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헬하운드-41화 (41/79)

〈 41화 〉 3 / 오월동침(6)

* * *

(6)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레오레는 이런 면에서는 나보다 확실히 머리가 명석한 구석이 있다.

왕실 기사단 소속임을 알려주는 순은 펜던트로 경비병을 속인다는 발상은 나로선 떠올리기 어려웠으니까. 아직 갖고 있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고.

펜던트에는 위조를 방지하기 위한 복잡한 문양과 주문이 걸려 있는 모양이었다. 펜던트를 제시하는 것만으로도 경비병들을 위축시키기에는 충분했다는 뜻.

덕분에 연회장 문을 지키고 있던 병사에게서 윈돌 영지의 후계자… 브란 폰 윈돌이 머무르는 방이 어디인지를 알아내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여긴가?”

“지키는 사람도 없네요.”

이 저택에서 두 번째로 큰 객실이었다.

가장 큰 객실을 누가 쓰게 되어있을지는 굳이 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고.

객실 앞을 지키는 병사도 없는 것으로 봐서는, 아마 브란 본인은 지금 자리를 비운 모양이다. 아직 연회장에서 돌아오지 않은 건가?

“일단 들어가 보자고. 안에서 뭔가 단서가 될 만한 걸 찾아보는 게 좋겠어.”

“…괜찮을까요?”

“괜찮고 자시고, 달리 뾰족한 방법이 있나?”

있을 리가 없겠지.

레오레에게는 방 주인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그 방을 뒤진다는 발상 자체가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이것저것 따지고 있기엔 이 경매는 냄새가 너무 심하게 났다.

지나다니는 사람 없고. 지키는 사람 없고.

주춤거리면 괜히 의심을 살지도 모른다. 당당히 객실로 다가갔다.

옆에서 레오레가 불안한 듯 좌우로 눈을 굴리다가 꺼림칙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잠겨있거나 하면 어떻게 하죠?”

…거기까지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부숴서 들어가는 건 아무리 나라도 가능한 피하고 싶은데.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자고.”

호사스러운 만듦새의 문고리를 붙잡고, 천천히 돌려보았다… 찰칵 하고 안쪽의 걸쇠가 맞물렸다. 힘들이지 않고 문이 당겨져, 레오레는 오히려 흠칫거리며 놀란 눈치였다.

“열렸다…?”

문은 열려 있었다.

하지만 안은 컴컴했다.

인기척도 없겠다, 누가 보기 전에 컴컴한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Lumen」.”

레오레가 나지막하게 주문을 외자 그녀의 이마 앞에서 하얀 빛덩어리가 나타났다.

마법이라곤 문외한인 나와는 달리 왕실 호위기사 경력이 있는 그녀는 전문까진 아니더라도 자질구레한 마법 정도는 익힌 모양. 편리하고만.

“누가 있는 것 같진… 않군요.”

“그냥 단순히 잠그는 걸 깜빡한 것뿐인가?”

옅게 떠오른 빛덩어리의 광량은 방 전체를 오롯이 비출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어슴푸레하게 드러난 방 안의 전경은 깔끔히 정리된 그대로, 누군가가 숨어든 흔적은 없었다… 우리 둘 외에는, 말이지.

“이제 어떻게 하죠…?”

“일단 뭐, 뒤져보자고.”

레오레는 자신의 이름에 그다지 어울리지 않은 놀란 토끼눈을 했다.

“네?! 그건, 아무래도 좀…”

“그럼 남의 방에 멋대로 들어와서 술판이라도 벌이면서 노닐자고 할 줄 알았냐?”

누군가가 드나든 흔적이나 주고받은 서신 같은 게 있다면 베스트.

만약 누가 들어온다면 변명의 여지없이 도둑이구만. 그렇게 자조하면서 일단 쭈뼛거리는 레오레를 지나쳐 한발 먼저 작업(?)을 시작했다.

“나가기 전에… 누군가와 있었던 것 같지는 않구만. 혼자 마시기라도 했나?”

방 중앙의 테이블에는 술병과 잔이 준비되어 있었다.

브랜디의 냄새가 희미하게나마 남아있는 잔은 하나뿐. 아마 왕제를 접대하기 전에 잔뜩 긴장이라도 했던 모양이다. 브랜디 한 잔으로 용기를 북돋아보려고 했을 테지.

