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화 〉 3 / 오월동침(1)
* * *
(1)
호흡이 동요하고,
머릿속이 혼란과 의혹으로 뒤엉켰다.
오우거 가면 아래의 얼굴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스스로도 모르겠다.
나 말고도 수많은 귀빈들이 한쪽 무릎을 꿇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발소리의 주인을 맞이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이제는 의심의 여지조차 없다.
아마 이 옥션의 주빈이자 이 나라에서 가장 높은 자. 눈앞에 진주로 장식된 붉은 구두가 바닥을 딛었다. 뺨에 땀이 흘러내렸다.
한 발. 두 발. 발이 한 데 모이고.
멈춰섰다.
섬뜩한 느낌에 한껏 숙이고 있는 목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들킨 건가? 이렇게 되면 역시…
사고가 질주했다. 등에 멘 대검에 손이 가려는 것을 억눌러야 할지, 아니면 바로 지금 쥐고 휘둘러야 할지 아주 잠시 고민했다. 얼굴을 들면 시선이 마주칠까. 그럼 모든 일이 수포로…
“류카스카.”
등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여왕의 목소리와 비슷했지만 판이하게 다른 울림을 띠고 있는 목소리.
열정을 덜어내고, 그 자리에 가혹함을 채워넣은 듯한 가시 같은 목소리는 내가 모르는 이름을 불렀다.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노예라도 데리고 온 것인가, 하고 처음에는 생각했다.
‘…울음소리?’
비통하게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곧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넘치려는 듯 다시 괴롭게 숨소리가 뱉어졌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 거지. 게다가 묘하게 그 숨소리와 울음소리가 조금 귀에 익었다.
최근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얼마 전쯤에는 들었던 듯도 한데.
윈돌의 사창가를 시험 삼아 돌아다녀보기도 했지만, 딱히 여자를 사지는 않았었다.
언데드가 된 이후로 조금 유감스럽게도 점점 욕구가 희미해지는 기분이기도 했고.
그러니 여기서 산 여자의 울음소리가 귀에 익거나 할 리는 없다. 그렇다면 누군가…
‘설마?’
내가 울린 여자라고 하면 싫어도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설마, 설마, 설마.
그 여자가 이런 곳에, 그런 이름으로 올 리가 없건만.
한껏 숙이고 있는 눈앞에 손이 하나 나타났다.
아마 평생 옷가지보다 무거운 것이라고는… 왕관 외에는 잡아본 적이 없을 가녀린 손. 그 팔 너머로 젖가슴이 가리는 옷가지 하나 없이 드러나 출렁거렸다.
…이제는 부정하려야 부정할 수도 없었다.
살결 냄새, 젖가슴의 형태. 그로부터 이어지는 하얀 몸의 선.
바닥을 기고 있는 여자는, 내가 복수의 대상으로 범했던 여자다.
즉 이 나라, 트란 드라쿨루의 여왕인 메살리나 드라쿨레아가… 틀림없다.
“큭, 흑… 읏, 으… 하아, 읏…”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그 날 이후로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 나라의 여왕이 울면서 바닥을 기는 꼴이 되었냐고.
‘아니….’
동정 따위는 하지 않는다. 애초에 이 여자의 탓으로 내 인생은 철저하게 망가져서 도망자에 제대로 죽지도 못한 망자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여자의 몰락에 희희낙락할 만큼 충분히 썩지도 못했다. 나란 놈은. 가면 아래에서 이를 깨문 채, 그 눈구멍 사이로… 지금 이 자리에서 노예로 전락한 여자의 말로를 눈에 담았다.
‘…뭐야.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하지만 ‘류카스카’라는 낯선 이름으로 불리는 여왕의 기색은 몹시 이상했다.
기르는 애견처럼 융단 위를 기는 손과 무릎이 떨리고 있다.
가느다란 목에는 가시가 박힌 목줄이 둘려, 두꺼운 사슬이 채워졌다.
눈가리개까지 씌워진 채 그저 사슬이 이끄는 대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노예라고 해도 심한 처사다. 그런데…
‘기뻐하고 있어?’
그 여자의 볼은 잔뜩 달아올라 있었다.
바르르 떨리는 입꼬리, 벌어진 입술 사이로 천박하게 침 흐른 자국이 엿보였다.
눈가리개 사이로 울음이 넘쳐 턱으로 떨어지는데, 내 눈앞을 지나가는 허벅지가 묘하게 질척거렸다. 코끝에 시큼한 냄새까지 맡아졌다.
‘제길….’
자제심이 보이지 않는 손이 되어 머리를 눌렀다.
만약 누군가가, 저 여자의 정체를 이 자리에서 일어나 폭로하려 한다면… 그 폭로를 끝으로 다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겠지.
파악할 수 있는 건, 바닥을 기고 있는 여자 외에는 발뿐.
‘수는 대략… 여섯인가.’
갑옷을 입은 자가 넷. 아마 왕실 근위대 ‘용의 기사단’이겠지.
그리고 진주로 장식된 붉은 구두를 신은 여자의 양옆에 걸음걸이가 단정한 둘.
걸음걸이에 군더더기도 낭비도 없었고, 철저히 몸에 수련을 때려 넣은 절도가 엿보였었다.
되는대로 검을 휘두르는 자기류인 나와는 다르게, 철두철미하게 짜인 검술을 몸에 새겨넣은 검사가 둘. 그리고 정예 기사단원 넷.
지금은 싸움을 피해야 할 때이다.
하지만… 그럼 이 구두의 주인은 대체 누구란 말이지?
