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헬하운드-76화 (76/79)

〈 76화 〉 3 / 개의 인사는 싸움이다 (8)

* * *

(8)

끝을 향해 치달아가던 싸움을 도중에 말리는 놈만큼 짜증나는 놈은 없다.

아예 모르는 놈이었다면 그저 베어버렸을 텐데,

상대는 그럴 수도 없는 녀석이다. 순순히 베여줄 놈도 아니고.

물론 싸우게 된다면… 가능한 즐길 생각이었지만,

지금은 저 자식과의 싸움을 순수하게 즐길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어, 검을 거두고 일단 물러섰다.

“아~ 아. 완전 김샜네요. 불완전연소에요. 뭐냐고요 이건.

이렇게 어영부영 맺는 싸움은 딱 질색인데.

한 번만 더 붙었으면 그땐 분명 내가 이겼다고요.”

“앞에 말은 동감이지만, 꼬맹아.

그건 내가 네 머리통에 칼을 꽂지 못했을 때의 얘기지.”

“뭐에요, 다시 한번 해 보자는 거예요?”

좋지. 난 더할 생각 만만이다. 이런 식으로 어영부영 마무리짓는 건 내 취향이 아니다.

하지만 지금 저렇게 눈을 부라리는 하프 오우거 놈이 방해라고.

다시 칼을 뽑기라도 하면 그대로 활을 들 기세라서 이를 으득 갈고는 일단 칼을 내렸다.

저쪽도 짜증난다는 얼굴 그대로였지만, 일단 물러나기로 했나보다.

“그래서, 이유나 들어보자고. 왜 갑자기 다 된 싸움에 화살을 뿌렸는지.”

“하이엔. 당신의 싸움이 아무래도 이전과 다르게 삿된 기척이 느껴졌습니다.

그대로 둘 수 없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또 그 소리냐고… 난 달라진 게 없어.

네가 뭘 신경 쓰는지는 알겠지만,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미친 것처럼 보이냐, 내가?”

아질이 눈껍을 한번 꿈틀거렸다.

스스로도 어느 정도는 난폭해지고, 조금 더 자제심이 엷어졌다는 자각 정도는 있다.

하지만 원래부터가 그다지… 신사적인 성격이 아니었을 뿐더러,

구태여 허둥거리거나 호들갑 떨 생각 따위는 전혀 없다.

난 그저 나답게, 칼 휘둘러서 문제를 해결하면 그뿐이라고.

“당신이 늘 그랬다는 건 누구보다 제가 잘 압니다만,

이번에는 그렇게 쉽게 넘어갈 일이 아닙니다.”

“저기요~”

완전히 대화에서 소외된 라크샤사가 손을 들었다.

불만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더 싸움을 걸어올 기색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싸움의 맥이 끊긴 이유를 하나도 납득할 수 없었을 테니 당연한 반응이다.

“그래서 이제부터 뭘 어째야 하는 건데요? 우린 뭐라고 해야 하나…

둘 중 하나가 쓰러져야 다음 경기를 치를 수 있단 말인데요?

그런데 여기에서 이렇게 경기가 흐지부지되면 누가 승자인 거냐고요.”

맞는 말이다.

이 싸움의 승패에는 승패 자체의 의미 말고도 충분히 다른 의미도 있었다.

나도 여행 자금을 마련할 겸 해서 이 싸움에 참가했으니,

라크샤사도 아무리 싸움을 좋아한다 하더라도 맨입으로 싸움을 끝낼 수는 없을 것이다.

과연 아질에게는 저 화난 토끼를 달랠 만한 비책이 따로 있을 것인가.

내가 알기로 말재주가 그다지 특출나다고 할 수 없는 하프 오우거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품에서 단검을 한 자루 꺼냈다.

라크샤사의 눈이 경계와 물욕으로 살짝 커졌다.

아질이 꺼내든 단검이 심상찮은 물건인 것을 알아본 모양이다.

“비룡의 이빨로 만들고 마법을 건 단검이오.

