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화 〉 3 / 오월동침(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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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이라면 다행인 것이, 검은 말을 탄 흑기사가 복도를 주파하면서 쫓아오는 사태까지 번지는 일은 일단 없었다.
묘하게 길게 이어진 복도를 뛰어 본관에까지 한달음에 내달리고 난 후 겨우 한숨 돌렸을 땐 레오레는 어깨로 숨을 몰아쉬었고, 옆구리에 낀 꼬맹이는 개구리마냥 아예 혼절해있었다.
“젠장,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겠네.”
초조감이 슬그머니 꿈틀거렸다.
어쩐지 아까부터 계속 허탕에 헛일, 헛물만 들이키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자괴감이 지끈거렸다.
“그래도… 쫓아오는 것 같지는 않아 다행입니다. 손님들도… 거의 없어진 것 같고요.”
“그러고보니 슬슬 연회장에 모였을 때긴 하구만. 어이, 꼬맹이. 일어나 봐라.”
남의 집에 쳐들어온 너구리마냥 늘어진 꼬맹이의 뺨을 두들겨본다. 반응이 없다.
조금 더 힘을 늘려야 하나. 손을 조금 더 높이 들어올리자 레오레가 서둘러 녀석의 어깨를 흔들었다. 이번에는… 반응이 있군.
“으, 으… 어째서 매번, 그런 식인 거냐, 너는…”
“내 맘이다. 얼른 일어나라.”
정신이 덜 들었는지 머리를 흔드는 윈드 엘프 꼬맹이. 정신이 확 돌아오게 도와줄 수도 있는데 말야.
뭐라고 알아듣기 어려운 윈드 엘프 말… 아마도 날 향한 욕지거리를 몇 마디 주워섬기면서 겨우겨우 몸을 비슬거리며 일어나 앉은 녀석은 숨을 잠시 헥헥거렸다.
“루드라 님께 맹세코… 하아, 으으.”
“루드라에게 뭘 맹세하건 말건 간에, 몇 가지 좀 물어봐야겠다.”
“…뭐냐?”
숫제 도와줬더니 떽떽거리며 군다는 듯한 눈이다.
하여간 엘프들이란.
“거긴 어떻게 알고 숨어들었지? 거기가 영주의 아들이 머무르는 방인 건 어떻게 알았냐는 거다.”
“…이거다.”
망토 아래에서 둘둘 말린 종이 한 장을 내민다.
받아서 펼쳐보니 이 저택의 구조와 주요 귀빈들의 객실 배치 현황이 씌여있었다.
뭐야. 이런 건 어떻게 얻었지?
“위병이 가지고 있던 것을 훔쳤다.”
이 꼬맹이, 점점 알 수 없구만.
대체 정체가 뭐길래 이렇게까지 막무가내냐? 조금 기가 차서 바라보았다. 옆에서 지도를 들여다보니 레오레가 눈을 깜빡였다.
“…그 방은 저택 왼쪽 맨끝의 분관이었던 것 같군요. 왕제 전하의 객실은 반대로 오른쪽 끝 분관이고. 왜 방의 배치가 이럴까요?”
그러고 보면 안으로 들어올 때 꽤 넓은 마당과 긴 복도를 통과했었던가.
중앙에는 본관이 있고, 양옆으로 분관이 있다. 바깥에서 보면 건물 하나였던 것 같았는데.
“그러고 보니, 이름을 못 들었잖아.”
“내 이름은… ‘바유’다.”
“멍청한 자식, 네 이름을 물은 게 아니… 잠깐, 바유?”
꼬맹이, 바유는 아직 어린 얼굴에 맞게 커다란 눈에 불만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
대충은 사정이 이해가 갔다.
“아는 사이셨습니까?”
“이 녀석이 아니라 이 녀석의 이름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있어. 너, 족장 후계자였냐.”
