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화 〉 2 / 흥정은 말리고 싸움은 붙여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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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고민은 무슨.
라크샤사가 던지고 간 폭탄 탓에 나르콜렙시와 레오레가 도끼눈을 뜨고 있었긴 했지만, 딱히 켕길 것도 없다. 그냥 밤마다 대련을 한 것뿐이라고.
“하이엔 군 말도 마냥 믿기 어려운 게… 상대는 볼퍼팅어라고. 정말 대련만 했어? 다른 일로 땀을 낸 건 아니냐고.”
“작작 해. 볼퍼팅어 상대로 발정하겠냐. 아니, 발정했다 치자. 그게 너랑 뭔 상관이야?”
“그을쎄. 이엔 군이 저번 일 이후로 유독… 음… 개과가 되어놔서 믿기가 어렵단 말씀야.”
저번 일… 뭐, 마물이 뱃속에 쑤셔박히게 된 이후로 나도 모르게 영향을 받고 있다는 자각은 있다. 성질이 난폭해지고, 식욕이 강해지고… 사실 원래부터 그랬던 것일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난 이걸 전달하고 올 테니까 너희들은 숙소나 잡아둬.”
“동행하겠습니다.”
“굳이 안 그래도 되는데.”
“…동행하겠습니다.”
레오레는 부득불 고집을 부렸다.
마치 내가 혼자 있으면 반드시 무슨 일이 벌어지거나, 무슨 일을 벌일 거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는 눈이라 한숨이 난다. 반박할 수 없다는 게 더 짜증나지만. 하는 수 없지.
“그럼 나와 유스티카는 성에 다녀올 테니까, 넌 스텔라하고 숙소 좀 알아봐. 근데 이렇게 사람이 많은데 남는 방이 있을지 모르겠구만.”
“그러게. 난 이렇게 인간들이 많은 건… 솔직히 좀 거북한데.”
그럴 만도 하지.
거리는 북적북적하고, 거친 인상의 싸움꾼들이 보이지 않는 기싸움을 벌이면서 활보하고 있다. 어설픈 녀석이 혼자 돌아다녔다간 어느 골목에서 칼침 맞고 뒈져나가지는 않을지 모를 일이라고.
“방은 잡을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아, 그건 걱정 안 해도 돼.”
“뭔가 뾰족한 방법이라도 있냐?”
날 돌아보곤 만면에 자신만만한 웃음을 씩 머금는 나르콜렙시의 웃음에 일말의 불안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아니,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고.
“허튼 짓하지 말고.”
“걱정 마, 걱정 마.”
전혀 믿음이 가지 않지만.
집합 장소와 시간까지 정한 뒤, 나르콜렙시와 스텔라는 숙소를 찾으러 멀어져갔다. 멀어져가는 뒷모습은… 대충 자매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럼 이쪽도 슬슬 움직일까.”
“네.”
스파타스… 몇 년 만에 온 도시임에도 풍경이 눈에 띄게 달라지진 않았다. 달라진 게 있다면 오히려 내 쪽이겠지.
이름 없는 검투사로 이 도시를 떠난 후, 나름대로 이름이 좀 알려진 칼잡이가 되어 돌아왔으니 감회가 새로울 수밖에 없다. 그 이름이 위명이 아니라 악명이라도 말이지.
“저기가 관청인 모양이네요.”
레오레가 몇 명의 사람들이 줄을 선 건물을 가리켰다. 잘 관리한 깔끔한 건물에 드나드는 사람들도 입성이 좋은데다 싸움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아닌 것처럼 보였으니 관청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하다.
뭐, 반 정도는 레오레의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건물 지붕에 솟아있는 갈매기 모양의 표식만 아니라면 나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저기는 동항로 회사(East Seaway Company)야. 하여튼 돈 되는 일이면 뭐든 다 하는 곳이니까… 여기에도 들어왔었나보구만.”
