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화 〉 4 / 하이에나와 늑대의 시간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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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크게 칼에 베인 늑대원숭이는 쓰러졌지만, 그 목숨까지 앗지는 않았다.
이긴 정도로 충분하지. 숨을 고르고 흉검을 다시 등으로 되돌렸다.
늑대인간은 초월적인 재생력을 갖고 있다고 하지만 완전히 수화하지도 않은 늑대원숭이는, 적어도 지금은 그 정도의 재생력을 발휘해 몸을 일으키거나 하지는 않았다.
발로 툭툭, 피로 번들거리는 옆구리를 두들겨보고는 한숨 쉰 뒤 놈을 지나쳤다. 애 먹이기는. 아직도 어깨가 덜렁거리는 것 같다. 뭐, 팔이 떨어지지 않은 악운에 감사할 수밖에.
“크, 으아아, 아아악!”
등 뒤에서 포효라는 게 폭발했다.
돌아볼 필요도 없다. 상황은 충분할 정도로 알았다.
요컨대, 검사도 아니고, 전사도 아니고, 그저 한 마리 짐승에 불과하다면.
그 빈틈투성이 가슴팍에 흉검을 박아넣는 것으로 족하단 얘기다.
우직, 우지직, 우직, 우직.
끈적하게 점도가 높은 피가 칼날을 타고 흘러내렸다. 더러운 감촉이었다. 쓴 사탕을 문 것처럼 중얼거렸다.
“짐승 새끼. 뒈지고 싶다면 뭘 못해?”
원숭이처럼 팔을 높게 들어올린 털북숭이 늑대가 가슴팍에 칼이 박힌 채 카아악, 하고 단말마 같은 비명을 토했다. 네가 자초한 일이다.
우직, 우직. 왼쪽 어깨가 비명을 질렀다.
숨을 훅 내뱉고, 그대로 흉검을 내리그었다. 드드드드드득… 성긴 뼛조각을 긁고 부숴내면서 칼끝이 호를 그리고, 빠져나왔다.
간신히 상반신과 하반신이 잘려나가지 않은 짐승의 몸이 이번에야말로 바닥에 널부러졌다.
금새 칼에 말라붙은 피를 될 수 있는 한 툭툭 털어내면서 침을 탁 뱉었다.
라이칸슬로프가 아니라 라이칸슬로프 할아버지가 와도 혼자서는 되살아나지 못하겠지. 가장 확실한 건 목을 치는 것이지만…
“…젠장, 관두자.”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이번에야말로 등을 돌렸다.
목을 칠 마음까진 들지 않았다. 짐승의 피로 질척거리는 융단을 밟고 나아가서, 연회장의 문을 열어젖혔다.
안에서 은은하게 흘러나오던 음악이 멈췄다.
내빈들의 시선이 갑작스럽게 난입한 내게 쏟아졌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그리고 들고 있는 흉검에 피가 낭자한 나에게.
위축되기는커녕,
이런 퍼포먼스에는 오히려 익숙하지.
“여어, 기사, 남작, 부인 기타 등등 높으신 나리들. 난 오늘 밤의 여흥올시다. 흥 깨러 온 게 아니니 안심하시라고.”
오우거 가면을 쓰고 있지 않은 맨얼굴과 드레스 코드가 영 짜증 나서 벗어버린 정장 대신 갖추고 온 평소의 경갑 차림. 도저히 손님으로 보이지 않는 나에게 주변의 시선들은 잠시 미친놈 보듯한 불쾌함으로 일그러졌지만…
“…하이엔, 더츠백?”
어딜 가든 내 얼굴을 알아보는 자는 있기 마련.
허리에 호사스러운 군도를 찬 것으로 보아 군인이거나 기사인 듯한 독수리 가면의 남자가 중얼거리자, 주변이 크게 술렁였다.
“검성이라고?! 검성 하이엔 더츠백?!”
전(?) 자 빼먹지 마라. 나도 특별히 좋아서 달고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다른 쪽에서는 다른 호칭이 들렸다.
“반역자 더츠백, 이런 곳에 나타나다니! 어떻게 여기에 들어올 수 있었던 거지? 위병, 위병!”
