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화 〉 평소에는 노예 하지만 침대 위는...
* * *
3년 전, 내가 이렇게 되리란 걸 알았을지.
보름달이 떠오른 밤은 그들의 왕국이었다. 인간들은 먹이가 되지 않기 위해 도망쳐야 하는 노예였다.
나도 남들과 같은 도망자 신세다. 어머니 품에 안겨있을 갓난아기 시절부터 너무 많은 지역을 거쳐 다녔다.
어머니나 아버지 두 분 모두 먹이가 되었을 때의 나는 간신히 성인이었다.
스무 살을 기념하고자 나를 위해 목을 메달 나무를 정했다. 하지만 역시 죽는 건 무섭기에 나무를 전기톱으로 잘라버렸다.
그렇게 구차하게 살아남아 3년 전.
최후의 정착지마저도 뱀파이어들에게 들키고 말았다. 이마저도 살기 위해 달아나는 사람들 틈에서 나는 죽음을 마주하기로 했다.
하지만,
“찾았다─!”
그것을 내가 죽기 전 마지막 눈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야릇하게 휘어지는 붉은 눈동자는 나를 내려다보며 초승달처럼 휘었다.
가슴께가 드러나는 우아한 원피스. 여우로 생각되는 동물의 모피 외투를 걸치고 늘어뜨린 푸른 기가 감도는 흑발은 아름다움을 더했다.
요사스럽기도 하지만 우아함이 강하게 묻어나는 그녀의 아름다운 이목구비는 묘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보름달을 등지고 무너진 철골 위에 서서 오만하게 내려다보는 여왕.
“달콤한 냄새.”
내 인생을 망가뜨린 여자.
나의 모든 걸 빼앗은 여군주.
나를 성노예로 여기는 주인님.
나의 여왕, 나의……….
<1/>
짹 짹.
몸을 짓누르는 피곤함에도 눈을 떴다. 아침을 알리는 지저귐에 몸을 일으키고 침대에 걸터앉아 얼굴을 문질렀다.
“하아….”
피곤함을 억지로 걷어내고 내가 오늘 몇 시간 잤을까를 계산했다. 마지막으로 본 시계가 새벽 두 시였는데, 그 이후로 몇 번을 주인님의 음부와 애널을 오가며 두 번 정도를 더 사정했다.
그럼 적어도 한 시간에서 두 시간 사이이지 않을까.
지금은 아침 6시 반. 수면 부족 때문에 미치기 직전이지만 애써 일어나 준비해야 한다.
내가 누웠던 침대 옆에는 아름다운 여성이 이불을 다 걷어내고 엎드려 자고 있었다. 그녀의 몸 선을 따라 내려가며 굴곡을 눈으로 음미했다.
엎드려도 보이는 그녀의 옆 가슴과 잘록한 허리, 처짐 없이 사과처럼 예쁜 엉덩이.
세상에 이런 몸매가 존재한다는 건 누군가에겐 축복이지 않을까?
어딘가에서 감히 주인님의 누드를 위한 찬양가를 부르고 있을 거란 시답잖은 상상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티슈를 들고 왔다.
새벽, 거친 섹스로 지쳐 쓰러진 주인님과 함께 잠들었는데, 당시 나도 피곤한 상태인지라 주인님을 말끔히 씻기질 못했다. 마저 뒤처리를 마치고 먼저 욕실로 들어갔다.
주인님이 깨어나기 전에 서둘러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노예라고 해서 누더기를 입고 다니진 않는다. 물론 고약한 심보를 가진 흡혈귀는 노예에게 누더기를 입히지만 난 고귀한 여군주님의 노예다.
깔끔한 예복을 입었다. 요즘 같은 현대에서는 노예도 주인의 성품을 담당하기 때문에 이렇게 입어줘야 한다.
모든 준비를 마치면 일곱 시 정도가 된다. 난 마음을 가다듬고 목 부근을 건드렸다.
찰그락.
마법으로 투명화되어 있던 사슬이 건드린 부위로부터 빠르게 윤곽이 드러났다. 파동처럼 사슬 전체로 윤곽이 드러났다가 이내 투명하게 변했다.
사슬의 손잡이는 주인님의 손아귀에 있다.
‘기다려라… 이 쇠사슬이 네년 목에 걸려있고 내가 그 손잡이를 쥐고 있는 날이 반드시 올 거다.’
3년 전부터 지금까지 늘 해오는 다짐이었다.
단 한 순간도 이 다짐을 잊은 적 없다. 아침에 일어나 씻을 때도, 식사할 때도, 일과할 때에도, 그리고 주인님과 섹스할 때도, 잠자리에 드는 그 순간마저도.
복수만을 꿈꾸며 지금껏 버텨왔다. 주인님 앞에선 고분고분 말에 따르면서.
대신 침대 위에선 그녀를 내 수하에 두기 위해 나만의 조교를 이어갔다. 그녀는 점차 내가 아니면 만족하지 못하고 결국 나를 원하고 찾게 되는 성노예로서 전락하게 되는….
