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화 〉 3 / 오월동침(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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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시계를 약간 앞으로 되돌려서.
방을 나온 나르콜렙시는 이제부터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를 대강 짐작했다.
남자의 목숨을 빼앗은 여자와 그 여자의 자존심을 빼앗은 남자.
남자… 하이엔 더츠백이 여자, 여왕 메살리나를 훔쳐왔을 때 상반된 감정을 동시에 느꼈었다. 이제부터 무슨 일이 벌어질지에 대한 흥미와 신경 쓰이는 남자에 대한 약간의 질투.
두 감정이 팽팽히 균형을 이루었지만, 어느 쪽이든 일단 그 방 안에 있고 싶지는 않았었다.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였는지, 아니면 차마 보고 싶지 않아서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여자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걱정하는 것 같은 표정 하고 말야. 오늘은 내내 짐짝이었던 주제에.
“그런 얼굴 하지 말라구. 난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별로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지 않는데.”
끄응. 괜히 어설프게 눈치는 있어서.
사실 찜찜하다. 두 년놈이 붙어먹는 게 솔직히 신경 쓰이고 짜증 나기도 한다.
최고위의 몽마인 자신이 남자 하나에게 휘둘린다는 인상을 주고 싶지는 않아서 그저 아닌 척하고 있었을 뿐이다.
“아무렇지도 않다니까. 흥, 난 이래 봬도…”
“여기에 있기에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얼굴이지.”
대답은 엉뚱한 곳에서 들렸다.
목소리에서 울린 불온한 느낌에 레오레가 반사적으로 허리를 더듬었지만, 무기는 가져오지 않았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을 뿐이다.
나르콜렙시는 어땠냐면,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향해 돌아서고는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요컨대 그다지 반가운 만남은 아니었다는 뜻이다.
“…그쪽 역시도 말이야.”
흥, 하고 거들먹거리는 숨소리가 되돌아왔다.
말끔한 정장을 입고 있었으되, 그들은 키가 아주 작았다. 그 대신 좌우로는 꽤 널찍한 몸뚱이를 갖고 있어서, 오뚝이를 연상하게 했다. 짧고 통통한 다리와 팔, 툭 튀어나온 올챙이배, 그리고 몸뚱이에 비해 유난히 커다란 머리. 드워프라고 생각하기엔 전혀 단련의 흔적이 없었다.
“몽마족의 나르콜렙시. 여기서 뭘 하는 거지?”
마족.
레오레는 바짝 눈앞의 땅딸보들을 경계했다. 자그마한 몸을 가진 소마족. 임프, 고블린, 그렘린, 코볼트 등이 속한 소마족은 대개 하나하나의 전투력은 그리 대단하지 않지만, 지성을 가진 이들이 부리는 마법은 다소 위협적이다.
“그러는 당신이 왜 여기에 있는지는 꽤 알기 쉽네. 엘프 노예 장사 소리를 듣고 온 거지? 돈 냄새를 맡는다는 당신네만 한 부족이 없으니까.”
“나르콜렙시….”
레오레는 긴장감에 표정을 굳히면서 조금 앞으로 나섰다. 그녀는 제법 늠름한 기사처럼 보였다. 풍만한 몸매를 과시하듯 드러내 보이는 비키니 아머만 아니었다면 말이지.
본인도 그 사실을 한발 늦게 깨닫고, 얼굴을 확 붉히면서 허둥지둥 몸에 걸친 짧은 망토로 몸을 가렸지만, 워낙 자락이 짧았기에 오히려 망토에 쫙 달라붙은 몸매가 여실히 드러나는 꼴만 되고 말았다.
“괜찮아. 일단 내가 아는 녀석이니까 잠시 얘기 좀 하고 올게.”
“…정말 괜찮은 건가?”
그렇게 안절부절못하는 얼굴에 우스운 꼴로 걱정해봤자 그냥 주위의 이목만 끄는 꼴이라는 걸 말해주고 싶을 정도다. 손을 살살 흔들고는 앞서가는 소마족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짧뚱한 걸음걸이의 답답할 정도로 짧은 보폭은 속이 터지게 했지만, 그들이 머무르는 방 앞에 도착했을 땐 적잖이 놀랐다.