사라스바티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바람을 관장하는 정령 군주 루드라, 그리고 그 위대한 늑대와 계약하여 무리로서 따르는 윈드 엘프 가운데에서는 한 세대에 몇 명씩 루드라의 특징이 두드러지는 아이가 태어난다고 했던가.
그리고 그 아이 중 한 명에게는 제 세대의 윈드 엘프를 이끄는 족장으로서 고대 전승의 바람신의 이름인 ‘바유’라는 이름을 붙인다고.
그렇다면 왜 이 녀석이 혼자 몸으로 아득바득 윈드 엘프 동족을 구하겠다고 그 난장을 부렸는지는 대강 이해가 갔다. 이 녀석에게는 다스려야 할 백성을 빼앗긴 꼴일 테니까.
하지만 동시에 멍청한 짓이다.
족장 후계자쯤이나 되는 녀석이 잡히면 그땐 어떻게 되었을지는 생각하지 않은 건가?
이래서 애들이란 싫다. 이맛살을 한껏 찌푸리면서, 바유라는 이름에 밀려서 삼키려던 말을 다시 뱉었다.
“…뭐야. 내 이름에 대해 네가 어떻게 알지?”
“내 동료 중에도 엘프가 있다. 아무튼, 네 이름이야 어찌 됐든 상관없고, 그 안에서 뭔가 이름을 들었다고 했잖냐고.”
내 진짜 관심은 그쪽이다.
그제야 기억났다는 얼굴. 한 대 때려줄까, 잠시 진지하게 고민했다.
녀석은 잠시 기억의 밑바닥에 가라앉은 이름을 건져내기 위해 망토 안에서 팔짱을 끼고 끙끙거리다가 겨우겨우 그 이름을 낚아올리는 데 성공한 눈치였다.
“…이온. 그래, ‘아이온(Aeon)’이라고 했었다. 그래, 분명 그런 이름이었어.”
“아이온…? 어디서 들어본 듯한 이름이군요.”
레오레가 묘하게 반응을 보였고,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틀림없냐?”
“내 귀는 헛듣는 일은 없어. 루드라 님께서는 바람숲의 가장 작은 새끼가 잠든 소리까지 들으시니까. 그 이름이 틀림없다.”
의기양양해하는 녀석의 반응에 짜증이 확 치솟았다.
아이온, 아이온. 젠장. 왜 그 이름이 나오지?
물론 아닐 것이다.
흔치는 않지만 그래도 아예 존재하지 않는 이름은 아니지.
‘위대한 지혜’라는 좋은 뜻을 가진 이름이니만큼, 대략 십여 년쯤 전까지는 마법사들에게서도 왕왕 쓰이던 이름이었다.
어떤 사건을 계기로 후계자에게 그 이름을 붙이는 마법사는 사라졌지만.
레오레가 생경한 반응을 보이는 것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녀는 어디서 그 이름을 들었는지 떠올리는 데 꽤 고생하는 모양이었다.
“…나르콜렙시에게 돌아가야겠군. 녀석도 뭔가를 슬슬 알아냈을 때가 됐으니까.”
“그렇네요. 그럼…”
나와 레오레의 시선이 한군데 쏠렸다.
이 녀석은 어떻게 하지?
자신의 처우를 고민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녀석의 행동을 재빨랐다.
“나, 나를 버리고 너희들끼리만 빠져나갈 생각은 아니겠지!”
“꺄아아악?!”
잽싸게 레오레의 다리에 달라붙었다.
내 다리에 붙어봤자 씨도 안 먹힐 거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그야말로 짐승의 본능.
예상대로 소스라치게 놀란 레오레는 어찌할 줄 모르고 이쪽에게 필사적으로 도움을 청하는 눈길을 보냈다. 이거 어떻게 합니까? 하는 의사가 전해져 온다.
“날 도와준다는 얘기는… 어떻게 된 거야!”
“그건 네 녀석을 그 기사 녀석에게 빼내 준 것으로 끝이다.”
“그럴 수가!”