문득 나르콜렙시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렇게 말했었지.
“…왕제 발레리아. 상당한 수준의 수완가이며 마법사야. 내가 왕궁을 나오기 전까지는 섭정을 하네마네 하고 있었으니 지금쯤 섭정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네. 여왕의 여동생이다 보니, 여왕도 많이 의견을 묻는 것 같았어. 이 나라의 실세는 지금 누가 뭐래도 그 여자지.”
의견을 묻는다…라.
그런 훈훈한 자매, 군신 관계가 아닌 것 같은데.
이 구두의 주인이 바로 왕제 발레리아 드라쿨레아.
이름만은 들어본 적이 있었으나 직접 대면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 아버지인 선왕을 알현할 때조차 본 적이 없었던… 왕가의 그림자 같은 풍문만 들었을 뿐이다. 기억이 조금 되살아났다. 정치나 모략보다는 마법 탐구에 훨씬 더 열을 보인다고, 지금은 망자가 된 왕이 한탄하곤 했었지.
하지만 껍질을 한 꺼풀 벗겨보니 어떤가.
하지만 설마 섬겨야 할 왕이자 자신의 육친… 언니가 되는 여왕을 노예로 만들어 이런 곳까지 끌고 올 정도의… 또라이였을 줄이야.
“헥, 헥, 헥….”
‘류카스카’. 지금은 그렇게 불리고 있는 여자가 기던 다리와 손을 멈춰세웠다.
마치 주인의 애정을 바라는 애견처럼 쪼그려 앉은 그 자세에서 몸을 들어올렸다. 출렁거리는 젖가슴 양옆으로, 접은 팔을 모아 붙인 채 헥헥거리는 소리를 낸다.
수치심과 피학감이 반반씩 섞인 암캐 같은 숨소리가 머리 위에서 울리는 지금의 상황이… 전혀 현실감을 띠지 않았다.
쿡쿡, 하고 낮게 억누른 웃음소리가 함께 기괴한 화음을 이루었다.
이쪽은 가학심과 모멸이 한껏 뒤엉켜서 아낌없이 쏟아져 내린다.
“발레리아 왕제 전하. 이렇게 누추한 자리에 왕림해주셔서 영광입니다.”
“아… 브란 경이셨죠. 초대해 주셔서 제 쪽에서 감사드려야죠.”
머릿속으로 짜맞추던 정황에 쐐기를 박는 대화가 오갔다.
여자는 발레리아 왕제. 그리고 나서서 맞이하는 자는 윈돌의 영주 후계자인 브란.
이 장소는 이제 단순한 엘프 노예를 사고파는 경매장이라는 형태에서 일변해, 무엇인가 다른 것으로 변하려 하고 있었다.
“제가 너무 늦지는 않은 것인지 모르겠네요? 벌써 파티가 시작되었다면 죄송해요.”
“하하, 무슨 말씀을… 왕제 전하께서 도착하지 않으셨는데 벌써 행사를 시작했을 리가 없지요. 제가 모시겠습니다. 연회장으로 가시죠.”
“아, 그 전에….”
무엇인가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동시에 헥헥거리는, 기쁜 듯한 소리도 함께 번졌다. 눈앞에서 허벅지와 사타구니가 바르르 떨리는 것이 언뜻 스쳤다. 아마 머리를 쓰다듬은 것이 아닐까.
배를 한껏 들어 알몸을 아낌없이 보인 아랫배에… 말갛게 빛나는 분홍색 무늬가 번들거리는 것도. 잘도 친언니에게 저런 짓을 하는군, 발레리아 왕제.
웃음소리를 한껏 억누르되, 누구라도 눈치챌 수 있도록 목소리의 저면에 일부러 깔아놓은 여자가 뭔가를 휘어잡았다. 학학거리던 숨소리에 약간의 괴로움이 뒤따랐다.
“이 아이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오늘 밤의 여흥으로 데려온 아이이니, 부디 깨끗하게 단장시켜주세요.”
“…분부대로 따르겠습니다. 왕제 전하.”
브란은 알아보았을까, 아니면 단순히 노예라고 치부했을까.
한 지역의 영주 후계자라면 여왕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을 테지만… 설마 여왕이 이런 꼴로, 노예 취급으로 경매장에 끌려올 것이라 상상할 수 있는 자는 그다지 없을 것이다.
최면이든, 정신지배든… 만약 한순간이라도 그녀가 원래의 의식을 찾는다면, 이 자리의 모두가 반역죄로 형장에 줄지어 목을 늘이고 있을 것이다.
즉, 발레리아에게는 절대적인 자신감이 있었다. 설혹 반역죄로 몰리더라도 그 상황을 뒤집을 수 있는 무엇인가가.
그게 대체 뭘까.
지금으로선 알 수가 없다.
또각, 또각, 또각… 걸음을 멈췄던 구둣소리가 다시금 바닥을 울리면서 멀어져갔다.
왕제와 브란의 행렬이 충분히 멀어지고 나자 허리를 굽힌 채 무릎을 꿇고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일어서서 뻐근해진 몸을 이리저리 풀고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서로 담소를 주고받는 초대객들 사이에서, 녀석의 얼굴을 보았다.
윌리엄… 녀석은 왕제 발레리아가 멀어져간 방향을 바라본 그대로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저 녀석은 분명히 뭔가를 알고 있다.
그리고 또한 뭔가를 꾸미고 있다.
책략가들의 밤. 이제 그 막이 오르려 한다. 무대에 서 있는 나만은 아무것도 모른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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