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화 〉 2 / 흥정은 말리고 싸움은 붙여라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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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점심을 조금 지난 시간은 식사 때도 아니었건만. 영주성 식당으로 안내되자마자 어안이 벙벙해졌다. 나와 레오레, 두 사람을 위해서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만찬이 떡하니 차려져 있었던 탓이다.
“…대체 뭐냐고, 지금 이 상황.”
정확하게는, 레오레 한 사람을 위해 이 식탁이 준비된 것이겠지. 나는 덤이고.
어이가 없어 중얼거렸지만 레오레도 대답할 정신이 없긴 매한가지인 모양이었다.
덧붙여 식당의 의자에 앉아있는 건 지금은 나 하나뿐.
레오레는 생글생글 웃으면서도 빈틈이라곤 전혀 없어보이는 시녀에게 붙들려버렸고, 영주는 영주대로 성에 도착한 뒤 내가 전한 서찰에는 아무 관심도 없다는 양,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다.
덕분에 나는 하릴없이 모처럼 차려진 음식이 식어가는 걸 보고 있을 따름.
식사 때도 아닌데 이 요리를 차리느라 애썼을 요리사에게는 다소나마 유감을 표하고 싶을 지경이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길다면 길고, 짧지는 않았던 기다림 끝에 당혹스러운 표정을 한가득 품은 채 레오레가 식당으로 들어왔다.
간소한, 하지만 맵시 있는 진주색 드레스 차림으로, 길게 펼쳐진 드레스 자락을 밟지 않으려 걸음 하나하나에 전전긍긍하는 모습에 조금 웃음이 날 것 같았다.
“…대체 왜 일이…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 습니다.”
“내 말이.”
난 그냥 윈돌 영주에게서 받은 편지 한 통을 전해주고 쿠오 글라디우스를 구경하고 싶었을 뿐이다. 겸사겸사, 내 검을 조정해줄 장인을 찾으면서.
그런데 스파타스에 오자마자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리는 바람에 예정이 전부 틀어져버리고 말았다. 여관에서 기다리고 있을 나르콜렙시는 짜증을 내겠지. 스텔라는… 그냥 멍하니 있을 것이고.
“영주하고는 친구였나?”
“아… 네. 이카루스 펜시온, 아시죠?”
알지.
율령교회의 ‘케루빔’, 제국의 ‘세라페이움’, 컬브랜드의 ‘카엘리온 아르 위스그’와 더불어 서부 사수지에서 가장 큰 네 개의 학문기관 중 한 곳이다. 북쪽 끝의 자유도시 에트루사에 위치했다던가.
“저는 그곳 졸업생입니다. 로니… 그러니까, 베로니카도 입학 동기로 만났고요.”
이른바 학연이라는 건가.
나랑은 먼 나라 이야기다. 뭘 바래. 나는 배운 게 없는 검투사 출신이고 학교 같은 건 문턱도 넘지 못했는데.
“스파타스에서 왔다고는 지나가다 말했었습니다만… 영지의 후계자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성조차 말해준 적이 없어서.”
좀 묘하구만. 귀족 출신이라면 자기 성을 드러내놓고 다녀야 가문 홍보가 될 텐데. 물론 이카루스 펜시온은 다른 교육기관과는 달리 입학에 제한을 두지 않는 방침이라고 하지만 대신 그만큼 졸업이 빡세다고 들었다. 아무리 나이가 차도 성적이 되지 않으면 졸업을 시켜주질 않아서 자퇴율이 6할 가까이 된다고 들은 적이 있는데.
“그건 어쩔 수 없었어. 거기 다니고 있다고 알려지면 날 잡으러 올 게 뻔했으니까.”
문이 열렸다.
간소하게 차려입은 레오레와는 다르게 틀어올린 아마색 금발을 녹주석으로 치장하고, 풍만한 몸에는 강렬한 붉은 드레스를 걸친 영주가 대담하게 파인 가슴골을 자랑스레 드러내며 식당에 합류했다. 아마색 금발 아래 검은 안대가 강렬한 존재감을 발했다.
“영주가 되어선 통 재미없는 일뿐이었는데 이렇게 레오를 다시 보게 되고. 조금은 괜찮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 잘 지냈어? 레오.”
“로니. 나도 만나서 반…”
레오레의 말이 도중에 툭 끊겼다.
