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화 〉 4 / 하이에나와 늑대의 시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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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물론 의문은 있었다.
자신이 아는 한 그 이름을 가진 이는 이 세상에 한 명뿐이다.
의문이 있으면, 그리고 그 의문이 좀처럼 풀리지 않으면 짜증이 뒤따른다.
불과 한 시간 전쯤까지 그 이름은 망각의 밑바닥에 가라앉아있었던 이름이다.
그런 놈이 있었지, 하고 과거형으로 되새기던 이름이 지금은 수면까지 올라와, 현재진행형으로 일렁이고 있다.
만난다면 따져 물을 생각이었다.
무슨 지랄을 꾸미길래 이딴 개수작을 부리고 있냐고.
어울리지도 않는 헛짓거리는 집어치우라고.
하지만 그딴 건 지금 와서는, 그리고 지금에 한해서는 아무래도 좋은 일이 되었다.
“음!”
칼날이 뻗쳐온다.
면도날처럼 얇고, 예리하고, 섬짓한 한기를 품은 서릿발 같은 칼날이다.
어디 한 군데, 베이면 치명상이 될 곳만을 집요하게 노리는 늑대의 턱 같은 참격이 지금도 내 턱을 아슬아슬하게 지나갔다.
횡베기가 무위로 돌아가자, 칼날이 곧게 누웠다.
미간을 노린 찌르기가 날아온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보다 먼저, 몸이 옆으로 굴렀다.
별개의 생물인 것처럼 팔이 움직여, 흉검을 쥔 한 손의 근육이 파열할 듯이 우지끈 소리를 냈다. 양손으로도 벅찬 흉검의 무게를 한쪽 팔의 힘만으로 버티려 했으니 노림도 조절도 엉망이 될밖에.
하지만 제대로 들어가기만 하면 효과적이다.
제대로 들어가기만 한다면 말이지. 제기랄.
그런 식으로 칼질을 할 줄은 몰랐다는 듯 녀석의 옷자락이 길게 찢겼다.
하지만 정작 살에는 얕은 상처 한 줄 내지 못했다. 제기랄.
“학, 학… 늑대원숭이라고? 예명이… 뭐 그따구야, 제기랄.”
욕이 나온다.
이름 그대로, 원숭이에게 농락당하는 기분은 참 더러웠다.
뻐근해진 손바닥과 손목, 어깨… 오른팔을 한번 털어 둔통을 가능한 가라앉히고, 흉검을 고쳐쥐었다.
“귀공이야말로, 검성이라는 이름을 짊어진 남자의 검이…”
내려놓았다고, 멍청아.
서로 일격을 주고받았다.
놈의 무릎께 옷자락이 찢겨 맨살이 드러났다.
내 경우에는 광대뼈 즈음에 긴 상처가 새겨졌다. 시큰거리는 감촉이 머릿속에 들끓던 아우성을 닥치게 했다. 피가 질척거리는 건 조금 난점이겠지만.
제대로 들어갔으면 무릎부터 날려버려 외다리로 만들었을 것이나,
제대로 먹었으면 내 목이 날아가 이 싸움은 끝이 났겠지.
“…조잡하군.”
찢긴 무릎의 옷자락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놈이 칼을 늘어뜨리며 자세를 바꾸었다.
긴 칼을 오른손에 쥐고, 대신 빈손에는 중간 길이의 칼을 뽑아 쥐었다.
“귀공과의 대결을 기대하고 있었다. 헌데 이리도 검이 조잡할 것이라곤 미처 생각지도 못했다. 호흡, 걸음, 간격…. 무엇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군. 무턱대고 칼을 휘두르는 꼴이라니. 아해에게 칼을 쥐여준 것과 무엇이 다른가.”
불만이냐, 이 자식아.
그리고 검성 딱지는 내가 원해서 단 것도, 내가 자진해서 반납한 것도 아니니까 그쪽에 가서 따져라, 빌어먹을.
“어쩌라고. 왜, 그런 조잡하고 되먹지 못한 칼질에 무릎을 날려먹을 뻔해서 욱했냐? 칼잡이 주제에 이거저거 따지는 쪽이 멍청한 거지. 이건 그냥 사람 쳐 죽이는 데 쓰는 도구일 뿐이야. 거기에 예의니 범절이니 쓸데없는 소릴 지껄이는 건 같잖은 짓이고.”
