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화 〉 3 / 오월동침(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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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라는 일이 있었어!”
뭐 할 말 없냐는 투다. 구체적으로는 뭔가 받들어주길 바라는 눈친데.
물론 할 말 같은 거 없다. 왜 으스대는 모양새인지도 모르겠고.
묘하게 어깨를 펴고 의기양양해서 돌아와서는, 자기가 보고 들은 일을 꽤 부풀려 말하는 몽마는 꽤나 공치사에 목말랐던 모양이다. 그런 거 신경 쓰는 녀석이었나?
물론 이 쪽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마족 간의 내전 따위 알 바냐고.
“그게 뭐 어쨌다고? 돈 밝히는 놈들이 여기에 끼는 게 특별히 이상한 일도 뭣도 아니지. 별것도 아닌 걸 가지고 그 호들갑을 떤 거냐?”
그나저나 로렌초라. 어처구니없게도 마왕 토벌 중에 소마족과 거래한 적이 있긴 하다.
분명 돈 되는 일은 뭐든 하는 놈들 가운데에서도 특출나게 돈독이 오른 놈이었다.
레오레는 조금 안절부절못하고 이쪽과 나르콜렙시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마계의 역학관계나 권력구조 같은 건 제법 생소한 모양이다.
“내전…은 그렇다 치고서라도, 이번 일에 고위 마족이 끼어있다니….”
그쪽의 생리상 내전은 흔해터진 일인데, 거기에 일일이 놀란 눈치인 게 그 증거지.
아예 그쪽 관계자인 나르콜렙시나 마계에서 깽판쳐본 경험을 가진 나와는 달리, 이 여자는 왕실 호위 기사로서 온실 속 화초의 가드닝 담당이었을 테니, 이상할 일은 아니지.
“…정말로 발레리아 왕제 전하께서는 마족과도 손을 잡으신 거군요….”
그녀는 이해하려고 했을 것이다.
엘프 노예 밀매도, 비록 그것이 정의롭지 않은 방법이라 지탄받을지라도… 이 나라, 트란 드라쿨루의 재정을 확충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노라고 그렇게 받아들이려 애썼을 것이다. 하지만 마족과의 내통이라니. 이는 인간 종족 전체를 배신한 것과 다르지 않았다.
“발레리아 님… 저도 자주 뵌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제가 기억하기론 그럴 분이 아니셨습니다. 내향적이고 외곬인 면이 있긴 하셨지만… 육친에게 그, 그, 그런 짓을… 하고, 거기에 더해 마족과의 수상한 거래까지 몸소 나서서 추진하실 정도는…”
질풍노도의 시기, 사춘기의 일탈이라고 하기에는 선을 넘긴 했지.
아니, 그보다 사춘기라고 해도 너무 늦지 않았나? 뒤늦은 반항기? 누구를 향한?
“나도 직접 얼굴을 맞대고 얘기해본 적은 없긴 한데. 영감이 살아있을 때는 가끔 딸 얘기들을 하더란 말이지.”
선왕을 영감이라고 표현하는 내 말에 레오레는 흠칫 반응했지만, 불경하다며 목소리를 높이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 정도로도 뭐, 장족의 발전이라고 해야 할지.
“그런데 둘째 딸에 대해 딱히 걱정하는 얘기는 못 들은 것 같다. 오히려 왕위를 승계할 첫째 딸에 대해서는 한숨을 푹푹 쉬어댔었지.”
“제 기억에도… 그렇습니다. 아버님께서도… 아주 오랫동안 왕가의 친위대장으로 봉직하셨지만 왕제 전하의 사람됨을 염려하시는 말씀을 하신 기억은 없습니다.”
레오레는 무척이나 혼란스러운 모양이었다. 흔히들 말하는 그건가? 1인자에 대한 질투? 언니에게 가려진 동생의 복수?
영 석연치가 않다.
