 넣었다.
“시간문제일 뿐입니다. 오히려 황제 폐하께서 그 문제를 심각하게 여기시는 게 저로선 아이러니할 뿐이죠. 당신도 그렇지 않습니까? 에이르 폐하도 이런 문제 그저 콧방귀를 뀌실 텐데.”
“저희는 심각함을 인지하고 있습니다. 함께 사절단으로 파견 온 것만 봐도 아시잖습니까?”
시미르는 계단을 올라 사라졌다. 분노를 죽이고자 진은 이마를 짚은 채 한동안 서 있었다. 잠시 후에 고개를 돌리곤 내 어깨를 두드렸다.
“봤지? 라미에르는 저런 놈이야. 위아래 없고, 예의도 없지. 테르세르 국가의 흡혈귀들은 거의 다 저래.”
“시미르님은… 다르지 않았나요?”
“…아니. 시미르도 그와 똑같아. 단지 표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한숨을 적잖게 내쉰 진은 나를 데리고 감옥에서 나왔다. 감옥 입구에서 파리한 얼굴로 기다리던 니아가 우리를 보자 울 듯한 얼굴로 다가왔다.
“그래서 황태녀님이 걱정이야.”
진의 말에 난 예의상 물었다.
“왜죠?”
“황제 폐하는 이제 은퇴를 고려하실 만큼 노쇠하셨어. 의사들의 말로는 아마 올해 안에 서거하실 수 있다고 하더군.”
“아….”
“그럼 황좌를 황태녀님이 계승하실 텐데, 감히 내가 평가하는 게 어리석지만, 너무 여리셔. 노력은 하시는데 테르세르 국가의 집요한 참견을 감당하시기엔 무리가 있으시거든.”
진의 턱에 힘이 들어간 게 보였다.
“그래서 너라도 데려가서 황태녀님을 위로해주고 싶은 거였어. 너라면 아마 걱정거리를 뒤로하고 즐기시지 않을까 해서. 겸사겸사 자신감도 얻으면 좋고.”
잠깐만. 가만히 듣고 있자니 이 얘기 단순한 흡혈에만 관련된 게 아닌데?
“잠깐만요, 진님. 듣다 보니 제가 의문이 생기는데, 혹시 저를 황태녀님께 데려가는 게 단순 흡혈 목적이 아닌 겁니까?”
내 의문에 진은 그럼 뭘 생각했냐는 표정을 지었다.
“…너 제법 눈치 없구나.”
“아니, 방금 얘기를 들었을 때도 그렇고… 저를 지금 황태녀님의 밤 상대로 선물하겠단 소리인데, 그렇게 아껴 마지않는 황태녀님께 섹스를 목적으로 저를 선물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모순인지 알아요?”
내 얘기에 니아의 얼굴이 빠르게 달아올랐다. 진은 그저 미소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황태녀님의 호위 무사거든? 매일 밤 그분의 침실 앞을 지키는 일을 하는데, 그분이 밤마다 자위하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너를 선물하는 게 이상하진 않잖아?”
“이 양반 프라이버시를 어디다 팔아먹은… 아니, 그래도 돼요?”
잠깐. 아주 잠깐 생각한 진은 동그랗게 만 손가락 안으로 자신의 손가락을 밀어 넣으며 말했다.
“그래도 처녀는 지키고 계시거든? 애널로만 해라.”
내 성적 개념이 이상한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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