칼집도 비룡의 가죽으로 만들었소. 지금 잠시 자리를 물려주면 이걸 주겠소.”

“어이쿠, 그야 말해 무엇하겠어요. 마음껏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세요!”

…밸도 없는 토끼 같으니.

그녀의 손에 단검이 빨려들듯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들었다.

요정목에 비룡가죽을 덧대 만든 칼집에는 둥글게 세공한 보석이 두 개 박혀 있었다.

아마 저 보석에는 사라스바티가 주문을 걸어뒀겠지. 어디에 팔든 값을 제법 후하게 받을 게 분명하다.

“저거 그냥 줘도 되는 거냐?”

“어차피 저것을 빼도 앞으로 2자루는 더 있으니.”

…나름 흔한 물건이었나? 조금 멍했지만,

뭐 굳이 라크샤사의 기분을 건드리진 않기로 했다.

아질 녀석이면 몰라도 굳이 찬물을 끼얹는 취미는 내가 없으니까.

한쪽 길을 막고 있던 철창이 천천히 들어 올려져, 일단 그쪽으로 이동했다.

안에는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자리와 먹고 마실 것이 마련되어 있었다.

아직은 텅 비어있는 자리 중 한 곳을 차지해 앉자,

아질도 맞은편에 앉으면서 혹여 누군가가 지켜보거나 엿듣는지는 않은지

눈을 부라리고, 귀를 움찔거렸다.

…적어도 이 근처에 다른 누군가가 몰래 숨어있는 것 같지는 않지만.

“…뭐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냐?

진짜로 내가 싸우는 꼴이 마뜩찮아서 그런 거냐?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최근 스파타스를 돌아다니는 와중에 수상한 것을 본 적은 없습니까?”

갑자기 뭔 소리래.

쓸데없는 것이나 물으려고 갑자기 여기에 난입한 건 아닐 것이고.

잠시 스파타스에 온 날부터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찬찬히 돌아봐도, 그다지 짚이는 건 없다.

쿠오 글라디우스 기간에는 누군가 길을 가다가 시비 털려서 죽임당했다는 얘기조차 크게 수상하다고 할 수 없다고.

“글쎄다, 특별하게 이상한 건 없는데….

애초에 왜 그걸 나한테 물어? 내가 여기 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스파타스에 들어온지는 사실 며칠 되지도 않았다. 거리에는 사람이 넘치고,

지하 투기장은 성황이고, 영주라던 베로니카는 레오레와 성에서 놀고 있고.

그 덕에 나르콜렙시나 스텔라도 간만에 푹 쉬고 있는 사이

나는 지하 투기장에서 돈이나 벌고 있는 거잖아.

“제가 당신보다 여기에 얼마쯤 먼저 와서 알아본 사실입니다만…

지금 쿠오 글라디우스는 진행이 완전히 멈춰있습니다.”

“…뭐?”

그건 또 갑자기 무슨 소리지?

검의 축제 하나로 먹고 사는 스파타스에서, 이런 대규모 행사를 갑자기 멈춰두고 있다고?

아니, 그런 일이 있다면 왜 전혀 그런 사실에 대해 들은 바가 없는데?

“바로 어제 오후 경기부터 진행이 멈췄습니다만,

아직까지는 참가자 외의 대중에게는 이 사실이 알려지지 않고 있는 모양이더군요.

과거에도 이런저런 사정으로 인해 얼마간 진행이 멈춘 일이 있다고 하니,

그다지 주목할 일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실은.”

아질이 목소리를 바짝 낮췄다. 그답지 않게 아주 조심스러운 기색이 한층 짙어졌다.

“…당신이 이전에 말했던 대로, 윌리엄…

당신은 아이온 크로니클이라고 했던가요. 그를 보았습니다.”

“뭐…?!”

윌리엄… 아이온 W 크로니클, 그 자식이 여기에 있다고?

또 여기에서 지난번에 했었던 일을 다시 벌일 셈인가?

“네가 잘못 본 건 아니냐?”

“틀림없습니다. 제 눈을 걸고 맹세할 수 있을 정도로요.”

