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화 〉 4 / 하이에나와 늑대의 시간 (3)
* * *
(3)
어째서지?
처음에는 아주 작은 위화감의 불씨였다. 지금은 바닥에 뿌려진 기름이 타들어 가는 것처럼 불길이 되어 번져가고 있었다.
대치하고 선 늑대원숭이가 쥔 칼날은 푸르스름한 예기를 띠고 있다.
마찬가지로 몸에 감은 옷도 방금 합을 나눈 영향 이외에는, 아무 흔적이 없었다.
이놈이 아닌가?
아무리 달인이라고 해도, 그 현장에서 몸에 피 한 방울 묻지 않을 수는 없다.
아니, 있다 하더라도 피 냄새조차 나지 않는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이 녀석이 나르콜렙시를 베었든 아니든 그와는 관계없이 이 승부는 내야 한다.
하지만 그에 앞서 확인 또한 해둬야 했다.
“…어이, 고릴라 형씨. 하나 묻자.”
“뭐지?”
한 자루의 대도와 한 자루의 단도.
두 자루의 칼을 날개를 펼치듯 좌우로 펼친 채로, 그는 으르릉거리듯 내 물음을 받았다.
입으로 들이마시는 숨이 차갑게 식었다.
“오늘 마라를 벤 적이 있냐?”
“…이상한 것을 묻는군.”
돌로 만든 가면처럼 딱딱한 표정이 약간의 의귀심으로 풀렸다.
저 반응은…
“아니. 공교롭게도 오늘은 마라는커녕 그 누구도 벤 일이 없군. 물론 귀공이 여길 부득불 지나가려 한다면, 나는 귀공을 베어야겠지.”
자신의 내면에 도사리는 무엇인가를 수행으로 누르는 듯한 무거운 목소리는 차분히 답을 냈다. 나르콜렙시를 베어버리고 여왕을 빼앗아갈 동기를 가진 자가 달리 더 있는단 말인가?
이놈은 아니다. 지금은 그 사실만으로 족했다.
오히려 마음에 걸리적거리던 것을 치울 수 있어서 차라리 낫다. 후우, 불필요한 공기를 내뱉고는 다시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놈의 칼에 당한 어깨 쪽의 팔이 후들거렸다.
“허나, 귀공은 그걸 바라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군.”
늑대원숭이도 자세를 좀 더 낮추고, 팔을 넓게 벌린 예의 검세를 고쳐잡았다. 입가가 일그러져 휘어지고, 다물린 이빨이 서로 맞물리면서 까득 갈리는 소리를 냈다.
지금의 제 얼굴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웃고 있는지, 분개하고 있는지. 아니면 행여나 양쪽 다가 아닌지.
글쎄. 아무래도, 아무래도 상관없다.
“형씨가 아니라면 상관없어, 좋아. 다시 한판 벌여볼까.”
소리도 내지 않고 기수식을 취하는 검사의 안면을 향해 칼끝을 겨누었다.
그 검술 특유의 자세로 팔을 넓게 펼치고, 놈은 도발하고 있었다.
들어가고말고. 농락당하고만 있어서야 하이엔 더츠백의 이름에 흠집이 가겠지.
숨을 깊게 들이마신다. 찌르르한 떨림이 통 가시지 않는 어깨를 의식하여, 마치 어깨의 근육 그 자체를 동여매듯이 힘을 꽉 쥐었다. 그다지 효과는 신통치 않았다.
발끝이 지면을 강하게 디뎠다.
녀석처럼, 갑자기 눈앞에서 사라지는 발재간은 내게 없다.
순보라던가, 축지라던가, 저런 류의 칼잡이들은 그렇게 부르곤 하는 기술인 듯하나 내게는 도통 그런 잔재주는 성미에 맞지 않았었지.
내게는 오히려…
“흐랴아아아압!”
정면으로 들이받아, 치고받는 게 어울린다.
일직선으로 뛰쳐나갔다. 녀석이 눈을 크게 부릅뜨는 것이 보였다.
미간을 노리고 흉검을 후려치듯 휘두른다.
막아낸다면 방어째로 짓부순다. 피한다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자, 그 가늘고 예쁘장한 칼로 어떻게 대처할지 한번 볼까!
놈이 칼을 들었다. 내려치는 흉검을 날을 두 자루 칼날을 세워 받아낸다. 센이 벼린 칼인가, 가늘지만 의외로 튼튼해서, 두 자루를 겹쳐 세우니 단박에 부러뜨릴 수는 없었다.
집게에 붙들린 것 같구만.
힘겨루기에 들어간다. 힘은 덩치 차이가 있다보니 저쪽이 위인 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무기의 내구도는 어떨까. 센에게는 미안하지만, 부숴주겠어!
