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화 〉 3 / 개의 인사는 싸움이다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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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종이 한 장 차이로 우열을 다투던 공방이 잠시 잦아들었다.
천천히 상대와의 거리를 재면서 숨을 골랐다. 라크샤사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특별히 평정심을 유지하면서 칼을 쓰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격정에 맡겨 쓰러뜨릴 상대와 그렇지 않은 상대 정도는 구분한다.
‘적어도 그 늑대 자식이랑 동급이란 말이지….’
유파가 같아서인가, 검술의 경지는 순수하게 동격이었다.
체구가 작은 만큼 근력이나 검의 거리에서 떨어질지언정, 그를 보완하는 속도가 있었으니.
‘방금 전 한 번은…’
상대의 검을 파훼했음에도 기분 좋은 흡족함을 느끼지 않았다.
내 힘으로 정면에서 깨부순 게 아니라 소 뒷발에 쥐 잡듯이, 얻어걸린 것처럼 피해냈던 탓이 크겠지.
라크샤사는 그런 것도 알려주지 않는다고 투덜거렸지만 정확히는 알려줄 만한 게 없었던 것에 가깝다. 뭐라고 하겠어, 말 그대로… 그냥 감으로 때려맞혔다고.
‘뭐, 지나간 판은 지나간 판이고.’
숨을 천천히 골랐다. 발놀림을 가볍게, 하지만 동시에 신중하게.
검투장을 중심으로, 서로 원을 그리듯이 상대와의 간격을 유지해 간다.
‘이제 어떻게 한다…. 젠장, 대가리 굴려가며 싸우는 건 취향이 아닌데.’
해괴할 정도로 넓은 반경을 커버하는 저 길고 얇은 칼에 냅다 머리를 들이미는 건 조금 자제할 필요가 있다. 그런 얕은 수로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고.
“으으음. 이런 교착 상태, 그다지 좋아하는 편이 아닌데 말이죠~.”
라크샤사는 긴 귀를 쫑긋쫑긋 흔들면서 불만스레 툴툴거린다.
다시 검을 눕히고, 머리 옆에 세운 채로 끄트머리를 겨눈 특유의 자세 그대로.
“그럼 먼저 들어와 보든가. 토끼잖아? 멋대로 발정해서 들어오라고.”
“성희롱에 이어 아인 차별 발언이라니, 너무하신데요.”
“헹.”
저 녀석은 꽤 마음이 달아있는 모양이지만 이쪽은 그다지 서두를 이유는 없다.
오히려 지난번 늑대원숭이와의 싸움이 불완전 연소라는 느낌이 강했지.
나는 이래저래 시간에 쫓기고 있었고, 승부에서 쫓긴 그 늑대 놈은 이성도 없는 짐승이 되어 덤벼드는 바람에 끝마무리를 망쳐놓았었다. 뒷맛이 안 좋았다고 해야 하나.
‘즐길 수 없는 한 판이었고.’
적어도 저 녀석이 거대한 토끼로 변해 달려들 일은 없을 테니, 그 점에 대해서는 느긋하게 즐길 수 있을 것 같은데.
“하는 수 없네요. 그럼 이번에는 손 가는 대로, 한번 가볼까요.”
천천히 자세를 풀고 칼자루를 쥔 손이 아래로 내려왔다. 칼끝이 노리는 곳이 안면에서 몸통 정중앙으로 옮겨갔다. 실실 웃던 녀석의 얼굴에서 조용히 웃음기가 걷혀간다. 눈을 감고, 숨을 고르듯 들이마신 뒤 내뱉은 순간…
“…!”
눈, 표정, 호흡, 손, 발.
감정을 일절 남기지 않고 잘라낸 무심의 태세로, 라크샤사의 검이 변화했다.
아무 예고 없이, 무릎 아래로 숙이고 들어온 라크샤사.
호를 그리며 휘몰아쳐 올라오는 칼날의 궤적에 맞대응했다.
“큭!”
날카롭게 울리는 쇳소리와 함께 칼날이 부딪혔다. 칼자루를 통해 울려온 충격에 손목이 시큰거린다. 드워프제 바스타드 소드의 겉면을 긁은 열기와 떨림이 칼날을 타고 후벼파왔다.