그러고보면 녀석과도 종종 이런 논쟁을 주고받았지.
이 국면에서만큼은 녀석과도 참 의견이 맞지 않았더랜다.
어쩌라고. 난 검투장에서 사람 썰면서 내 몸에 맞는 칼질을 익힌 자기류다.
그걸로 마왕 모가지도 땄으니 상관없잖아?
“뭐해? 나불나불 입 놀리는 데는 서로 재주 없잖아? 아니면 입씨름 쪽에 더 자신이 있으신가? 부끄러워라, 난 혓바닥질에는 그닥 재능 없거든.”
이죽거리면서 묵직한 칼끝을 앞으로 겨누어 세웠다.
눈을 가늘게 뜬 거한은 팔을 넓게 벌려 두 자루의 칼을 날개를 펼치듯이 쥐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먼지를 일으키며… 사라졌다.
“흡!”
실핏줄이 터져라 눈을 부릅떴다.
순전히 본능으로, 뒤돌아서면서 흉검을 세우자, 카가가가가각… 순식간에 쇠를 긁는 소리와 불티가 팔을 욱신거리게 했다.
한 호흡, 여섯 번의 칼질.
오른손의 대도(大?)가 세 번, 왼손의 장도(??)가 마저 세 번.
순식간에 흉검의 칼날을 물어뜯고, 또 순식간에 멀어져 간다.
“이 새끼!”
으랴, 숨을 몰아쉬며 기합을 불어넣고, 물러서는 기척을 향해 한 번의 타격을 묵직하게 때려넣었다. 쿵, 바닥에 깊이 파고드는 칼끝에 사람을 벤 감촉은 없었던 것은 유감이다.
“…원숭이처럼 잽싸긴, 씁.”
처음 대치했던 곳의 반대편에 놈의 모습이 드러났다.
만약 내가 놈을 무시하고 연회장으로 돌진한다면… 놈은 분명 바로 내 등을 노리겠지.
쉽게 따돌릴 수 있는 상대도 아니었다.
검투사 시절 겪어본 적이 있었다. 녀석과 비슷한 칼질을 하는 칼잡이가 있었지.
미처 승부를 내지 못했던 그 한 번의 칼싸움에 감사할 수밖에.
어지러울 정도의 저 속검에 어찌어찌 대처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그때의 경험 덕이다.
하지만, 녀석의 공격을 막아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 건 놈도 마찬가지였다.
여전히, 마치 새가 날개를 펼친 듯 양팔을 넓게 펼친 특유의 검세를 유지하면서 놈이 미간을 조용히 일그러뜨렸다.
“어떻게 피할 수 있었지?”
“네놈과 비슷한 짓거리를 하던 녀석이 하나 있었거든.”
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주 미세하게.
이 말에 동요했나? 소 뒷발에 쥐잡은 격이지만, 어드밴티지는 써줘야 하는 법이지.
쾅, 칼끝을 바닥에 패도록 박아 내리고는 손을 까딱거렸다.
예상대로, 놈은 노기를 숨기지 않았다. 어지간히 제 검의 정밀도에 자신이 있었던 모양이다.
지금 일합은 놈에게 결코 밀리기만 했던 것은 아니라는 뜻이 된다.
그렇다면 그것으로 좋다.
“요행이었는지, 아닌지… 한 번 더 시험하겠다. 이 기술도 받아낼 수 있는지, 한번…”
해 봐라, 그렇게 입이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발끝이 움직인다. 이번엔 눈이 놓치지 않았다. 사라지는 것은 한 번으로 충분하다.
하지만 몸이 따라갈 수 있을까. 실핏줄이 터지도록 눈을 부릅뜨고, 밖으로 당긴 칼을, 근섬유가 끊어지도록 휘둘렀다. 저리도록, 손아귀에 힘을 밀어 넣었다.
부우우웅,
직선으로 곧게, 화살처럼 날아드는 놈의 신형(??)을 흉검의 송곳니가 물어뜯고 지나간다.
