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화 〉 3 / 개의 인사는 싸움이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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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결국 성에 돌아온 것은 아침 해가 꽤 높이 뜬 시간이 되어서였다.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지만, 그 얼굴이 꽤 부루퉁해있는 것도 의외였다. 그 가게에서 나왔을 때는 날짜는 진즉에 넘어갔고, 동쪽이 밝아오기 시작한 새벽이었으니 여기까지 걸어오는 데에는 제법 시간이 지났지.
“왜 안 자고 있었냐?”
“하이엔….”
나르콜렙시가 눈썹을 찡긋거렸다. 별로 기분이 좋아보이지는 않는다.
불쾌한 듯 낀 팔짱에, 자랑스럽게 내보이곤 하는 가슴이 눌려있는 것이 보였다. 어젯밤의 기억이 좀 강렬하게 머리에 남았나.
아무튼, 몽마 주제에 낮에도 멀쩡하게 돌아다니는 녀석은, 별로 달갑지 않다는 듯 입을 열었다.
“…어디 갔다 왔어?”
“그걸 왜 묻는데?”
최근 들어 이 몽마 녀석이 은근슬쩍 들러붙으려는 게 영 꺼림칙하다.
백 보 양보해서 일행이라는 말까지는 인정하겠지만, 괜스레 내 일에 간섭하려 들지 말라고.
“물으면 안 될 것도 없잖아? 일단 좋든 싫든 같이 움직이는 처지인데.”
“각자 자유시간을 어떻게 보낼지까지 서로에게 보고할 필요는 없다고… 뭣보다 너더러 나한테 붙어있으라고 한 적 없어. 싫으면 네 갈 길 가. 안 말린다.”
나르콜렙시가 발끈했다.
“난 너한테가 아니라, 우리 왕 후보에게 붙어있는 거야. 네가 일단 내 왕이 될 분이랑 운명공동체라는 자각 정도는 있었으면 좋겠는데.”
짜증스럽다는 듯이 한마디도 지지 않으려는 나르콜렙시의 반응은 평소답지 않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그걸 구태여 따지고 들기엔 피곤하다. 오늘 밤에는 당장 큰 싸움판이 기다리고 있는데 괜히 힘 빼고 싶지 않다고.
“내 목숨은 내가 알아서 간수할 거고, 네가 내 스케줄까지 간섭할 권리도 없어. 볼일은 그게 다냐? 그럼 가서 밥이나 달라고 해라.”
“…너 진짜 짜증 나.”
쏘아붙이니 홱 돌아서면서, 한 마디 가시 돋친 말을 했다.
조금 전 녀석이 뱉은 한 마디에서 무척이나 익숙한 기분을 느꼈다. 저런 식으로 제 기분을 표출하는 여자가 있었는데.
뭐, 그러거나 말거나.
사실 배가 빈 것은 이쪽도 마찬가지다. 가만있자, 영주성의 요리사에게 밥 같은 걸 달라고 해도 되려나.
“쓸데없는 걸 떠올리게 만들긴.”
찜찜한 기분이 뒤따랐다. 좀… 말이 심했나.
괜히 머리를 긁으면서 식당으로 향하니 먼저 온 선객이 와 있었다.
무척… 불편해보이는 차림을 한 레오레가 무슨 일인지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평소답지 않은 모습인데다가 내가 오는 걸 눈치채지도 못한 모양인데. 왜 저러지, 저 여자는.
“…어이, 유스티카.”
“으악?!”
어깨를 건드리자 엄청나게 놀란다.
저래 봬도 명망 높은 무가의 후예인 레오레가, 내가 바로 등 뒤에 설 때까지 전혀 알아채지 못한다고? 아니, 그보다 으악이 뭐야, 안 어울리게.
“하, 하이엔… 님?”
“듣는 귀가 많으니까, 님은 빼. 왜 그렇게 넋 놓고 섰냐?”
레오레 유스티카가 스파타스의 영주… 베로니카와 절친한 친구 사이라는 건 이미 쫙 퍼졌을 거다. 그런 여자가 나한테 새삼 공대를 하는 걸 누군가가 수상쩍게 여긴다면, 바로 귀찮은 일로 비화될 것이다.
가뜩이나 베로니카 영주가 날 방해꾼처럼 보고 있는 마당인데.
“여긴… 어떻게?”