“아… 들어본 적 있습니다. 항구마다 지부가 있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이런 내륙에도 지부가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어요.”
“이번 대회에 출자라도 한 건가? 흠.”
쉴새없이 사람이 드나드는 모습은 꽤 장관이었다.
아마 갑옷이 아닌 옷을 입은 스파타스의 사람들은 전부 한 번씩 저 건물에 들르는 것 같은 광경이어서, 옆에 붙은 다른 건물이 초라하게 보일 정도였다… 바로 그 건물이 관청이었는데도.
혀를 끌끌 차고는 동항로 회사 지부에 들어가기 위해 줄을 선 사람들을 지나쳐 관청으로 들어섰다. 예상대로, 놀라우리만치 썰렁한 관청에는 접수 직원 한 사람만이 외롭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을 뿐이다.
“…어떻게 오셨어요?”
물 한 잔은 고사하고 어서 오세요라든지 같은 기본적인 접객 멘트는 없다. 아니, 한쪽 뺨이 책상에 눌린 것을 보면 내가 들어오기 전에는 한잠 거하게 낮잠을 때리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두꺼운 뿔테에 부스스한 갈색 머리. 멜빵바지를 입은 직원은 보란 듯이 하품을 길게 내뱉고는 머리를 흔들었다.
여기다 맡겨도 문제없으려나.
“…윈돌의 영주로부터 스파타스 영주에게 전해달라는 전갈을 가지고 왔는데.”
“그러세요? 거기 앉으세요.”
마치 그림으로 그린 듯한, 귀찮아 죽겠다는 투다.
그냥 성으로 직접 갈 것이지 왜 관청에 왔나 하는 생각이 얼굴에 쓰인 듯이 확실하게 전해졌지만, 성보다는 관청이 더 가까우니 이쪽에 온 게 당연하지.
“쿠오 글라디우스가 코앞인데 왜 이렇게 관청이 한산하죠?”
레오레가 눈을 깜빡이면서 순진하게 묻자, 뿔테 직원이 그것도 모르냐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곤 한마디 더 쏘아붙였다.
“그야 접수가 진즉에 끝났으니까죠. 그거 때문에 저번 주에는 꼬박 일주일 날밤을 지샜다고요. 젠장. 급료나 좀 후하게 쳐주지.”
…상사가 없다고 그렇게 되는 대로 지껄여도 되는 건가? 지적하니 뿔테 직원의 입가에 이죽거리는 웃음이 슬며시 걸렸다가 그조차도 귀찮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상사는 진즉에 실려 가서 치유사 협회에 자리 깔고 드러누웠어요. 꼴좋다. 아니지, 내가 먼저 드러누울걸. 씁. 누울 자리는 또 존나게 잘 본다니까. 맨날 피 보는 건 나지.”
두꺼운 뿔테 안경을 쓴 직원의 눈밑은 거뭇거뭇한 기미가 잔뜩 끼었다. 예선은 이미 끝났을 테고, 본선이 시작될 때까지는 관청에 용무 없음, 이라는 상태인 모양이다.
“아무튼 좀 기다리세요. 영주님들끼리 주고받는 전갈이면 나도 확실하게 받았다는 증거를 남겨놔야 하니까… 씁, 어따 놨더라, 도장, 젠장할….”
서랍장을 주섬주섬 뒤지는 품이 아무래도 시간이 제법 걸릴 모양이다.
정말 ‘잠시만’ 기다리면 될지 어떨지부터 의심이 가는데.
한동안 구석에 마련된 테이블에서 물 한 잔 없이 뿔테 직원 혼자서 된소리를 꿍얼거리는 꼴을 구경하고 있었다. 당장 방문객이 없다고 일까지 없는 건 아니라고 시위하는 것 같다… 내가 들어오기 전까지 자고 있었던 주제에.
“영주님이 우연히 근처에 와 있어서 여기에 잠깐 들른댑니다. 좀 기다리세요. 잘됐잖아요? 여기저기 다른 지구 관청까지 발품 팔면서 들락거릴 필요가 없어서.”
