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화 〉 5 / 흉검의 헬하운드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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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표르디.
대지와 생명을 관장하는 여신 ‘샬 피요르’의 날이 되었다.
그리고 생명의 탄생을 축복하는 그 날에, 가장 먼저 눈을 뜬 것이 아이러니하게도…
이 세상을 창조한 여신 라에라드의 대적자, ‘마라’ 종족의 왕이었다니.
89위의 악마란 율령교회의 성전에 기록된 고위 악마들을 이름이니 그들은 태초의 거악인 망각의 용 ‘니힐리그’로부터 태어난 89명의 분신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그중 둘… 마왕 ‘나잘슈파르’와 ‘안드라스’가 이 자리에 있다.
마왕 나잘슈파르. 퇴폐와 향락, 그리고 축복받지 못한 잉태를 관장하며, 같은 열의 마왕인 시트리, 제파르와 함께 몽마를 다스리는 왕이라고 알려졌다.
마왕 안드라스. 파괴와 불화, 증오를 관장하는 이 마왕은 검은 개와 불타는 검을 부리고 천사의 날개를 가졌다고 전해진다.
자신들이 ‘스텔라’라고 불렀던 그녀가 마왕의 후계자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말로 그 진실이 드러났을 때, 레오레에게는 그 진실이 결코 적지 않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어찌할 셈이지? 동포 안드라스여. 제대로 된 힘도 없는 네가, 사역마도 없이 내게 대권을 요구하는 것인가? 설마하니, 영락했다고는 해도 마왕의 일각인 네가 인간에게 감화되었을 것으로 생각하기도 어렵거늘.”
“그럴 생각은 없어. 나잘슈파르. 다만….”
스텔라가, 아니 안드라스가 처음 보는 표정을 지었다.
언제나 멍하고 나른한, 마치 어린애처럼 순진하게 굴던 스텔라는 그 이름 그대로, 그녀가 관장하는 영역… 파괴와 불화를 추구하려 하고 있었다.
“한 시대에 마왕은 오직 한 명. 네 말대로 내가 마왕의 일각이라면 지금 왕좌에 올랐다고 선언한 너를 좌시할 수 없다는 정도는 알겠지?”
“유치하고 어처구니없지만, 실로 마라다운 행동 원리로구나.”
나잘슈파르 또한 웃었다.
다른 왕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왕다운 이유이며…
또한, 투쟁을 갈망하는 마라의 본능에 합치하는 이유였다.
스텔라가 마왕으로서의 힘을 가지고 있든, 그렇지 않든, 그것은 다른 문제이다.
마라란 그런 종족인 것이다. 존재하기 위해서는 투쟁이 필요하고, 강자에게 복종하며, 힘이야말로 모든 권위를 우선하는 종족. 그것이 마라다.
스텔라의 머리가 옆으로 움직였다.
그 외에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는데, 하이엔을 제압하고 있던 E의 그림자가, 멀리 튕겨나갔다. 창과 갑주, 그리고 마갑을 빈틈없이 갖춘 말까지, 전부.
“언제까지 누워있을 생각이야.”
“겨우 본성을 조금 끄집어냈냐, 꼬맹이. 시키지도 않았는데 튀어나와서는.”
구멍이 난 몸인 그대로 하이엔이 떨어진 흉검을 붙잡고 일어섰다.
입에 고인 죽은 피를 뱉어냈지만, 어차피 상관없다.
이미 그는 죽어있었고, 그 몸뚱이는 송장이니까.
“몸에 구멍이 났는데도 부려먹을 생각 만만이라니, 사람 다루는 게 험하잖아.”
“가만히 죽어있는 건 성격에 맞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 주제에 눈썰미는 있고말야.”
이상한 일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아무리 언데드 상태였다고 해도 이 정도 타격을 받았다면 전투불능에 빠졌을 텐데, 지금은 상처에서 피와 고름이 새고 있는데도 검을 휘두를 수 있을 것 같은 힘이 솟아나고 있었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다.
E가 불러낸 창기사가 꿰뚫은 상처조차, 다시 살이 차오르고 있다.
손은 이미 창에 뚫렸던 흔적조차 남지 않았고, 가슴팍의 상처에도 새살이 차올라 찢긴 옷을 제외하면 흉터도 없이 아물었다.
“호오.”
나잘슈파르가 작게 감탄했다.
“그게 네 새 사역마인가.”