아질이 눈을 걸고 말할 정도면, 아이온 놈은 분명히 여기에 있다.

이번엔 또 무슨 되먹지 못한 짓을 벌이려고 뒷수작을 부리고 있는 거지…?

불완전한 변태이긴 했지만, 그 녀석이 깨워낸 마왕 나잘슈파르와의 싸움에서는

정말로 죽을 뻔했던 주마등의 기억마저 아직까지도 생생하다.

나만 죽을 뻔했던 게 아니다.

나르콜렙시, 레오레, 스텔라… 날 따라다니는 녀석들 말고도, 그 파티에 참석했던 귀족들,

그리고 여왕까지도 불귀의 객이 될 뻔했던 커다란 사건이었다.

윈돌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으로 여겨질 정도이니까.

“…그럼 역시 윈돌 영주는… 젠장, 그 자식 대체 뭘 하고 다니는 거지?”

그 서찰을 베로니카 영주에게 전달했던 건, 아이온이 여기에 숨어들었다는 확증이 생겼던 탓인가.

나는 그 가능성을 생각했을 때는,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다고 생각했었지만…

막상 이렇게 현실이 되고 나니 갈피를 잡기가 어려워졌다.

“그럼 쿠오 글라디우스가 중지된 것도….”

“아마 윈돌 영주의 서찰을 받은 이곳의 영주가 수상한 낌새를 채고 중단시킨 것이겠죠.

지금 스파타스에는 외국에서 온 방문객도 많습니다.

무슨 일이 벌어지면 스파타스는 궤멸적인 타격을 받을 겁니다.

절대로 그냥 두고볼 수는 없을 테니까요. 무엇보다도….”

아질은 신중하게 혹여 누군가 듣고 있지는 않은지 귀를 기울였다.

나도 부쩍이나 감각이 예민해진 탓에 누군가 듣고 있으면 바로 알 수 있다…

적어도 지금 이 대화를 엿듣고 있는 이는 없다.

“성탁기사단도 여기에 끼어든 듯 합니다. 사태는 점점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가고 있죠.”

“성탁기사단?! 또 그 신참 놈인가?”

요슈아 세룰라이트… 이가 으득 갈렸다.

그 녀석의 성검, 엑스페란사를 자기 것처럼 쓰고 있다고 생각하면 분통이 터질 지경이다.

센 영감에게는 제대로 따지지도 못했었지만, 다시 만나면 그 때는 반드시 결판을 내고,

엑스페란사를 받아낼 거라고 몇 번이고 다짐한 바 있었다.

그 자식이 여기에 있다면… 아이온도, 그 성전기사 놈도 놓칠 순 없다.

하지만 아질은 고개를 살짝 저었다.

“아니오, 이 도시에 잠복해있는 성전기사는… 꽤 거물입니다.

성탁기사단의 제4석 ‘마르가리타’라고 하죠.”

“…들어본 적 있는데.

89위의 마왕 중 하나의 머리를 망치로 부숴버렸다고 알려진 성기사잖아.

교회 자식들, 마왕 사냥이라도 벌일 셈인가?”

“아마 윈돌에서 있었던 일이 교회에 전해진 게 아닐까 싶습니다만.”

물론 당연히 그럴 만도 했다.

성전기사가 직접 나서서 싸웠고, 얼핏 듣기로는 그 싸움 뒤에도 아이온을 구속하기 위해서인지,

윈돌 여기저기에서 활동하는 교회 쪽 인간들이 보였다는 소문을 들었었다.

여기에 성탁 제4석이 나타났다는 건, 결국 아질의 말에 신빙성을 보태주는 일이 되는 것인데…

어째 일이 복잡하게 꼬여만 갈 것 같은 더러운 기분에 몸서리가 쳐졌다.

대체 그 자식, 무슨 일을 벌이려는 거지?

윈돌에서 했었던 일을 다시 벌일 생각인가?

'그럼 그 때야말로….'

지난 번에 못 다한 결판을 내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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