조금 우물쭈물하던 레오레도 결국 내키지 않는다는 듯 조사를 시작했다.

발걸음이 처지는 게 아무래도 밖에서 누군가가 벌컥 들어오지 않을지를 염려하는 모양이다.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될 문제고.

“음…?”

레오레가 조금 놀라는 소리를 내는 것이 들렸다.

야트막하게 깔린 어둠 아래에서 허리를 굽혀 무엇인가를 줍는 모습을 언뜻 본 듯도 하다.

“뭔가 찾았냐?”

“네. 그런데, 이건….”

“뭔데? 어디…”

그쪽으로 다가가려던 발걸음이 멈췄다.

지나치리만치 예민한 귀끝에 뭔가가 짚어졌다. 융단을 밟는 소리. 문밖. 수는 둘… 셋? 그들 중 하나는 본능적으로 제 발소리를 한껏 죽이고 있었다. 누군가를 의식한 것이 아니라 본능의 영역. 제법 수련을 쌓은 전사다.

“…어이, 누가 온다.”

“네?!”

소스라치게 놀란 레오레의 어깨를 붙들고 일단 숨을 곳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걸음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초조함에 잇새에서 으르릉, 하는 소리가 자기도 모르게 새었다.

“…이쪽으로!”

방 한구석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가 홱 돌아갔다.

쪽문이 있었다. 아주 살짝, 빼꼼히 열린 틈으로 깜빡이는 눈망울이 엿보였다. 어차피 이제 이 이상의 유예는 없다. 레오레의 팔을 잡아끌어 그쪽으로 구르듯이 향했다.

쪽문 안쪽은 공간이 있었다. 꽤 비좁았다는 사소한 문제는 있었지만.

“너…”

움찔거리는, 머리 위에서 솟아오른 뾰족한 귀.

그리고 풍성하게 움직이는 꼬리. 이번에는 어떠냐, 하고 의기양양한 표정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누구더라.”

“대체 왜 일부러 그런 낡아빠진 반응을?!”

그럴싸한 딴지다.

분위기를 전혀 따라가지 못하는, 매사 매우 진지한 레오레만 빼면.

“잠시. 누군가… 들어왔습니다.”

쪽문 너머에서 이제는 레오레에게도 들릴 정도로 발소리가 울렸다.

문이 닫히는 소리. 그리고 두런거리는 말소리.

제길,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알아먹기가 힘들다.

조금 더 귀를 기울이면 들릴 법도 한데…

“좁, 아….”

공간이 좀 비좁은 게 답답했다. 땀이 난다.

레오레가 괴로운 듯 숨을 달싹거렸다. 벽과 내 등에 눌린 듯한 모양새가 되어버려, 부르르 떨리는 부드러운 감촉이 등에 파고든다. …정체는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다.

화제, 생각할 거리를 돌리자.

“그나저나… 윈드엘프 꼬마, 넌 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었던 거냐?”

“역시 기억하고 있었잖아.”

기가 차다는 듯 투덜거리고는 꼬맹이가 귀를 쫑긋거렸다.

귀가 좋기로 정평이 난 엘프 가운데에서도, 정령 군주의 은혜를 받아 수화한 윈드 엘프라면 저 바깥의 대화를 남김없이 훔쳐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나도 귀와 코가 예민하다고 자부하는 편이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 녀석의 감각에까지는 미치지 못하겠지.

“저 녀석들이 뭐라고 하는지 알려주면… 그럼 날 도와줄 거야?”

“…뭐, 이제야 얘기가 좀 되는군.”

난 누군가를 돕거나, 까닭 없는 선행 따위는 베풀지 않는다.

다만 빚이나 거래라면 얘기는 다르지. 고개를 끄덕였다.

좁디좁은 한 칸짜리 어둠 속에서, 녀석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한번 귀를 쫑긋 세웠다.

“좋았어.”

충분한 동기부여가 된 모양이다. 귀를 기울이면서 녀석의 표정이 조금 진지하게 굳어졌다. 동족을 구하고자 하는 의지는 제법 확고해 보였다. 꼬맹이 주제에 말야.

여기에 잡혀 온 윈드 엘프의 운명 따윈 알 바가 아니지만, 이 정도로 진지하다면 거래에는 충실하게 응하는 게 나름의 도리라면 도리일 것이다.

