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화 〉 Chapter 3 1 / 견토지쟁(?之?) : 개와 토끼가 다투다 (1)
* * *
(1)
결국, 그 날을 넘긴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윈돌에서 출발할 수 있었다.
지금은 좀 살만해졌는지 시무룩한 레오레 쪽이 어제 상태가… 죽 나빴던 탓이다.
다행히 스파타스와 길이 겹치는 짐마차 행렬에 호위로 동행할 수 있었기에, 그녀는 짐 사이 빈칸에 무릎을 모으고 쪼그려선 시무룩했다.
“…죄송합니다. 괜히 저 때문에 시간을 허비하게 돼서….”
“너무 그렇게 자책하진 말라고. 어차피 어제 걸어서 출발하나 오늘 짐마차를 타고 출발하나 걸리는 시간은 거기서 거기니까.”
도중에 괜히 싸움만 일어나지 않으면 체력을 조금이라도 아낄 수 있을 테니 그 점은 오히려 나을 수도 있다.
거는 싸움은 받아준다는 게 내 신조이긴 하지만, 지금은 일단 싸움을 피해야 할 때이기도 했다. 괜히 마물을 자극하고 싶지 않기도 했고, 어제 겸사겸사 검의 상태를 보고 그간의 사정 얘기도 들을 겸 대장장이 센을 찾아갔을 때 그가 했던 말이…
‘지난밤에 하늘에서 불장난했던 게 너였다면, 이제 이 녀석은 널 감당할 수가 없을지도 모르겠구만.’
이렇게 한마디 툭 뇌까리고는, 그저 손상된 곳을 손보고 날을 새로 벼려주는 정도로 끝냈었다. 엑스페란사를 왜 성기사 놈에게 줬냐는 다그침에 가까운 질문에는 오히려 뻔뻔하게 나왔었지.
‘그 검이 그 기사를 필요로 했다. 그래서 내줬어. 전에도 말했지만, 죽은 녀석은 그만 쉬게 해 줘라. 성불 못 한다. 그 검은 이제 너와 연이 다 했어.’
젠장.
짜증이 치밀어도 항변할 말은 없었다.
왕궁에서 엑스페란사를 꺼내오려고 그 난리를 쳤던 게 결과적으로 그 애송이 성기사놈에게 건네주기 위함이었냐는 생각이 들면 화통이 뒤집힐 지경이었지만.
“어이쿠, 이 녀석이 왜 이래.”
마부가 당혹스러운 소리를 냈다. 말이 조금 투레질을 하면서 불안한 숨소리를 내는 것이 보였다. 이런. 갑작스럽게 화를 치밀면 아무래도 마물을 자극하는 꼴이 되어버리는 것 같다. 이젠 맘놓고 열불을 터뜨리지도 못하게 되어버렸다는 사실이 짜증났지만, 일단 눌러놓고 볼 일이다.
“별일도 다 있네요. 순한 녀석들인데 오늘따라 말을 안 듣고. 아, 반갑습니다. 제대로 인사드릴 기회가 없었죠.”
마부석에 앉아있던 젊은 남자가 이쪽으로 등을 돌려서 손을 내밀었다. 싹싹해보이는 젊은 인상에 사람 좋아보이는 웃음을 얼굴에 띄웠지만 본능적으로 상대의 얼굴 여기저기, 이목구비의 특징을 기억하려는 듯 조금 약빨라 보이는 눈이 꽤 부지런히 움직이는 사내였다.
“알프레드 마일즈입니다.”
“하이엔 더츠백이오.”
“예. 알고 있습니다. 이름 높은 ‘검성’을 이렇게 뵙게 되는군요.”
“예전 일이라는 것도 알고 계실 텐데.”
내밀어진 손을 잡아 가볍게 악수해서 인사를 한 뒤 젊은 남자 알프레드는 마부석 옆 대신 아예 짐칸으로 넘어와 앉았다. 그의 눈이 짐칸 여기저기에 자리를 만들어 앉은 일행들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곤 다시 내게로 돌아왔다.
