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화 〉 6 / 마무리가 좋으면 뭐든 좋다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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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여자 둘이 침대에 엎드린 채로 끙끙거리는 광경은, 보기에 따라서는 좀 처참한 것일 수도 있다. 여자 둘을 그렇게 만들어놓은 게 자신이라면.
“…이건 불공평해!”
불공평하다고, 나르콜렙시는 이불 안에서 몸을 바슬거리며 투덜거렸다. 레오레는 말조차 제대로 잇지 못하고 파리한 안색으로 숨을 색색거리다가, 겨우 한 마디 했다.
“주인님… 그렇게 말씀드렸다고, 정말로 한숨도 안 재우실 줄은….”
“그보다 왜 검성 군만 쌩쌩한 거냐고, 불공평해.”
묘한 공감대가 형성된 것처럼 구는, 반쯤 시체처럼 되어버린 그 녀석들에 비해 나는 오히려 몸이 개운해졌다.
꽉꽉 눌러두었던 욕망을 노폐물처럼 배출한 것처럼 새 활기가 돋기도 하고. 정신을 제 안에 집중해보면 마물이 만족스레 으르릉거리는 것이 느껴지는 듯도 했다.
“둘 다 괜찮아?”
스텔라가 쟁반에 빵과 콩 스프를 받쳐왔다. 나르콜렙시와 레오레가 끙끙거리는 것의 원인을 다 안다는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날 그저 한번 지그시 응시하고는 둘의 머리맡에 식사를 내려놓았다. 먹을 수나 있을는지 원.
“고마워, 스텔라 님. 으으으. 근데 넘어가지가… 않을 것 같아, 콩 스프….”
“저도… 나름대로 산전수전 겪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건, 좀… 견디기가.”
끙끙거리며 이불 속에서 한번 몸을 무심코 움직였다가 괴로운 소리를 끙끙거리는 레오레의 모습은 꽤… 웃기도록 볼만했다.
“뭐하면 하루 더 쉬어갈까? 영주도 하루 정도 더 머무른다고 뭐라고 하진 않을 텐데.”
“끄으응… 하지만, 그… ‘쿠오 글라디우스’는 이제 얼마 안 남았잖아.”
“도중에 아무 일만 없으면 아직 여유는 있다고.”
“아무 일도 없을 수가 있을까요….”
레오레가 자조적인 웃음을 흘리는 게 들렸다. 여전히 안색은 핼쑥했지만, 확실히… 윈돌에 오기 전에도, 오고 나서도 트러블이 끊이질 않았었지. 이봐, 번개도 같은 자리에 두 번 떨어지지는 않는다고 했다고.
어깨를 꾹꾹 당기는 손길이 느껴졌다. 조금 키가 자란 스텔라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뭔가를 말하고 싶은 눈치길래, 특히 자기 쪽에 등을 돌리고 있는 레오레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 같아서 스텔라의 입가에 귀를 갖다댔다.
“오면서 여왕의 하녀라는 사람이 전해달래. 여왕이 당신에게 할 이야기가 있다고.”
조금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쪽은 그다지 할 이야기 같은 거 없는데.
레오레는 이 대화를 못 들었는지 그대로 엎드려서는 끙끙거리고 있었고.
“할 수 없구만. 일단 알았다.”
스텔라의 머리카락을 한번 쓰다듬고는 벽에 세워두었던 흉검을 등에 메었다.
“내일 출발하자고. 오늘은 대충 쉬고 있어. 난 좀 나갔다 올 테니까.”
“네? 나가실 거면 제가 호위… 으으으으!”
레오레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려다가, 다시 그대로 뻗어버렸다.
아랫배가 어지간히 아픈지, 끙끙거리면서 바들거리는 게 안쓰러울 지경이다.
“…대충 쉬고 있으라고 했잖아. 어디 나가거나 하지 말고 얌전히 디비져 자고 있어. 야, 스텔라. 이 녀석들 어디 못 나가게 네가 감시하고.”
옛썰, 하고 척 경례를 붙이는 스텔라의 볼을 한번 쥐었다가 놔주고서는 방을 나섰다.