“이 자식…!”
몸을 다그쳐 대응한다.
한껏 아래에 웅크린 녀석의 머리를 노리고 검을 내려쳤다. 키기긱… 거슬리는 쇳소리를 끌면서 칼날과 칼날이 부딪히고, 미끄러뜨렸다.
‘젠장, 촐랑촐랑 귀찮게 구네, 진짜!’
그 길고 얇은 칼날로 내 검을 받아내면 칼날이 버티지 못할 것임을 녀석도 알고 있다. 곡면을 따라 미끄러지는 힘에 무게중심이 기울었다. 칼날이 바닥을 후려치는 것과 동시, 허리가 기우뚱하고 몸이 앞으로 기울어졌다.
“목, 이번에는 받아갑니다.”
감정을 최대한 잘라낸 듯 머리 위에서 차갑고 섬뜩하게 죽음의 선고가 내려온다.
칼날을 미끄러뜨리는 것과 동시, 내려쳐오는 내 칼날을 타고 올라간 칼끝이 위로 솟구쳤다가… 녀석이 양손으로 머리 위로 들어올린 칼의 자루를 움켜쥐었다.
내려쳐온다.
낙뢰처럼.
‘이대로 당할까보냐!’
다리를 넓게 벌려, 기울어지려는 몸을 지탱하고,
이미 늦은 검 대신, 머리를 대신 휘둘러 녀석의 가슴팍을 들이받았다.
무슨 생각이나 계산이 있어서 그렇게 행동했던 것이 아니다. 다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목을 내주게 될 것이라는, 내 것이 아닌 그 직감만이 한순간 몸을 지배했다.
“칵…!”
무방비한 가슴팍에 들이받아진 라크샤사의 작은 몸이 쿨럭, 기침을 내뱉었다.
얼굴을 찡그리면서 호기를 놓친 그녀의 얼굴에 분한 기색이 비쳤다. 그 상황에서 이런 식의 반격을 당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던 걸까.
“무슨, 시정잡배도 아니고… 늘 그런 식으로 싸우시는 거에요? 진짜로?”
“싸움질에 수단 방법을 가리는 타입으로는 안 보였는데.”
승기를 거머쥘 호기를 놓쳐서인지, 아니면 내 싸움방식이 별로 마뜩찮아서였는지,
어느 쪽인지는 몰라도 라크샤사는 검을 바로잡으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데 그런 것 치고는… 지금 하이엔 씨… 전혀 즐기지 못하고 계신 것으로 보이는데요.”
라크샤사가 이상한 말을 했다.
싸움을 즐기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해보면 그럴지도 모르겠구만.’
예전에는 어땠더라.
다섯이서 같이 여행했을 때는… 좀 더 머릿속에 아무것도 잡생각을 할 필요도 없이 칼을 휘둘러 적을 베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하지만 지금은 이만한 상대를 앞에 두고도…
‘검에만 정신을 쏟을 수가 없어.’
어째서일까.
자문해봐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
다만 제 안에 자신도 모르는 영역이 검게 웅크리고 있는 듯한 감각이 있었다.
온갖 부정적인 생각과 분노를 먹어치우고, 쓰레기장처럼 확장되어가는 그 검은 영역.
때때로 그로부터 새어나오는 어떠한 야성, 아니 마성이 몸을 대신해 움직이는 감각이다.
한번 죽고 난 뒤, 그 영역이 점점 넓어지는 것을 느낀다.
어쩌면 나는 내 자신의 것이 아닌 싸움에 지겨움을 느끼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게 뭐 어쨌다고. 까딱하면 목을 내놓게 되는 싸움을 즐길 수 있는 미친놈이 그리 흔한 줄 알아?”
하지만 그 점을 간파당한 것은 화가 난다.
나는 저 꼬맹이 토끼조차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궁지에 몰려 있었나.
아니면 그만큼 초조해 있었나. 내 검이 그만큼 무뎌졌다고 생각하면…
그 녀석이 떠올라 화를 참을 수 없다.
부르르, 칼자루를 쥔 손에 과도하게 힘이 들어가, 힘줄이 꿈틀하고 반응했다.
“하는 수 없네요. 더 이상의 문답은… 서로에게 그다지 득이 되지 않을 것 같아요. 이쯤에서… 끝을 내도록 하죠.”