“으랴아아아!”
전신의 힘을 한데 모아, 벽에 박힌 못을 뽑듯이 힘껏 비틀었다.
늑대원숭이의 표정에 당혹이 스쳤다.
두 자루로 버티던 칼이 옆으로 젖혀져 무방비한 옆구리가 드러났다.
지금이다.
그대로 칼자루를 놓은 뒤, 몸을 반 바퀴. 딛은 발을 축으로 회전시켰다. 원심력을 실은 발끝이 정확하게 놈의 옆구리를 후려쳤다. 갑옷처럼 단단한 복근 너머까지도, 묵직하게 타격을 가한 느낌이 발끝에 전해졌다.
“…칵, 어깨 값은 이걸로 받은 셈 치도록 할까.”
기세를 실은 한 방이었으니만큼, 늑대원숭이의 거대한 몸을 벽으로 날려버리는 데에는 충분했다. 이를 드러내며 히죽 웃고는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부러진 흉검을 다시 손에 쥐었다.
기세등등하게, 어깨에 흉검을 지면서 목소리를 한껏 높였다.
“어이, 고릴라! 설마 이 정도로 정신 놓고 뻗어버린 건 아니겠지!”
순간 얼굴을 옆으로 젖혔다.
먼지구름 너머에서 엿보인 한순간의 번뜩임을 보고, 생각에 앞서 몸이 반응한 결과였다. 또 한번 내 목숨을 이 반사신경이 구했다.
날이 짧은 칼이 내 머리가 있던 자리를 지나 벽에 박혔다.
벽에 깊이 박히고도 자루를 파르르 떨 정도로 남은 힘은 놈이 꽤나 흥분했다는 사실을 방증했다. 흥, 코웃음 치고는 다시 자세를 낮추어 잡았다.
크르릉, 크르릉…
잇새로 으르릉거림이 새는 듯 두서없이 숨소리가 울렸다.
달처럼 풍기는 노란 눈자위를 번들거리며, 이제 한 자루밖에 남지 않은 칼을 쥔 늑대원숭이가 먼지구름 사이에서 걸어 나왔다. 뭐야, 발길질 한 번 당했다고 화난 건가?
악물린 이 사이로 피비린내가 풍겼다.
들썩거리는 어깨. 그리고 발을 디딜 때마다 여분의 힘이 바닥에 깊은 자국을 냈다.
조금 전의 물이나 바람처럼 고요한 검기가 굶주린 아귀처럼 흉흉한 살기로 변하고 있었다.
“뭐냐, 그 반응은 설마 발로 차인 것으로 꼴리기라도 했냐? 거 곤란한 취향이구만. 난 그쪽 취향은 없으니까 대신 사창가라면 소개해줄 수도 있는데. 발이 매운 창녀라면 몇 알거든.”
한 마디 농담을 건넸지만, 놈의 일변한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오히려 방금 전보다 더 까다로워졌을지도 모르겠다며 자세를 낮추고, 경계…
“…?!”
약 4m의 거리, 발을 딛는 동작조차 없었다. 아니, 보지 못했다.
곰처럼 낮게 웅크린 자세. 처음과 마찬가지인 난격술을 구사하던 그 자세. 이를 악물고 그 자리를 향해 한발 먼저 흉검을 내려쳤다.
“무슨, 지랄…!”
놈은 칼을 여전히 한 손으로 붙잡고 있었다. 두툼한 근육에 핏줄이 울컥거리는 게 보였다. 팔등을 덮은 털이 까맣게 두드러져 빳빳이, 거칠게 서오르는 것마저 보였다.
그럼 다른 손은?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두툼한 손바닥이 흉검의 날을 붙잡았다.
아무리 무디고 조잡한, 예리함보다는 무게와 힘으로 대상을 분쇄하는 데 더 탁월한 대검이라고 해도 한 손으로 붙잡아 세울 수 있을 턱이 없다.
두꺼운 손가락이 흉검의 겉면을 우악스럽게 붙들고, 칼날이 파고든 손바닥에서 농도 짙은 피가 흘러넘쳤다.
늑대원숭이의 잇새에서 한번 더 으르릉거리는 소리가 새었다. 양팔로, 칼자주를 쥐고 밀어붙이는 내 발이, 칼날을 쥐고 한 손으로 미는 늑대원숭이의 힘에 뒤로 밀려났다.
이쯤 되면 꽤, 이 검사… 아니, 지금의 놈을 검사라고 부르는 건 온당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저 짐승의 정체가 꽤 일목요연해진 셈이다.
“라이칸슬로프, 였나. 왜 늑대원숭이이니 하는 이름을 쓰나 했지.”