물론 주인님은 그 사실을 모른다. 몰라야 한다.
가볍게 목을 가다듬고 부드러운 어투로 주인님을 깨웠다.
“아침 새가 지저귑니다. 주인님.”
살며시 떠지는 붉은 눈동자를 마주했다. 아침의 졸린 얼굴의 그녀는 참 귀엽다.
나와 마찬가지로 무거워진 몸을 일으킨 주인님은 시계를 살폈다. 이어 나를 물끄러미 관찰하다가 커튼을 걷으라는 것처럼 손을 휘저었다.
그녀의 명령대로 커튼을 걷자 기분 좋은 햇살로 방안이 가득 찬다.
옷 하나 걸치지 않고 일어선 주인님께서는 부스스한 상태지만 우아한 걸음걸이로 창가로 걸어가 창문을 열었다.
따스한 공기가 밀려 들어온다.
“주인님. 누가 볼지도 모릅니다.”
“감히 누가 짐을 볼 터냐?”
하기야 누가 죽음을 각오하고 감히 알몸의 여왕을 훔쳐보겠는가. 창밖을 살펴보니 다행스럽게도 바깥엔 아무도 없었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메이드였다.
“여왕님. 아침 새가 지저귑니다.”
“일어났으니 시녀들만 들어오너라.”
몇 명이 물러나는 소리가 들리고 곧 시녀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아침마다 보던 장면임에도 시녀들은 실오라기 걸치지 않은 여왕과 차려입은 인간 노예의 모습에 익숙하지 않다.
잠시 얼굴을 붉히며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들어온 시녀들은 즉시 여왕을 데리고 욕실로 함께 했다. 한 시녀는 내게 얼른 나가서 기다리라는 것처럼 등을 밀었다.
“밖에서 대기하도록 하겠습니다.”
문밖에 서서 멀거니 닫혀있는 문을 지켜봤다. 저 시녀들은 도대체 뭐가 그렇게 부끄러운지 여왕의 알몸을 차마 똑바로 바라보질 못한다. 오히려 부끄러워 얼굴을 붉힌다.
물론 여성이 봐도 여왕의 관능적인 몸매는 환상적이지만 괜히 야릇한 상상을 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백합물을 머릿속에서 지우며 지루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반쯤 열린 문에서 쏙 빠져나온 메이드가 단단히 문을 닫고 돌연 나를 향해 매섭게 눈을 치켜떴다.
하아, 익숙한 듯 한숨을 쉬었다.
“가축!”
첫마디는 늘 저거였지. 가축.
“제 이름은 김한원입니다만.”
“여왕님께서 네놈을 전용 흡혈인으로 지정하셨지만 그렇다고 네 직급이 올라간 게 아니란 걸 잊지 말아라!”
“잊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절 못 잡아먹어서 안달입니까?”
내 반발에 메이드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살기를 흘렸다. 아무리 상대가 메이드라 할지라도 엄연히 흡혈귀 중의 한 명이다.
흠칫 물러난 나는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
“아무리 여왕님의 노예라 할지라도 가축 주제에 흡혈귀들에게 함부로 이빨 드러내지 말아라. 네놈 정도는 한순간에 혈액팩으로 만들 수 있으니까.”
“…칫.”
고집 있지만 소심하게 작게 혀를 찼다. 용케도 이 소리를 들었는지 매섭게 눈을 치켜뜬 메이드가 거칠게 다가오며 나를 벽으로 밀어붙였다.
“방금 ‘칫’이라고 했어?”
“안 그랬는데요?”
“거짓말하지 마! 가축!”
벽에 등을 기대고 메이드는 가슴을 내밀어 나를 궁지에 몰았다. 머리는 나보다 하나는 작은데 위압감은 내 두 배 정도나 된다.
차마 어쩌지 못하고 쩔쩔매는데 언뜻 눈치를 채보니 이 메이드도 가슴이 남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알겠다. 나름 강하게 나서려고 내민 것일 텐데 어쩌다 보니 가슴을 강조하게 됐다.
뒤늦게 내 시선이 수상하다는 걸 안 메이드는 자기 가슴을 내려다봤다. 얼굴을 붉히며 물러나 가슴을 가린 메이드는 살기를 마구 뿜었다.
“이… 이…! 파렴치한 가축 주제에!”
“당신이 보여줬잖아요, 에밀리.”
“함부로 내 이름 부르지 마─!”
그녀가 손톱을 내세우며 내 목을 뜯어버리려던 그 순간,
달칵, 문이 열리며 검은 원피스와 모피 외투를 걸친 주인님이 미간을 찌푸리며 우리를 노려봤다.
“누가 감히 여왕의 침소 앞에서 언성을 높이느냐!”
주인님을 대신해 곁에 서 있던 메이드장이 버럭 소리쳤다. 에밀리는 어쩔 줄 몰라 고개를 숙이고 난 딴청을 피웠다.
“아무리 가축일지라도 장소를 봐가면서 조교 함을 잊었느냐!”
