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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하운드-72화 (72/79)

〈 72화 〉 3 / 개의 인사는 싸움이다 (4)

* * *

(4)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검을 고치는 동안 쓸 검을 한 자루… 빌렸다. 물론 공짜는 아니었지만.

양손으로 잡기에도 편하고, 한 손으로 휘둘러도 좋은 바스타드 소드의 손잡이가 손가락에 감겨 달라붙었다. 상하 두 부분으로 나뉘어진 그립에 질좋은 가죽을 써서 미끄러질 염려는 없을 것 같다.

“돈 주고도 안 파는 검을 헐값이나 다름없게 빌려줬는데, 사람이 고마운 줄 모르는가?”

팔라르가 제 팔을 매만지면서 투덜거렸다. 그의 말로는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도 팔에 깊게 칼자국을 낸 것을 봐서 쓸만한 검을 빌려주는 거랜다. 눈물 나게 고맙구만, 그거.

그래도 드워프가 벼린 검답게 손잡이를 쥐자마자 마치 칼끝까지 마치 피가 통하는 것처럼 익숙하게 손바닥에 감겨오는 게 느낌이 꽤 좋다. 곧게 뻗은 날과 예리하게 다듬어진 칼끝, 그리고 묵직하게 무게중심을 잡는 폼멜까지.

“내 드워프로서의 명예와 내 이름의 무게를 걸고 장담하지. 그 검보다 더 좋은 검을 들고 다니는 녀석은 이 스파타스에 얼마 되지 않을 거라고.”

갈라르까지 팔짱을 낀 채 거들먹거린다. 드워프 둘이 제 이름까지 걸고 말하는 이상에야… 불만을 더 말할 순 없겠다. 괜히 더 주절거렸다간 그나마 빌린 검도 뺏길 것 같으니.

“그럼 언제 찾으러 오면 되지?”

“글쎄, 워낙 검의 상태가… 그래서. 작업에 들어가면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스파타스에 오래 머무를 예정인가?”

“딱히 예정을 정해놓진 않았다고.”

“그럼 느긋하게 기다린다고 생각하는 편이 더 나을걸.”

절대 하루이틀 안으로 끝날 것 같지 않구만.

갈라르가 내어준 칼집에 바스타드 소드를 꽂아넣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쿠오 글라디우스가 끝날 때까지는 꼼짝없이 여기에 머무를 수밖에 없겠다.

드워프 형제의 대장간을 뒤로 하며 나오는데, 아직도 포기를 못한 얼굴로 그 멀쑥한 귀족 청년이 가게 앞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끈질기구만. 그 안에서 나오는 날 향해 불똥이 날아든 것도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거기, 거기! 당신, 잠깐 나 좀 보시오!”

아, 귀찮아.

“무슨 일인데 그러쇼?”

“무슨 일인데 그러느냐고?”

드워프에게 모욕당했다고 생각했는지 그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도록 화를 내면서 다가왔다… 번짓수 틀린 분노를 나한테 풀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민폐라고. 민폐.

씩씩거리며 다가와서는 위아래로 훑어보는 그의 태도는 꽤 노골적으로 사람을 얕잡아보는 데 익숙한 이의 것이라, 자연스럽게 마음에서부터 깊게 짜증이 우러났다.

“귀족(보이야르)이오?”

“아니오만.”

“그럼 말을 조금 편하게 해도 상관없겠군.”

음, 하고 단정한 예복의 옷깃을 다듬은 그는 허리를 곧게 펴고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더 거만한 자세를 취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내가 입을 다문 이유는 순전히 놈의 입에서 무슨 개소리가 나오는지를 들어나 보자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탓이다.

“저 드워프가 자네에게 뭐라고 하던가?”

자네? 지금 자네라고 했나?

한쪽 눈을 일그러뜨리며 팔짱을 낀 채 쯧, 하고 혀를 찼지만, 놈은 거만한데다 눈치조차 없었다. 마치 내가 자신에게 한 방 날리지 못할 거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것처럼. 아까 내 서슬에 칼까지 떨어뜨린 건 기억에서 싹 지워버린 모양이다.

