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헬하운드-48화 (48/79)

〈 48화 〉 5 / 흉검의 헬하운드 (2)

* * *

(2)

얼음처럼 시리게도 푸른 날에 눈송이 같은 예리함이 하얗게 섰다.

자신이 알던 그 예전, 그 녀석이 들고 있었던 그대로다.

하지만 검을 쥔 손만은 그 녀석과 다르다. 에스텔에 비하면 아직 한참 수련이 부족한, 솜털이 보송보송한 애송이의 손이 아닌가.

“지금은 그걸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닐 텐데. 도움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나? 검성.”

“하여튼 이놈이고 저놈이고….”

짜증으로 성미가 울컥거렸지만 일단 하는 수 없다.

고양이 손이라도 빌고 싶은 심정이었던 것도 맞으니까. 잠깐의 공동 전선 정도는 참아줘야겠지.

하지만 그 전에 짚고 넘어가야 할 건 있다.

“정 그러고 싶다면 난 한 가지 더, 지금 확인할 게 있다.”

“뭐지?”

한층 목소리가 낮아졌다.

아무래도 좋다면, 또한 아무래도 좋은 문제일 수도 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칼끝을 무디게 할 변수라면, 분명히 해 둬야만 한다.

그 정도의 상대인 것이다.

“나르콜렙시… 몽마를 벤 건 너냐?”

“…어느 여인에게 술수를 부리던 몽마 말인가? 왜 그걸 묻지?”

이놈이 맞군.

그러고보면 나르콜렙시는 그때 성검 운운하는 말을 했었다.

짜증이 울컥 솟았지만, 이 녀석의 입장에서 보면 여자에게 되먹지 못한 짓을 하려던 서큐버스에 지나지 않았겠지. 그렇다면 이 자리에서 그것을 추궁할 수는 없다.

“흥, 네놈이라는 걸 알았으면 그걸로 됐다.”

멍청한 몽마 같으니.

아무리 무방비한 상태였다 하더라도, 사람을 찜찜하게 만들고 말야.

칫, 하고 혀를 차고는 성기사에게 향했던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어차피 지가 칼 맞은 빚을 내가 갚아준다 해도 나르콜렙시는 기뻐하거나 하지 않을 것이다.

“성탁기사단의 애송이. 발목이나 잡지 마라.”

“누가 할 소리.”

요슈아라는 놈은 가당치도 않다는 듯이 웃지도 않고 낮게 읊조린 뒤 칼끝을 아이온을 향해 겨누었다.

E라고 했던가, 정체를 전혀 알 수도 없는 수도녀가 단 위에서 움직이려는 것을 아이온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저 여자 또한 아이온과 행동을 함께 한다는 점에서 평범한 수도녀일 리가… 없겠지.

“율령교회는 관용을 교리로 하건만.”

아이온은 한탄하듯이 한 번 읊조린 뒤 약간 옆으로 돌리고 있던 몸을 정면으로 섰다.

옛날부터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놈이긴 했지만, 지금에 와서는 우리와 함께 행동했던 그 예전의 진의조차 믿을 수 없게 되어버렸다.

요슈아는 반박했다.

“관용을 베풀기 위해서는 진실이 앞서야 하는 법이다. 여신, 라에라드께서 그렇게 가르치지 않으셨나?”

“진실이라.”

진실이라는 한 마디.

아이온은 입가에 슬쩍 웃음을 머금었다가 곧 지웠다.

자기도 모르게 가면이 흔들렸다가, 그 가면을 바로잡는 것처럼 간단히.

“성탁기사단의 요슈아 세룰라이트. 당신의 진실이란… 뭐, 예전의 제가 그랬듯 율령교회의 말을 진실이라 믿어 의심하지 않고 있을 테니 상관없겠고. 하이엔, 그렇다면 네 진실은 뭐지?”

“일이 이상하게 되어가니 목숨 구걸하냐? 교회 놈들끼리의 시시한 신학 담론에 날 끼워 넣지 마. 내 진실은 여기서 네놈을 쳐 죽이는 것뿐이니까.”

으르릉거리는듯한 대답에, 어르는듯한 한숨이 새었다.

누굴 동정하듯이 보는 거야, 이 망할 자식이.

발이 움직였다. 어차피 그 망할 결계만 날려버렸다면, 목을 날리는 건 늘 내 역할이었다!

“벼락의 도끼여Tuagh dealanaich!”

“우왓!”

아이온의 머리를 노리고 달려들려던 찰나, 눈앞에 벼락이 내리꽂혔다.