호흡을 가다듬고, 라크샤사의 칼끝이 천천히 움직여 정면을 향했다.
칼자루를 바투 쥐고, 다리를 약간 벌리고, 정면을 향해 칼날을 세워 겨눈 빈틈없이 선 자세.
검사의 자세 중에서도 기본이자 근간인 그 자세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이 국면에서 가장 신뢰하는 자세라는 것은,
승부를 결정짓는 수를 두겠다는 선언이나 마찬가지였다.
“시시한 말싸움보다는 훨씬 확실하지.”
끝을 내자는 말에는 동의한다.
나도 이 싸움에 신물이 나던 참이다. 묵직한 칼날을 머리 위로 들어올려 내려베기 자세를 잡았다. 저 녀석에게 가장 안정감 있는 자세가 정면을 보고 선 자세라면, 내게는 이 자세가 그러하다.
어떻게 들어오건, 어떤 기술을 걸어오건, 어떻게 방어해오건, 머리 위에서부터 똑바로 내려쳐 반으로 갈라버리겠다, 다만 그렇게 생각한 자세였다.
서로가 서로의 거리를 섣불리 침범하지 못하고, 잠시 정적이 지나간다.
초조함이 극점에 다다른 순간, 한껏 예민해진 귀가 다른 기척을 포착했다.
아니, 귀가 포착한 것이 아니다. 소리보다 먼저 날아오는 적의를 파악한 것은 이번에도, 제 것이 아닌 육감이었다.
허리를 비스듬히 틀고 검을 휘둘렀다. 단단하고 뾰족한 쇠붙이가 튕겨져나가, 바닥에 꽂혔다. 한 대의 화살이지만, 화살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굵어서 작은 창과 같았다.
‘이런 화살을 쏘는 놈은 내가 아는 한 한 놈 뿐이지….’
게다가,
날 맞출 생각도 없었다. 빈틈을 포착해 들이치려는 라크샤사의 발 앞에 똑같은 화살이, 호를 그리며 날아와 꽂혔다. 이번에도 명중시킬 생각이 아닌 어디까지나 이 싸움의 맥을 끊어놓겠다는 한 발이었다.
“아질, 뭐 하냐 너! 남의 싸움판에 끼어드는 고약한 취미가 생기기라도 했냐?!”
용의 뿔과 뼈로 만든 거궁(巨?)을 손에 쥔 궁사.
하프 오우거 아질은 조금 높은 단 위에서 그 활에 두 개의 화살을 매기고는 이쪽을 겨누고 있었다.
“마누라 옆에서 애나 돌보고 있어야 할 놈이 왜 이런 곳을 기웃거려?”
“으햐… 저 분위기 죽이는 아저씨는 또 누구시래요. 위험하네. 나 저런 아저씨 완전 취향인데.”
“…쟤 마누라 있다는 방금 내 말은 그 큰 귀로도 못 들었냐?”
김이 팍 새는 반응을 보여준다. 라크샤사는 갑자기 난입한 아질의 거대한 덩치와 바위처럼 딱딱하게 굳어진 얼굴에 잠시 시선을 떼지 못하다가, 결국 칼을 제 칼집에 집어넣었다.
아질 또한 활을 내리고는, 화살 없는 빈 활을 손에 쥔 채로 연단에서 뛰어내렸다.
저벅저벅, 다가오면서 내뱉는 굵직한 목소리가 검투장 안을 맴돌았다.
“하이엔. 제게는 인간들이 가진 마물에 대한 선입견 같은 것은 없습니다만….”
화살을 거두고 활을 내렸을지언정,
아질의 눈동자만은 여전히 임전태세 그대로,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눈에 넣은 그 어떤 목표물도 놓치지 않는 그 눈이 날 보고 있다는 것이 무척… 어색하면서도, 이번에야말로 희열이 들끓었다.
그래, 솔직해지자.
저 자식하고도 한번쯤 싸워보고 싶었지.
다만 지금은… 저 자식과의 싸움을 진지하게 즐길 수 있을까?
그런 회의감을 간파했다는 듯, 아질의 입이 숨을 들이마셨다가, 담담히 내뱉었다.
“당신,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뭐가, 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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