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화 〉 3 / 오월동침(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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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세상을 살다보면 가끔 자신이 벌이는 일인데도 자기 자신조차 이유를 모를 때가 있다.
지금 내가 딱 그런 꼴이었다.
“손님, 여기는 귀빈 전용 대기실이오니….”
“왕제 전하의 명령으로 왔습니다. ‘류카스카’의 상태를 보러 왔습니다만.”
목소리를 될 수 있는 대로 내리깔았다. 어깨너머로 주워들었던 예의 있는 말씨는 오래 쓸 만한 것이 못 된다. 대화가 길어지면 들키겠지만 그때 일은 그때 생각하면 되지.
“아, 류카스카 말씀… 이십니까.”
문을 막고 있던 경비병은 나를 한번 바라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속인 건…가? 너무 일이 쉽게 풀린 것 같은데. 경비병은 비켜서서 문을 열었다.
“류카스카는 진정되었습니다. 상태를 보고 말고 할 것도 없어요. 씻기고 입히고 재우는 내내 미동도 없었으니까요.”
아무래도 이 경비병은 류카스카가 이 나라의 여왕, 메살리나 드라쿨레아라는 사실은 전혀 모르는 눈치다. 아니면 뛰어난 마법사라는 왕제 발레리아가 그렇게 암시를 가해뒀거나.
그럼 거짓말을 짜낼 차례다.
잘 속아주려나. 자신은 없다. 지금 나조차 내가 왜 이러고 있는지 모르니까.
“수석 마법사에게 보이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데려가도 되겠습니까?”
“그러시죠.”
생각 외로 일은 간단히 풀렸다.
경비병이 지켜보는 가운데 류카스카… 메살리나가 침대에 누워 새근새근 숨을 내쉬는 것을 보았다. 여전히 목에는 족쇄가 굳게 채워진 채, 아랫배에는 음탕한 문양이 빛의 무늬가 되어 너울거리는 꼴이다. 그냥 매음굴에 던져놓으면 창녀라고 믿어 의심치 않겠지.
“그럼 수고하십쇼.”
경비병이 수상하게 여기기 전에 메살리나를 업고 그대로 방을 빠져나왔다.
여기나 저기나 지금의 메살리나와 비슷한 꼴의 노예들뿐이지만 주위의 시선이 내게로 쏟아지는 것 같다. 젠장, 팔자에도 없는 여왕 납치범이 될 줄이야.
가장 골 때리는 건, 나를 포함해 누구도 내가 왜 이러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 이엔… 엑.”
방으로 돌아오자, 나르콜렙시는 도끼눈을 했고 때마침 겨우 술을 깼는지 일어나 이불을 둘러쓰고 있던 레오레는 놀란 토끼눈을 했다.
“…하이엔 님? 그분은 설마….”
“네가 생각하는 그대로니까 새삼 물어볼 필요 없어. 나르콜렙시, 너 이런 데는 좀 빠삭하지? 상태를 봐.”
침대에 눕힌 메살리나는 얕은 악몽에라도 시달리는 것처럼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특별히 동정하지는 않지만, 아마 그녀에게는 현실 쪽이 더 지독한 악몽이 되어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은 했다.
“꼭 이런 건 날 시킨단 말야….”
나르콜렙시는 잠깐 투덜거리고는 손끝을 메살리나의 몸에 갖다댄 뒤 천천히 촉진하듯 미끄러뜨렸다. 가느다란 손가락 끝이 한껏 색정을 품은 농익은 여체를 바삐 돌아다녔다.
“흐음…? 이거, 참.”
녀석의 눈치가 이상했다.
미심쩍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손을 뗀 뒤, 이번엔 살갗에 배인 땀방울을 혀로 핥아냈다… 대관절 무슨 진단법인지도 모르겠다.
“누구 작품이야?”
두서없이 말머리를 잘라치우면 알아듣는 건 내 몫이냐, 이 몽마 녀석아.
팔짱을 낀 채로 조금 눈을 찌푸리다가 텀을 두고 대답했다.
“아마 그 왕제인가 하는 녀석.”