오, 그쪽은 조금 더 마음에 드는 호칭을 써주시는구만.
하지만 발상은 좀 무디다. 위병으로 날 막을 수 있을 턱이 없잖아? 완전무장한 기사단 정도는 데려와라… 좀 뻥이 섞였음은 인정하지만, 지금 난 기세등등하게 굴 자격이 있었다. 일단 이 도시에서 승부를 봐야 할 놈 둘 중 하나는 밖에 반쯤 뒈져 널부러지게 만들었으니까.
“난 댁들의 목숨 따위에는 관심 없어! 내가 찾고 있는 건…”
주변을 둘러보았다.
머릿속이 까닭 모를 노기로 들끓었다. 아니, 이유라면 있고말고.
놈은 우리의 자존심을 진흙발로 짓밟았다.
나와 에스텔, 사라, 아질, 그리고 자기 자신의 명예까지도.
아주 나지막한 대답이 돌아왔다.
하지만 동시에 모두의 귓가에 아주 또렷하게 들리는 대답이기도 했다.
“…물론 네가 찾고 있는 건 나겠지, 하이엔… 더츠백.”
계단을 내려오는 발소리가 있었다.
아무도 그 발소리 이외의 소리를 내지 못했다. 마치 누군가가 그들의 입과 발을, 그리고 숨통까지도 틀어막은 것 같은 고요함이 융단처럼 바닥에 깔렸다.
얼굴에 쓴 화려한 장식의 새 가면을 떨어뜨리면서 그는 고개를 들었다.
수려하고 단정한 흰 얼굴에 절로 경건함을 느끼게 하는 고요한 표정이 스며있었다. 후드로 감추고 있던 머리카락은 은색에 가까운 회색이었다. 자신에게 익숙한 보리 이삭 같은 금갈색이 아니라.
“아이온… W 크로니클!”
놈의 이름을 외쳤다. 그제야 침묵에 빠져 있던 좌중이 한번 크게 술렁였다.
그 이름으로 그를 부르는 것이 낯설었다. 이제껏 한 번도 그렇게 불러본 적이 없었으니까.
놈이 마왕 토벌의 파티에 들어온 순간부터, 놈의 사연을 에스텔에게 들었을 때에도, 그리고 토벌을 마치고 서로 각자의 길로 흩어지는 순간까지.
“늑대원숭이는… 너에게 결국 졌구나. 널 당해내지 못할 거라곤 생각했어. 그리고 가능하면 네가 이 자리에 오지 않길 바랐고.”
“그딴 소릴 들으려고 여기에 온 게 아니란 건 네놈도 알지?”
흉검의 날끝이 놈의 미간을 겨누었다.
제 머리를 노리는 흉검을 조용히 응시하면서도, 놈의 눈동자에는 한 점 동요도 없었다.
놈과 오랫동안 알고 지냈기에, 녀석이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이 체념에 가까워 보였다는 것만을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다.
“너와 나 사이의 일이다. 다른 놈들은 모두 내보내.”
“꼭 그렇다고만은 할 수 없게 되었네요. 검성.”
이번엔 또 누구야.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군중을 해치고 아이온의 바로 앞으로 나서는 그 얼굴이 누구인지는 이미 새삼 말하지 않아도 뻔했다.
메살리나를 꼭 빼닮은 얼굴.
여왕의 쌍둥이 여동생… 왕제 발레리아 바노슈 드라쿨레아. 이 나라의 섭정. 여왕조차 제 애완동물로 전락시켜버린 최고 실세.
“아이온. 이제 쓸데없는 이야기는 하지 마세요. 모처럼의 대관식을 망치고 싶지 않으니까.”
대관식?
“뭐야. 결국 여왕의 옥좌를 빼앗기 위해 이런 시시한 촌극을 벌인 거였냐? 왕도도 아니고 윈덤에서 영주 입회도 없는 대관식이라니 참 쓸쓸하군그래.”
한껏 이죽거려줬지만, 왕제는 피식 웃고는 어깨를 한번 으쓱거렸다.
마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우둔한 아이를 비웃는 듯한 동작이었다.