찢겨졌다. 하지만 살을 찢는 감촉은 손에 남지 않았다.
당했다는 감촉이 머릿속에 스며들었다.
“풍월운룡류(風月雲??).”
나지막하게 읊조리는 소리. 무릎 아래에, 사냥감의 목줄기를 물어뜯기 위해 힘을 모은 몸을 잔뜩 웅크린 늑대가 있었다.
“5형. 취(?)광풍.”
솟구쳐올랐다.
전신의 근육을 한계까지 수축하여, 그 하나하나에 깃든 탄력이 정점에 달했다.
용수철처럼 단숨에 몸이 튀어 오른다. 늑대의 턱이 지척이었다.
“칵…!”
전혀 의도하지 않았는데, 발이 떠올랐다. 둔통이 한 박자 늦게 뒤따랐다.
녀석의 어깨에 받혔나? 찰칵, 하고 칼자루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등골에 송연하도록, 위험신호가 내달렸다.
옆면을 세웠다.
최소한 직격은 피해야 한다.
자존심이고 뭐고, 일단 이 자리에서 송장이 되는 것만은 피해야 할 테니까.
“악, 쓰…!”
사방에서 면도날 같은 바람이 몰아닥쳤다. 쉴새 없는 칼질이 흉검의 옆면에 긁힌 자국을 두들겨댔다.
쏟아지는 빗줄기 같은 연격은 앞을 가로막은 흉검을 비켜나가 팔과 허벅지, 다리 여기저기에 칼자국을 찢겨대었다. 핏방울이 날리고 나서야 시큰한 아픔이 전신의 신경 신호에 어지럽게 뒤엉켰다.
쿠우웅.
시간으로 치면 약 3초. 아니면 그보다 더 짧았다.
칼을 눕혀 진로를 막아낸 정면을 제외한 전신에 무수히 피흘리는 칼자국이 흐드러졌다.
아니, 이걸로 끝일 리가 없다. 이 어지러운 연격은, 분명…
“거기냐!”
온다.
아주 잠깐, 연격이 멎은 순간이다. 내 몸은 아직 공중에. 그리고 녀석의 가속과 도약의 기세가 거의 사그라들었을 때,
그때를 노려, 옆으로 세웠던 흉검의 칼날을 앞으로 세웠다.
휘둘렀다. 부딪혔다. 서로 생각하는 바는 같았다.
놈은 내 주의를 흩트려 놓고 최후의 일격을 가하려 했고,
나는 그 결정타에, 카운터를 때려 넣을 생각뿐이었다.
찌르기를 꽂아넣는 칼끝과, 후려치려는 칼날이 엇갈렸다.
어깨, 어깨에서 피가 튀어 올랐다. 마구 튀는 적색이 시야를 물들인다.
“학, 학, 학….”
바닥에 착지했다. 발치에 조그마한 피 웅덩이가 뚝, 뚝 생겨나고 있었다.
어깨를 긁고 지나간 상처에서 피가 울컥거렸다. 머리가 지끈거리도록 뜨거워져서, 숨을 거칠게 몰아쉬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젠장, 손잡이를 쥔 손이 후들거린다.
하지만 놈 또한 아무 손실이 없을 수는 없었다.
빠직, 빠직, 빠직… 찌르기를 넣은 장검이 아주 산산히 파편으로 깨져서 흩어졌다. 그가 손에 쥔 것은 칼자루뿐이다.
놈은 자루만 남은 장검을 내던져버렸지만 여전히 길을 비켜줄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당연하지. 나 또한 여기서 승부를 흐지부지 넘길 생각 따윈 추호도 없다.
어깨뼈가 부서지지 않았으니 칼을 쓰는 데는 문제가 없었지. 광대뼈께의 상처에서 흐르는 피를 혀로 핥으면서 비리게 웃었다.
“…그야말로 한 마리 날뛰는 짐승이로군.”
늑대원숭이가 촌평하며 마지막 남은 칼을 뽑아들었다.
하얗게 빛나는 짤막한 칼끝이 눈에 들어온 순간 어쩐지 이유 모를 위화감이 목 안쪽을 간질였다.
나는 지금 뭔가를 놓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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