“그래서, 뭐라고 하고 있냐?”

“…아직까지는 특별히 이렇다 할 내용은… 없는데.”

잔뜩 눈썹을 찌푸리고, 그 어떤 사소한 내용이라도 듣고야 말겠다는 듯 귀를 바르르 떨었다. 빨리하는 게 좋을걸. 내 등 뒤에서 여자가 슬슬 한계에 다다르고 있으니 말야.

두런거리는 말소리는 이어지고 있었다.

속닥속닥 이어지는 대화를 알아듣기가 영 쉽지 않다. 직접 들을 수 있으면 좀 덜 답답할 텐데. 제길.

“…조금 나이가 어린 쪽이… 이것저것 물어보고 있어. 준비? 의식? 뭔가… 의식을 준비하는 모양인데.”

“무슨 의식 말이지?”

“거기까지는….”

이맛살을 잔뜩 찌푸리곤 오만상을 지은 채로 끙끙거리는 게 보기가 안쓰러울 정도다.

엘프를 노예로 사고파는 건 동족에게는 분명 심각한 문제겠지만, 이 녀석에게서는 어쩐지 그 이상의… 어떠한 집념이 느껴졌다.

“어라, 방금 이름을 말했어. 아무래도 상대방…”

“엎드려!”

오싹한 예감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 예감보다도 먼저, 몸이 레오레와 꼬맹이의 머리를 누르고 좁디좁은 바닥에 먼저 엎드리게 했다.

와장창!

방금 녀석의 머리가 있던 자리에, 뾰족한 창끝이 닥쳐들어왔다.

멍하니 얘기에만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면, 과연 어떻게 되었을지.

“누구냐!”

뒤늦게 브란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무슨 말인지 몰라 느꼈던 답답함은 해소되었지만, 그다지 귀기울여 들을 필요가 없는 내용이었던 점은 조금 유감이다.

문제는, 창을 찌른 쪽이지. 이를 으득 악물었다. 아마 발소리를 죽이고 있던 쪽이다.

하지만…

“말…?!”

레오레가 그를 올려다보며 눈을 바들거렸다.

말을 탄 기사가 있기엔, 아무리 그래도 장소를 착각한 게 아니냐고.

말이 울었다.

푸르륵, 하고 숨이 아니라 독과도 같은 불을 코와 입에서 뿜어냈다. 눈동자 대신, 꺼질 듯이, 그러나 살아 일렁거리는 잿불이 눈구멍 사이에 있었다. 온몸의 털은 그을린 듯 검었고, 머리에서 목으로 이어지는 갈기 또한 불길이었다. 그 말이 발을 바닥에 탁탁 구를 때마다 불티가 튀었다.

그을린 듯 새카만 갑옷의 가슴받이 양쪽에는 똬리를 튼 뱀이 장식되어 있었다. 방금 꼬맹이의 머리를 뚫을 뻔했던 창에도, 두 마리의 뱀이 서로 경쟁하듯 마상창에 감겨올라간 형상이었다. 갑옷 안에 몸이 있는 게 아니라 마치 갑옷 그 자체가 몸인 것처럼 호리호리한 흑기사는, 탄 말과 마찬가지로 투구 사이의 슬릿에서 눈빛이 아닌 불길을 일렁이고 있었다.

…분위기 죽이는데.

말에 탄 기사가, 마상창을 품으로 잡아당겼다. 아무 문답도 없이 공격해올 참이다!

카아앙!

호사스러운 창날과 흉흉한 칼날이 맞부딪혔다.

묵직하고 얼얼한 감촉이 칼자루를 타고 팔에 스며들었다.

떨쳐내고는, 한쪽 옆구리에 꼬맹이를 끼워 잡아들었다.

“일단… 튀자!”

제기랄, 뭐 하나 제대로 알아내지도 못했는데!

레오레가 내 등을 따라 달리면서, 뒤를 돌아보고는 주문을 입에 담았다.

“「Lumen」!”

들어왔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마력을 한껏 품은 빛덩어리가 등 뒤를 덮쳐왔다.

폭발하는 섬광과,아무 대비도 하지 못한 브란의 비명을 뒤로 하고, 그저 내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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