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화 〉 6 / 마무리가 좋으면 뭐든 좋다 (1)
* * *
(1)
날이 밝은 뒤, 윈돌의 영주성에서 조촐한 연회가 열렸다.
아니, 차라리 식사 대접에 가까운 자리라고 해야겠다. 악단도, 무희도 없고 참가자라고 해도 영주가 초청한 손님은 넷에 불과했으니까.
“이런 옷은 슬슬 질리는데.”
“정 불편하면 갈아입고 오게나.”
“그럴 것까진 없고.”
예복 앞섶의 호박 단추를 조금 헐렁하게 푸는 것으로 참아주겠다고, 하이엔은 웃지도 않고 어깨를 으쓱였다. 식탁 중앙에는 커다란 멧돼지가 놓였고, 술이 한 잔씩 돌았다.
“생각 같아서는 좀 더 화려한 자리에서 자네의 공을 치하하고 싶었네만, 시국이 미묘하여 그럴 수가 없군. 이해해 주게.”
“떠들썩한 자리라면 당분간 학을 뗄 것 같아서. 이렇게 간소한 편이 좋아.”
멧돼지의 옆구리살을 기세 좋게 먹어치우면서 하이엔이 적당히 대답했다. 영주는 고개를 한번 끄덕이곤, 나머지 내빈들에게도 인사를 돌렸다.
“…비록 마라의 일족이라고는 하나, 오늘 윈돌에서 일어나던 음모를 막아내는 데 조력해준 것에 대해서는 감사를 전하오.”
“마라에게 별말씀을 다 하시네요, 인간 영주님께서는.”
고기보다는 단 과자에 관심을 보이는 스텔라를 대신해서 나르콜렙시가 살짝 웃으며 정중히 대답했다.
일부러인지, 그녀는 이 자리에서 서큐버스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뿔과 날개, 꼬리까지 전부 내보인 것은 그녀 나름의 예우일까, 아니면 어떠한 어필일까.
“그대가… 하이엔을 돕는 것은 개인적인 조력이라고 들었소. 가능하면 앞으로도 그를 도와주길 바라오.”
“아니, 누구 맘대로.”
하이엔이 발끈하여 항변했지만, 영주는 그다지 귀담아듣는 기색은 아니었다.
오히려 뽐내듯 한 얼굴이 된 나르콜렙시가 기세등등해져서는 입가에 웃음을 그렸다.
“뭐어, 저쪽이 좀 더 성의있게 나와준다면 저로서도 박정히 굴 수야 없지요. 물론 영주님께서도… 그 성의를 조금만 보태주신다면야.”
영주가 고개를 끄덕이고 행정관을 바라보았다. 행정관이 그다지 탐탁해 하지 않는 얼굴로 다시 눈짓하자, 병사 하나가 하이엔의 옆에 내용물이 묵직하게 든 자루를 내려놓았다.
“윈돌과… 아들을 구해준 내 나름의 성의일세.”
“행정관 나리가 고생을 하시겠구만.”
어차피 이 돈은 영지의 장부에는 기재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지출을 짜 맞추느라 행정관이 어떤 고뇌의 나날을 거듭할지 상상하는 건 꽤 어렵다.
“…동전을 맞추는 정도로 뒷수습이 끝난다면 그것만으로도 다행이겠지.”
영주는 한숨을 쉬었고, 행정관도 조금 불만스러운 얼굴이었지만 일단 그 말에 동의하는 모양새였다. 그도 그럴 것이, 궤짝의 동전 개수를 속이는 정도로 끝나지 않을 뒤처리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윈돌의 감옥이 갑자기 들이닥친 손님으로 만원이 되었다는 얘기는 들었지.”
“일단 그들은 구금해 놓았지만, 외부에는 보호라는 명목으로 입을 막아둔 상태네. 정보통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더군. ‘십수 년 전 교수형을 당한 것으로 알려진 아이온 W 크로니클의 부활’이라고 떠들면서.”
