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헬하운드-66화 (66/79)

〈 66화 〉 2 / 흥정은 말리고 싸움은 붙여라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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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여자는 어머니가 되면 강해진다고 했던가.

그럼 원래부터 대마법사로서 강했던 사라스바티는 이제 음… 무슨 괴물이 되는 거지?

나르콜렙시와 이야기를 나누는 사라스바티를 바라보면서 실없이 그런 생각을 했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 몽마와 같이 다니나 했는데 말이죠.”

“하프엘프와 하프오우거가 눈 맞아서 애도 낳는데, 검성이랑 몽마와 같이 다니는 정도는 별 것도 아니잖아? 근데 잘 보니 귀엽네, 얘. 우쭈쭈. 울룰루. 깍꿍.”

나르콜렙시는 의외로 다정한 태도로 보에 싸인 아이를 흔들면서 달래주고 있었다.

눈 위에서 꼼지락거리는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을 잡으려 갓난아이가 조그마한 손을 이리저리 뻗었다.

제 자식을 예뻐해주는 상대를 매정하게만은 대할 수 없는 게 또 부모 마음.

예전에는 서로 죽이려 들던 적 사이였는데 지금은 갓난아이와 놀아주고, 또 그걸 보고 있는 미묘한 상황은 그다지… 웃을 수만은 없었다.

“얘 좀 봐. 웃네. 이 누나가 얼~마나 무서운 누나인지 알아? 누나 한창때는 막 마왕군의 간부였어요. 아니, 지금도 간부이긴 하지만.”

“…너 애랑 놀아주러 왔냐?”

사라스바티랑 얘기 좀 하라고 데려왔더니 애한테 푹 빠져서는 정신을 쏙 빼앗긴 모습에 투덜거릴 수밖에 없었다. 뭐, 아질과 사라스바티의 아이에게 잘 대해주는 건 좋은 일이지만 일의 선후는 따지자고.

“애가 이렇게 좋아하는데 왜? 근데 이름이 뭐야, 얘?”

“‘라마’라고 지었어요.”

“흐으응. 좋은 이름이잖아. 어휴, 예쁘다. 으응. 누나가 더 예쁘지만.”

거 정분나겠네.

아질과 사라스바티의 아이, 라마가 나르콜렙시와 놀아주는 사이 이쪽에서 얘기를 하기로 할까. 뭐, 처음 계획과는 조금 어긋났지만 원래 모든 게 뜻한 대로 풀리지는 않는 법이지.

“조금 이상한 얘기를 하려고 하는데. 윌리엄 얘기야.”

“윌리엄 씨… 말인가요?”

사라스바티에게는 의외의 화제였는지 조금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살짝 침울한 얼굴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다. 배교 혐의로 교수형을 당한 동료를 몰래 수습해서 묻어주었을테니, 별로 좋은 기억은 아니었을 테지.

“나도 이야기를 꺼내는 게 별로 내키지는 않지만 뭐. 아래에서 아질과 한잔하다가 그 얘기가 나와서 말이지.”

“으음….”

사라스바티는 원체 눈치가 빨라서 이 얘기로 제대로 얼버무렸는지 모르겠다.

아질은 거짓말을 잘 간파하는 편이지만 반대로 거짓말을 못 하는 편이기도 했으니 더더욱.

이래서 나르콜렙시를 데려온 건데 저 녀석은 애랑 노느라 정신이 없다.

하여간 도움이라곤 약에 쓰려고 해도 요만큼도 안 돼.

“…윌리엄 씨가 그렇게 되어버린 다음 저와 남편이… 그날 밤 바로 윌리엄 씨의 유체를 수습했었어요. 목 졸린 자국만 빼면 의외로 꽤 멀쩡했었던 것 같네요. 윌리엄 씨의 고향이라는 마을의 언덕에 묻었고요.”

생각해보면 그 녀석, 고향이라고 할 만한 곳이 어디였는지 못 들었다.

나는 이곳 스파타스가 사실상의 고향이고, 사라스바티는 바람숲 출신이며 아질은 상실의 땅 북쪽에 오우거들이 모여 산다는 대고원이 고향이라고 했다. 에스텔… 그 녀석은 우르슬라 법국 출신이라고 했는데.

“그 자식, 고향이 어딘데?”

“우르슬라 법국 외곽의 작은 마을, ‘웨일럼’이라는 곳이에요. 서류에 그렇게 쓰여있었죠.”