날 격앙시키고자 하는 의도라면, 그리 쉽게 말려 들어줄 순 없지.
“검성. 당신쯤 되는 자가 아직도 그런 순진한 소리를 하나요? 언니의 왕관 따위에는 아무 흥미가 없어요. 이런 궁벽하고 외진 트란 드라쿨루의 왕좌 따위, 언니가 알아서 잘 해먹으라고 하죠. 내 대관식은, 좀 더 드높은 왕의 탄생을 축원하는 자리가 될 테니까요.”
“무슨 소리지?”
“아이온.”
아이온이 긴 로브 자락 아래 감추고 있던 손을 드러내었다.
눈이 확 커졌다. 어두운 청색의 겉면에 돌기가 돋아난 채 희미하고 은은한 빛을 뿜었다가, 잠잠해지곤 하는 물건이 손에 들려있다. 마치 심장박동처럼 보이는 광휘는 저 알이 아직 살아있다고 말하면서.
“마왕의 알!”
“어머. 알고 있었군요. 뭐 하긴. 몽마와 같이 행동하고 있다고 했죠? 그 몽마에게 꽤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던 모양이네요.”
왕제가 손을 한번 슥 휘둘렀다. 실내를 밝히던 촛불과 마법 조명이 전부 꺼지고, 출입문이 드르륵 닫히면서 잠겼다. 아직도 상황을 파악하지 못해 우왕좌왕하던 손님들은 이제야 무엇인가 일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겨우 깨달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또한 이미 늦어버렸다.
“이, 이게 뭐…!”
“왕제 전하! 왕제 전하!”
사방에서 비명이 일었다.
모든 조명이 사라진 실내. 그 바닥에 깔려있던 어둠이 질량을 얻어 팽창했다.
비명을 지르는 부인의 입을 틀어막고, 검을 뽑아 휘두르려는 군인의 팔에 감겼다. 어디론가로 달아나려는 귀족의 다리를 잡아챘다. 그 모든 비명과 노호성이 질식에 가까운 소리로 바뀌기까지는 채, 10초도 채 걸리지 않았다.
“이제 조금 조용해졌네요.”
까딱거리는 손가락 사이에서 피어난 빛이 중앙 샹들리에로 옮겨졌다. 팟, 하고 폭발하듯이 실내를 다시 비추는 조명 아래, 자신과 몇몇을 제외한 이들이 모두 가시나무 같은 새카만 어둠에 묶여있는 광경이 또렷해졌다.
“이 자식… 윌리엄, 이 자식!”
더 이상 봐줄 수가 없다.
분기를 터뜨리며 단 한 걸음, 놈과의 거리를 좁혔다. 그 머리통에 우악스레 흉검의 칼날을 내려쳤다.
카가각, 카각, 카가각…
두꺼운 흉검의 날이 녀석의 들어올린 팔 사이에 막혔다.
소매를 찢으며 거대한 발톱이 드러났다. 흉검의 날을 막아낸 것은 바로 그 발톱이다.
악마의 손톱이나 송곳니를 형용한, 악마를 사냥하는 성직자의 무기, 「종루(??)」.
“E. 나서지 마라.”
아이온이 조용히 뇌자, 이쪽을 향해 얼굴을 돌리고 있던 수도녀… E가 물러서는 것이 보였다. 뭐야, 1:1 대결이라도 벌이자는 거냐?
“많이 컸는데, 현자. 네놈이 나와 1:1로 싸우자고 나오고 말야.”
“늑대원숭이에게 어깨를 당했잖아? 불공평한 싸움이라고 생각한다면 치유해줄 수 있는데.”
웃기는 소리다.
비실거리는 말라깽이 자식에게는, 딱 맞는 핸디캡일 뿐이다.
눈 한번 깜빡일 사이에 그 대가리를 박살 내고 꿍꿍이 가득한 내용물을 끄집어주겠어.
“지랄하고 있네, 엿이나 처먹어라, 개새꺄!”
휘둘러지는 흉검, 그리고 맞아들이는 쇠발톱.
검성과 현자의 싸움, 그 개막치고는 이례적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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