커다랗게 파인 자국이 입을 벌렸고, 파직거리는 스파크가 튀어올라 모골이 송연했다.

말 그대로 거대한 도끼와도 같은 벼락을, 누가 불러냈는지는 뻔하다.

“이제 그만 놀라고 했을 텐데요, 아이온! 표르디가 되기까진 이제 5분도 채 남지 않았다고요!”

표르디?

볼룬디의 다음날인 표르디. 아흐레의 일주일 중 8일째.

이 자식들, 날짜가 바뀌는 순간 뭔가 하려는 건가? 단 위에 E와 함께 서 있는 왕제의 얼굴은 초조함과 불쾌감으로 물들었다.

“표르디… 피요르의 날… 대지와 생명을 관장하는 여신….”

요슈아가 옆에서 뭔가 미심쩍다는 듯 중얼거렸다.

지금이 그런 헛소리를 중얼거리고 있을 때냐고.

“어서 언니를 데려와요! 이미 잡아두었겠죠?!”

“그게 말입니다만,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예정이 바뀌었습니다.”

“그러니까 무슨 예정이… 끅?!”

푸욱, 하는 파열음이 낭자했다.

E의 손이 움직였던 것이다. 수도녀의 손이 왕제, 발레리아의 등줄기를 파고들었다.

한 방울의 피도 새지 않은 채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커다랗게 뜨인 그녀의 등줄기, 그 어딘가를 휘젓은 E가, 다시 손을 빼냈다.

왕제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손을 바들거리면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손안을 감촉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내… 내 마나맥, 이…”

“예에. 잠시 왕제 전하의 마나맥을 마비시켰습니다. 괜히 날뛰시거나 하면 여러 가지로 곤란하니까요.”

“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에요, 아이온!”

참담한 얼굴로 외치는 왕제 발레리아의 얼굴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녀가 그렇게 경멸하고 모독하며 능욕했던 그녀의 언니가 우는 얼굴과… 흡사했다.

“아이온, 당신… 설마…”

그제야 그 생각에 미친 모양이다.

자신이 배신당했다는, 그 발상에 이제야 다다랐다고.

“싫, 어… 그, 그건 싫어, 하지 마, 하지 말라고…! 내가, 여기까지 오기 위해 무슨 짓을 했는데, 언니, 아빠, 언니이이이…!”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는 왕제는 어린아이나 다름없었다. E가 어렵지 않고 그녀의 몸을 제압해서 등 뒤에서 붙든 사이 ‘알’을 손에 쥔 아이온이 계단을 올랐다. 마치 왕관을 들고 계승자에게 향하는 사제와도 같이.

“둘까보냐! 따라와, 성탁!”

“내게 지시하지 마라!”

왕녀는 마법을 봉인되었고, E는 그런 왕녀를 붙들고 있다.

아이온의 등은 지금이야말로 텅 비었다. 뭔 짓을 꾸미려는지는 몰라도…!

두근,

아이온의 손에 들린 알이 한 번 더 맥동쳤다.

성검을 쥐고 한발 먼저 달려들려던 요슈아의 발밑, 그림자가 질량을 얻어 자라났다. 눈을 조금 크게 뜬 요슈아가 성검을 휘둘러 떨쳐내려 한다.

“이, 건…!”

성검의 빛이 잠시 불경한 그림자를 밀어냈지만 성검을 쥐지 않은 발목에 집요한 그림자가 감겨붙었다. 요슈아가 눈을 한번 타오르는 불길 같은 푸른색으로 빛냈다.

“성검 빙의(Blade Advent)!”

일전에도 본 적 있는 요슈아 세룰라이트의 성탁기사단으로서의 힘.

엑스페란사에 지난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빛의 폭풍이 휘감겼다.

아무데나 굴러다니는 롱소드와는 격이 다른 검이니만큼 솟구치는 빛의 폭풍을 아무 무리 없이 받아내면서, 휘몰아치는 황황한 빛의 칼날이 천장까지 뻗쳤다.

“아이온 W 크로니클, 끝이다!”

내려쳤다.

신의 선고처럼 내려오는 참격을 등진 채 눈길조차 돌리지 않는 아이온은, 그저 ‘지금 자신이 해야 할 일’에 철저하게 몰두하고 있을 뿐이다.

마치 목 위에서 떨어지는 죽음이 방해할지라도.

그 누구라도, 아이온의 패배를 확실시하게 생각했을 때. 귓가에 히힝거리는 말울음소리가 스쳤다.

“저 자식!”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예의 흑기사가 손에 든 검은 창을 휘둘렀다.