아마 이 저택에서 가장 좋은 객실 중 하나일 것이다.
문을 열자마자 따뜻하게 덥힌 방의 훈기가 느껴졌다. 몇 명의 소마족들은 술을 마시거나 여흥을 즐기고 있고, 저택의 하녀… 로 보이는 여자들이 그들의 시중을 들고 있었다.
“로렌초. 이번엔 대체 무슨 사기를 친 거야?”
답답하다는 듯, 로렌초는 얼굴을 감싼 두건을 풀어헤쳤다.
툭 튀어나온 매부리코 아래, 살집이 투실투실한 볼이 욕심으로 그득했다.
“사기라니 실례잖나. 난 그저 정당한 장사를 했을 뿐이야. 내 장사에 꽤 구미가 당겼는지 거래 상대가 손님맞이를 제법 제대로 해주고 있는 것뿐이고.”
고블린, 로렌초는 외투를 벗어 자연스럽게 시중을 드는 하녀에게 맡긴 뒤 의자에 앉았다. 의자가 비명을 지르듯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고, 오동통한 손가락을 흔들어 입에 문 파이프에 불을 붙였다.
나르콜렙시는 맞은편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꼬았다.
몽마족과 소마족 또한 서로 거래를 주고받는 관계이긴 하지만, 설마 이런 곳에서 만날 줄은 생각도 못 했고, 또 만난다 한들 동족의식을 다질 만큼 친밀한 관계도 아니었다.
“한잔하겠나?”
“줘.”
거만하게 까딱거리는 로렌초의 턱짓에 메이드가 글라스에 브랜디를 채웠다.
이 지방 특산 브랜디라고 해도 그냥저냥 마실 만한 정도의 도수에 불과하다. 자기들에게는 좀 더 독한 술이 더 입에 맞았고.
그래도 술은 술.
나르콜렙시는 한 모금 삼킨 뒤 찰랑거리도록 글라스를 흔들었다.
“지난 콘클라베 이후로 처음이려나? 당신이 직접 여기까지 올 정도면 제법 건수가 되는 장사인가 본데.”
“그야 뭐. 장사 중에는 사람 장사가 제일 많이 남잖나?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어수룩한 녀석을 보내면 오히려 손해 보기 딱 좋아서 바빠도 직접 온 게지.”
그래서만은 아닐 것 같은데.
나르콜렙시는 한 모금 더 옅은 갈색 술을 홀짝거리며 담배 연기를 두꺼운 입술 사이로 뿜는 고블린을 건너보았다.
“흐응. 혹시 거래 상대가…”
그럼 한번 슬쩍 떠보도록 할까.
“발레리아 왕제야?”
“…흠.”
로렌초는 의미 모를 숨소리를 흘리면서 얼버무리려는 듯 제 몫의 브랜디를 마셨다.
약 2초 정도의 침묵이었지만, 아마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과 인정하지 않는 양쪽을 저울질하는 모양이다.
계산에 빠른 고블린답게, 그 저울질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어디에서 이야기가 샌 건지.”
어차피 나르콜렙시도 이 나라에 연고라곤 없는 몸. 인정한대도 달라질 게 없긴 했지만 그래도 정보 관리가 어수룩하게 되었다는 것은 상인으로서의 자존심에 상처가 될 일이긴 하다.
“걱정하지 마. 그쪽에서 얘기가 나온 게 아니니까. 오히려 거래 상대가 조금… 지나치게 자신만만했던 거지.”
“인간이란 정말 다루기 어렵단 말이지.”
“누가 아니래.”
지나치게 자신만만한 어떤 남자를 떠올리곤 웃어버렸다.
마저 글라스를 비우고 테이블에 내려놓자, 메이드가 천천히 다시 술을 채웠다.
“그런데 거래는 대체 어떻게 트게 된 거람? 아무리 수완이 좋아도 쉽지 않을 텐데. 게다가 그쪽에는 고정 거래처도 있잖아. 그 성질 고약한 패왕족.”