여왕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다니지 않은 게 어디겠나, 영주는 허탈하게 덧붙이고는 흑맥주를 한 잔 마셨다.
“유스티카 경께서도 수고하셨습니다.”
“…영주님. 저는 이렇다 하게 한 일이 없습니다.”
레오레가 침울하게 중얼거리면서 드레스 자락을 조금 쥐었다. 가슴이 파인 진주빛 드레스는 그녀치고는 꽤 대담한 의상 선택이었지만, 역시 전날 억지로 입었던 갑옷을 빙자한 수치스러운 의상보다는 상황이 나았기도 했고.
영주는 눈을 가늘게 떴다. 레오레의 눈이, 흑맥주를 연신 들이키는 하이엔에게 자꾸 가 닿는 것을 보았던 탓이다. 오늘 밤에는 무슨 일이 있겠군, 하고 생각하면서 그도 흑맥주를 한 잔 더 목 너머로 넘겼다.
“윈드 엘프들은 어쩌고 있지?”
“일단 신원을 파악하고 있네. 바람숲에서 왔다는… 그 족장 후계자라는 엘프에게 도움을 받고 있지. 개중에는 윈드 엘프 말고도 다른 부족 소속의 엘프도 섞여있던 모양이네. 가능하면 각자의 부족이 사는 곳으로 보낼 수 있도록 손을 써야겠지.”
엘프 중에는 윈드 엘프처럼 숲을 누비며 거칠게 살아가는 족속이 있는 한편, 마라에 속하는 다크 엘프처럼 마(?)에 발을 들인 이들도 있다.
가장 오래된 엘프라고 알려진 하이 엘프는 북해 너머의 니네베 섬에 자신들만의 나라 트리에스테를 세우고 모여 산다고 했던가. 서부 사수지 최남단에 위치한 트란 드라쿨루와는 말 그대로 이역만리다. 가볼 일은 없겠지.
“자네는 이제 어떻게 할 건가? 원한다면 이대로 윈돌에…”
“됐어. 모처럼 이렇게 되었으니 난 좀 더 각지를 돌아다녀 보겠어.”
하이엔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했지만, 속사정은 조금 복잡했다.
이전까지는 스텔라와 같이 다니지 않으면 구울이나 좀비가 된다고 생각되었지만, 지금은… 그 정도로 끝나지 않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억누를 주인과 함께 있지 않으면, 제 심장 역할을 하는 마물이 무슨 짓을 벌일지 알 수 없다는 점이 더 컸다. 최소한 그걸 억누를 방법을 찾기 전에는 팔자 좋게 한군데에 눌러살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뭐, 아직 젊으니 그것도 좋겠지. 갈 곳은 정했나?”
“아직.”
“흠.”
그런 속사정을 짐작했을 리 없는 영주는 그저 젊은이의 치기 정도로 여긴 모양이었다.
하이엔도 자신의 사정을 구구절절 늘어놓는 성격이 아니었고, 영주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럼 ‘스파타스(Spathas)’에 가보는 건 어떤가?”
“스파타스?”
스파타스는 조금 더 북쪽으로 올라가면 나오는 도시이다.
물론 모를 리는 없었다. 검과 검투로 유명한 도시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의 고향이나 다름없는 곳이었으니.
“별로 가고 싶은 동네는 아닌데. 왜?”
“일주일 후에 무투 대회가 열린다네.”
“아… 그 ‘쿠오 글라디우스(Quo gladius)’인가 하는 그거 말이지? 스파타스까지는 대충 잡아도 닷새야. 여기서 거기까지 가다 보면 예선이고 뭐고 다 끝났겠는데.”
사실 그다지 참가할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뭣보다 눈에 띄는 건 슬슬 사양하고 싶다고. 하지만 나르콜렙시의 생각은 조금 달랐나보다.
“쿠오 글라디우스? 그 무투대회가 그렇게 유명한가요?”
“흠. 서부 사수지에서는 꽤 유명한 편이오. 인접한 컬브랜드나 티르 타이른키, 알트슈타인은 물론이고 더 북쪽에 있는 나라에서도 참가하려고 오는 이가 매년 있을 정도니.”