완전히 수화하지 않았음에도 이런 힘이라니, 기가 막힐 따름이다.
크앙! 날카롭게 울음을 토하면서 놈은 손에 쥔 흉검의 칼날을 아무렇게나 휘둘렀다. 휘둘러야 할 것은 나인데, 마치 칼자루에 딸린 부속품처럼 가볍게 휘말렸다.
“젠, 장!”
된소리를 뱉으며 있는 힘을 다해 떨쳐내려는 머리 위로, 대검의 칼날이 들이닥쳤다.
그야말로 궤도고 힘이고 뭐고, 아무렇게나 휘두르는 일격이었다. 톡 까놓고 말해, 내 칼질과 비슷한 수준이다!
“…처먹어라!”
겨우 놈의 손바닥에서 빼낸 칼날을 마주 휘둘러 받아났다.
놈의 몸은 강해졌을지언정 칼날이 달라진 것은 아니다. 제법 두꺼운 날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래도 칼날 가운데가 깨어져, 흉검의 날이 박혀 들었다.
서로의 자세가 한번 무너지고, 가운데가 깨진 검을 쥔 채 늑대원숭이는 두어 걸음 물러났다. 성치 않은 어깨에서, 방금 칼을 받아낸 여파로 죽은 피가 울컥 새었다. 뼈도 삐걱거리는 게, 오래 버틸 순 없을 것 같다.
“하아, 하아, 하아… 빌어먹을. 내 팔 어쩔 거야, 씨발.”
하지만 왜지?
놈은 왜 갑자기 이성을 잃은 짐승처럼 구는 거지? 그저 발길질을 한 번 당했다고 정신줄을 놓고, 지금까지 잘 감춰오던 본성을 드러낸단 말인가?
크륵, 크륵, 크륵….
아직 놈의 얼굴에는 인간다운 용모가 남아있었지만, 앙다문 이 사이에서 거품 이는 침이 새고 있었다. 마치 무슨 낭광병자 같구만.
“…썅. 듣고 있기는 한 건지. 늑대처럼 구는 중이라고 사람 말 못 알아먹는 척이냐? 들어오지 않을 거라면….”
길게 끌 수가 없다.
이 녀석의 괴력을 계속 받아냈다간 내 몸이 남아나질 않겠어.
웅크린 채로, 마치 뛰쳐나가려는 몸을 억누르듯 구는 놈의 정신이 온전치 않은 지금만이 호기라고, 확신했다.
“내가 먼저 간다!”
녀석과 검사로서 승부를 걸 타이밍은 지금뿐이다.
후들거리는 다리에 쥐어짜낸 힘을 불어넣고, 이쪽에서 달려들었다.
“뒈져… 쳐먹어라!”
오른쪽 아래에서, 왼쪽 위를 향해, 비스듬하게 흉검을 올려쳤다. 온 힘을 쥐어짜낸 일격이다. 이것도 어디 한 손으로 막을 수 있나 보자!
“흐, 하아!”
늑대원숭이의 손이 움직였다.
손에 쥔 목줄을 억누르듯 떨리는 양손이 칼자루를 강하게 붙들고, 칼끝이 아래로 향하도록 크게, 칼을 눕혀세웠다. 본능에 의지한 방어 행동. 그 반사신경만큼은 경탄할 지경이었지만…
“걸렸구나, 고릴라!”
노린 곳은 늑대원숭이의 몸이 아니다.
흉검의 아가리는 정확히, 놈의 칼날의 깨진 부분을 물어뜯었다.
빠각, 빠각, 빠각… 금이 가는 소리가 삐걱대고, 반으로 토막난 칼날이 힘을 이기지 못해 허공으로 튀어올랐다.
“…이겼다!”
멈추지 않았다. 칼 하나 분질러먹은 것으로 멈출 리가 없지!
손끝에 감각이 왔다. 살을 긁는 감각이 짜릿하게.
흉검의 칼끝이 그대로 놈의 옆구리에 파고들었다. 옆구리에서, 가슴팍을 지나, 어깨뼈를 부수는 궤적을 그리며, 휘둘렀다.
늑대원숭이의 몸이 피를 튀기며 공중에서 튀어올랐다.
그리고 한 발 먼저 솟구친 칼날과 동시에, 바닥에 추락했다.
“하아, 하아, 하아…”
새어나오는 피에 점점 잠겨가는 늑대원숭이의 쓰러진 몸을 보며 한껏 거칠게 달아오른 숨 사이로 승리감이 차올랐다. 손끝에 분명히, 그리고 아직도 남아있다. 놈을 베어버린 감촉이.
누군가 여기서 멍청하게 ‘해치웠나?’ 따위의 말은 하지 않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