“왕제 발레리아… 라. 흠. 제법 수완 있는 마법사라는 말은 들었지만, 이건 조금 예상외인데.”
“어려운 마법이냐?”
다가온 레오레는 복잡한 기분인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나에게 이 여자는 서로가 원수이면서 복수의 대상이지만 레오레에게 섬기던 주군이니까.
“어렵고 말고의 문제만이 아니라 계통의 이야기지.”
어디서 났는지 모를 안경을 꺼내어 쓰고는 어흠, 하고 나르콜렙시가 목소리를 골랐다.
네가 무슨 마법 학교의 강사라도 되냐.
“지금 이 여자의 안에 들어있는 건 몽마야. 아니, ‘들어있다’는 건 조금 의미가 다를까. 구석구석 꼼꼼하게 여왕의 영혼과 몽마의 혼을 이어붙여서 하나로 만들었어.”
나르콜렙시는 감탄까지 하는 눈치였다.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메살리나의 몸을 훑어보면서 혀를 내둘렀다.
“이런 건… 일개 마법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닌데.”
“너는 할 수 있냐?”
“…조금 자존심은 상하지만 난 못 해. 이런 건 마왕 중에서도 무투파가 아니라 학구파 마왕에게나 가능한 일이라구.”
나르콜렙시는 날 졸졸 따라다니는 강아지처럼 굴고 있지만 제 동족에게 돌아가면 자기 부족의 대표 정도는 해먹는 상급 몽마다. 녀석과 적으로 마주쳤을 때에는 녀석의 마법에 애를 많이 먹었지. 그런데 할 수 없다니, 다소 의외였다.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 여왕 폐하를….”
레오레는 무척 말을 꺼내기 힘든 모양이다.
당연하지. 내가 저 여왕한테 무슨 일을 당했는데.
하지만 어떻게 할지 모르겠는 건 나도 마찬가지다.
당최 내가 왜 이 여자를 데려왔는지도 모르겠다.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자 나르콜렙시가 투명한 핑크색 눈을 불만스레 깜빡였다.
“…어떻게 하고 싶은지 영 갈피가 안 서면 얘기라도 해 보지 그래?”
“내가 이 여자랑 왜 얘길 하냐?”
“얘기도 안 할 거면 왜 데려온 건데? 그냥 죽든 살든 거기에 내버려두지.”
요컨대 나르콜렙시는 내가 메살리나를 데려온 것 자체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어떤 의미든 신경이 쓰인다는 건 부정할 수 없으니까.
그래서 처음부터 그렇게 도끼눈을 뜨고 있었던 거냐고.
선을 그을 필요가 있었다.
“…어이. 착각하진 마. 나나 너희들이나 어쨌든 마지막에 가서는 서로 그냥 적이다. 지금은 그냥 이해관계가 맞아서 같이 다니고 있는 것뿐이라고.”
나르콜렙시는 눈썹을 꿈틀거렸고, 레오레는 조금 침울해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그게 사실인 걸 어쩌겠어. 내게 동료라고 할 수 있는 녀석들은 에스텔과 아질, 사라스바티. 그리고 지금은 엇나간 것 같지만 윌리엄까지. 이 정도에 불과하다.
“알았어. 매정하긴…. 아무튼, 이 여자 깨울 테니까 얘기나 좀 나눠봐.”
뭐라 말릴 틈도 없이 나르콜렙시가 손을 들었다. 손끝에 맺힌 새까만 구체가 메살리나의 이마 위에 머물렀다. 빙글빙글 도는 마력의 구체가 그녀의 이마에서 뭔가를 빨아들이는 것 같았다.
미동도 없던 메살리나의 눈꺼풀이 얕게 꿈틀거렸다.
“우린 나가 볼게. 잘해봐.”
“뭐? 나는….”
“네가 지금 저 여자랑 만나봐야 서로 불편하기만 하다고. 가자.”
나르콜렙시의 채근을 부정하지 못하고 레오레도 입술을 깨문 채 정신이 돌아오려는 제 주인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가 내키지 않는다는 듯 자리를 떴다.
조금 후, 눈을 뜬 메살리나는 천장을 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이었다.