빛의 검을 막아내는 어둠의 창이, 공중에서 부딪혀 서로를 밀어내기 위해 길항하는 사이, 요슈아의 시선은 경악으로 물들어 흑기사가 나타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림자가 있을 수 없는 위치, 빛의 가장 아래에 길게 늘어진 E의 그림자에서, 검은 말을 탄 흑기사가 당당히 서 있었다.

“89위의 악마… 중 한 명… 엘리고스…! 크악!”

검은 투구 안에서 흉흉한 눈을 불사른 흑기사가, 커다랗게 팔을 휘저어 결국 빛의 검격을 튕겨냈다. 빛의 검이 기세가 한풀 꺾이자, 기다렸다는 듯 요슈아의 발 아래 그림자에서 사방팔방으로 뻗치는 촉수가 그의 팔다리를 잡아챘다.

“검성!”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잖아!

“날 무시하지 마라, 이 사기꾼 자식아!”

아이온은 그사이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첫 계단을 밟고 뛰어올랐다.

이번에야말로 잡아버리겠다고, 정말로 목숨을 끊어버릴 각오로 검을 휘두르기 위해 한껏 팔을 뒤로 당겼다.

하지만 내가 간과한 사실이 있었다.

내가 놈의 목숨을 빼앗겠다고 결심했다면, 놈도 똑같이 결심할 수도 있을 거라는 사실.

콰득. 우드득. 우직…

등 뒤에서 파고 들어온 창날이 배로 튀어나왔다. 컥, 하고 복근을 뚫고 튀어나온 창날을 내려다보았다. 검은 창이 내 피로 번들거렸다.

“…미안하다. 하이엔.”

검은 기사가 창을 뽑아내고는, 말발굽이 내 뒤통수를 짓눌렀다. 창끝이 푹 파고든 손등에서 흉검이 떨어져 바닥을 뒹굴었다.

“윌리엄, 이 자, 식…!”

“잠시면 된다. 전부 끝날 거야.”

자기도 모르게 옛 이름으로 부르자 아이온은 쓰게 웃으면서, 아직도 E의 손에 잡혀 버둥거리는 왕제에게 다가갔다.

“나, 나는 요람으로는… 모자라요, 난, 난 안 된다고, 당신이… 그랬잖아요? 이 알의 요람은… 음죄가 가득 쌓인… 여인의 몸이 적합하다고, 그래서… 그래서 언니를 그렇게, 한 거잖아요, 난 하고 싶지 않았다고!당신, 전부당신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야!”

마치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죄인처럼 눈물 젖은 얼굴을 비통하게 일그러뜨린 채 탄원하는 왕제 발레리아를, 누가 이 나라의 최고 실세로 볼까. 아이온은 그저 엄숙한 표정으로, 양손에서 푸르게 맥동치는 마왕의 알을 왕관처럼 받쳐들었을 뿐이다.

그야말로, 해야 할 일을 한다는 신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아이온은 조용히 왕제의 자기변호를 잘랐다.

“왕제 전하. 하오시면 한 가지 여쭙지요. 육친이자 여왕 폐하를… 그렇게, ‘요람’에 적합하도록 능욕하는 동안, 정작왕제 전하의 옥체에 쌓인 음죄는 어떻게 되었을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혹시라도 계승에 문제가 될까 봐 성직자도 찾아가지 못하시고 전전긍긍하는 동안 쌓인 왕제 전하의 그 음죄 말이지요.”

비통한 탄원은 분노의 일갈로 뒤바뀌었다.

깨물어서 뜯어버리겠다는 듯 이를 드러내고 악을 쓰는 왕제의 얼굴은… 새삼, 그녀의 언니와 지나치게 닮았다.

“당신, 당신이 전부 시킨 거잖아…! 당신도 똑같은… 공범이야, 이 배신자, 사기꾼! 아이온 W. 크로니클, 악마 숭배자아아아!”

“예에, 전부 맞습니다. 제 몸은 지옥의 가장 깊은 구덩이에 떨어지겠지요. E.”

E가 한껏 웅크려있던 왕제의 몸을 억지로 세우자, 왕제의 얼굴에 절망이 드리웠다.

가볍게 한탄과도 같은 기도를 누구에게인지 알 수 없도록 한 번 읊조린 뒤, 왕제의 가슴에 천천히, 아이온은 ‘마왕의 알’을 밀어넣었다.

마치 물에 가라앉는 것처럼 알이 부드럽게 살을 파고들었다. 그를 바라보는 왕제의 얼굴이, 절망에서 비탄으로, 그리고…

쾌락과 환희에 물들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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