“어떻게는 무슨. 밥 먹으러 왔다. 식당에 달리 올 일이 뭐가 있는데?”
“네에, 그렇…죠.”
평소에는 매사에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면서 오늘은 마음이 콩밭에 가 있기라도 한가.
본인이 제대로 설명할 정신이 없다면 내가 채근할 일이 아니지. 쯧, 하고 혀를 차고선 레오레를 그대로 지나쳐 식탁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기묘하고 어색한 침묵이 잠시 흘렀다.
“…할 말 있으면 하지? 눈치나 슬슬 보는 건 너랑 안 어울리는데.”
“읏….”
드레스 사이로 드러난 레오레의 어깨가 가볍게 움찔거렸다.
뭔가 할 말이 있긴 했군, 하고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앞에 놓인 스테이크를 적당히 썰어서 입에 넣었다. 어쩐지 맛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결국 레오레는 한숨을 한 번 쉬고는,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실은… 로니에게서 오늘 밤 있을 무도회에 참가해달라는 말을 들었어요.”
“그게 뭐 어쨌다고?”
고기조각의 반을 한입에 넣어버리고 남은 반을 다음 입으로 삼켜버렸다.
여전히 맛은 잘 모르겠고… 조금 더 피가 뚝뚝 떨어지는 고기 쪽이 더 맛이 날 것 같다는 생각이 언뜻 스쳐 갔다. …입맛이라는 게 그렇게 휙휙 변하나?
“저, 저… 그게, 혼자 나가기는… 조금, 어려워서…. 혹시, 오늘 밤에 뭔가 다른 예정이… 없으시다면….”
그런 볼일이었나.
하필이면 오늘이라니.
“미안한데, 나도 오늘 밤에는 볼일이 있어서. 선약이 있다고.”
오늘 밤에는 그 여자에게 주선을 받은 싸움판에 참가하기로 되어있다.
무도회 따위 그다지 취향이 아니긴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선약을 파하기는 어려운 상황이기도 하고 말이다.
레오레는 아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셨… 군요. 그런데 선약이라고 하시면?”
“내가 여기 출신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내 지인 중에는 네가 모르는 녀석도 있어.”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한데 붙여놓으면 거짓말처럼 될지 몰라도 따로 떼어놓으면 어쨌든, 사실은 맞잖아.
레오레는 한결 침울해져서는 접시에 놓인 고기를 슥슥 썰었고, 맛도 모르는 얼굴로 고깃조각을 입에 넣어 우물거렸다.
“그나저나 그 영주, 네게 꽤 호의적이네. 그렇게 친했냐?”
“아뇨… 사실 이카펜에서는 그다지 친하다고 할 만한 사이는 아니었어요. 솔직히 말하자면 그냥 얼굴만 아는 사이였다고 해야겠죠. 그래서 이렇게 호의를 베푸는 게… 좀 얼떨떨한 기분이에요.”
뭔가 냄새가 나는데.
얼굴만 아는 데면데면한 사이에게 베푸는 친절에는 반드시 어떤 이유가 깔려 있는 법이다.
마치 ‘우리 친해요’라고 남들에게 보여주는 것 같은 과장된 반응은 경계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내가 아니고 레오레가.
“그 여자한테서는 냄새가 나. 나하고는 상관없지만 경계를 해 두라고.”
“…하이엔, 지금 절 걱정해주시는 건가요?”
“흥, 설마.”
말 그대로 코웃음을 쳤다.
이곳 영주가 뭔가 꿍꿍이가 있고, 결과 레오레가 어떤 모략에 빠진다고 하더라도 그게 내가 걱정해줄 이유는 되지 않지. 녀석의 일은 녀석이 알아서 할 것이다.
“안 어울리는 충고 한마디 해 줬다고 널 특별 취급한다는 생각은 접어둬.”
“알고 있어요. 당신이 그런 사람이라는 정도는요.”
당신이라.
꽤 가시 돋친 말투에서 이 녀석을 처음 만났을 때의 생각이 언뜻 들었다.
지금은 고분고분해져서 재미없지만, 처음 만났을 때는 제법 재미있는 반응을 보여줬었는데 말이지.
돌이켜보면 나와 아질, 사라를 죽이러 왔던 이 녀석과 같이 행동하고 있는 이 상황을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게 된 것도, 어쩌면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다.
아무튼. 적당히 배운 테이블 매너대로 식기를 정리한 뒤 일어섰다.