“그걸 댁이 알아서 뭐 하시게?”

“무엄하다! 말씨를 정갈하게 하지 못할까!”

이 자식은 꽤 귀찮은 부류임을 직감했다. 더 상대해줄 가치를 느끼지 못하고 돌아서려는데, 갑자기 슥 다가온 놈이 팔을 붙들었다. …이 자식이 꽤 귀찮은 부류임을 이렇게 확인할 줄이야.

“그래그래, 말 정도는 편하게 해도 상관없지, 암. 암. 자네, 잠시만 내 말 좀 들어주게나. 들어주게, 응? 부탁이니까!”

젠장, 베어버릴 수도 없고.

허리에 차고 있는 검을 뽑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지만, 비굴하게 나오는 놈을 때려죽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찝찝한데다, 상대가 귀족 나부랭이라면 일이 귀찮아진다.

“…어디 말해봐.”

“말해봐… 그, 그래. 말하겠네. 고맙네.”

억지로 웃는 거 다 보인다. 이 새꺄.

팔짱을 낀 채 놈을 바라보면서 그 자리에 서자, 놈은 아주 짧게 못마땅한 기색을 보였지만 눈을 부라리자 끓는 솥에 집어넣은 개구리마냥 쪼그라들었다.

“나는 쥴리오라고 하네. 스파타스의 남작가 야에츠 가문의 당주이지. 아는가? 우리 가문의 이름 정도는 알고 있겠지?”

“전혀.”

내가 왜 귀족 가문의 이름 따윌 머릿속에 넣어둬야 하는 거냐.

짜증 섞인 대답을 돌려주자, 쥴리오인지 하는 기생오래비놈의 입이 잠시 할 말을 잃어버린 듯 다물었지만, 평온한 침묵은 몇 초 가지도 못했다.

“하, 하하. 마음에 드는 친구로군, 아주 대범해. 귀족 상대로 태도가 당당한 게…”

“맘에 없는 소리 하지 말고, 본론이나 말하라고 본론이나. 난 이렇게 시간 죽이고 있을 정도로 한가하지 않으니까.”

“게다가 겉치레도 없으니 아주 견실한 남자겠어, 허험, 허험.”

아, 짜증난다.

주위의 구경꾼들이 뭔일인가 힐끔거리는 것도 짜증나고, 느물거리면서 달라붙는 것도 짜증나고. 어떻게 적당히 떼어놓을 방법 뭐 없나?

“본론.”

조금 위압을 실어서 다그치자, 입에 기름을 바른 듯 번들번들 돌아가던 쥴리오인지 하는 놈의 입이 잠시 다시 다물어졌다. 하지만 이번에도 몇 초 가지를 못했다.

“그러지 말고, 시간 있으면 그래, 우리 집에 들르는 게 어떤가? 식사라도 하면서 이야기를 하는 게…”

“됐고, 본론.”

강하게 싣지는 않았다고 해도 내 위협에 한번 움찔한 정도라니. 이 녀석은 의외로… 얼굴 가죽이 상상 이상으로 두꺼운 놈인 게 틀림없었다.

“휴우… 좋아, 알았네. 자네, 어떻게 그 드워프를 구워삶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보기엔 자네는 분명 일류 검사야. 어떤가? 지불을 후하게 할 테니 잠시 내게 고용되서 솜씨를 발휘해보는 게?”

“거절하겠어. 그럼 이만.”

“고민도 안 하고?!”

고민은 개뿔.

이런 놈들에게 얽히면 뒷일이 귀찮아진다는 건 몇 번이나 겪어봐서 잘 안다. 그 녀석… 에스텔이었다면 용사의 책무니 뭐니 하면서 자기가 먼저 나서서 도와주려 했겠지만 난 그 녀석만큼 성격이 좋지 않단 말이지.

“아니, 그러지 말고 무슨 일인지라도 들어보게! 내 후하게 내겠다니까? 음식도 여자도 얼마든지 제공할 테고!”