불합리하다고 생각하냐? 그게 어른이다.
그 녀석 어디에 던져버려! 하고 레오레에게 눈짓했지만, 마음 약한 레오레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제 다리에 마치 나무늘보마냥 딱 달라붙은 바유의 목덜미를 어설프게 붙잡았을 뿐이다.
“나, 날 데려가지 않으면… 위병에게… 네 녀석들에 대해 전부 불어버릴 거야! 물론 그 느려터지고 둔한 위병 따위에게 내가 잡히거나 하지는 않겠지만, 혹시나… 혹시나에 혹시나로 잡힌다는 가정에서! 아아, 어쩌면 좋담. 혹시라도 잡혀버린다면 가혹한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네 녀석에 대해 줄줄 불어버릴 텐데!”
네 이름은 바유가 아니라 혹시나냐! 귀찮게도 구네, 진짜!
뜨악하게 변하는 내 표정에 녀석의 눈이 반짝거렸다. 반격의 기회라도 잡은 것처럼 군다. 아, 짜증나. 이래서 애들은 싫어.
“……유스티카, 그 녀석 놔 줘라.”
“네에….”
체념한 듯한 말투에, 녀석의 눈이 한층 더 강렬하게 반짝였다.
늑대는 한번 문 먹잇감을 놓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걸 이런 식으로 다시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고!
“일단 나르콜렙시에게 돌아가도록 하지… 하아. 일단 본관의 어디쯤일 텐데, 제대로 길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구만, 진짜로.”
“나르콜렙시?”
이제는 한 파티의 일원이 된 것마냥 한층 더 거리낌 없는 태도로 꼬맹이가 중얼거림에 끼어들었다. 요컨대 뻔뻔한 녀석이 하나 더 추가되었다는 뜻이다.
경사스럽게도 이 사태를 얼른 끝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아, 그 경박해 보이는 여자 말이냐. 기억하고 있어… 내 꼬리 자르게 가위 가져오라고 말했던 그 여자였지!”
한껏 곧추세워진 꼬리 끝이 부르르 떠는 게 퍽 좋지 않은 기억이었던 모양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 여자의 냄새라면 기억하고 있다. 그 여자가 있는 곳으로 가면 되는 건가?”
그건 좀 편리하군.
사냥개 대용으로는 그럭저럭 쓸만할지도 모르겠는데.
루드라의 형질을 짙게 이어받았다고 하니 코가 예민한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그러고보면 이름을 못 들었군? 에흠. 같은 ‘파티’의 일원이니 서로 이름을 알아야 편리하지 않겠나? 내 이름은…”
“말한 지 5분도 안 됐다, 이 망할 꼬맹아.”
“그럼 좀 이름으로 부르는 게 어떠냐, 이 빌어먹을 놈팽아!”
씩씩거리는 바유를 달래면서, 레오레가 먼저 자기를 소개했다.
그러고 보면 나르콜렙시도, 레오레도 퍽 이 녀석에게 사근사근하게 굴고 있었다.
꼬리가 귀엽다, 이거냐? 내 눈에는 벼룩이 들끓을 것으로밖엔 보이지 않는데.
“…레오레 유스티카입니다. 이쪽은… 음…”
나와 자신의 관계에 대해 어떻게 소개할지를 잠시 고민하던 레오레였지만, 이내 포기하고 그냥 어설프게 넘기는 것을 택한 모양이다.
“하이엔 더츠백… 님이십니다.”
“하이엔… 더츠백?”
바유의 눈썹이 살짝 꼼지락거렸다. 느긋하게 움직이던 꼬리도 잠깐 움직임을 멈췄다.
뭐야, 내 이름을 알고 있나? 설마 바람숲에까지 내 이름이 알려져 있으면 조금 귀찮…
“…더츠백(Dirtbag)이라니, 네 녀석에게 딱 맞는 성씨로군.”
한 대 맞고 싶냐, 이 자식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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