“웨일럼이라. 처음 들어보는데.”

뭔가 단서가 남아있을 것 같진 않지만, 일단 이름은 기억해두도록 하자.

여기서 더 캐물었다가는 눈치 빠른 사라스바티에게 뭔가 꼬리를 밟힐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내 감은 꽤 잘 맞는 편이라서, 슬슬 이쯤에서 꼬리를 빼는 게 맞을 것 같다.

나나 아질이나 말주변이 나빠서 더 얘기해봐야 수상하게 여길 테니까. 이 정도면 옛 동료의 마지막이 궁금했다는 정도로 퉁칠 수 있겠지.

“뭐, 그 얘기는 이쯤 하자고. 그나저나 너희들은 스파타스에는 웬일이냐? 산후조리를 하기엔 좀 시끄럽잖아, 여기.”

“그게 좀…”

“…아이를 데리고 다니다 보니 생각 외로 여비가 좀 들어서 말입니다.”

알 것 같구만.

막 죽은 멧돼지를 뜯어먹어도 탈이 없을 정도로 튼튼한 아질과 바람숲에서 약육강식의 생활방식으로 자라난 사라스바티와는 달리 갓난아기는 잘 먹이고 재우고 싶었을 것이다. 숲 생활에서 돈이 있었으면 얼마나 있었겠나.

“쿠오 글라디우스에 참가했을 것 같진 않고… 뭐, 어디에 지하 투기장이라도 알아봐 둔 모양이지?”

“예에, 뭐. 그렇죠.”

아질이 떨떠름하게 긍정했다.

확실히 아기가 있는 곳에서 할 말은 아닐지도 모르겠구만.

원래 큰 잔치가 벌어지는 곳에서는 작은 잔치도 뒤따르는 법이다.

쿠오 글라디우스 같은 큰 판이 벌어지노라면, 그 수면 아래에서는 규모가 조금 작고, 은밀하게 벌어지는 작은 난투장 정도는 알음알음 벌어지게 되어있다.

영주의 집전 하에 벌어지는 쿠오 글라디우스와는 달리 훨씬 노골적이고 원색적인 싸움판일 것이다. 물론 나도 그런 싸움판에 끼어서 구르던 시절도 있거니와.

“점잖게 싸우는 건 저나 당신이나 취향이 아니고 말이죠. 마침 지하 투기장에서 싸울 대전사(?戰?)를 모집하는 소문이 있길래 거기에 끼기로 했습니다.”

“꽤 돈을 맡이 쳐준 모양이지?”

“적어도 당분간 아이에게 좋은 고기를 먹일 만큼은 됩니다.”

오우거 혈통이라 그런가?

아질과 사라의 아이, 라마는 갓난아이인 주제에 고기를 먹는 모양이었다.

뭐 오우거는 태어난지 사흘 만에 걷고 일주일이 지나면 뛰어다닐 수 있다고 듣긴 했지만, 쿼터 오우거­엘프 혼혈에게까지 적용될 말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뭐 나는 굳이 그런 데에까지 끼고 싶은 생각은 없다고. 윈돌 영주한테 돈을 두둑히 받았고, 거기에 여기에서도 잘하면 영주한테 한몫 뜯어낼 수 있을 것 같으니 말야.”

“그럼 스파타스에 오래 머무르진 않겠군요.”

“솜씨 좋은 도검 장인이 있다고 들었는데, 한번 알아보고 떠날 생각이라고.”

이곳 영주에게 서찰을 전해달라는 윈돌 영주의 부탁은 이미 마쳤다.

설혹 윌리엄, 아니… 아이온 크로니클이 여기에서 무엇인가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해도, 알 바 아니다. 그런 고초는 윈돌에서 겪은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확실히 이 시기가 되면 자기 실력을 어필하려는 도검 장인들도 각지에서 몰려온다는 소문을 듣긴 했습니다.”

“그야 이렇게 큰 판이면, 자기 이름을 내세워서 한몫 잡으려는 녀석들이야… 던전의 고블린처럼 많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대장장이 센은 퍽 특이한 케이스에 속한다.

영예나 영달에는 관심이 없고, 좋은 쇠나 불, 땅을 찾아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그 노인네는 그저 자신이 만족할 만한 쇠질을 하면 그걸로 족하는 괴짜였으니까.