이 나라의 여왕께서 할 말이 있다니, 일단 얼굴 정도는 비추는 게 예의겠지.
방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메이드를 따라 복도를 조금 걸었다.
눈물점이 돋보였다. 고양이처럼 조금 치켜오른 눈매에 단정한 얼굴을 한 메이드는 한번 고개를 의례적으로 숙였다가 든 뒤 앞장섰다. 융단이 깔린 복도롤 5분쯤 말없이 걷노라니 어색한 공기가 스멀거렸다.
영주성이 좀 넓었어야지. 어젯밤에도 목욕탕에서 녹초가 된 채로 두 녀석을 부축해서 방에 데려오느라 고생을 좀 했었더랬다.
참지 못하고 먼저 말을 꺼냈다.
“어이, 메이드 언니. 여왕이 대체 나한테 무슨 할 말이 있다는 거지?”
“모릅니다. 여왕께서 저 같은 일개 하녀에게 하실 말씀을 전하실 리가 없지 않습니까.”
일개 하녀라. 꼭 그렇지만도 않을 것 같은데.
앞서가는 메이드의 걸음을 살폈다. 평범한 메이드로는 보이지 않는… 싸우는 자 특유의 절도가 느껴졌다. 본능적으로 등 뒤의 상대를 경계하고, 자신의 싸움법에 적절한 거리를 두는 걸음.
알아낼 수 있는 것은 거기까지였다. 뭔가를 더 알 수 있을 것 같은 찰나에 메이드의 발이 멈춰섰기 때문에.
“이 방입니다.”
“흠… 여기라고?”
도착한 곳은 특별할 것도 없는 객실이었다.
특별한 손님이 머무르는 귀빈실도 아니고, 그저 영주성에 볼일이 있어 찾아온 일반 손님들이 잠시 기다리거나 혹은 묵어가기도 하는 그런 방이다. 지금 나르콜렙시와 레오레가 누워 있는 방도, 크게 차이가 나지 않을 것이다.
“드시지요.”
메이드의 채근에 흠, 하고 숨을 짧게 내쉬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등 뒤에서 소리도 없이 문이 닫혔다.
“…사실은 두 번 다시 당신과 마주치고 싶지 않았는데.”
문이 닫힌 뒤 이쪽을 돌아본 여왕… 메살리나 바노슈 드라쿨레아의 눈은 복잡한 심경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어떠한 해방감, 그리고 날 대하는 두려움과, 그럼에도 나와 마주쳐야만 하는 다소의 각오, 망설임 등이 어지럽게도.
“피차일반이야. 나도 댁이랑 그다지 오래 얘기하고 싶지 않아. 볼일이 뭐야?”
“…여전히 불경하기 짝이 없네. 난 이 나라의 여왕이야.”
“여기에서 여왕이라고 당당히 나갈 수 있다면 한번 계속 으스대보시지. 여왕 폐하가 두 발로 왔던가, 아니면 암퇘지마냥 네 발로 왔던가?”
“으….”
수치심과 분노가 타올라 얼굴을 확 붉힌 채, 조금 눈에 뿌옇게 수막을 드리우고는 날 노려보았다.
실크 장갑으로 그 물기를 걷어낸 후, 여왕은 용케도 숨을 내쉬어 분개를 거둬들였다. 여왕이라는 위치의 체면 탓인지, 아니면 내 등에 차고 있는 흉검 탓인지는 알 수 없다.
“볼일이나 말해.”
여전히 나에게 저 여자… 메살리나 바노슈 드라쿨레아는 동정의 대상조차 되지 않았으니까. 굳이 저 여자의 태도에 마음이 흔들리는 일 따위는 없다.
어쨌든 저 여자는, 자기 동생의 농간에 놀아났든 어쨌든 내게 사형 선고를 내리고 목이 떨어지게 한 장본인이 아니었나.
감정의 거스러미를 숨을 내쉬어 마저 정리한 여왕이 적개적인 눈을 치떴다.
눈을 왜 그렇게 떠. 한방 먹여줄까보다.
“…내 필두 기사가 널 따르고 있다고 들었어.”
“유스티카는 필두 기사였나? 뭐, 그랬지.”