얼굴을 겨우 돌려 날 발견하고 나서야 그 표정이 경악으로 뒤바뀌었다.
“너, 너…! 너! 검성, 하이엔 더츠백…!”
“네가 떼버린 칭호를 네가 도로 부르는 거, 좀 웃기다고 생각하지 않냐?”
그놈의 검성 타이틀은 언제쯤이나 다른 녀석에게 던져줄는지.
메살리나는 후다닥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이불을 붙잡은 채 등이 벽에 부딪힐 때까지 물러섰다. 입술을 꾹 깨물고 노려보는 얼굴이지만, 공포는 숨길 수 없는 모양이다.
“진정하시지. 여왕 폐하의 체통이고 뭐고 안 챙겨도 되냐?”
“내게 무슨 짓을 한 거야, 이 반역자!”
“그건 내가 아니라 네 예쁜 동생에게 물어야지.”
동생.
그 말을 듣자마자 메살리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볼만한 꼴이다.
이 여자의 처지에 동정 따윈 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마냥 통쾌하지도 않았다.
“…날 어떻게 할 셈이지? 혹시 날 인질로 잡아서 발레리아에게 뭔가를 요구할 셈이라면…”
“될 턱이 없지. 어지간히 동생에게 밉보인 모양이던데? 홀딱 벗은 몸으로 엉덩이랑 젖통을 출렁거리면서 바닥을 개처럼 기는 게 꽤 볼만했어.”
메살리나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일그러졌다. 붉게 달아오른 뺨에 노기가 함께 치솟았다가, 울음의 형태로 눈에서 흘러넘쳤다.
그녀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괴로운 숨을 토해냈다.
“난 어떻게,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차라리 죽고 싶은데, 그럴 수조차…!”
어떠한 암시라도 걸어둔 모양이다. 몽마의 영혼을 강제로 쑤셔박아 본래의 주인과 하나로 만들어버릴 수 있을 정도의 마법사라면 스스로 죽지 못하게 하는 정도는 간단하겠지.
아주 조금, 측은하다고 생각했고.
또 이 여자가 이렇게 된 데에는 그 날 밤의 일도 연관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고, 그런 생각도 들었다. 거기에 대해서 특별히 책임을 느끼거나 하지 않지만.
다만 몹시도 술 한 잔이 땡겼다.
잠시 후, 메살리나는 겨우 울음을 그쳤다.
울음이 가시자 그 자리에 가시가 돋쳤다.
“…하이엔 더츠백. 날… 날 왜 데려온 거지? 괜히 동정심이라도 들었어? 아니면 당신이 망가뜨린 여자가 어떤 꼴이 되었는지 가까이에서 직접 보기라도 하고 싶었어? 침이라도 뱉고 싶었던 거냐고.”
“반쯤은 그럴지도 모르겠는데.”
이죽거리자, 울컥해 하는 반응이 돌아왔다.
발작적으로 테이블에 놓인 과도를 집어서 제 가슴께를 겨누었다.
말릴 생각도 없었지만, 과도는 아주 얕게 그녀의 윗가슴에 약간의 긁힌 자국만을 남겼을 뿐이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에서 과도가 허무하게 미끄러졌다.
“봐… 보라고,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심지어 내 손으로 목숨을 끊지도 못해. 언젠가부터 미칠 듯이 올라오는… 요, 요, 욕정을… 주체하는 것도, 못 해. 말만 여왕이지, 지금도, 나는…!”
학, 학, 학…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여자의 상태가 이상했다. 어깨가 떨리고, 그 떨림이 번진 손으로 뺨을 감싼 채 뜨거운 숨을 힘겹게 몰아쉬고 있다. 손가락 사이의 눈에 핏발이 섰다.
한 겹 이불 아래에서 두 다리가 그 사이를 서로 비비면서 발버둥치는 것이 보였다.
노골적인 그 모습에 눈썹이 찌푸려질 수밖에 없었다.
울음 섞인 목소리에는, 한껏 깎여나간 여자의 자존심과 애원이 어지럽게 섞여 있었다.
“…도와… 줘… 제, 발….”
젠장.
이래서 자리를 뜬 거냐고, 이 빌어먹을 몽마 같으니.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