…비아냥거리는 거 맞지?
순간적으로 욱하려는 성질을, 레오레가 소매를 잡아당겨서 제지하지 않았으면 저 뿔테 안경 직원의 안경테를 그대로 뺏어다 작살내버렸을지도 모르겠다.
“얼마나 기다리면 되는데요?”
“글쎄요? 바로 옆 건물에 들렀다가 온다고 했으니… 한 10분쯤?”
내 입에서 말이 곱게 나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을 했는지 레오레가 대신 물었다.
위기의식이라고는 조금도 느끼지 않는 비범한 뿔테 안경 직원이 뿔테 안경을 손으로 잡아 까딱거리면서 맥아리 없는 목소리로 중얼댔다.
참자, 참아.
저 정도로 간댕이가 붓지 않았다면 스파타스에서 공무원 노릇도 해먹을 수 없을 테니 일종의 직업병이라고 생각하고 참자고. 나답지 않게 성질을 죽이면서 된소리를 한번 내뱉고는 다시 의자에 가 앉았다.
그렇게 10분쯤 시간낭비를 했을까. 뿔테 직원이 말한 대로 문이 열리고 가장 먼저 영병들이 들어왔다. 아무래도 도시 기풍이 기풍이다보니, 부자 도시인 윈돌보다도 병사들의 무장이 한층 그럴싸했다. 사슬갑옷 위에 판금을 덧댄 갑옷은… 여름에는 무척 덥겠다.
그리고 영병들이 좌우로 도열한 사이로, 털이 달린 망토를 걸친 젊은 여자가 후줄근한 나무 바닥을 짓밟으며 들어왔다.
한쪽 눈에는 마치 보란 듯이 안대까지 하고, 안대 아래로 커다랗게 얼굴의 반을 흉터가 잡아먹은 그런 여자.
남은 눈 하나도 별로 친절한 기색이 아니었고, 구불거리는 아마색 금발이 찰랑이면서 내려온 어깨 아래로, 투박한 갑옷을 입고 있었다.
적어도 내가 아는 얼굴은 아니었다.
저런 살벌한 인상의 여자 모른다고.
“윈돌에서 온 사자라고?”
“네. 그렇습….”
나 대신 먼저 일어서려던 레오레가 눈이 딱 마주치더니, 그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상대 여자도, 하나 남은 눈을 놀란 듯이 깜빡이면서 표정을 딱 굳혔다.
“레오?”
아주 잠시, 내가 끼어들 수 없게 만드는 침묵을 깨고 상대 여자… 영주가 먼저 레오레의 이름… 이라기보단, 아주 약간의 친근감을 더한 듯한 애칭을 불렀고, 레오레도 그제야 상대가 누군지를 확신한 모양이었다.
“로니…?”
로니라니, 인상보다는 꽤 부드러운 이름이구만.
애칭일 가능성이 크긴 했지만.
영주 여자는 좌우의 호위 병사까지 헤치고 다가와서는 다짜고짜 텁, 레오레의 손을 잡았다.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다. 레오레도 거절하거나 하지 않고, 얼굴에 여전히 당혹스러움이 담긴 눈으로 영주를 바라보다가 입가를 살짝 바들거렸다.
어째 반갑지만은… 않은 눈친데?
“오… 랜만이야, 로니.”
“그러게. 정말 오랜만이야. 레오.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더라. 분명 이카루스 펜시온 졸업식에서 본 게 마지막이었지? 너무하네. 그 뒤로 편지 한 통 없고 말야.”
첫인상이 확 날아갈 정도로 친근하게 구는 영주 여자와, 어쩐지 모를 당황으로 어물거리는 레오레의 모습을, 나와 뿔테 안경 직원이 즐겁게 지켜보고 있었다.
꽤나… 온도차가 나는 그런 재회에서 트러블의 냄새가 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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