“일행이오. 소개는….”
“아뇨, 소개하시기에 조금 곤란한 분들이라는 걸 압니다.”
알프레드가 조금 뼈대가 있는 웃음을 보였다.
슬쩍 약간의 누름돌 삼아 손을 조금 더 힘주어 쥐었다가 놓았지만 그는 웃고 있는 얼굴에 미동도 없었다.
“듣는 귀가 가벼우시군.”
“상인은 정보가 생명이니까요.”
“하지만 그만큼 입은 무거웠으면 좋겠소만.”
“그야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상인들이란.
속으로 끌끌 혀를 차고서는 조금 물러앉았다. 알프레드는 아예 내게서 뭔가 정보를 캐고 싶은 모양인지 그 자리에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았지만, 그에게 마차 값 대신 말해주기엔 윈돌에서 보고들은 게 지나치게 위험한 정보들뿐이라 어떨지 모르겠다.
“스파타스로 가신다고요?”
“도중까진 길이 겹치니 거기까지 신세를 지기로 했소.”
“스파타스라… 쿠오 글라디우스에 가십니까? 하지만….”
쿠오 글라디우스는 이제 엿새 후에 개최한다.
지금 윈돌에서 출발해서 아무리 빨리 가 봤자 예선에 참가하는 것조차 아슬아슬할 터이다.
“참가할 건 아니고 일행들이 보고 싶다길래 가는 거요. 부탁받은 일도 있고 해서.”
“하하. ‘검성’께서 참가하신다면 대진표를 새로 짜야 할지도 모르죠. 검투사들 사이에서는 특히 더 유명하기도 하시고… 어떤 일을 부탁받으셨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미안하오만 그건 말씀드리기 어렵소.”
영주에게 은밀한 부탁을 받은 것이 있다.
단단히 밀봉되어있는 문서를 그쪽의 영주에게 전달하면 되지만 그게 어떤 내용인지는 나도 모르기도 하고. 알프레드의 눈에 조금 낙담이 비쳤지만, 곧 녹듯이 사라져버렸다.
“스파타스라… 좋은 곳이죠. 참가하시는 게 아니라면 관광이실 텐데, 꽤 즐거운 관광이 될 겁니다. 스파타스에는 자주 가셨습니까?”
“뭐, 남들 가는 만큼은 갔었소.”
일종의 귀향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햇수로 치면 몇 년 만인지조차 이제 가물가물하다. 그 녀석에게 권유받아 파티에 낀 뒤로는 아예 가본 적이 없어놔서.
“그쪽의 영주가 바뀐 뒤 처음 열리는 쿠오 글라디우스이니 아마 규모가 상당할 겁니다.”
“영주가 바뀌었다고?”
스파타스의 영주와 대면한 적이 한 번 있었다.
50명의 노예 검투사가 나선 사투장에서 가장 마지막까지 서 있었던 덕에 노예에서 풀려났을 때였던가. 스물이 죽고, 열은 병신이 되고, 나머지는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그때 영주에게 청동으로 만든 검을 받아 노예에서 풀려나지 않았다면, 난 아마 스파타스 어딘가의 검투장에서 죽어서 호랑이나 사자 밥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게 아무리 길어봤자 3, 4년 전이었던 것 같은데, 영주가 4년 만에 자리를 물려줄 정도로 늙었던가?
“스파타스에 무슨 일이 있었소?”
“귀족들의 일을 함부로 말씀드리기가 무척, 조심스럽습니다만….”
알프레드의 눈이 슬쩍 레오레를 향했다.
레오레는 스텔라, 나르콜렙시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어서 알프레드의 시선을 알아채진 못한 것처럼 보였다. 태평하긴.
“…갑자기 병에 걸려서 자리보전한 지가 오래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번에 아예 그 아들에게 영주 자리를 물러줬다고 하더군요.”