“그래서, 문제의 그 언니 씨는 지금 뭘 하고 있어?”
“알 게 뭐냐? 자고 있겠지.”
“이엔 군… 애프터 케어가 형편없네. 잠자리 매너라는 것도 몰라, 이엔 군은?”
“남이사. 그런 걸 챙길 사이도 아니라고, 애초에.”
왜 네가 불평이냐?
“…한 가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조용히 뭔가를 생각하고 있던 레오레가 조금 목소리를 낮추었다.
“이런 말씀을 드리기 조심스럽습니다만… 여왕 폐하를 어떻게 할지 빨리 결정하시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엔 님.”
“왜?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별로 원하지도 않는 섹스를 하는 사이에 방 밖에서 무슨 이상한 징후라도 있었나?
레오레는 몹시 조심스러운 투였다. 행여나 주변에 누가 듣고 있는 건 아닌지 바짝 긴장해서는.
“누군가를 찾는 눈치인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아마 여왕 폐하께서 사라진 것을 알고 찾아다니는 게 아닌가 합니다만….”
“뭐어… 드러내놓고 찾을 수는 없는 노릇일 테니까.”
떠들썩하게 이 잡듯이 뒤지는 순간 행사는 엉망이 될 테고, 또 내빈 중 누군가가 여왕을 알아보는 순간 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것이다.
아니… 걷잡을 수 없이, 는 조금 다를지도 모르겠다.
이 나라의 실세이니만큼 수습할 방법이야 있겠지.
하지만 구태여 하지 않아도 될 뒤처리를 도맡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지금은 일단 그 점을 이용하는 게 좋겠지. 적임자도 있다.
“나르콜렙시, 네가 나설 차례다.”
“응? 나?”
자기가 지목받을 줄은 몰랐는지, 자신을 가리키며 나르콜렙시가 눈을 깜빡거린다.
천연덕스럽게 구는 게 괜히 짜증이 났다.
“난 굳이 그 여자랑 말을 섞고 싶지 않으니까, 네가 그 여자 꿈에 들어가서 엿보라고.”
“…좀 악취미인 거 아냐?”
“그래, 나 악취미다. 할 수 없는 것도 아니잖아?”
나르콜렙시를 다그쳤지만, 녀석은 입을 꽉 다물고 묘한 울림이 있는 앓는 소리를 냈을 뿐이다. 반응이 또 왜 그러는데.
“이엔 군. 난 서큐버스인데.”
“그래 보인다.”
“…그리고 자는 쪽은 여왕이고.”
“그래서 뭐가 어쨌다고?”
심드렁하게 반응하자, 서큐버스가 악, 하고 결국 화를 내질렀다.
마치 말을 제대로 못 알아듣는 학생을 다그치는 강사 같군.
“난 인큐버스가 아니라 서큐버스라고, 이 둔탱이!”
“뭐야. 못 하냐?”
“그으으으야, 당연히 할 수야 있거든! 단지 많이 귀찮은 일이라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네!”
“네이네이. 알겠으니까 얼른 시작해.”
부아가 치민 듯이 울컥하는 꼴이 생각 외로 재밌다.
이렇게 자존심을 살짝 긁으면 이 몽마 녀석을 일하게 만들 수 있다. 기억해두자.
“그럼 여왕 쪽은 알아서 처리해. 뭔가 수상한 걸 발견하면 말하고.”
“…도대체 몽마족의 간부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람.”
생각해보니 새삼 꼴받았는지 부글부글 끓는 얼굴로 문을 열고 안에 들어가는 나르콜렙시. 문을 쾅, 소리 요란하게 닫는 것까지 어필이 아주 제대로였다.
“이 빚은 나중에 톡톡히 받아낼 거야! 각오해!”
뭘로 생각하긴. 쉬운 음마로 생각하지.
“…할 수 있으면서 왜 저렇게 뜸을 들인 걸까요?”