“거 끈질기네. 필요 없다고 하잖아. 칼잡이가 필요하면 용병 알선해주는 업자한테나 가볼 일이지, 왜 나 같은 불한당한테 질척거리는 거냐고.”

“그야 자네가 드워프에게 인정받을 정도의 전사라서지! 나는 그저 그런 잔챙이들을 모으려는 게 아닐세, 가능한 강한 이들을 모으려는 거지!”

칼 한 자루 빌린 것 가지고 너무 오버하는 거 아니냐고.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보자마자 튈 걸 그랬다고, 진심으로 한탄했다.

“그렇게 쓸만한 놈들을 모아서 어쩌게. 영주 상대로 전쟁이라도 벌이려고?”

“뭐, 비슷한 건 벌일 생각이라네. 영주 상대는 아니겠지만.”

“오, 열심히 해 보쇼. 그럼 난 이만.”

보아하니 잘못하면 귀족 나리들의 멍청한 세력다툼에 말려들 판이다. 트란 드라쿨루라는 나라가 원래 귀족 계급 간의 분쟁이 특히나 심한 나라라는 건 다른 나라들을 둘러보면서 알게 되었지만… 하나도 안 변했구만. 뭐, 내 알 바는 아니다.

“어차피 자네… 지하 투기장으로 갈 셈이지? 내 말 맞지?”

“엉?”

뭐야. 어디에서 뭔 얘기를 들은 거지? 돌아보니 쥴리오는 기생오래비 같은 낯짝을 히죽거리며 방금 전까지 구질구질하게 매달리던 태도를 버리고 다소 여유를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

“이야. 이건 한번 되는 대로 찔러본 건데 설마 맞았을 줄은 몰랐는데.”

말 그대로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고 찔러봤다가, 운좋게 얻어걸린 모양이다.

그럼 대체 감이 거기 있다는 건 어떻게 안 걸까. 뭐, 그 사실이 새어나갈 입이라곤 하나 뿐이긴 하지만. 창녀의 입이란 믿을 게 못 된다.

“그게 뭐 어쨌다고? 내가 어느 투기장에 얼굴을 들이밀든 그쪽이 뭔 상관인데. 관중석에라도 나와서 술이라도 한잔 빨라고?”

“관중석에 나올 필요가 없는 게… 아마 자네가 출전하려는 그 투기장, 우리 가문에서 돈을 좀 넣은 곳이거든. 이제껏 출전한 적 없는 신참이 나온다는 얘기가 들리더라고. 귀빈석에서 구경할 맛이 좀 나겠지.”

주절주절 말이 많네.

이제라도 확 물러버려? 아니, 그러기에는 자존심과 주머니 사정이 허락하지 않는다. 눈에 띄지 않게 적당히 돈 벌 정도만 하고 빠질랬더니. 일이 점점 꼬이는구만.

“사퇴할 생각은 아니겠지? 자네가 사퇴하면… 나는 좀 서운할 거야. 그 서운함을 어떻게 풀지는 자네 상상에 달렸고.”

“웃기네. 용두질이나 오입질로 얌전하게 풀진 않을 거라는 건 알아듣겠는데,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냐고.”

“…자네는 말을 좀 가려서 할 필요가 있어.”

은근슬쩍 그 창녀… 디아나에게 뭔가를 할 거라고 압박을 넣지만, 그 또한 내 알 바가 아니다. 그녀와는 하룻밤 서로 재미 보고, 오늘 밤 경기를 알선해준 사이에 불과하다. 그 뒤에는 쥴리오가 몇날 며칠 밤을 데리고 놀든 말든, 나와는 상관이 없다는 거다.

“뭐 아무튼. 사퇴하지 않을 거라고 내 느긋하게 생각하지. 오늘 밤 보세나.”

대체 뭘 믿고 저렇게 장담을 하는지 모르겠다.

쥴리오는 반반한 기생오래비 낯짝을 히죽거리며 떠나갔다. 짜증이 슬그머니 부풀어오르는 것을 삼키면서, 침을 탁 뱉었다.

더럽게 재수 없는 밤이 될 것 같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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