“누굴 사역마 취급이야? 이 악취미 계집이.”
으르릉거리는 하이엔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나잘슈파르는 긴 손톱으로 금발을 한번 넘겼다. 손톱 사이에 사락사락하고, 잘린 머리카락 다발이 아래로 떨어지다가, 허공에 빳빳하게 서서 정지했다.
“그럼 이쪽도 이렇게 하지.”
“모두 이쪽으로.”
스텔라가 미간을 모아 찌푸리고는 손을 뻗어 제 앞에 얇은 막을 전개했다.
레오레와 바유는 본능적으로 그 막 안으로 숨어들었고, 요슈아는 성검의 빛으로 그림자를 겨우 몰아내고선 제 앞에 비슷하게, 푸르른 얇은 막을 펼쳤다.
사방팔방으로 나잘슈파르의 머리카락이 흩뿌려졌다.
바유의 눈이 크게 뜨였다.
“안 돼! 이건…! 안 돼!”
귀빈, 노예, 하인…
그림자에 붙들린 실내의 모든 이들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흩뿌려진 머리카락이 그들의 정수리에 파고들었다.
“이… 이건 약속이 다르잖습니까, 아이오오오오온! 아이온 크로니클!”
영주의 아들 브란마저도 예외가 아니었다.
당혹에 가까운 비명을 지르며, 그의 갈색 머리카락이 자라난 정수리를 비집고 금색의 머리카락이 파고들었다.
두개골 틈바구니를 간단히 헤집어 들어가 뇌에 뿌리를 박은 브란의 몸뚱아리가, 엉망진창의 신호를 보내는 뇌에 의해 팔다리로 꼴사나운 댄스를 추었다.
황금이었다.
그들의 입에서 넘쳐흐르는 황금이 발버둥치는 이들의 몸을 전부 덮었다.
이미 전신이 황금으로 덮였는데도 눈과 코, 입, 귀… 인체의 모든 구멍에서 녹은 황금이 쏟아져내리고 있었다.
윈드 엘프, 인간, 누구나 할 것 없이.
바유는 경악에 찬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황금을 뒤집어쓴 윈드엘프에게 손을 뻗으려 했다.
“만지지 마!”
나르콜렙시가 다급하게 소리질렀다.
상처는 전부 나았음에도, 그녀는 비지땀을 흘리며 바닥에 주저앉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지금 저들에게 함부로 손을 댔다간… 뒷일이 어떻게 될지 장담하지 못해, 정신 똑바로 차려!”
“흠.”
그리고 나르콜렙시의 그 태도는, 몽마를 다스리는 왕에게는 마뜩치 않은 것처럼 보였다.
황금색의 손톱을 우아하게 물결치면서 나잘슈파르는 나르콜렙시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꽤 고위의 몽마로 보이거늘… 왜 내게 맞서는 것이냐, 아이야? 물론 나는 이유를 알고 있다. 네 안에 가소로운 것이 담겨있구나. 그렇다면 이 자리를 모두 정리한 뒤에, 네가 마라로서 다시 설 수 있게 하는 것이 왕이자 어버이로서의 책무가 되겠구나.”
나르콜렙시를 향해 천천히 손을 뻗는 그녀의 손톱 끝이 탁 튕겼다.
나잘슈파르의 눈이 불쾌한 듯이 일그러졌다. 그녀의 발치에는, 검은 깃털 하나가 꽂혀있었다. 스텔라는 한 손으로 마왕을 겨눈 채 단호하게 목소리를 냈다.
“네 상대는 나야, 나잘슈파르.”
“안드라스…!”
피막의 날개가 펼쳐졌다.
검은 깃털의 날개도 함께 펼쳐졌다.
“좋다, 상대해주마. 여흥으로서는 괜찮겠지. 게다가 네 힘까지 받아간다면, 내 위(?)는 더욱 공고해질 터.”
“그렇게는 안 될 거야. 넌 여기서 폐위되고, 퇴거하게 될 테니까.”
“할 수 있으면 한번 해 보거라!”
나잘슈파르의 몸이 단 위에서 떠올라, 손톱을 휘둘렀다. 황금색의 칼날이 질풍을 끌고 몰아닥치는 것을 스텔라… 안드라스는 날개를 크게 펼쳤다. 순간 불아닥친 돌풍이 황금색 칼날을 흩어냈다.