“생각해보면 그 양반… 스파타스를 꽤 마음에 들어할 것 같긴 한데, 의외로 여기에 올 것처럼 굴진 않았지. 언젠가 또 만나려나, 어딘가에서.”

아마 다음에 만나는 곳은 윈돌은 아니겠지.

만나지 못한다고 해도 뭐 어떠랴.

“그래도 기왕 스파타스에 온 김에 몸이라도 풀고 가면 어떻습니까?”

“몸을 푼다라. 당분간은 싸움이라면 지긋지긋한 판인데… 그렇게나 짭잘한 판인가?”

“당신 실력이라면 제법 주머니가 두둑해지겠죠. 원하신다면 제가 알선해드리겠습니다. 같이 팀을 맺을 상대를 구하고 있던 참이거든요.”

목적은 그거였나.

하긴, 어중이떠중이보다는 서로 누구보다 잘 알고 지내던 이들끼리의 팀이 훨씬 마음이 놓이기야 하겠지.

“생각은 해 보지 뭐.”

“옛날 솜씨 그대로인지 궁금하던 참입니다.”

“흥, 윈돌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면 너라도 놀라지 않고는 못 배길걸.”

윈돌에서는 완전히 각성하지 않았다고 해도, 마왕을 한 놈 더 베어버렸다고.

전적이라고 치기는 무척 찜찜한 결론이었지만, 어쨌든 윈돌의 노예시장에서 나타난 마왕… ‘나잘슈파르’는 상대하기 벅찬 강적이었지.

여전히 아이온 크로니클, 그 자식이 대체 무슨 생각으로 발레리아 섭정을 제물로 삼아 마왕을 강림시켰는지는 의문이다. 이유도 모르겠고, 뭘 꾸미고 있는지는 짐작도 가지 않는다.

그 옆을 따라다니는 E라는 여자도 더더욱.

평범한 수도녀가 아니라는 점만은 확실한데.

“그래서, 네가 출전하기로 되어있는 그 난투는 언제 열리는 거냐?”

“이틀 뒤입니다. 그래도 내일 중에는 대답을 해 주셨으면 좋겠군요. 접수 측에도 사정이라는 게 있으니 말입니다.”

이틀 뒤라.

적어도 내일까지는 적당히 스파타스를 돌아보면서 관광이나 하고, 그렇게 시간을 때우면 딱 좋겠다. 흐응, 하고 대답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가실 겁니까?”

“엉. 얘기도 잘 들었고… 아, 그렇지. 일단 내일은 어떻게 될지 몰라도 아마 오늘은 영주성에 있을 것 같으니까 뭔 일 있거든 거기로 연락하라고… 어이, 나르콜렙시. 대체 언제까지 애하고만 붙어있을 거냐? 슬슬 가자고.”

한참 아이와 붙어서 놀고있던 나르콜렙시가, 겨우 고개를 돌리곤 눈을 투명하게 깜빡였다.

…저렇게 아이를 좋아하는 성격이었나? 몽마가? 그러고보면 그 녀석이, 어딜 가든 애들과 놀기 바빠했던 기억이 났다. 젠장, 별로 좋지 않은 기억이다. 자꾸 죽은 녀석을 생각하는 건 좋지 않은 버릇인데.

“어… 뒤에 특별히 일이 있는 거 아니면 조금만 있다 가면 안 돼? 얘 되게 귀여운데.”

“애 귀찮아하는 거 안 보이냐.”

“누가 귀찮아한다고! 그치, 그치?!”

동의를 구하는 나르콜렙시에게 대답을 하는 건지, 거절을 하는 건지 애매모호하게 갓난아이가 손을 꼼지락거리면서 옹알이를 했다. …뭐 오우거 아이라 내 눈에 귀여운지는 잘 모르겠지만, 몽마 눈에는 귀엽게 보이나부지.

“슬슬 애 밥 먹을 시간이에요.”

결국 보다 못한 사라스바티가 천천히 라마를 안아다가 제 품에 안았다.

나르콜렙시는 못내 아쉬운 듯 쩝, 하고는 라마를 잠시 바라보다가, 겨우 미련을 떨친 것처럼 보였다.

지금이 아니면 자리를 뜰 수가 없겠구만.

“그럼 간다. 내일 중에 보자고.”

그렇게 아질과 사라의 방을 뒤로 했다.

자아, 이제 남은 시간은 뭘 하면서 보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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