하이엔을 바라보는 나르콜렙시가 눈을 반짝였다. 그 옆에 앉은 스텔라도 같이 눈을 반짝였다. 그는 속으로 생각해야 했다. 젠장. 텄다, 텄어.
조금도 가고 싶지 않았지만, 이렇게 되었다면 그다지 도리가 없지 않나. 하이엔은 한숨을 푹 내쉬고는 어깨를 늘어뜨렸다.
“뭐, 여비도 있겠다, 가끔은 고향에 가보는 것도 괜찮겠지. 어이, 유스티카.”
유일하게 쿠오 글라디우스의 화제에 대해 가타부타 반응이 없는 레오레를 부르자, 한박자 늦게 그녀가 반응했다. 마치 나쁜 짓을 하려다가 들킨 것 같은 반응이어서, 하이엔의 눈이 의아하다는 듯이 꿈틀거렸다.
“네? 아 네. 네. 무슨 일이신지요, 하이엔 님.”
“반응이 왜 그 모양이야? 네 생각은 어떠냐고. 스파타스로 갈지 어떨지를 지금 얘기하고 있잖아.”
“스파타스? 아, 네. 스파타스… 예에, 그다지… 저도 찬성입니다, 예. 좋은 곳이죠.”
“…뭔 걱정이라도 있냐?”
아무래도 마음이 콩밭에 가 있는 듯한 그 반응이 야리꾸리해서 조금 조심스럽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꽤나… 눈앞의 일에 집중하질 못하는 것 같다. 아직도 어제의 그 충격이나 술기운이 덜 깼나?
“아뇨, 아무것도….”
이런 일에는 아무래도 정치적인 감각이 있는 영주 쪽이 더 눈치가 빨랐다.
“여왕 폐하를 걱정하는 것이오?”
“…영주님.”
정곡을 찔렸나보다. 크게 한번 어깨를 움찔거리곤 레오레는 드레스 자락을 꽉 쥔 채로 입술을 깨물었다가, 겨우 말을 꺼냈다.
“…사실 그렇습니다. 물론 여왕 폐하의 사정을 아는 것은 아주 극소수이겠지만… 이번 일로 얼마나 마음의 상처를 입으셨을지는 전 차마 상상할 수가 없고, 또…”
하이엔을 슬쩍 바라보는 유스티카의 눈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하이엔은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갈등하고 있었다. 스스로도 어찌할 바 모르는 걱정과 마음 사이에서.
“미리 말했지만 넌 내 노예다. 그러니까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단 뜻이야. 여왕이 그렇게 걱정된다면 노예인 너는 도망가는 길밖에 없겠지. 그럼 난 굳이 귀찮아서 쫓진 않을 거고.”
사실상 네 마음대로 하라는 말인데도, 오히려 레오레의 표정은 한층 어두워졌다. 어두워진 가운데 입가에 뜬 미소가 자못 썼다. 역시 하이엔은 자신을 동료로 보지 않았던 걸까, 하는 생각은… 생각 외로 아프게 가슴을 찔렀다.
이상한 기류를 감지한 영주가 좌중을 둘러보고는 서둘러 화제를 정리했다.
“일단 스파타스로 가기로 결정되었다면 오늘 밤은 편히 쉬는 게 좋겠군. 행정관에게 마차 편을 알아보도록 해 주겠네. 예선에 출장하기는 시간상 어렵겠지만 뭐, 구경은 할 수 있지 않겠나.”
쿠오 글라디우스에 참가하는 건 마뜩찮은 일이었지만, 구경이라면 얘기는 다르지.
느긋하게 구경하면 조금 좀이 쑤실지도 모르지만, 어차피 ‘공인된 싸움판’만 열리는 게 아닌 것은 어디에서나 마찬가지 아닌가.
오늘 밤이 지나, 날이 밝으면 출발한다.
검과 검투의 도시, 스파타스로.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