“알게 뭐야. 남자 꿈이 아니면 먹기 싫은 모양이지. 몽마란 대충 그런 종족 아니냐.”
몽마의 생태 따위 알게 뭔가.
녀석이 여왕의 기억을 뒤져보는 데는 시간이 걸리겠지. 그럼 이쪽은 이쪽 나름대로 움직이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러려면…
“어이, 유스티카.”
“네.”
“일단 옷부터 갈아입어라.”
여차할 때 만족스럽게 움직이지도 못하는 녀석은 아무짝에도 도움이 안 된다.
그보다 기사 주제에 창피한 옷 때문에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한다니, 유스티카 영감은 대체 얼마나 오냐오냐 딸을 키운 거유?
“…그, 하지만… 그래도 됩니까?”
“이미 들어온 이상 어차피 노예 놀이는 그 정도만 해도 되잖아. 방해만 되니까 시키는 대로 하라고.”
레오레는 분한 듯이 입술을 깨물었지만, 반론할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사라스바티가 선물로 주었던 마법 자루에서 평소의 장비를 입고 나자 탄식과 안도가 뒤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수고를 끼쳐 죄송합니다.”
“하, 알긴 하니 다행이구만. 이제 우물쭈물하지 마, 움직일 테니까.”
“네.”
정말로 수고를 끼쳤으니 좀 반성을 하시지.
일단 영주의 아들, 브란 폰 윈돌을 족쳐서 이야기를 듣는 게 좋을 것 같다.
아버지 몰래… 라고 착각하면서, 대체 여기서 무슨 작당을 하는 건지 들어둬야 할 테니까.
일단 브란은 발레리아를 에스코트하면서 연회장으로 향했었지.
마치 주빈을 맞이하는 주최자 같았는데, 결국 영주의 우려는 사실이었던 셈이다.
애송이가 너무 위험한 놀이를 하고 있다.
“일단… 연회장 쪽을 족쳐보도록 할까. 그나저나 유스티카. 일개 영지의 후계자 자격으로 이런 행사를 아버지 몰래 꾸미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냐?”
하지만 동시에 의혹도 새롭게 생겼다.
젊다 못해 어린 철모르는 도련님이, 아무리 왕가의 비밀스러운 후원을 등에 업었다고 해도 마족까지 한 다리 걸친 경매를 진행하는 게 가능하냔 말이다.
“어렵지 않을까요? 확신은 할 수 없습니다만… 다들 가면을 쓰고 계셔서 말이죠. 하지만 궁중에서 뵌 듯한 분들도 계셨던 것 같습니다.”
패닉이었다가 취하기까지 한 와중에 그런 건 또 어떻게 봤는지.
한때 여왕의 필두 호위 기사였던 그녀가 하는 말이니, 어느 정도는 신빙성이 있다고 봐도 좋겠지.
윈돌은 물론 왕국의 주요 도시 중 하나지만, 그 후계자의 위명이 궁정에 드나드는 이들까지 불러모을 수 있을 정도는 아니다. 그렇다고 왕제가 초청했다고 생각하기도 어려운 상황. 왕제도 일단은 초대객 신분이었지 않나.
“…이엔 님, 한가지 여쭤봐도 될까요?”
“뭔데?”
몹시 말을 꺼내기 곤란하다는 얼굴로 잠시 입술을 꾹 다물고 부루퉁한 표정이었다가, 레오레는 한숨처럼 서두를 꺼냈다.
“그래서 결국 그 영주의 후계자는 어디로 가야 만날 수 있는 겁니까?”
“그러게.”
“아무 생각이 없으셨던 거군요….”
어쩐지 레오레의 목소리에 조금 맥이 빠져 있었다.
등 뒤로 따갑게 힐난의 시선이 꽂히는 것 같아서 조금 머쓱했다.
아무튼, 연회장으로 가보면 뭔가 해결될 거라고. 아무튼 그럴 거다. 아무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