“왜 그녀가 널 따르고 있는 거지? 왜 죽었다고… 날 속인 거고?”
“한 가지 확인을 하자고.”
나도 별로 기분이 편치만은 않았다.
여왕의 측근 같은 걸 달고 다녀봤자 세상 물정 모르는 귀족 아가씨라서 별로 도움되는 것도 없었다고. 오히려 은근히 이쪽이 치다꺼리하는 편이고. 애보기에, 귀족 아가씨에, 몽마라니.
“그 숲에 유스티카와 기사단을 파견한 건 네가 아니었다는 거냐?”
“…난 모르는 일이야.”
“대충 사정은 알겠구만.”
거짓말인 것 같지는 않았고, 경멸이나 모멸의 의사도 보이지 않았다. 대충 사정이 이해가 갔다. 만약, 그 일 또한 왕명을 참칭해서 죽은 발레리아가 꾸몄던 일이라면…
그녀로서는 어느 날 갑자기 측근 중 하나를 잃어버린 셈이 되었겠지. 그 탓에 마음이 깎여나가 더 동생에게 의지하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윌리엄… 아니 아이온 그 자식이 숲 습격에도 관여했더라면.
정말로 그 자식을 쳐 죽이지 않고는 참을 수 없겠다.
“유스티카는 머리가 명석한 여자다. 그 녀석이 왕궁에서 뭘 봤는지까지는 난 모르지만 자기가 남아있는 것이 오히려 네게 해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것이겠지. 아무튼, 일은 끝났다. 데려갈 거냐?”
“……아니.”
여왕은 입술을 깨물곤 조금 바들거리다가 겨우 말을 뱉어냈다.
언제부터 이 여자가 동생에게 휘둘리고, 아이온에게 이용당했는지까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제 와서 동정 따윌 해서 뭘 하겠어.
“레오레는… 그쪽에 계속 맡겨둘게. 어제 잠깐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어. 자신에게 손대는 일도 없고…”
어이쿠. 어제 손대버렸는데.
이 말은 하지 않는 게 좋겠지.
“…모욕을 주지도 않았다고. 그 아이가 그렇게 말한 이상, 나도… 일단은 그 아이가 하고싶은 대로 내버려두고 싶어. 대신, 너는 절대로 그 아이를 버리거나 하지 마.”
“네 명령 따윈 안 들어.”
“부탁이라고 들어도 좋으니까.”
여왕은 잠시 뜸을 들였다가 눈을 감았다.
눈을 덮은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난 앞으로도 아마, 널 결코 용서할 순 없을 것 같지만…”
누가 할 소리냐.
너나 나나 서로에게 결코 풀 길 없는 묵은 원한의 찌꺼기를 아마 죽을 때까지 달고 살 거다. 그러니까, 난 네가 당한 일에 대해서 한 점도 동정할 수가 없는 거라고.
“그리고 너도 날 결코 용서하지 못하겠지만.”
잘 알고 있네.
흥, 하고 팔짱을 낀 채 잠자코 듣고 있었다.
“적어도… 너에게 복수를 하고 싶은 생각 같은 건 없어. 너도 그랬으면 좋겠어. 발레리아에 관해서는 오히려 감사해야 하는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건 뻔뻔하다 여길지도 모르지만.”
“요컨대 내가 목을 따러 올지가 신경쓰여서 밤잠도 못 자고 있단 소리잖아? 그럴 일 없어, 귀찮아. 왕궁 습격 따위 두 번은 사양이다.”
여왕은 내게 더 손을 대지 않겠다고 하고, 나도 이 이상 이 여자에게 관여할 생각 같은 건 없다. 그렇다면 이제 더 만날 일은 없겠지. 등을 돌리곤 한 마디 보탰다.
“한가지 말해두겠는데, 유스티카는 언제나 널 걱정했다. 그 녀석에게 부끄러운 왕은 되지 마라.”
구태여 한 마디 덧붙인 것은 오지랖이라고는 생각하고 있다. 그럼 어쩔 건데.
뒤통수에 달라붙는 희미하게 흐느끼는 듯한 소리를 등지고, 방에서 나왔다.
이제 저 여자와 얽히는 일은 두 번 다시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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