천천히, 교태어린 발걸음으로 다가간 영주가 레오레의 허리를 장갑 낀 손으로 꾹 짚어 잡고, 레오레의 양 뺨에 입술을 갖다대었다. 인사라고 하기엔 조금, 길게.
레오레의 뺨이 불그레하게 물들어 부끄러워하면서도, 뭐라 말하지 못하고 뻐끔거리는 것을 즐겁게 바라본 영주가 천천히 레오레에게서 몸을 떼어갔다.
…난 왜 이런 걸 보고 있는 거지?
혹시 잊혀지고 만 건가? 나는?
그렇게 약간의 자괴감을 곱씹고 있을 즈음, 영주가 겨우 이쪽으로 관심을 돌려주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검성 님.”
“검성은 때려쳤어. 지금은 그냥 하이엔이라고 불러달라고.”
“네, 그럼 그렇게. 윈돌의 영주님께서 보내신 전갈을 가지고 오셨다고요?”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고는 품에 곱게 갖고 있던 편지를 건넸다. 다소 꼬깃꼬깃해지긴 했지만… 봉납에 손을 댄 흔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곤 영주는 어깨를 으쓱였다.
“하이엔 씨는 전령으로서는 그다지 재능이 없으신 것 같네요. 뭐 아무튼 잘 받았습니다. 잠시만.”
영주, 베로니카는 겉봉을 호쾌하게 부욱 뜯고는 편지를 꺼내어 하나밖에 없는 눈으로 훑어내려갔다.
중간쯤 읽었을 때는 눈썹이 조금 꿈틀하고는 마지막 줄까지 읽어내려간 뒤 한숨 같은 것을 지었다. 두 손 안에서 꾸깃 편지가 구겨지고, 내가 며칠에 걸쳐 가져온 편지의 끝은 구겨진 채로 난로에 들어가 불쏘시개가 되는 모습이었다.
“윈돌에서 이런 일이 있었군요. 일단 여왕 폐하께서… 흠. 무사하시다니, 이럭저럭 다행한 결말이라곤 할 수 있겠어요.”
베로니카가 조심스럽게 말하면서 나를 힐끔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눈이 바쁘게 레오레에게로 번갈아 돌았다.
“그리고 여왕 폐하께서는 음, 공식적으로 발표할 수는 없지만 ‘검성’ 하이엔 더츠백에게 씌워진 반역 혐의를 없던 것으로 한다고도 씌여있었고 말이죠.”
알 게 뭔가.
여왕과는 서로 풀 것을 풀었다. 이제 두 번 다시 만날 일도, 서로 이야기를 나눌 일도 없다.
결국 그 여왕도 생각해보면 마왕의 힘에 눈이 먼 왕제 발레리아, 나아가서는 그를 미끼로 왕제를 꼬드긴 ‘현자’ 자식, 아이온 크로니클의 농간에 놀아난 꼴이었던 것에 불과하고.
귀찮게 굴면 목을 따버리겠지만 날 귀찮게 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여왕과 엮일 일은 두 번 다시 없겠지.
“아, 말이 길었네요. 식사부터 하죠. 스파타스에 머무르는 동안은 성에 머무르셔도 좋습니다. 일행이 있으시다고 들었는데?”
“있긴 한데, 괜히 뒷얘기 나오는 게 아닌가?”
민감한 시기다.
쿠오 글라디우스는 서부 사수지의 전사들이라면 누구나 꿈에 그리는, 이름을 널리 알릴 기회다. 그런데 외부에서 온 손님이 넙죽 영주성에 머무른다는 소문이 퍼지면… 다른 뭣보다 내가 움직이기 귀찮아진다고.
“레오의 손님들인데 그 정도를 못 해 드리겠어요?”
레오레를 보았다. 적잖이 부담되는 얼굴을 하고 있다.
이제까지 스파타스에 지인이 있다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으니 어쩌면 정말 잊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거기에 상대가 저렇게 맹렬하게 호의를 베풀고 있다면 이 성실한 아가씨는 패닉에 빠질 만도 하지.
“게다가 묻고 싶은 것도 있고요.”
“말해봐.”
조금 더 가느다랗게 변한 영주, 베로니카의 하나밖에 없는 눈이 레오레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이번엔 다시 내쪽으로 휙 돌았다. 즉, 이것이야말로 베로니카의 진짜 흥밋거리라는 얘기다.