메이드장은 목청이 상당했다. 귀가 먹먹해짐을 느낄 때 주인님께서 손을 들어 메이드장을 조용히 시켰다.
“그만. 메이드장이 훨씬 시끄럽군.”
“송구합니다. 면목이 없습니다.”
피곤함 때문인지 주인님은 에밀리를 잠깐 노려볼 뿐 화내진 않았다. 그저 무심히 복도를 따라 걸었고 난 그 뒤를 따랐다.
뒤돌아 젖은 눈가로 나를 바라보는 에밀리를 향해 혀를 내밀어주고, 분노로 일그러지는 에밀리를 보며 내심 통쾌함을 느꼈다.
“한원.”
가축이라 부르는 흡혈귀들 사이에서도 주인님만큼은 나를 이름으로 불렀다. 그 사실은 꽤 감명스럽긴 하지만 흡혈귀에게 감동 같은 걸 느끼긴 싫었다.
“예, 주인님.”
“즐겁나 보지?”
무엇을? 어리둥절하게 바라보고 있는데 돌연 목이 확 잡아 당겨졌다. 알 수 없는 당김에 의해 바닥에 엎어져 주인님을 올려다보는데 주인님이 쇠사슬을 꽉 움켜쥐고 있다.
‘제기랄.’
그래, 안일했다. 이 생활에 익숙해지다 보니 내가 흡혈귀의 노예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말았다.
난 노예이고 여긴 나를 언제든 잡아먹고 싶어 눈을 부라리는 흡혈귀들의 소굴. 난 성노예로서 있지만, 본질은 그저 먹이일 뿐이다.
무릎을 꿇은 상태에서 머리를 조아렸다.
“제 위치를 잊고 말았습니다. 미천한 저는 그저 흡혈귀들의 노예. 주인님의 총애를 받고 있다는 사실에 저 자신의 존재의의를 잊는 멍청함을 저질렀습니다.”
“고개를 들어라.”
명에 따라 고개를 들었다. 부드럽게 뺨을 쓰다듬는 주인님의 손길에 흠칫 두려움이 다가섰다.
“넌 노예 이상도 아니고 이하도 아니다. 네가 비록 짐의 전용 흡혈용 인간이긴 하다만 그것이 네 만행을 다 눈감아주지 않는다.”
“옳습니다.”
“그래….”
주인님의 엄지가 갑자기 닫혀있는 내 입으로 침투했다. 난 주변의 메이드들이 바라보는 앞에서 그녀의 고귀한 엄지를 야릇하게 핥아야 했다.
만족한 미소를 보인 주인님은 문득 내 냄새를 맡았다.
“달콤한 냄새….”
나는 모르겠으나 주인님은 내게서 다른 인간에게서 나지 않는 너무 달콤한 냄새가 난다고 한다.
달콤함이 어찌나 강렬한지 맡고 있으면 당장 여린 살결을 물어뜯어 피를 맛보고 싶다고.
실제로 주인님은 종종 섹스 중에 참지 못하고 내 목을 물기도 한다. 다행히 자제력이 강해 적당한 피만 섭취하는데 그럴 때마다 내 심장은 덜컥 내려앉는다.
언제 싫증이 나서 날 죽일지도 모르는 섹스라니. 성욕에 지배당해도 그런 순간이 오면 아랫도리가 차가워지고 쪼그라든다.
“냄새를 맡으니 피가 고프구나. 얼른 식사하러 가자.”
“예, 주인님.”
침울한 분위기를 만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보다 머리 하나가 작은 주인님은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나를 음흉하게 바라봤다.
“아침부터 소란피웠으니 좀 혼나야 할 테다.”
“달게 받겠습니다.”
탁자 위에 음식을 놓아두고 맛있게 먹는 식사는 인간들에게만 적용된다. 흡혈귀들의 식사는 사뭇 다르다.
붉은 천으로 가려진 작은 방. 자신의 흡혈용 먹이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가면 흡혈귀들은 그때부터 식사를 시작한다.
각자만의 방식으로 인간의 목을 물거나 때때론 변태적인 성향을 지닌 흡혈귀는 인간의 옷을 벗겨 생채기를 내고 핥아 먹는다.
그것이 흡혈귀들만의 독특한 식사문화다.
메이드들이 열어주는 붉은 천 안으로 들어선 주인님은 자리에 앉아 나를 기다렸다. 탁자 위에는 피가 뚝뚝 흐르는 소고기가 있지만, 주인님은 오로지 나만을 바라봤다.
난 얼른 넥타이를 풀었다. 아침은 늘 목을 무셨으니까.
“아니.”
셔츠를 풀다 멈추고 의아한 듯 쳐다봤다. 주인님은 가까이 오라 손짓했다.
다가가자 주인님은 내 바지춤을 덥석 잡더니 야릇하게 미소 지었다.
“바지를 벗거라.”
“주인님…?”
“벌을 받아야지 않겠느냐?”
밖에 메이드들이 대기하고 있는데… 천 너머를 눈치 봤지만 어쩔 수 없었다. 바지 벨트를 풀고 지퍼를 내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