핏, 핏, 핏, 핏…
하지만 돌풍을 뚫고 들어온 네 갈래 칼날이 스텔라의 작은 몸에 상처를 내었고 푸른 피가 치솟아올랐다.
나잘슈파르는 입가에 고혹적이면서도 요염하게, 비웃음을 띠었다.
“거의 동등하나, 내가 조금 앞서는 것 같구나. 너와 나의 격은 동등하지만 힘의 차이가 생겨나는 이유는 뭘까.”
“글쎄. 하지만 네가 방심하고 있다는 건 알겠어. 그 허영은 네 지울 수 없는 약점이지.”
스텔라가 손을 휘젓었다. 비수처럼 날아든 깃털이 그대로 나잘슈파르의 이마에 날아가 꽂혔다. 한순간 뒤로 크게 젖힌 그녀의 머리였지만, 다시 앞으로 시선을 내렸을 때 그녀의 얼굴은 실망으로 얼룩져 있었다.
“일부러 보인 빈틈을 제대로 노리지도 못할 정도로, 그리고 그것을 자랑스러워할 정도로 영락한 것이냐? 무지몽매하구나. 가엾은 것.”
“힘을 쓰는 것이 워낙 오랜만이라서. 안심해. 준비운동은 이제 끝났으니까.”
손톱 끝으로 미간에 박힌 깃털을 뽑아냈다. 마왕의 미간을 타고 흘러내린 푸른 피가 입술을 적셨다. 제 피에 젖어 푸르게 물든 입술이 가소롭다는 듯이 웃음을 덧그렸다.
스텔라의 등 뒤로 거대한 새의 형상이 그림자처럼 드리웠다. 눈만이 황황히 빛나는 가운데, 반투명한 검은 새의 형상이 거대한 날개를 펼치고 불길한 울음소리를 내었다.
“…나잘슈파르. 이번엔 내 차례야.”
이번에는 스텔라의 발이 바닥을 강하게 박찼다.
그녀의 등 뒤로 떠오른 새 또한 날아오르고, 상복 같은 드레스의 자락이 펄럭였다.
“안드라스!”
반쯤 쥔 주먹 사이에서 붉은 화염이 타올랐다.
율령교회의 성전에 의하면… 89위의 악마 중 한 명 안드라스는, 불타는 검을 사역마로 부린다고 했지.
이글거리는 불길은 스텔라의 손안에서 한층 맹렬한 열풍을 일으키며 마왕을 향해 짓쳐들었다. 눈두덩만을 한번 까딱거린 마왕이, 한 손만을 들어 그 불덩어리를 받아내었다.
“미지근한 불꽃이구나. 네가 자랑하던 홍염은 고작 이 정도였더냐, 안드라스.”
“자랑하는 손톱이 조금씩 녹고 있는 것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둔해졌어? 재활이 필요한 건 네 쪽이 아닐까.”
황금과 홍련.
양자가 서로를 휘감으려는 마찰이 스파크를 튀기며 거칠게 삐걱거렸다. 나잘슈파르는 빈손을 스텔라의 머리를 향해 휘둘러갔다. 빈손이었지만, 그것이 얼마나 위력적인지는 이 자리의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 쪽을 놓치지 않은 스텔라 또한, 날개를 휘둘러 뻗쳐오는 손톱에 맞대응했다.
카각, 카각, 카가각…!
“큭…!”
스텔라의 날개 한쪽이 크게 찢겼고, 나잘슈파르의 손톱 끄트머리가 바스러져 황금빛으로 흩어졌다. 스텔라의 얼굴에, 한순간 당혹의 빛이 서렸다.
“미지근하다고 하지 않았느냐.”
불길의 검과 대치하고 있던 손톱이 마침내 크게, 한번 호를 그리며 휘둘러졌다.
상복 자락이 갈기갈기 찢기며 푸른 피가 튀고, 그 뒤를 이어 불의 검이 튕겨올랐다.
한쪽 어깨와 팔에 커다란 손톱자국을 입은 채 그 팔을 늘어뜨리며 스텔라가 나잘슈파르의 앞에서 비틀거렸다. 황금의 마왕, 그 입가에 승리의 미주를 머금었다.
“흐음. 감개 한 점도 느껴지지 않은 하잘것없는 승리였다만… 조금쯤 재미있었다.”
거대한 손톱이 나잘슈파르의 머리 위로 춤추었다.
그것을 스텔라의 머리 위에서부터 내려치면서, 마왕은 승리를 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