“레오와 하이엔 씨는 무슨 사이세요?”
와인을 삼키던 레오레가 놀라 사례에 들려 콜록거렸고, 그 반응에 영주는 더더욱 수상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웃고는 있었지만, 그 웃음에 뭐라고 해야 하나… 어둠 같은 게 드리운 것 같다.
물론 난 켕길 것도, 꿀릴 것도 없다.
‘이 여자는 내 노예다’라고 하면 이 영주의 얼굴이 볼만해지겠지만…
“그냥 동업자다. 윈돌에서는 여러 가지로 서로 신세를 졌지.”
적당히 무난한 대답을 하는 편을 골랐다.
귀찮은 일에서 해방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참이다. 굳이 긁어 부스럼낼 필요는 없지. 레오레가 조금 복잡한 표정을 짓는 것은 의외였다. 뭐라고 해주길 바랬기에.
“아하, 그러셨군요. 다행이네요.”
다행이라니, 뭐가?
베로니카는 얼버무리듯 술을 한 모듬 들이키고는 제 앞에 놓인, 김이 피어오르는 송아지 다리를 천천히 썰었다.
내 말을 완전히 믿는 눈치는 아니지만, 뭐 당장 추궁할 건덕지도 없는 대답이었지 않나.
레오레도 별 말없이 베로니카와 내 눈치를 살피면서 행여나 자신이 말실수를 하면 어떻게 될지 전전긍긍하는 표정이다. 뭐 그 때는 그 때 가서 대처하면 될 일이고.
“윈돌 영주께서 경고하신 게 있어요. 윈돌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태… 용사 일행 중 한 명인 ‘대현자’ 윌리엄이 그 배후에 있었다고요.”
“다른 이름은 안 쓰여있던가? 아이온 W 크로니클, 녀석의 본명이었지.”
솔직히 말하자면 그조차 본명인지 어떤지조차 헷갈리는 지경이었지만.
베로니카는 갑작스레 몹시도 두려워하는 듯한 표정으로 조심스레 주변을 살폈다. 그녀도 ‘크로니클 사건’에 대해 알고 있던 모양이다.
열신교를 상징하는 손짓으로 부정한 이름을 들은 불경을 몰아내고는, 영주는 옅게 한숨지었다.
“여신께서 용서해주시길. 크로니클 사건의 주범이 살아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요. 게다가… 윈돌 영주님께서는 그의 다음 행선지가… 이곳, 스파타스일지도 모른다고 경고해주셨고요.”
스파타스에? 왜?
물론 그 녀석이 육박전에 소양이 있다는 것은 저번에 겨뤄보고 알게 되었다. ‘종루’라고 불리는 묘한 무기를 쓴 싸움법에는 나름대로 애를 먹었었지.
하지만 그렇다고 쿠오 글라디우스에 흥미를 보일 만큼 무투파였던가?
아니면 무엇인가… 다른 목적이 있어서?
“아니, 다른 영지에도 고루 전갈을 보냈다는 걸 생각해보면… 그저 어디에 숨었을지 모르니 조심하라는 의미였겠지. 로니.”
“그럴 수도… 있겠네. 레오. 네 말에도 일리가 있어.”
지나친 확대해석이라고 레오레가 말했고, 베로니카는 그다지 수긍하는 눈치는 아니었지만 어디까지나 레오레가 한 말이기에 대놓고 반박하지는 않았다. 내가 묻고 싶다. 니들 대체 무슨 사이냐?
“쿠오 글라디우스의 본선은 이틀 후부터 시작됩니다. 그 동안은 영주성의 방에서 편히 지내주세요. 저는 그럼, 공무가 있어서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레오, 이따 봐.”
영주 베로니카는 일단 이야기를 짧게 매듭지은 뒤 일어섰다. 레오레에게 하나밖에 없는 눈으로 윙크를 날리면서. …정작 윙크를 받은 레오레는, 그저 떨떠름한 반응이었지만.
“…못 보던 사이에 로니… 베로니카는 많이 변했네요.”
“네가 진면목을 몰랐던 건 아니고?”
키득 웃고는 바구니에 담긴 빵을 하나 집어 깨물었다.
만약, 윈돌 영주의 짐작대로 아이온 그 자식이 여기에 있다면…
꾸직, 하고 손 안에서 빵이 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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