왕왕 있는 일이긴 하다.
하지만 용케 그 와중에 쿠오 글라디우스 같은 큰 행사를 신임 영주가 개최할 정신이 남아있었나. 인수인계만으로 바쁠 텐데.
“이미 국경을 직접 접한 알트슈타인이나 티르 타이른키에서 참가자가 들어온 모양이고, 거기에 더하여 컬브랜드, 라 샤펠에서도 스파타스로 들어오고 있는 이상 갑자기 취소하는 것도 어려웠겠죠. 재정 문제도 있고요.”
스파타스는 노예 검투가 주요 수입원인 기형적인 도시이니만큼 가장 큰 무투 경기를 한 해 날려먹는 것도 분명 영지에 큰 타격이 되긴 했을 것이다. 결국 어찌할 도리가 없이 추진했다는 얘기가 되는 건데.
“워, 워, 워!”
마부가 갑자기 다급하기 고삐를 잡아끌었다.
말이 놀라 투레질을 하면서 발을 멈췄던 것은 조금 앞서가던 다른 짐마차 행렬이 갑작스럽게 멈췄던 탓이다. 급정거라는 것이 늘 그렇듯이 상황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셋이 동시에 짐마차에 나뒹굴었다.
“무, 무슨 일이야?!”
가장 먼저 일어난 나르콜렙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두리번거리며 상황을 확인하려 했고, 자기도 모르게 스텔라를 감싼 레오레가 얼굴을 찡그린 채 바닥을 짚고 몸을 반쯤 일으켰다.
“…스텔라, 괜찮아요?”
“응.”
알프레드는 잠시 선두 행렬 쪽을 바라보았다. 그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를 보아 뭔가 일이 있긴 있었던 모양인데… 심각한 일 같아보이진 않았다. 앞쪽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짜증은 섞였을지언정 곤혹스러움이나 놀라움 같은 기색은 엿보이지 않았으니.
“제가 가서 보고 오도록 하죠.”
“같이 갑시다. 무슨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
“예. 그럼 감사하게.”
일단 행렬 호위를 돕는다는 명목으로 여기에 끼워탄 것이기도 하니 나몰라라 할 수만은 없는 노릇 아닌가. 흉검을 등에 매고선 알프레드의 뒤를 따라 행렬 앞쪽으로 향했다.
앞으로 나아갈수록 웅성거림이 더 짙어졌다.
가장 앞쪽 마차를 맡은 마부와 행렬을 총괄하는 상인 대표가 허리에 손을 짚고는 골 아프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알프레드가 나섰다.
“무슨 일입니까? 갑자기 왜 행렬이 멈춘 겁니까?”
“알프레드인가? 여길 보시게.”
짐마차 행렬의 대표인 듯한 턱수염을 짙고 단정하게 중년의 남자가 곤혹스럽다는 듯이 길가 한복판을 가리켰다.
“뭐야, 저건.”
뭔가가… 길가 한복판에 엎드려 있었다.
미동도 없고, 만(卍)자로 팔다리를 바닥에 딱 붙인 게… 죽었나 싶을 정도로 훌륭하게 드러누웠더라.
“저거 좀 치워 봐.”
“아, 난 싫어. 저 족속한테 걸리면 뼈랑 가죽만 남는다는 거 몰라?”
“야, 그거 전부 미신이야. 얼른 치워야 갈 길을 갈 거 아냐. 얼른 좀 치워.”
“난 싫다니까. 네가 치워, 네가!”
“…나도 싫어!”
더 골때리는 것은 인부들조차 섣불리 손을 대기 싫어하는 기색이었단 것이다.
그 시체(?)를 좀 더 주밀히 살핀 뒤에야 그 이유를 겨우 알 수 있었다.
아무렇게나 길바닥에 흩어진 하얀 머리카락 사이에 비죽 튀어나와 있었다.
길고 탐스러운… 토끼 귀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