“아아, 그쪽은 지금 정신이 하나도 없을 테니 우리가 다른 주머니를 찬다고 해서 신경쓸 처지가 못 된다고.”
“응?”
로렌초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을 받았고, 그 말을 들은 나르콜렙시가 오히려 눈을 깜빡거리면서 엉뚱한 말을 들은 얼굴이었다.
술잔을 앞에 두고 이어지는 잠시 간의 침묵에 로렌초가 느릿하게 눈을 껌뻑거렸다.
“…모르고 있었나?”
괜한 말을 꺼냈나, 하는 표정이 얼른 그 얼굴에 스쳤다가 빠르게 사라져갔다.
하지만 몽마족의 귀는 워낙 예민해서 말을 잘못 듣거나 하지는 않으니 없던 말로 물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로렌초의 눈이 가늘어졌다.
“…대체 얼마나 자리를 비운 게야? 자기네 부족 사정 정도는 좀 알고 있어야 하지 않나? 지금 한창 내전 중이건만.”
“아, 뭐 그 정도는 늘 있는 일이잖아.”
난 또 뭐라고.
얼마나 대단한 일이길래 그렇게 호들갑을 떠나 했더니.
“나베리우스가 죽은 게 언제인데 이제껏 조용했던 게 이상했던 거지 뭐. 왕이 죽고 나면 으레 있는 일인데.”
“뭐 물론 그래오긴 했지. 지난 콘클라베 때부터 조금씩 조짐이 보였으니까.”
역시 ‘마왕의 알’을 차지하지 못한 패왕족이 다른 부족을 침공하기라도 한 건가?
어딘지 꺼림칙하긴 하지만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다.
힘은 그 어떤 권위보다 우선한다는 게 마라의 철칙이었으니까.
“하는 수 없네. 조만간 부족에 한 번 돌아가서 좀 상태를 볼 수밖에….”
“그나저나 넌 왜 여기 있는 게야?”
“이상한 걸 묻는걸. 몽마니까 어디에 있든 이상한 것도 아니잖아?”
그것도 그렇군, 하고 간단히 로렌초는 수긍하면서 푹신한 의자에 몸을 묻었다.
“이상해하는 녀석들이 있으니까 묻는 거지. 몽마족 중에 인간 남자에게 홀려서 강아지처럼 졸졸 따라다니는 녀석이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어.”
…뜨끔했다. 아니 그나저나 강아지처럼이라니.
아니, 그 녀석을 졸졸 따라다니고 있는 게 아니라고 투덜거리면서 술을 한 모금 삼키는 손이 바르르 떨리는 것을 로렌초가 봤을는지는, 사실 모르겠다.
“뭐어, 뭐어. 몽마 중에서는 인간이랑 떡치고 새살림 차리는 녀석이 나오긴 하지.”
“그리고 대개 끝이 안 좋았지. 상대는 역시 그 인간이지? 전부터 묘하게 신경 쓰던 녀석.”
쓸데없이 눈치만 빨라선. 눈도 작은 게.
열받으니까 일단 시치미를 떼기로 했다.
“무슨 말을 하는 거람.”
“그렇게 시치미를 떼도 마계에 이미 모르는 녀석이 없다고. 몽마족의 나르콜렙시가 마왕을 죽인 검사한테 한눈에 뻑…”
“아, 아, 아! 무슨 말을 하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네!”
여기에서 부족간 분쟁으로 비화해도 상관없는 걸까, 이 고블린은?!
나르콜렙시가 씩씩거리자, 로렌초는 결국 한 발짝 물러나기로 했다. 뭐 이미 그녀의 반응으로는 알 만큼은 알게 되기도 했지.
“…뭐, 몽마가 정분났다는 말만큼 신빙성이 없는 말은 없기도 하지.”
“그러니까 정분난 게 아니라고. 그 코를 확 비틀어버리기 전에 이 얘기는 여기까지만 해.”
벌컥, 술을 입 안에 털어넣었다. 짜증이 부글거렸다. 뭣보다 열받는 건…
아직 정분이 나지조차 못했다는 사실이다!
몽마의 자존심으로는 죽어도 할 수 없는 말이긴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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