레오레의 눈동자가 따라 올라왔다.
“어디에 가시려고요?”
“아무래도 검을 좀 손봐야 할 것 같아서.”
대장장이 센 영감이 투덜거리면서 말했지만, 센 영감의 솜씨로도 슬슬 흉검 가름은 한계에 달해있었다. 아마 지난번 나잘슈파르와의 싸움이 결정타였겠지. 겉으로는 멀쩡해 보였지만 이걸 쥐고 휘두를 때마다 어떤 위화감이 점점 강해지는 게 느껴지곤 했다.
한다고 하는 전사들이 모여드는 쿠오 글라디우스에는 당연하게도 한다고 하는 무기장인들도 모여들기 마련이다. 이걸 손봐줄 만한 무기장인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로니에게 물어볼까요? 그런 걸 좀 알 것도 같은데….”
“아니, 미리 부탁해둔 게 있어. 게다가…”
뒷말은 조금 아끼기로 했다.
그 영주, 아무래도 찜찜한 게… 빚 같은 걸 지고 싶지 않다.
이 이상 빚을 지면 뒷맛이 영 개운치 않을 것 같다.
“게다가?”
“아니, 아무것도 아냐. 신경 쓰지 마라.”
그대로 조금 멍해있는 레오레를 놔두고 성을 나섰다.
성문을 나서자마자 머리 위에서 익숙한 울음소리가 들려와 시선을 위로 올리자, 갈색 깃털이 퍼덕거리는 게 보였다. 아질이 기르는 독수리인 ‘팀’이었다.
삐이이익!
팀은 한번 더 시선을 끌듯 울더니 작은 막대에 말린 쪽지를 떨어뜨리곤 제 주인이 머무르던 여관 방향으로 날아가버렸다. 주인을 닮아서인가, 도통 애교라곤 없는 놈이다.
“그새 알아본 거야? 하여간 부지런한 건 여전하구만.”
막대에 돌돌 말린 쪽지를 풀자 간단한 약도와 주소, 그리고 상호가 나왔다.
그 큰 손으로 이 조그마한 쪽지에 작은 글씨를 썼을 것을 생각하면 키득거리지 않을 수가 없다.
“앤빌튼 거리의 드워프 형제, 라….”
드워프 이름을 걸어놓고 장사하는 대장장이가 한두 명이 아니던데.
아질이 알아본 것이니 헛다리짚은 건 아니다 싶지만, 일단 큰 기대는 하지 않기로 했다. 애초에 기대를 잔뜩 해서 좋은 일은 별로 없는 법이기도 하고.
앤빌튼 거리는 어느 쪽이람.
거리에 세워진 이정표를 올려다보았다. 여기저기 화살표가 매달린 채 중구난방 방향을 가리키고 있는 가운데에… 앤빌튼 거리는 대체 어디에 있는 거냐고.
결국 일단 기억에 의존해야 했다.
앤빌튼 거리, 앤빌튼 거리… 적어도 내가 스파타스를 떠날 때에는 그런 거리 이름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최근에 생긴 곳이라면 그야말로 손쓸 길이 없는데.
“길 좀 물어도 되겠소?”
곤혹스러워하던 차, 마침 바로 옆을 지나가는 덩치 큰 용병에게 말을 걸었다.
덥수룩한 회색 수염에 커다란 소뿔 투구, 그리고 커다란 전투도끼를 멘 용병이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커다랗게 부풀어오른 근육에 문신이 가득한 것이… 어디 부족의 전사쯤 되는 모양이었다.
전사는 깜빡거리는 눈과 끄덕거리는 턱만으로 대답했다.
“앤빌튼 거리가 어느 쪽인지 혹시 압니까?”
여전히 말이 없는 전사는 수염 속 입술을 조금 꿈틀꿈틀거리더니, 손을 뻗어 방향을 가리켰다… 왜 좋은 입 놔두고 말을 안 한대?
“저쪽으로 가면 된다고?”
한번 더 끄덕인다.
…차라리 다른 녀석에게 묻고 말지, 말도 못 하는지 안 하는지 헷갈리는 사람 붙들고 있는 건 무척 바보같이 느껴졌다. 고맙수, 하고 대충 인사하고는 전사가 가리킨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얼굴 봐 뒀다.
만약 사기 친 거면 나중에 멱을 까버릴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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